12장
윤하가 다정을 봤을 때 처음 한 생각은 다음과 같았다. ‘여자네’ 새로 들어온 대리라는 정수의 설명은 늘 그렇듯이 대충 씹어 넘겼다. 이름도 들었던 것 같지만 기억해 두지 않았다. 벌써 육 개월 넘게 같은 팀에서 근무한 사람들의 이름도 안 외웠기 때문이다. 여자는 긴장한 건지 아니면 아무 생각 없는 건지, 애매한 얼굴로 윤하에게 인사했고 윤하는 이만 퇴근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도 안 됐는데 어딜 퇴근하냐고 울먹이는 정수의 말을 배경으로 그렇게 둘의 첫 만남은 끝났었다.
회사에 붙어 있을 생각도 없고 그렇다고 작년에 새로 얻은 오피스텔에 틀어박혀 있을 만한 정도 못 붙인 윤하가 주로 시간을 보내는 곳은 친구 석현이 운영하는 청담의 바였다. 술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다. 졸릴 때 바로바로 잠들 수 있으면 좋겠지만, 보통은 내내 졸려서 짜증 나 있다가 잠이 오면 장소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잽싸게 잠을 선택해야 했기 때문에 윤하의 생활은 불규칙한 편이었고 대체로 밤에 깨어 있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여자도 거기서 만났다.
당시 사귀던 신희주도 석현의 바에서 만났다. 윤하는 SNS상에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는 희주가 누군진 몰랐지만, 섹시하고 쿨하게 생긴 미인이 힐끔거리며 넌지시 여지를 흘리는 걸 모른 척하지 않았다. 석현이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을 때 바 테이블에서 홀로 술을 마시고 있던 윤하는 희주와 그 친구가 자리 잡은 테이블에 가 있었다.
“이름이 뭐예요.”
윤하의 질문에 희주는 제 앞에 놓인 술잔을 손톱으로 툭 튕겼다.
“나 대신 이거 마셔주면, 알려 줄게요.”
CF 촬영이 끝나고 뒤늦게 석현의 바로 왔던, 윤하의 전 여자 친구이자 지금은 그냥 친구로 지내는 승연은 그날을 이렇게 기억했다. 오윤하의 얼굴에도 혹하고 몸에 걸친 명품의 견적을 내는 것도 일찌감치 끝낸 신희주가 자기 손바닥에 오윤하를 올려놓았다고 착각하고 온갖 끼를 다 부릴 때, 오윤하는 정확히 신희주의 가슴만 보고 있었다고. 집중하고 있는 곳은 각자 달랐지만 어쨌든, 서로에게 꽂혔으니 그 뒤론 일사천리였다.
마감 시간이 다가오자 석현은 가게 문을 닫고 근처 나이트에서 놀고 있었다는 부잣집 도련님들을 불렀다. 석현의 친구인 탓에 윤하도 가끔 어울리긴 했지만, 윤하의 친구는 아니었다. 희주도 친구들을 불렀다. 이태원 게이 클럽에서 놀고 있었던 모델 친구들이 우르르 등장했다. 북적이던 가게에 열 몇 명만 남았으니 썰렁할 법도 한데, 분위기는 한층 더 후끈해졌다. 지금은 서로 점잔 빼고 있지만, 곧 이 자리가 얼마나 추저분해질지 짐작한 승연은 그냥 좀 떨어진 곳에 앉아 부지런히 술만 퍼마셨다.
희주가 주는 대로 술을 받아먹은 윤하는 일찌감치 나른하게 취해 있었다. 일찌감치 희주와 윤하 사이에 흐르는 기류를 파악한 이들이 둘이 잘해 보라고 자꾸 몰고 갔다. 그러다 보니 둘의 전 애인들을 뺀 과거지사가 술술 흘러나왔는데, 윤하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말에 희주가 눈을 반짝였다.
“피아노 쳐 주면 안 돼요? 나, 피아노 치는 남자가 이상형인데.”
만났다가 헤어지기 전까진 여자한텐 대체로 잘해 주고 매너도 좋은 윤하지만, 그것만큼은 귀찮아서 그냥 코웃음으로 요청을 날렸다.
“귀찮아서요. 술도 많이 마셨고.”
윤하가 이미 제 손바닥 위에 올라갔다고 생각하고 있던 희주가 당황한다. 조금 분위기가 싸늘해졌을 때,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던 승연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잖아. 쳐 주지 그래. 나도 듣고 싶은데.”
