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갓길에 차를 세워 둔 채 난데없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차를 가운데 두고 서로 빙글빙글 돌았다. 골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핸드폰 대리점 직원이 담배를 피우며 멀뚱멀뚱 우리를 구경하다 들어갔다. 그 외엔 상가가 드문 지역이라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간발의 차로 오윤하의 코트를 놓쳤다. 빈 허공만 움켜쥔 주먹을 거두며 이를 갈았다. 한 손엔 보라색 딜도가 위용을 뽐냈다.
“어딜 가, 이리 안 와?”
허리에 손을 얹고 헐떡거리는 나와 달리 오윤하는 숨이 조금 가쁜 걸 빼면 멀쩡했다. 트렁크 쪽에 달라붙어 있던 오윤하가 숨을 고르는 나를 지켜보다 바닥에서 뭔갈 주워들며 협상을 시도했다.
“그거 내려놓으면 나도 이거 줄게.”
뭔가 했더니 여자 구두였다. 그것도 아주 익숙한. 내 발을 내려다보고 허리에서 손을 뗐다. 구두가 벗겨진 것도 몰랐냐는 듯 검은 스타킹에 싸인 발가락이 꿈틀거렸다. 오늘 새로 꺼내 신은 건데 발가락 앞쪽에 구멍이 났다. 눈을 치켜떴다.
“너 가져. 나도 잠깐 넣었다가 뺄게.”
오윤하가 이를 드러내며 질겁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 여자가 진짜 미쳤나! 일하다 말고 뭔 낮술이라도 했어?”
“나 멀쩡해. 되게 제정신인데.”
에이 씨, 하고 입술을 말아 문 오윤하가 구두를 내 쪽으로 던져줬다. 구두는 내 종아리 옆을 지나 잎 하나 없이 앙상한 가로수 밑까지 굴러갔다. 구두야 목적 달성 후에 찾아 신으면 된다. 가만히 선 채 오윤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차체에 기댄 채 머리를 쓸어 올린 오윤하가 짜증 난 목소리로 따졌다.
“거기가 넣으라고 있는 구멍이야? 진짜 뭔 별.”
스타킹만 신은 발이 당장이라도 지면을 박찰 듯 앞으로 슬금슬금 나갔다.
“쓰고 싶으면 혼자 써. 윤 대리한텐 뭐 넣으라고 만들어진 구멍 있잖아.”
그 와중에도 저속한 말을 일삼으며 뻔뻔하게 군다.
“어쩌라고.”
“뭐?”
나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오윤하가 대놓고 짜증을 부렸다. 그러다…… 다시 달려드는 나를 피해 혼비백산하며 내뺐다. 위치가 뒤바뀌었다. 이번엔 내가 트렁크 쪽으로, 오윤하는 보닛에 손을 댄 채 나를 주시한다.
“네가 네 입으로 그랬었잖아. 네가 나 따먹은 거라고. 나는 왜 안 돼?”
“내가 언제…….”
발뺌하려던 오윤하가 찔리는 게 있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슬쩍 눈치를 보며 주절주절 변명을 붙였다.
“아니. 그때 그건, 그냥 섹스라는 말보단 그게 더 표현이 재밌으니까.”
재미? 재미 같은 소리 하네!
“아무튼, 네가 나 따먹었으니까, 나도 너 따먹어야겠어. 그래야 덜 억울할 것 같아.”
“에이 씨, 진짜!”
다시 차를 사이에 두고 빙글빙글 추격전이 시작된다. 세 바퀴쯤 돌았을 때 잠깐 오윤하가 발을 삐끗해 멈춘 걸 그대로 뒤에서 덮쳤다. 넘어질 듯 흔들거린 오윤하가 뒤에서 매달린 내 팔을 풀었다. 엎치락뒤치락했다. 내가 암만 정신 나간 상태라고 해도 힘에서 오윤하를 이길 순 없었다. 내 양 손목을 잡아채는 데 성공한 오윤하가 차체에 나를 꾹 눌렀다.
“진정해, 진정하고 대화 좀 해.”
대화 같은 소리 하네. 오윤하가 정강이를 차이자마자 인상을 찌푸린다.
“진정 좀 해! 진짜 왜 이래, 갑자기?”
결국, 짜증을 이기지 못한 오윤하가 성질을 터트렸다. 나도 마주 보고 고함을 질렀다.
“너도 했잖아, 나는 왜 안 돼!”
“나 혼자 했어? 제안서인지 계약서인지 그것도 썼잖아. 뭐가 문젠데!”
“네가 그랬잖아!”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오윤하가 잠깐 움찔했다. 이해의 영역을 벗어난 어떤 것을 보듯 눈썹을 일그러트린 채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봇물 터지듯 말이 쏟아졌다.
“싫다는 사람 어르고 달래고 밀어붙이면서, 기어코 나한테 그랬잖아. 내가 싫은 건 싫은 것도 아니고 네가 싫은 건 싫은 거야?”
손목을 내리누르고 있던 오윤하의 손아귀에서 살짝 힘이 빠져나갔다.
“끝낼 거면, 나도 너 따먹고 끝낼 거야.”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이를 악문 채 흐느꼈다.
“네가 나한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된 거잖아.”
오윤하의 손이 떨어졌다. 딜도를 쥔 손이 힘없이 추락했다. 얼굴을 감싸자 딜도에 솟은 돌기가 뺨을 꾹 찔렀다.
“따먹을 거면 몸만 따먹지, 왜 마음까지 따먹어. 왜…….”
인생엔 이성만으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언제나 휘말려 죽을 것 같은 홍역을 앓고 나서야 깨닫는다. 하지만 정말 예상하지 못했을까, 이제는 의문이 든다. 내가 진작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지, 그런 사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마른하늘에 번개 치듯 떨어지는 게 아니라 서서히 진행되고 있었다고.
“윤 대리.”
다만 깨달음이 순식간일 뿐이라고.
“아니. 윤다정.”
2월의 밤은 쌀쌀하고 외롭다. 좋아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도 사무치게 외로운 건 이 마음이 일방적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위태롭던 마음이 무너진다. 때 이른 장마처럼 눈물이 세차게 떨어졌다. 제 입술을 씹으며 우는 나를 지켜보던 오윤하가 코트를 벗었다.
“싫다는 사람 붙잡고, 내가 시작한 관계라는 거. 인정할게.”
눈살을 찌푸리며 내 어깨에 코트를 얹는다. 코트는 따뜻했다. 흘러내리는 코트 깃을 바로 잡으며 꼼꼼히 여며 준 오윤하가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랑 자면서 아무 마음도 없던 거 아니라는 것도.”
내 턱을 들어 올린 오윤하가 복잡한 얼굴로 엄지를 들이밀었다. 엄지가 눈머리에 닿자마자 눈이 깜박, 감긴다. 그칠 줄 모르고 새어 나오는 눈물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말을 잇는다.
“오래 보고 싶다고, 그거 거짓말 아니야. 당신한테 호감 있어.”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딜도를 어쩌니, 하면서 사람 환장하게 놀래킨 지금도.”
잠깐 눈을 내리깐 오윤하가 손을 뻗어 딜도를 가져갔다. 불쾌한 걸 잡은 듯 검지와 엄지만 살짝 이용해 딜도를 흘겨보던 오윤하는 언제 내가 돌변할지 모른다는 듯 길바닥 어딘가에 던져 버렸다. 딜도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다. 무슨 말을 덧붙이려던 오윤하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근데 왜, 다른 여자 만나?”
“여자? 무슨 여자.”
오윤하가 금시초문이란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에 대한 변명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눈물에 침식당해 군데군데 상한 목소리가 다시 입을 벌렸다.
“왜, 나랑 끝내려고 했어?”
말없이 쳐다만 보던 오윤하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까짓 연애하자면 할 수도 있어. 연애, 나한텐 당분간 이 여자랑만 자겠다는 그런 가벼운 결심 정도야. 당신이 제안서인지 계약서인지 그 종이 들이밀기 전엔 사귀자고 할까 생각도 했었고.”
신이 마음을 인간에게 넣어 줄 때 똑같은 걸 넣어 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누구와 만나건 마음에 뭔가가 싹텄을 때 그 크기와 속도가 같다면 좋을 거라고.
“근데 윤다정, 지금 당신이 원하는 거 그런 거 아니잖아.”
출발선에서 손을 잡고 떠나 보이지 않는 결승선을 향해 같이 가고, 중간에 마음이 다해도 똑같이 끝내고. 떠나간 이를 배웅하며 어딘지 모르는 곳에서 서성이다 보면 어떤 사랑을 하다 관뒀던 사람과 만나겠지. 마음이 시작되면 다시 출발하는 거다. 결승선을 향해.
“솔직하게 말할게.”
다시 눈물이 뚝 떨어진다. 눈물을 닦아 주려는 듯 손을 빼내던 오윤하가 한숨을 길게 쉬었다. 오윤하의 목소리 위로 언젠가 서승연이 내게 했던 충고가 떠올랐다. 당시엔 그냥 어이없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 말들.
“뭘 원하고 생각하든 당신이 나한테 바랄 모든 게 부담스러워.”
‘윤하, 잘해 주죠? 잘해 줄 거예요. 외할머니가 그쪽으론 엄하시기도 했고, 어린 시절은 페미니스트들이 많다는 프랑스에서 보내기도 했으니까. 특히나 사소한 데선 자존심 안 세우고 여자한테 져 주는 게 윤하의 제일 큰 장점이죠.’
“같이 있으면 좋아, 재밌고.”
‘근데 윤하가 할 줄 아는 건 그게 전부예요.’
“정 억울하면 뺨 몇 대 때려, 그리고 잊어.”
‘오윤하한텐 마음이 없거든. 장난감 가지고 놀 줄은 알아도.’
“알잖아.”
서승연의 충고를 들었어야 했는데. 무표정하다 못해 싸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는 이 남자에게서 도망쳤어야 했는데.
“사랑이었던 적, 없다는 거.”
내 마음이 이 모양 이 꼴로 생겨 먹었단 걸 알고 있으면서, 도망칠 타이밍을 놓쳤다. 성가심과 짜증. 그리고 조금의 안쓰러움으로 오윤하의 눈빛은 복잡했다.
“때릴 거면 지금 말해. 오늘처럼 갑자기 사람 잡겠다고 날뛰지 말고.”
아무 말 못 하고 고개만 숙였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살짝. 신호를 알아들은 오윤하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어깨에서 흘러내린 제 코트를 여며 준 오윤하가 데려다줘? 물었다. 또 고개를 젓는다.
“그거 입고 가. 돌려줄 필요 없어.”
이번엔 고개를 젓지 않았다. 그냥 잠자코 코트를 벗었다. 받지 않기에 떠넘기듯 억지로 코트를 안겨 줬다. 침을 삼켰다. 불덩이를 삼킨 것 같다. 마음이 타들어 가는 중이었다.
급하게 내리느라 열어 둔 조수석에서 가방을 찾았다. 구석까지 들어간 립밤을 챙겨 꾸역꾸역 가방에 쑤셔 넣었다. 이제야 신발이 달아난 한쪽 발이 얼어붙다 못해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시렸다. 가방을 쥐고 고개를 들었다. 얼마간 내 눈을 마주하던 오윤하가 고개를 돌렸다. 말라붙은 뺨 위로 새 눈물이 한 방울 지나갔다.