입을 닫고 구시렁거리던 윤하가 마지못해 일어났다. 취했지만 걸음은 곧았고, 조금 서먹해졌던 분위기는 이내 투명한 크리스털 피아노를 유려하게 연주하는 윤하의 모습에 로맨틱하게 바뀌었다. 여자마다 손을 모으고 윤하의 연주를 경청했고, 희주는 제 친구들에게 보란 듯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띄웠다. 피아노 칠 때만큼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윤하는 연달아 세 곡을 쳤다. 튕길까 아니면 같이 나갈까, 고민하던 희주의 고민이 한쪽으로 훅 기우는 순간이었다.
윤하가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땐 승연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물론 윤하는 눈치채지 못했다. 술에 많이 취한 것 같다며, 희주가 미끼를 던졌고 윤하는 기꺼이 물었다. 술 깨는 약을 호텔에서 파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윤하가 기꺼이 잡아 준 호텔 스위트룸은 희주의 마음에 쏙 들었고. 윤하도 희주가 썩 괜찮았다. 일단 생각보다 더 가슴이 컸고, 섹스가 끝난 후엔 잠도 두어 시간 잘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8차선 도로에 가방을 집어 던지고 주워 오라는 식으로만 굴지 않으면 잘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연애는 희주가 명동 한복판에서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이벤트를 해 달라고 달달 볶은 다음 끝났다. 윤하가 간과한 건, 명동 한복판에서 벌이는 이벤트를 로맨틱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희주가 남의 시선을 좆도 신경 안 쓰는 성격이었다는 점이다.
“많이 혼났냐.”
석현이 술을 내주며 윤하에게 물었다. 희주가 찾아와 회사에서 깽판을 치고도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오윤하 나오라며 술에 취한 희주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모습을 누군가가 촬영해 SNS에 올렸기 때문에,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다만 윤하의 기분이 터지기 직전처럼 안 좋다는 건 석현만 알았다. 아니, 한 사람 더.
“이건 뭐야. 피야?”
연락을 받고 뒤늦게 온 승연이 윤하의 셔츠 칼라를 뒤집으며 혀를 끌끌 찼다. 둘의 질문에 윤하는 그저 건성으로 어깨를 들썩였다.
“골프채로 머리 깨니 뭐니 하더니 커피 잔 집어 던지던데.”
“그래서,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어?”
“내가 왜.”
싹퉁머리 없는 대답에 승연과 석현 둘 다 혀를 찬다. 윤하만 별생각 없이 흘러나오는 재즈곡을 따라 손가락을 놀렸다.
“앞으로 출근 제대로 하래. 쓸데없이 여자 만나서 시끄럽게 언론에 이름 오르내리지 말고.”
쓰레기, 한심한 새끼. 같은 온갖 욕설을 섞어 장장 삼십 분간 지른 아버지의 고함을 대충 축약한 윤하가 다시 어깨를 으쓱했다.
회사에서 일하기 싫으면 후계자리 포기하면 될 일이 아니냐.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또 다른 누군가가 물려받을 돈이 얼만데 그걸 포기하겠냐고 하겠지. 하지만 윤하가 제 아버지를 싫어함에도 그나마 회사에 들락날락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외조부의 유언이 있었다. 선택엔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게 무슨 소리였는지 윤하만은 잘 알았다.
“너희 아버지도 참 널 모른다. 하긴, 자식들을 알면 너희 형을 그렇게 만들지도 않았겠…….”
여전히 윤하의 칼라를 만져 주며 무심코 말을 흘리던 승연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윤하의 눈치를 봤다. 윤하는 대꾸 없이 술을 마셨다. 굳이 승연에게 화를 내지 않은 건, 피곤했기 때문이다. 어제 낮에 잠깐 잤던 걸 빼면 벌써 이틀간 잠을 못 잤다. 입술을 달싹이던 승연이 윤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앞으론 수절 좀 하시게?
“생각 좀 해보고.”
말을 마친 윤하가 승연의 손을 대뜸 낚아챘다. 눈을 깜박이는 승연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윤하가 시선을 승연의 손으로 내렸다.
“매니큐어 색 바꿨네.”
신인 때부터 승연을 기용해 온 샴푸 CF 때문에 승연의 머리는 꽤 오래전부터 염색한 적 없이 긴 머리를 유지했다. 유행을 좋아하고, 뭔가에 금방 질려 버리는 승연의 성격상 지루함을 손톱 꾸미는 것으로 푸는 편이었다. 빨간색 매니큐어가 조명 아래 반짝반짝 빛났다.
“왜, 마음에 들어?”
“마녀 손톱 같아.”