“실례 많았습니다.”
나도 고개를 돌린다.
“팀장님.”
절뚝거리며 신발을 찾았다. 가로수 밑에 한참 나동그라져 있던 신발은 발을 집어넣기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고 차가웠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그냥 앞으로 뻗은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뒤, 오윤하의 차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얼마간 걸어가자 술집이며 식당이 모여 있는 조그마한 상가가 나왔다. 울며 지나가는 여자를 사람들이 얼마간 구경하다 이내 자기 자신의 삶으로 돌아갔다. 흔한 일이다. 모든 사람의 인생엔 눈물을 흘릴 만큼 슬픈 일들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나 또한 겪어 본 적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땐, 길거리를 울며 걸을 만큼 슬프지 않았던 것 같다. 혹은 슬픔을 꺼내 보는 방법을 몰랐거나.
어린 시절에 좋아했던 동화를 떠올린다. 마음을 꺼내 어루만질 수 있는 소년. 이젠 그 소년이 부럽지 않다. 감정을 제대로 느끼고 맞닥트리는 게 이렇게 힘들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하필이면, 오윤하 때문에. 헐떡거리며 눈물을 흘린다. 알고 있었으면서, 알고 있었는데.
“흡, 으…….”
그가 내 마음에 관심이 없다는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옛날 어느 가난한 도시에 한스라는 소년이 살았습니다. 한스가 태어났을 당시엔 극심한 흉년이 들었던 때라, 한스의 부모님은 아이에게 빈 젖이나마 물리고 안아 주는 대신 우는 아이를 지켜보며 절망 섞인 한숨을 쉴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해에 태어난 아이 절반이 전염되듯 굶주리고 병들어 죽었지만, 한스는 살아남았습니다.
새벽처럼 일을 나가 새벽 가까운 밤에 들어올 때까지 일하면서도 고기 넣은 죽조차 먹을 수 없는 가난에 시달리는 부모님 대신 인근에 사는 쭈글쭈글하게 마른 눈먼 노파가 한스를 보살폈습니다.
노파는 자신이 울거나 보채면 사람들이 속상해할 걸 안다는 듯 천진하게 웃기만 하는 한스에게 쥐가 귀퉁이를 갉아먹은 딱딱하고 조그만 비스킷을 쥐여 주며 늘 이렇게 속삭였습니다.
‘참 착한 아이구나, 참 착한 아이야.’
노파의 말이 주문된 듯 한스는 착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고심해서 지을만한 힘이 없는 부모들 덕에 골목에서 어울려 노는 아이들의 이름은 비슷하거나 겹치는 게 많았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헷갈리는 일이 없도록 아이들 이름 앞에 특징을 붙여 불렀습니다.
개를 키우는 미셸, 곱슬머리 미셸, 파란 눈의 피터, 유난히 씻는 걸 싫어하는 다른 피터의 별명은 지저분한 피터. 한스는 착한 한스라고 불렸습니다. 상냥하고 착한 한스. 친구들이 떠돌이 개에게 돌을 던지거나 꼬리에 불붙이는 시늉을 하며 괴롭힐 때 한스는 개를 자기 뒤에 숨기고, 자기 몫의 음식을 나눠주었습니다. 한스는 유난히 꼬리가 짧은 떠돌이 개와 금방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한스의 친구가 된 꼬리가 짧은 개가 밤중에 컹컹 짖었습니다. 잠에서 깬 한스는 자기 친구에게 주기 위해 내일 아침으로 자기가 먹을 빵을 반으로 잘라 나왔습니다. 그러곤 제 친구가 짖고 있는 곳을 보고는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한스네 집 지붕에 둥지를 튼 새가 입에 뭔갈 물고 있었거든요. 작긴 해도 사람의 모양이었습니다. 작은 인간이 구슬프게 한스를 보며 속삭였습니다.
‘아이야, 아이야. 제발 나를 도와주렴.’
‘하지만 너를 먹지 않으면 저 새가 굶게 되는걸.’
‘내가 없으면 숲속의 꽃들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나무에 열매가 열리지 않게 된단다. 그러면 잎사귀에 맺히는 이슬을 먹고 사는 벌레들과 그 벌레들을 먹고 사는 짐승들이 굶게 된단다.’
그 말에 한스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새에게서 작은 사람을 구해줬습니다. 화가 난 새가 한스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한스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내일 아침에 자기가 먹을 빵을 둥지에 내려놓았습니다. 작은 사람이 한스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고맙구나. 인간의 아이야. 나는 숲의 요정. 태양이 내리쬐는 아침에 깨어나 밤의 이슬을 품고 잠이 든단다.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해보렴. 금은보화를 잔뜩 안겨 달라면 그럴 수 있고, 나라에서 소문난 미녀와 결혼 할 수 있단다. 왕궁에 거처를 둔 늙은 연금술사들도 모르는 세상의 비밀과 지식을 전부 알게 해 줄 수도 있지.’
그 말에 고민하던 한스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부모님이 나를 꼭 껴안아 줬으면 좋겠어. 딱 한 번이라도.’
숲의 요정이 춤을 멈추고 한스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이내 요정이 말했습니다.
‘인간의 아이야, 너는 참으로 욕심이 없고 마음이 착하구나.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일은 내게도 어려운 일이란다.’
한스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부모님이 깨지 않도록 좀 더 목소리를 낮추고 바닥에 요정을 내려놓았습니다. 꼬리 짧은 개가 요정에게 다가와 냄새를 킁킁 맡았습니다.
‘내가 널 숲까지 데려다줘야 할까?’
고민하던 요정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러곤 한스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두 손으로 한스의 엄지를 꼭 쥔 요정이 속삭였습니다.
‘사람의 슬픔을 달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너라면 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네게 사람의 마음을 꺼내 쓰다듬을 수 있는 마법을 걸어주마.’
한스는 할 수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요정이 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한스의 손에 뿌렸습니다. 한스의 손이 정오의 햇살을 움켜쥔 것처럼 잠깐 밝아지다 원래 색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정이 떠나기 전, 충고를 남겼습니다.
‘슬프고 우울한 마음은 한두 번으론 행복해질 수 없단다. 기약 없는 기다림과 인내, 어떤 흉측한 모양이라도 다정하게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지. 할 수 있겠니?’
한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을 건 요정이 다시 춤을 췄습니다. 달빛 아래 춤을 추는 요정을 보며 한스는 손뼉을 쳤습니다. 그러곤 어느 순간부터 잠이 몰려오는 바람에 짚단에 몸을 누였죠. 벼룩이 한스의 옷 속에서 피를 빨았습니다. 한스는 자기의 마음을 꺼내 봤어요. 한스의 마음은 밝은 초록색으로 은은한 빛을 냈습니다. 다시 마음을 집어넣은 한스는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꿈에 나온 부모님이 웃으며 한스를 안아 주었어요.
잠에서 깬 한스는 다음 날부터 부모님의 마음을 꺼내 문질렀습니다. 요정의 말대로 부모님의 마음은 흉측했습니다. 때론 한스의 손길을 거부하며 도망칠 때도 있었어요. 그럴 땐 땀을 흘리며 마음을 쫓아다녀야 했지만, 한스는 하루도 빠짐없이 슬프고 외로운, 힘겨운 감정에 구멍이 송송 난 회색 덩어리들을 품에 꼭 안고 쓰다듬었습니다.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일 년. 마침내 시간을 기억하기엔 너무나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한스의 부모님은 한스를 안아 주기는커녕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 채 일터에서 돌아오면 곯아떨어지기만 했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돌아온 부모님이 한스를 덥석 끌어안았습니다. 땀 냄새가 지독했고 옷은 지저분했지만 품은 따뜻했습니다.
‘오, 한스야. 우리 아들. 우리 착한 한스.’
한스는 행복했습니다. 처음으로 웃으며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있던 한스는 무심코 자기 마음을 꺼내 봤습니다. 한스의 마음이 무지갯빛으로 반짝거리고 있었습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대답하기 전에 방문이 열렸다. 밥 먹으렴, 하고 운을 떼던 아빠는 내 무릎 위에 펼쳐진 책을 보고 잠시 입을 닫았다. 나도 눈만 깜박거렸다. 솔직히 가족이긴 하지만 아빠가 입은 촌스러운 진분홍색 앞치마는 볼 때마다 이상했다.
“뭐 하나 했더니, 어릴 때 읽던 책을 지금도 읽어?”
“그냥 심심해서.”
“TV 보지 왜. 오늘 무슨 예능에 잘생긴 영화배우 나온다던데.”
부엌에서 얼큰한 찌개 냄새가 넘어오고 있다. 코를 벌름거리다 배 안쪽을 쓰다듬었다. 아침에 빵을 좀 먹었더니 여태 배가 불렀다.
“잘생긴 사람 봐서 뭐 해.”
“관심 없니? 요즘 젊은 아가씨들 사이에서 인기 좋다던데.”
아빠가 내 옆에 쪼그려 앉았다. 쿡쿡 웃으며 대꾸했다.
“그런 건 어디서 봐요?”
“왜, 며칠 전에 윗집 사는 수험생 애가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걔네 엄마가 애가 모은 포스터니 뭐니 가져다 버린다고 밤중에 난리가 나 가지고 계단에서 반상회 했다니까.”
“으응, 그렇구나.”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여상히 대답했다. 책 표지를 쓸어 봤다. 낡고 표지색이 바라긴 했어도 전체적으론 깨끗했는데 책등 모서리가 유난히 뭉툭했다. 거길 계속 쓰다듬자 아빠가 아는 척을 했다.
“그거 예전에 재원이가 떨어트려서 그랬지?”
“그런 적이 있었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초등학교 6학년씩이나 돼서는 너 그때 울고불고 난리를, 그냥.”
책을 가져간 아빠가 의미 없이 책을 훅훅 넘겨보곤 다시 내 손에 들려 줬다. 꽤 어린 시절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울고불고 난리 난 내 모습은 그냥 깜깜했다. 심지어 초등학교 6학년이면 꽤 컸을 때 임에도 불구하고.
“어휴, 그때 이후론 우리 다정이 울거나 소리치는 걸 본 적이 없네.”
아빠가 내 등을 몇 번 토닥였다. 눈을 깜박이다 그냥 웃었다.
“다 컸잖아.”
아빠는 뭔갈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냥 입을 닫고 내 어깨를 짚었다.
“나와서 밥 먹어. 밥 다 됐어.”
아빠가 먼저 나갔다. 따라 나가며 문 옆 책꽂이 위에 책을 올려놓았다. 밥 먹고 좀 더 볼 생각이었다. 기억엔 그냥 짧은 동화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책이 두꺼웠다.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쓰다듬는 소년의 이야기는 기나긴 모험 이야기의 도입부에 불과했다. 손가락으로 색이 달아난 소년의 얼굴을 쓰다듬고 문을 닫았다.