윤하가 테이블 위에 승연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부턴 제시간에 출근해야 하니 집에 들어가 자는 시늉이라도 해 봐야 했다. 미련 없이 떠나는 윤하의 등을 보던 승연이 제 손톱을 빤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이 주 정도, 윤하는 아버지의 말을 지키긴 지켰다. 일단은 정각에 회사에 나왔고, 정각에 퇴근했다. 그사이에 잠을 자지 말라곤 안 했으니 시간은 대충 때웠다. 일단 핸드폰에 인기 순위에 있는 게임을 모조리 내려받았다. 그러다 잠이 오면 잽싸게 잤다. 소리라곤 제 숨소리밖에 없는 집보단 사람 사는 소리가 들리는 회사에서 좀 더 잠이 잘 왔다. 그래 봤자 ‘조금’일 뿐이라. 애초에 회사가 잠을 자라고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니 어설프게 잠들었다가 깨기만 반복했다. 자연스레 윤하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날도 그랬다.
“팀장님. 이것만 보고 자세요. 응?”
오랜만에 푹 잘 수 있겠단 기분이 들어 얼른 소파에 누웠는데, 십 분도 지나기 전에 정수가 들어와 윤하를 어르고 달랬다. 정수는 인간관계에선 우유부단하고 마음 약한 구석이 있어 깨울 때마저 조심스럽다. 윤하가 제대로 잠을 못 이룬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짜증은 나지만 자기 때문에 대학 선배 겸 아는 형인 정수가 고생한다는 걸 윤하도 알았다. 진짜로 짜증이 난 건 그다음이었다.
“저기, 윤하야. 요즘도 제대로 못 자는 거지.”
다시 자 볼까 해서 누웠는데 이미 달아난 잠이 되돌아올 리 없다. 짜증스레 소파에 누워 이리 뒤척이고 저리 뒤척이는 윤하를 정수가 불렀다. 회사에선 존칭을 칼 같이 지키는 양반이 별일이다 싶어 윤하가 정수를 힐끔 봤다.
“많이 힘들면 진짜로 정신과 한번 가 보는 게 어때. 응? 정신과라고 해서 무조건 이상한 곳 아니야. 다리 아플 때 정형외과 가는 것처럼…….”
거기서 기어코 큰 소리가 나고 말았다.
사람이라면 종류를 가릴 것 없이 상처가 있기 마련이다. 본인이 들여다보지 않으면 상처는 응어리가 되고 이내 단단히 마음에 박힌다. 몸에 난 상처를 내버려 두면 곯고 썩듯이, 마음의 상처도 마찬가지였다. 곪고 썩은 부위는 누군가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지독한 통증을 동반했다. 사정을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들추지 마.
화가 나서 뒤집어엎고 나오긴 했는데 막상 갈 곳이 없었다. 회사 나서는 모습을 보이면 제 아버지에게 말이 올라갈 테고 그러면 또 불려가 아버지를 한 대 후려치고 싶은 걸 참으며 폭언을 들어야 했다.
영감을 패면 혹시 패륜인가, 갈 곳이 없어서 회사 로비에 딸린 커피숍에서 커피 한 잔 물고 옥상 정원으로 올라온 윤하가 홀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친아버지가 맞긴 하니 패륜은 패륜인데, 관계는 남이나 다름없으니 심정적으론 패륜이 아닐 것 같다. 커피를 쪽쪽 빨며 혼자 열심히 생각하는 윤하의 귀에 어떤 대화가 걸렸다. 내용이 발칙하다는 건 조금 뒤에 알아챘다.
“저, 있잖아. 털 말이야. 사타구니 쪽은 남겨 놔도 되겠지?”
차분한 목소리에 여자랑 노닥거리는 걸 좋아하고 야한 이야기도 좋아하는 윤하의 귀가 솔깃해졌다. 여자는 전화에 집중하느라 윤하가 제 근처까지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것도 듣지 못했다. 전화 소리가 잘 들릴 곳에 자리 잡은 채 윤하는 다시 커피를 쪽쪽 빨았다. 여자가 민망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알겠어. 그럼 털 다 밀고……. 나 참, 걔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다.”
윤하의 머리에 자연스럽게 떠오른 건……. 밑을 홀랑 민 여자의 모습. 솔직히 말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출근 시간 신도림역만큼이나 오가는 여자가 많았던 만큼 윤하는 여자들이 위생상의 이유나, 생리할 때 편하다는 이유로 사타구니 털을 뜯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보통은 둔덕에 세모 모양이나 하트 모양으로 털을 남겨 두기도 하던데. 여자가 제 둔덕에 어떤 모양으로 털을 남겨 둘지 궁금해서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여자는 거기까지 대화를 이어가지 않았다. 윤하도 그쯤에서 호기심을 접으려고 했다.