“근데 윗집 애기가 벌써 수험생이야? 고등학교 3학년?”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연락 없이 오면 어떻게 하냐며 잔소리를 한 것 치곤 식탁에 뭐가 많았다. 식탁 가운엔 아직 냄비 가장자리가 보글거리는 빨간 동태찌개가 있었고 그 주위로 채소를 듬뿍 넣고 부친 계란말이와 바로 막 해서 먹어야만 맛있는 부추겉절이, 젓갈, 감자조림, 묵은 깻잎찜 같은 게 산더미였다. 따로 국그릇에 덜어 낸 동태 살이 두툼했다.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 보다 뒤늦게 물었다. 찌개가 좀 짜게 됐다며 궁시렁거리던 아빠가 대답했다.
“응. 다정이 너 고3 때 걔가 위에서 엄청 뛰었었지.”
그랬었다. 하지만 위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적이었냐 누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때 내 공부를 가장 많이 방해했던 건 재원이었다.
“애들 다 그렇지 뭐.”
동태 살을 아주 잘게 부쉈다. 그나마 젓가락에 집히는 것을 입에 쏙 집어넣었다. 짠 건 모르겠고, 좀 매웠다.
“팍팍 먹어, 팍팍.”
조금도 줄지 않은 국그릇에 동태 살이 하나 더 추가됐다. 계란말이가 깻잎찜과 자리를 바꿔 내 앞을 차지했다. 성화에 밀려 밥 한술 크게 뜨긴 했지만, 손 가는 반찬이 없어 그냥 맨밥만 우물우물 씹었다. 그새 아빠는 뼈를 다 발라낸 국그릇에 밥을 말고 있었다.
“회사는 요즘 좀 어때.”
“그냥 그렇지. 다 똑같아.”
“뭐 재미난 일은 없고?”
재미난 일이 뭐가 있을까. 지은 씨가 남자 친구랑 가라며 뮤지컬 초대권을 준 거? 그땐 못 갈 것 같다고 거절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받아와서 아빠랑 볼 걸 그랬다. 어차피 주말에 할 일도 없는데. 아쉬운 소리만 나올 것 같아 다른 뭔갈 생각해 내기 위해 눈을 살짝 굴렸다.
“3월에 회사 인사이동 있어.”
“그래? 승진해?”
김칫국부터 마시는 아빠 밥그릇에 계란말이를 얹어 줬다.
“승진은 무슨. 이직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고 나도 하나 밥그릇으로 가져왔다. 막 베어 먹으려다 흐흥, 콧소리를 내며 웃자 아빠가 고개를 들고 쳐다봤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려다 다시 흐흥, 웃었다.
“우리 회사에 낙하산 하나 다니거든.”
“낙하산? 무슨 낙하산.”
“회장님 아들이요. 이번 인사이동으로 상무 승진하나 봐.”
“그 전엔 직급이 뭐였는데?”
눈을 내리깔고 멍하니 부엌 구석에 시선을 줬다. 다시 가벼운 코웃음이 나왔다.
“우리 팀 팀장.”
“팀자앙? 어이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려고 여태 그 난리야.”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아빠가 국그릇에 입을 대고 후루룩 마셨다.
“얼마 전에 뉴스 보니까 뭔 국회의원인가도 자기 딸 취업시키라고 무슨 기업에 압력 넣었다더라. 자기 능력으론 면접 하나 합격도 못 할 애들이 회사 들어가서는 잘하겠어?”
그러게요. 말을 삼킨 채 다시 밥을 한술 떴다. 뉴스를 보고 어지간히 화났는지 아빠는 아직도 일장 연설 중이었다. 종국엔 동태찌개를 가리키며 재벌이고 국회의원이고 죄다 똥물에 튀겨야 한다는 말까지 했는데, 덕분에 입맛이 완전히 달아났다.
“그나저나 세희는 잘 있고? 세희 김치 없으면 좀 가져다줘. 아니다, 너 차도 없는데. 주소 아니? 아빠가 택배로…….”
순간 숨을 잘못 들이켜 컥컥, 기침을 토했다. 아빠가 놀라 물을 가져왔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사례 때문에 조금이나마 먹은 것이 죄다 명치에 얹힌 기분이었다. 물을 연신 들이켜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게.”
할 말은 있지만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계속 가슴을 문질렀다.
“세희 김치 많대. 홈쇼핑에서 주문했는데 실수로 세 개나 시켰다고.”
“아이고, 걔도 참 칠칠찮다.”
아직 세희에게 답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제 떠올렸다.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친구라고 해서 반드시 언제나 전부 마음에 들고 사이가 좋을 순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따지면 세희가 늘어놓는 음담패설에 깜짝 놀라거나 진저리 낼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순간의 욱하는 감정 때문이었다면 세희도 내 뒷말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여기저기 나눠 줄 만큼 김장을 많이 했어?”
“많이 하긴 뭐. 이제 재원이도 없으니까 남아돌까 봐 그렇지. 어휴, 남으면 묵혀 뒀다가 김치찌개용으로 써야지.”
방금 내가 오윤하를 낙하산이라고 아빠 앞에서 비웃었던 것처럼.
“자주 내려올게. 같이 없애.”
하지만 무섭다. 그게 순간이 아니라 세희의 진심이었을까 봐. 만약 진심이라면 어떻게 하지. 나는 그때의 처분을 결정하지 못했다. 마음이 방향을 못 잡고 바람 부는 대로 흘러가는 종이배와 같았다.
“……너 무슨 일 있지?”
아빠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 유심히 내 얼굴을 살피는 것에 가슴에서 손을 뗐다. 남은 물을 전부 마셨다.
“일은 무슨.”
“아빠한테 말해 봐. 무슨 일인데. 평생 안 그러던 애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집엘 다 오고. 응?”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버스를 타고 싶었다. 그런데 갈 곳이 없었다.
“재원이 입대하고 혼자 심심하실까 봐 그래.”
“진짜 아무 일도 없는 거지?”
“무슨 일 있었으면 해?”
“아유 무슨. 됐어. 밥이나 마저 먹어.”
동태찌개에 넣은 쑥갓을 젓가락으로 한 움큼 걷어 가며 무뚝뚝하게 대답한다. 얼마 뒤 아빠가 입을 열었다. 쑥갓이 허공에서 국수 면발처럼 흐느적거렸다.
“재원이 놈 입대한 게 뭐가. 그놈은 입대 전에도 여기가 하숙집인 줄 알고 살았는데 뭐. 하고많은 날 친구 놈들이랑 술 처먹고 주말에도 동네 것들이랑 어울려 다니고. 아빤 지금이 홀가분하고 편해.”
말은 그렇게 해도 정말은 좀 쓸쓸한 모양이다. 아빠 손을 잡을까 하다 관뒀다.
“다음 주도 올 거니?”
슬리퍼를 신고 빌라 앞까지 배웅 나온 아빠가 물었다. 다음 주 주말을 어떻게 보낼진 아직 생각을 안 해 봐서 고개만 갸우뚱 기울이고 말았다. 아빠가 두툼한 패딩 점퍼를 여며 줬다.
“아빠 다음 주 토요일에 친구들이랑 낚시가거든.”
“이 겨울에?”
“겨울에만 잡히는 고기가 따로 있다네. 올 거면 일요일 저녁에 내려와서 매운탕만 먹고 가.”
고개를 끄덕끄덕. 주말 저녁에 아빠 집. 공백에 문장 한 줄을 추가한다.
“아빠 먼저 들어가요. 춥다.”
“그래, 너도 조심히 가고.”
아빠가 먼저 등을 보였다. 가만히 서서 빌라를 올려다봤다. 아빠가 올라갈 때마다 켜지던 등은 3층에서 그쳤고 얼마 뒤엔 1층부터 차례대로 꺼졌다. 숨을 크게 쉬며 패딩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겨울바람에 등 떠밀리듯 종종걸음을 친다. 버스 정류장에 마침 내가 탈 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카드를 찍고 구석 자리를 차지했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한 통 샀다. 잠들기 전까지의 계획은 이랬다. 라라와 조금 놀아 준 뒤 아이스크림을 퍼먹으며 TV에서 하는 아무 영화나 보기. 영화 취향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지금은 재미가 없다 못해 지루한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러다 졸리면 침대로 들어가 잘 생각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어그러졌다.
“냑냐.”
“어, 응. 라라야.”
안 들어오고 뭐 해, 라라가 뒤늦게 아는 척을 했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든다. 집 안에 가득 찬 어둠을 노려봤다. 아이스크림이 담긴 봉지가 부스럭거릴 때마다 어둠이 춤을 추듯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우리 라라 집 잘 보고 있었어?”
알고 있다. 견뎌야 하는 건 이런 어둠이란 걸. 두 번이나 경험해 본 바였다. 멍청하게 가만히 서 있는 대신 냉동실에 아이스크림을 넣고, 식혀 둔 보리차를 따라 마셨다. 그리고 식탁 모서리에 손을 댔다. 가만히 쓰다듬어 본다.
오윤하와 처음 섹스하던 날이 생각나는 건 의지의 반영이 아니었다. 마실 것 없냐는 물음에 소주를 이쯤에 내줬던 것 같다. 싱크대 청소하고 남은 거란 말에 오윤하가 지었던 표정이 어땠더라, 무심코 웃음이 흘렀다. 그때 오윤하가 지었던 표정도 웃기고, 지금 이러는 나도 웃겨서.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사랑에 최선을 다했다면 헤어져도 후회할 일이 없다고.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 이별 후엔 별게 다 찾아온다. 인지 부조화와 타협, 부정이 폭풍처럼 지나간 자리엔 아이러니하게도 개운한 홀가분함이 남았다. 온갖 감정을 감당하느라 숨 쉬는 것마저 벅찼던 연애 시절보단 슬픔 하나만 감당하면 되는 게 편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부정이나 타협의 과정이 없다. 그렇다고 태풍이 지나간 후의 아이러니한 평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윤하와 헤어진 게 아니기에. 마음을 주고받은 적이 없으니 내가 지금 겪는 건 이별이 아니라서? 그렇다면 이 슬픔은 뭘까. 혼란스럽다. 처음으로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불안정하게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소파에 앉았다. 라라가 무릎 위로 올라왔다. 라라의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뜨나 감으나 어둠은 똑같았다. 이별이 아니라도, 변할 건 없다. 썩은 도끼를 든 나무꾼의 심정으로 가만히 숨을 고른다. 시간을 견뎌야 한다. 괜찮아질 때까지. 할 수 있다. 비슷한 일은 해 봤으니까.
“라라, 자?”
다만 몇 번을 겪었음에도 밤은 무디지 못하다.
며칠 내내 잠을 설쳤더니 멍한 건 둘째 치고 목 뒤가 뻐근했다. 이럴 때면 잠을 못 자게 하는 게 고문의 일종이었단 말을 실감하게 된다. 차라리 눈만 감으면 그대로 기절해 버릴 것처럼 잠이 오면 나은데 그런 것도 아니었다.
사방에서 바늘이 날 노리는 것처럼 신경이 곤두섰다. 당연하게도 그걸 다스릴 힘은 존재하지 않았다. 억지로 머리를 깨우고 몸을 반듯하게 세우고 있는데 모든 힘을 다 써야 하니까. 뻑뻑한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수라도 한 번 더 할 참이었다. 마침 과장님이 손짓했다.
“다정 씨, 이날 오후 업무 다 빼놔요.”