“엄마야!”
전화를 끊고 돌아선 여자가 어딘가 눈에 익은 얼굴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팀장님?”
자기 팀 직원인데, 솔직히 말해 이름은 기억이 안 났다. 맞다. 솔직해질 것도 없이, 다정이 이직하고 삼 개월이 지날 때까지도 윤하는 다정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 사람이 있는지조차 종종 까먹곤 했다. 긴장한 건지 아무 생각이 없는 건지, 맹해 보이진 않는데 그렇다고 해서 어떤 감정이 올라가 있는 것도 아닌 덤덤한 얼굴을 살피던 윤하의 눈길이 자기도 모르게 쭉 내려갔다. 속으로 생각한다. ‘말랐네.’ 그게 윤하가 다정에게 가진 두 번째 생각이었다.
몇 번 만나 봤던 모델들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일 만큼 등이 꼿꼿한 건 아니었지만 자세가 바랐다. 머리 길이는 그다지 길지 않다. 하나하나 따졌을 때 눈에 확 들어오는 미인은 아니었다만 조용하고 침착한 분위기가 있었다. 무심한 얼굴을 뜯어보던 윤하의 눈길이, 치마 아래 감춰진 여자의 아랫도리에 꽂혔다. 슬쩍, 뭔가가 동했다. 무심코 빨대를 깨물었다.
얌전하게 생겨서 저기에 하트나 세모, 네모라고 해도 상관없다. 어쨌든 그런 걸 생각하니 흥미가 생겼다. 급한 전화 좀 했다는 여자의 말을 대충 넘기며 고개를 까닥까닥. 윤하의 머릿속에서 여자는 홀딱 윤하의 무릎에 올라타 있었다. 전후 관계는 필요 없다. 실제로도 아무 생각 없던 여자가 윤하의 무릎에 올라타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으니까.
“그럼,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말없이 쳐다만 보자 여자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윤하가 여자를 불렀다. 이름이 뭐냐는 말에 여자는 좀 이상한 사람 보는 듯한 얼굴로 윤하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윤다정입니다. 팀장님.”
“아아. 윤, 다정 씨.”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해보려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회사 밖에서 여자 좀 만나는 거로도 아버지가 펄떡 뛰는데 사내 여직원을 건드렸다는 걸 알면 진짜 골프채라도 휘두를 것 같았다. 그리고 커피 잔은 맞아 줘도 골프채는 못 참을 것 같다. 계산을 마친 윤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정을 보냈다. 음, 이름이 윤다정이었네. 끝.
이름은 기억하게 됐지만, 여전히 관심은 없었다. 하지만 인생엔 항상 사건이 있는 법이었다. 사소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다. 사건은 인생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마련이란 걸 설명하기 위해 존재할 뿐이니까.
윤하를 사사건건 쫓아다니며 이제 일 좀 해라, 이제는 할 때도 되지 않았니, 왜 그러니. 하는 정수를 화장실 앞에서 쫓아냈을 때의 일이다. 볼일 보라고 만들어 놓은 변기에 뚜껑을 내리고 앉아 뿅뿅, 게임을 하는데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뭐, 여자 친구랑 헤어지게? 오래 사귀었다며.”
“시험 기다려 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두 번이나 떨어졌으면 가망 없는 거 아니냐. 거기다 정신 상태도 글러 먹어서, 요즘은 자꾸 결혼 얘기 꺼내는 게. 나한테 취집할 생각인 듯.”
“너 취업 준비할 땐 데이트 비용 걔가 다 냈다며.”
총 셋이었고, 대화는 대체로 이런 쓸데없는, 능력도 없으면서 젠체는 기갈나게 잘하는, 지질한 남자들이 즐기는 주제로 이뤄졌다. 윤하가 대화에 끼기는커녕 흥미를 보일 리 없는.
“아, 몰라. 요즘 부모님도 자꾸 선봐 보라고 하고. 너는 요즘 어때. 말 걸어 봤냐.”
“누구, 윤다정?”
막 신기록 갱신을 앞두고 게임에 정신 팔려 있던 윤하가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건 회사에서 자기 팀에서 정수를 빼고 유일하게 제대로 외우고 있는 윤다정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한 번에 떠올리진 못했다. 윤다정? 어디서 들어봤는데. 아, 사타구니.
“그게 누군데?”
“왜. 몇 달 전에 경영지원팀 이직한 여자 대리.”