가까이 가자 과장님이 목소리를 낮췄다. 달력을 가져와 내 앞에 두는 것에 잠시 딴생각에 빠졌다. 언제 또 2월이 다 갔지. 이러다 내일모레 바로 할머니 되겠네. 그런 거. 과장님의 말을 듣는 사이 정신이 완전히 탈주했다.
“다정 씨, 윤 대리님?”
“헙.”
꼴사나운 모습으로 입을 허둥지둥 닫았다. 과장님이 날 이상하게 보고 있다.
“내일모레 업무를요?”
과장님이 펜으로 가리키는 날짜를 봤다. 이유를 요구하는 눈빛을 던졌다. 과장님이 달력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목소리를 더 낮췄다.
“회장님이 이날 점심에 식사하자고 하세요.”
“……네?”
여태 잠잠하길래 그냥 해 본 말인 줄 알았는데?
“저 혼자요?”
“아니 아니, 나랑 윤하랑 다정 씨랑 이렇게. 긴장할 건 없어요. 회장님이 윤하 실무 도와줄 사람들 얼굴도 익혀 놓고 몇 가지 질문도 하고 뭐 그러시려는 것 같으니까.”
오윤하의 실무라.
“네…….”
그러지 않아도 아침에 층마다 붙은 인사이동 공고를 봤다. 엘리베이터가 승진 턱을 내니, 마니, 하는 말들로 시끄러웠다. 과장님도 출근하자마자 신 사업팀 팀장으로 승진한 걸 축하한다고 팀원들에게 한턱을 강요당했다. 듣자 하니 입사 때부터 기획실 쪽에서 일하던 걸 오윤하 뒷바라지하라고 이쪽으로 강제이동 당했던 거라니 실무도 잘 알겠고. 아무튼, 과장님은 걱정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리고 미안한데 혹시 커피 마시러 가는 거면 이것도 좀 복사해서 가져다줄래요?”
“저, 과장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내에서 오윤하 라인을 탔다고 소문이 쫙 퍼진 것도 퍼진 거지만 전략 기획 및 지원 담당 팀이라…… 아무리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해도 십 년이면 까마득한 옛날이었다. 과장님은 우리 팀에서나 전 회사에서 보던 업무와 크게 다를 거 없을 거라며 안심하라고 했지만, 글쎄.
“응? 왜요?”
가장 큰 문제는 오윤하 자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걱정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상명하복 구조의 회사에서 부서 이동하기 싫다고 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고 친 김에 홀가분하게 이직하는 것도 좋겠지만, 서른셋의 미혼 여자는 이직 시장에서 별로 인기 좋은 매물이 아니다.
“아니에요. 복사 몇 부나 할까요?”
차라리 세희처럼, 거기까지 생각하다 붕붕 소리가 날 정도로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아직도 답장할 말을 찾지 못했다. 장소도 적절하지 못했다. 회사는 일하는 공간이지,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거나 무너지는 공간이 아니다. 적정선에서 감정과 이성이 합의를 봤다. 복사실은 휴게실 안쪽에 딸려 있다. 닫힌 휴게실 문에 손을 가져다 대다 멈칫했다.
“기어이 상무 차지했네.”
“내가 뭐랬어. 자기 아들 앉히려고 그 상무 잘라 버린 거라니까.”
“어허이, 김 대리. 그 말들 여사원들이 들으면 난리 날걸.”
“내가 틀린 말했나.”
“며칠 전에 우리 팀 회식했는데, 주임 하나가 잘린 상무 불쌍하다고 했다가 욕을 욕을 그 자리에서 아주 바가지로 먹었어. 뭐라더라, 성폭행 가해자에 왜 감정 이입하느냐고? 불쌍하니까 불쌍하다 그러지 무슨 강간범 체험이라도 하고 싶다 그랬나.”
잠깐 남자 직원들이 휴게실에서 수다를 떠는 모양이었다.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라 그쯤 끊어 버릴 생각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문고리를 잡기만 했지, 당기진 못했다. 휴게실 수다의 주제가 다시 바뀌었다. 내게 달갑지 않은 쪽으로.
“근데 오윤하 능력 좋대. 저번에 기사 봤지? 이번엔 청순파 여배우.”
“그 여자가 스폰서 문 거 아니야? 옛날에나 잘나갔지 요즘은 TV에서 못 봤던 것 같은데.”
“오윤하가 무슨 능력이 있어서 스폰을 대주냐. 돈이나 좀 쥐여 주면 모를까. 돈 바라고 그러는 거면 룸살롱에 나가는 게 낫지. 하루에 여섯 테이블만 뛰어도 달에 몇천은 껌인데.”
저게 뭐 재밌는 주제라고 저렇게 진지하게 토론할까. 그것도 기사엔 한 줄도 없던 더러운 추측까지 끼워 넣으면서. 한숨을 몰래 삼켰다.
“암튼 지금 오윤하가 정신 차렸다, 안 차렸다, 내기 걸 사람?”
“사람이 쉽게 바뀌나. 그 새낀 평생 정신 못 차려.”
“쉿, 말 크게 하지 마.”
“들으라고 해, 들으라고. 평생 여자 끼고 놀고 술 처먹던 새끼가 상무는 무슨.”
잠자코 듣자니 예전에 호텔 남자 화장실에서 들었던 말들과 언뜻 비슷했다. 동일 인물들이 껴 있는 모양이란 추측이 완성된다. 이번엔 한숨을 뱉지도 삼키지도 않았다. 그냥 눈을 내리깔고 검지로 문고리를 소리 없이 두드렸다.
“근데 오윤하 밑에 있으면 2차로 강남 룸살롱 다닐 수 있는 거 아니야?”
“오른팔이 서정수 그 양반인데, 그 양반은 애처가라 그럴 깜냥이 안 되고.”
시간을 세는 중이었다.
“하긴 요 몇 달 새는 정시 출근한다만 돈도 많겠다, 일도 제대로 안 하고 다녔겠다, 유흥 쪽은 빠삭하겠…….”
적절할 때 저 말들을 끊어 먹기 위해서. 문을 당기자마자 테이블에 엉덩이를 걸치고 있던 누군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유난스럽지 않다뿐이지 놀란 표정은 여전했다. 싸늘한 침묵을 깼다.
“커피 들고 계셨나 봐요.”
차분하게 입을 떼자 아하하, 예. 같은 어색한 답이 돌아왔다. 서로서로 얼굴을 보며 눈치를 살피던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 나갔다. 그중에 인사팀 김 대리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럴 줄 알았다. 순식간에 휴게실이 텅 비었다.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의자를 정리했다.
커피 기계 앞으로 갔다. 설탕 알갱이가 지저분하게 흩어진 상판을 냅킨으로 닦았다. 눈을 내리깔고 냅킨을 반으로 접었다. 그러곤 같은 자리를 또 닦았다.
별반 놀랄 것도 없다. 다들 앞에서 말을 안 할 뿐이지 회사 내에서 오윤하의 평판은 최악이나 다름없었다. 오늘 오전만 해도 인트라넷 익명 게시판에 오윤하를 욕하는 푸념 글이 올라왔다. 올라온 지 삼십 분밖에 안 됐는데 조회 수가 월등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씨발 세상 조가타…… 인생 살아 보니 결국 제일 중요한 건 부모 잘 만나는 것…… 일 존나게 해 봐야 부모 잘 만난 넘 못조차가…… 왕후장상 영유종호…….]
술 마시고 쓴 것처럼 맞춤법이 엉망이었던 것까지 기억하는 걸 보면 당시엔 담담히 지나쳤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회장님이나 오윤하가 보기 전에 얼른 지우란 성화에 한성 씨는 하던 일도 멈추고 게시글을 블라인드 처리해야 했다. 그러곤 아닌 척 경고성 글도 하나 남겼다. ‘이 게시판이 진짜 익명인 줄 아세요?’
“아우, 달아.”
다른 생각에 빠져 설탕을 네 숟가락이나 넣었다. 단번에 정신이 들 만큼 쓴맛을 기대했던 타라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버려야 하나 아니면 참고 마셔야 하나. 망설이다 한 모금 더 마셔 봤다. 견딜만하면 그냥 마시려고. 혀가 뚱뚱해지는 맛에 미간이 먼저 반응했다. 솟구친 어깨를 억지로 제자리에 돌렸다.
커피를 싱크대에 부어 버리고 돌아섰다. 서류를 집어 들고 복사실 문을 열었다. 이게 무슨 서류인가 들춰 보며 걸음을 옮기다 무심코 돌아봤다. 복사실에 놓인 작은 테이블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눈을 깜박인다.
“…….”
“…….”
달갑지 않은 이벤트는 방금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과 함께.
“…….”
“…….”
침묵 속에서 오윤하가 먼저 움직였다. 오윤하 옆엔 복사를 마친 서류 몇 개가 쌓여 있었다. 들고 있던 노란 파일에서 눈을 뗀 오윤하가 눈을 맞춰 왔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가슴이 덴 것 같이 화끈해진다. 얼른 눈을 내리깔았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몇 마디 안 되는 짧은 문장에 목이 콱 멨다.
그날 이후로 오윤하를 아예 못 봤던 건 아니었다. 사무실에서,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오윤하는 자기가 찬 여자를 위해 뭘 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아니면 또다시 생길 수 있는 성가신 일을 미연에 방지하는 법을 알고 있다던가. 오윤하는 실수로라도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다시 들었다. 잠시 오윤하의 눈매는 누가 보라색 물감을 잔뜩 문질러 놓은 것 같았다.
“일 봐요.”
여상하게 대답한 오윤하가 다시 시선을 노란색 파일에 처박았다. 오윤하에게 보이진 않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버튼을 누르는 검지가 어긋나, 재빨리 취소 버튼을 누르고 다시 시작을 눌렀다. 내 몸통보다 큰 복사기가 살아있는 것 같은 큰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억지로 입을 벌려 혀로 입술을 축였다. 남아 있는 설탕 맛에 눈가가 잠시 달아올랐다.
“다, 듣고 있었어요?”
복사기를 내려다보는 자세 그대로 속삭였다. 동시에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가 멈췄다. 그 짧은 새에 별별 생각이 다 났다.
“밖에 사람들이 떠드는 말. 다 듣고 있었어요?”
복사기가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종이를 한 장 한 장 토해 내는 걸 보다 돌아섰다. 바로 오윤하와 눈이 마주쳤다. 토끼처럼 빨개진 눈. 누가 봐도 잠을 못 자 피곤함에 시달리는 얼굴이었다. 오윤하가 요즘 일에 열심이라는 건 팀원들도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과장님 얼굴이 사람 형상을 되찾았다는 사실도. 코로 짧게 한숨을 쉰 오윤하가 제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내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왜 그런 말을 그냥 듣고 있어요?”
바로 따지듯 묻는 것에 오윤하는 잠시 말문 막힌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천천히 미간을 구긴다. 눈동자만 움직여 똑바로 내 눈을 들여다본다.
“미안한데 나 요즘 기분 더럽거든. 쓸데없는 질문 말고 하고 싶은 말 하고 가 줬으면 하는데요.”
귀찮다는 듯 차갑게 말하는 오윤하의 얼굴은 내가 이직했던 초반에 익히 봐 왔던 것이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