“아아. 뭐야, 너 그 여자 관심 있어? 별로 예쁘지도 않던데. 그 여자보다는 거기 신입이 낫지. 귀엽고, 싹싹하고.”
“아직 여잘 모르는구만. 신입 쪽은 성격이 좋은 거지. 따지면 수수하긴 해도 예쁜 건 윤다정 쪽이야.”
“얼씨구. 너 그 여자 좋아하냐? 좋아해?”
“됐거든요.”
곧이어 시원찮은 오줌 줄기 소리가 들리는데,
“그 여자, 애인 있대. 그리고 내가 생각한 거랑 좀 다른 거 같더라고.”
“뭐가?”
“왜, 인천 현장에 있는 박 주임 말이야. 윤다정이 먼저 꼬리 쳐서 자기도 마음 갔는데 전화하니까 애인이라는 남자가 받아서 한 번만 더 전화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그랬대. 왜 그런 여자들 있잖아. 애인 있어도 흘리고 다니는 애들.”
물론 흔히 있는 찌질한 중상모략이었다. 그걸 씨불이고 다니는 인간이나 홀랑 믿고 떠들고 다니는 인간이나 한심하긴 마찬가지였지만, 오윤하는 딱 한 가지만 생각했다.
오호라?
그렇다고 또 바로 다정에게 달려가 뭘 하자고 해 본 건 아니었다. 흥미를 갖긴 했지만, 그날 게임 신기록 갱신을 아깝게 놓쳤기 때문에, 홀랑 까먹었다. 다정이 은근히 지조 없는 여자라는 오해가 뇌 한구석 어디에 박혔을 뿐. 박혀 있는 사실을 꺼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예컨대 이런 상황에서라면.
“오후 회의에 팀장님도 참석하시나요?”
정수의 잔소리를 따돌리고 한적한 빈방에 처박혔는데, 삼십 분도 지나기 전에 누가 들어왔다. 밤부터 십분 간격으로 자다 깨다만 반복하다 출근한 탓에 예민해져 있던 윤하가 말을 거는 이에게 눈을 부라렸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였다. 그래서 바로 알아보지 못했다. 멍한 뇌를 여자의 목소리가 깨웠다.
“윤다정입니다. 이름 기억 또 못 하실까 봐.”
어, 은근 헤프다는.
윤하가 속으로 이런 생각하는 걸 꿈에도 모를 다정이 갑자기 무릎을 굽혔다. 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지고, 다정이 조심스레 그 머리를 쓸어 넘겨 귀 뒤에 꽂았다. 윤하는 펜을 줍는 다정을 지켜봤다. 뭔가를 발견한다. 이 여자의 머리카락을 타고 귓바퀴부터 어깨까지 떨어지는 선이 무척이나 섬세하고 섹시하다. 다정이 귀 뒤로 넘긴 머리카락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이자 또 깨닫는다. 눈을 내리깐 표정이 무척이나 정숙하고 음전했다.
순간 다정이 궁금해진다. 오랄할 때도 저렇게 정숙하고 음전한 표정일까. 호기심을 해결하고 싶어진다. 품에서 만년필을 꺼내 굴렸다. 특유의 묘한 표정으로 윤하를 쳐다보던 다정이 고개를 다시 숙였다. 머리카락 몇 올이 뺨 근처로 늘어졌다. 생각은 길지 않다. 머리카락을 넘겨 주자 다정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거기서 생각이 확 기운다.
이 여자랑 자 볼까?
“뭐야. 갑자기. 뺑소니라도 쳤어?”
잔뜩 열이 받은 채로 들어온 윤하에게 석현이 아는 척을 했다. 시시껄렁한 농담은 대충 넘겨 버리고, 주문한 술이 나오자마자 단숨에 넘긴 윤하가 그때야 숨을 길게 토했다. 숨을 쉬자마자 올라오는 지독한 쓴 냄새에 이미 구겨져 있던 미간이 더 구겨진다. 그사이 석현은 윤하의 기분이 저조한 이유를 추리했다.
“뺑소니를 쳤으면 변호사한테 갔을 테고, 너희 아버지한테 맞았으면 분명 티가 날 텐데 얼굴 멀쩡하고. 뭐, 형님 납골당이라도 다녀왔나.”
전부 시큰둥하게 무시하던 윤하가 마지막 말에 석현을 노려봤다. 하지만 화는 내지 않았다. 어쩐지 계속 화내는 것도 바보 같아서 그쯤 해서 미간을 푼다. 이내 내내 웃기다고 생각해 온 석현의 하와이안 셔츠를 노려보며 윤하가 입을 열었다.
“나한테 관심이 없데.”
“어디서 만난 여잔데?”
엉뚱하게도 대답은 다른 방향에서 날아온다. 석현과 윤하가 동시에 말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다. 막 화장실에 다녀온 승연이 아직 물기가 남은 손등에 핸드크림을 짰다.
“남자가 자기한테 추근거린다면 모를까. 남자가 자기한테 관심을 안 보인다고 열받을 오윤하는 아니고, 그렇다고 여자 문제로 심심하면 복날에 개 잡듯 잡는 회장님이 너한테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여자밖에 더 있니.”
논리정연한 말에 윤하가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술을 한 잔 더 주문한다. 승연도 옆에서 독한 위스키를 시켰다. 위스키에 입만 살짝 대고 내려놓던 승연이 윤하의 옆얼굴을 봤다. 뚱한 얼굴. 이내 윤하가 입을 열었다.
“회사 사람.”
승연이 놀란 척을 한다.
“꽤 예쁜가 봐. 회장님 감시 아래서 회사 사람 건드릴 생각 했다는 거 보니까.”
덧붙인다.
“나보다 예쁘니?”
그 말에 힐끔 윤하가 승연을 봤다. 시선은 길지 않다.
“그냥 묘해.”
“첫눈에 반한 거야?”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젓는 윤하에 승연이 순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석현이 승연을 지켜보다 한숨을 길게 쉬었다. 제 입술을 깨물던 윤하가 성질을 터트렸다. 머리를 마구 헝클이며.
“아, 왜 이렇게 열받지 근데.”
그 답은 석현과 승연 둘 다 알았다. 비자 카드처럼 윤하의 외모는 인종, 나이를 막론하고 웬만한 여자들이 호감을 품을 만한 것이었다. 예컨대 지금 윤하의 짜증은 편의점에서 젤리를 사려다 카드 잔액이 없다고 쫓겨나는 것과 비슷한 일에서 발생한 것이다. 오윤하 매력이 잔액 부족이니 꺼지세요!
그리고 윤하의 여자 친구들은 웬만하면 석현의 가게에서 생겨났는데, 윤하가 먼저 관심을 보이는 것보단 먼저 추파를 던지거나 애인이 있음에도 심심찮게 윤하에게 먼저 추근거리는 여자들이 더 많았다. 그리고 윤하는 웬만하면 여자를 까다롭게 따지는 법이 없어 인기가 더 좋았다. 그러니까 스폰 있다고 소문 자자한 차민영하고도 만났지. 승연이 속으로 생각하며 콧방귀를 뀐다.
“제대로 말해 봤어?”
사실 승연은, 아직 윤하에게 마음이 있다. 그게 사랑이라고 하긴 뭐하다. 하지만 오윤하에게 있어 제가 특별한 위치인 걸 잘 알았다. 헤어진 여자 친구 중 유일하게 친구로 남았다. 여자 친구랍시고 유세 떠는 것들이 간혹 나타나도 저보다 예쁜 애는 없었고, 오윤하도 애인일 때 그랬던 것처럼 제 까탈스러운 요구를 들어줬다. 승연은 솔직히 오윤하를 잠깐 스쳐 지나가는 여자들한텐 관심이 없었다. 자신도 종종 남자를 만나 왔고 지금도 신인이었다가 전작이 빵 터져 스타 반열에 오른 어린애랑 연애 중이었으니까.
“상사라 조심스러운 모양이지. 제대로 말해 봐. 사귀자는 거 아니고 결혼하자는 것도 아니라고. 그냥 놀자고. 애인이랑 헤어질 필요도 없다고. 아니면 그냥 튕기는 거라던가.”
본인이 생각하기엔 꽤 논리적이고 어른스러운 충고를 늘어놓으며 승연이 손톱을 매만졌다. 빨간색이 지워진, 대신 본래 손톱 색과 비슷한 살구색만 수수하게 올린 손톱을.
“나 손톱 바꿨어.”
그런가? 내 말이 애매했나? 그냥 튕기는 거였나? 고민하는 윤하의 앞에 승연의 손이 내밀어졌다. 여전히 제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다정의 무심한 얼굴을 생각하며 윤하는 대강 정답을 내놓는다.
“예쁘네.”
술잔이 비워졌다. 승연이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쁘게 웃는다. 윤하는 그걸 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생각 없이 한마디 툭 던진다.
“데려다줘?”
생각해 보니 자기한테 마음이 있으면서 일부러 안달 나라고 튕기는 여자들은 많았다. 윤하의 결정이 한쪽으로 확 쏠린다. 승부욕과 오기가 발동한다. 요즘 들어 느끼지 못한 감정이다. 회장 아들인 자신에게 도전할 이는 누구도 없으니까. 뒤에서 욕을 할지언정. 얼마 뒤, 승연이 괜찮다고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걷는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팀장님 권유를 거절하는 일에 제가 남자 친구가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윤하의 문장이 바뀐다. 이 여자랑 자 볼까, 가 아닌. 이 여자랑 꼭 자 보고 말 테야.
다정은 몰랐을 것이다. 승부욕에 불이 붙은 윤하가 얼마나 집요해질지. 사실은 윤하도 몰랐다. 우기면 울상으로 넘어오긴 하는데 결정적인데 선 항상 ‘NO’. 그게 자기 성격에 얼마나 불을 더 붙이는지. 뭔가에 의욕이 생긴 게 참 오랜만이란 것도.
밥을 세 번 먹자고 할 때는 거의 오기였다. 그리고 더 넣어지는 장작이 없어서 재만 남긴 채 불이 꺼지려 할 때, 인생은 다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몸을 튼다.
“그럼, 자고 가실래요?”
솔직해지자면, 윤하는 남은 감정이 거의 오기였던 것만큼 다정과 한두 번 자고 말 생각이었다. 그렇게 나한테 싫다고 질색팔색하더니 드디어 넘어왔구나. 의기양양해진다. 드디어 이 여자를 정복했구나. 사타구니에 털이 있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런데. 섹스 도중에 문득 깨달았다.
“이 자세, 싫어.”
꼭 닫힌 창문 너머로 들어온 달빛은 몸의 윤곽 정도만 비춘다. 표정 따윈 보이지도 않았다. 마르기만 한 팔다리, 모양은 예쁘지만 쥐는 감촉은 여태 만나온 여자들에 비하면 반만 담은 공깃밥을 삼천 원에 강매당하는 느낌이 들게 하는 가슴. 그런데 그걸 모두 잊게 만드는 게 있었다. 서럽게 흐느끼는 듯한 소리.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 무심한 얼굴이었다. 심지어 짜증을 낼 때도 금방 표정을 감추고는 특유의 정숙한 표정으로 노려보기만 했다.
“당신 싸는 거 보고 싶거든.”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이를 꽉 물고 신음을 참는데, 그 소리가 마치 어린애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우는 것 같다. 여전히 표정은 안 보이지만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느낀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뻣뻣하던 여자가, 내 밑에 깔려서, 죽는소리를 내. 문장이 짧게 짧게 끊긴다. 마음이 조금 흉포해진다. 한두 번으로는 안 되겠어.
그렇게 거칠게 한 것도 아닌데 섹스 좀 두 번 했다고 기절하듯 잠들어 버린 다정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다음엔 불을 켜고 섹스하자고 할까. 그런 생각인데, 다리 사이를 물티슈로 닦아 주는 동안 계속 뒤척이던 다정이 힘없이 팔을 윤하의 목에 감았다.
“이제 좀 자자.”
멀뚱거리니 그 말을 듣던 윤하가 다정의 손길에 일단 몸을 눕혔다. 잠이 올만큼 섹스한 건 아니니 잠투정쯤이야 조금 받아 주다 가도 괜찮겠지, 그런 마음이었다. 역시나 깬 건 아니고 잠결이었는지 다정이 다시 고르게 숨을 쉬었다. 벌거벗은 가슴팍에 손이 올라와 있다. 다정이 잠깐 입으로 숨을 쉬었다. 손이 토닥토닥 윤하의 가슴팍 위에서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움직였다.
“착하지, 착해.”
그게 뭐라고.
“자장, 자장…….”
분명 잠이 안 왔는데, 깜빡 잠이 들었다. 좁은 침대가 불편해 잠이 깼을 땐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윤하는 그냥 별일이라 생각했다. 윤하의 다리 사이를 스쳐 지나간 고양이가 다정의 머리맡에 자리 잡고 울 때도, 시트가 어쩌고 했던 다정의 말을 기억해 대충 세제를 쏟아붓고 시트를 세탁기에 돌릴 때까지도.
본인에겐 별일이고, 다정의 잠버릇이 특이하다고. 그 정도로만.
그리고 주말 동안 멍하니 밤을 보낸 뒤 다시 생각했다. 그 잠버릇, 제법 마음에 들어. 병원에 가는 것만 아니면 잠을 자기 위해선 뭐든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자기한테 이미 넘어온 여자인데? 등잔 밑이 어둡단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설마하니 회사 사람이랑 그럴 줄 영감이라고 알겠어? 일이 쉬워졌다는 생각에 윤하는 룰루랄라 출근했다. 그리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말로 다시 뻥 차였다.
“치, 친한 척하지 마세요.”
얼떨결에 얻어맞은 뺨을 부여잡으며 윤하는 생각한다. 이 여자 뭐야? 다정이 계약서인지 제안서인지 모를 종이를 들이밀었을 때도 다시 생각한다. 이 여자 진짜 뭐지?
나름 배려해서 그렇게 세게 박지도 않았는데 뭐 하지 말라는 말만 연거푸 쏟아붓는다. 심지어 반만 넣으래. 거기서 또 청개구리 심정이 발동한다. 진짜로 그렇게 박힌 뒤에나 하지 말라면 모를까, 심지어 너 같은 놈하고 자 봤자 심장에 기별도 안 간단 식의 말엔 나름 억울하기도 했다. 물론 다정은 그렇게 말한 적이 없지만, 윤하의 귀엔 그렇게 들렸다.
어쨌든 오늘은 저 잠버릇을 즐기러 온 거니까. 실랑이하느라 늘어난 팬티를 허공에 던져 버리며 기어이 자리를 잡는다. 아버지한테 하도 맞았더니 악력도 약한 여자가 때리는 건 딱히 신경도 안 쓰였다. 아프게 때렸다고 해도 화를 내진 않았겠지만. 윤하는 그런 부분에선 특히나 관대했다.
“아, 빨리. 끝.”
할딱거리는 소리를 내며 다정이 애원한다. 그 소리가 좋아서 일부러 표정을 피하고 접합부만 지켜봤다. 두 번째 듣는 거지만, 진짜 사람 자극하는 소리다. 가학적인 음심을 부추긴다. 섹스 중에 여자 때리는 애들은 사람 취급도 안 하는 윤하였다. 그런 짓을 왜 해? 좆질 만으로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급하게 섹스를 시작했으니 당연히 불을 끄거나 커튼을 칠 시간 따위는 없었다. 숨넘어가는 소리를 즐기며 가슴을 쭉쭉 빤다. 반응이 즉각적이다. 입으로든, 몸으로든. 가슴을 애무하던 입술이 목덜미까지 닿았을 때, 윤하는 다정의 얼굴을 봤다. 처음엔 얼굴색이 삶은 당근 같다고 생각했고, 얼굴은 안 빨았는데 흠뻑 젖었다고 생각했다.
“힘들어? 끝낼까.”
가슴을 움켜쥐며 다정의 얼굴을 홀린 듯 쳐다본다. 물에 빠져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던 사람이 작은 널빤지를 잡고 잠깐 숨을 돌리는 것처럼, 다정의 얼굴에 잠시 안도가 떠올랐다. 그 모두를 지켜보며 윤하는 잠시 숨을 골랐다. 일부러 민소매를 들춰 다정의 유두를 꼬집듯이 툭툭 건드렸다. 그래도 가라앉지 않는다. 천천히 움직였다. 다정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걸 지켜봤다. 그 위로 눈물이 다시금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전부 지켜봤을 땐 정수리 뒤쪽이 찌릿하게 당겼다.
이, 여자는, 이런 식으로, 섹스해 본 적이 없는 거야.
또 문장이 뚝뚝 끊긴다. 소리만 들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몰아쳤다. 이런 섹스를 해 봤을 리 없다. 해 봤다면, 자기 얼굴이 지금 어떨지 알 테니까. 꾸며 내지 않은, 그리고 그걸 감추는 방법도 모르는. 이런 생각을 입 밖으로 낼 정도로 이성이 나가 버린 건 아니라 꾹 참았다.
다정이 얼굴을 손으로 가린다. 손길이 상냥하지 못하게 나갔다. 거칠게 움켜쥐고 소파 위로 처박았다. 생각 없이 퍽퍽 밀어붙이자 입도 한가득 벌린다. 좆이 한 개 더 있으면 저 입에도 물려 줄 텐데. 머릿속이 상스러워진다.
결박당한 채, 낯부끄러운 표정으로 날것의 신음을 뱉는 얼굴을 꼼꼼히 살핀다. 평상시의 다정을 생각하자 갑자기 핀트가 뚝 끊겼다. 허벅지를 가슴팍 위로 잡아 눌렀다. 삽입이 깊어지자 다정의 우는 소리도 한층 더 깊어진다. 씨발.
“앞으론 내 이름만 들어도 질질 쌀 정도로 만들어 줄게.”
진심이었다. 앞으로 그렇게 만들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