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조용한 늦은 저녁에 듣는 세탁기 소리는 하나의 평온을 가져다준다. 다른 집이라면 이 시간에 세탁기를 돌리는 게 민폐였겠으나 아랫집이 일 년 전부터 비어 있으니 늦은 밤에도 안심하고 세탁기나 청소기를 돌릴 수 있는 게 이 낡은 빌라의 큰 장점이었다. 느릿하고 부드럽게 돌아가는 진동에 맞춰 발을 탁탁, 움직였다. 허리가 뻐근해도 나름 견딜 만했다.
침대에 엎드린 채 턱을 괬다. 내가 질색하는 얼굴을 보겠다고 브래지어를 계속 사수하던 오윤하는 결국 쥐어뜯듯이 벗겨 냈을 때야 백기를 들었다. 사실 백기를 들었단 표현은 부적합했다. 나를 놀리는 걸 우선순위에 두느라 버티긴 했지만 어쨌든 본인도 취향은 아니었는지 개운한 표정을 지었으니까.
천장을 보고 있던 오윤하가 고개를 돌렸다. 안 그래도 목에 생채기가 적나라한데 어깨까지 불그스름하니 참, 여자 울리고 다니는 바람둥이다운 모습이라고 해야 할지. 스스럼없이 침대와 내 몸 사이에 손을 쑥 넣은 오윤하가 납작해진 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잠깐 고민하다 턱에서 손을 떼고 팔꿈치를 세웠다. 상체에 조금 공간이 생겼다.
“……서승연 씨랑은 언제부터 알았어요?”
내 가슴을 위로 통통 튕기던 오윤하가 턱을 비틀어 시선을 마주했다. 그건 왜, 하는 눈빛도 잠깐. 오윤하가 다시 시선을 가슴 쪽으로 내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대학 다닐 때.”
간결한 대답이었다. 그럼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말은 그냥 소문이겠구나. 속으로 문장 위에 줄을 박박 긋는다. 그다지 크지도 않은 가슴을 주물럭거리는 게 뭐 그리 재밌는지 오윤하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내 가슴을 열심히 튕겼다. 왼쪽 가슴이 올라가면 오른쪽 가슴은 내려가고 오른쪽이 올라가면 왼쪽은 내려가고……. 손등을 꼬집었다. 오윤하가 조금 늦게 반응했다.
“아.”
면전에 대고 하는 무미건조한 아.
“그때 봤던 바 하는 친구랑 나랑 대학 동창인데, 걔 친구야. 내가 아는 애들도 대부분 걔 친구들이고. 서승연이 막 데뷔했을 땐데 성격은 좀 더러워도 예뻐서 좀 오래 만났어. 반년인가, 일 년인가.”
막상 추억을 더듬어 보니 할 말이 많은지 묻지 않은 것까지 술술 분다. 오윤하가 눈 돌아가게 예쁜 여자들만 만나 왔다는 건 오윤하를 실제로 보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다 아는 사실이었다. 원래라면 가십을 다루는 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릴 리 없는 오윤하가 유명한 것도 그 탓이었다. 모델, 연기자, SNS 유명인 등등…….
“성격 있는 여자가 취향이에요?”
손쉽게 신희주까지 떠오른다. 헤어짐을 통보받고 회사까지 찾아와 깽판을 쳤다는 신희주의 이야기는 아직도 팀원들의 삼삼한 안줏거리였다. 그때 나야 출장을 가 있었으니 보진 못했지만 전 남자 친구가 일하는 회사까지 쫓아왔던 걸 생각하면 그쪽도 한 성격 하지 싶었다.
이어진 질문에 오윤하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봤다. 슬금슬금 가슴 쪽으로 다시 기어오던 손도 멈추고. 이내 인상을 확 쓴다. 무슨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하냔 표정이었다.
“외할머니가 여자가 뭘 하든 참고 받아 주래서 참은 거지, 누가 말끝마다 지나가는 여잘 쳐다봤니 어쩌니, 뭐라도 조금 헷갈리면 어떤 년이랑 그랬느냐느니, 자길 사랑하면 지금 내가 8차선 도로에 던진 저 가방 찾아 주워 오라니. 그런 걸 누가 좋아해?”
그냥 눈만 껌벅였다. 진짜 성격 대단한 여자들만 사귀었나 보네…….
“할머니가 왜 그런 걸 받아 줘야 한다고 하셨는데요?”
다시 손을 뻗은 오윤하가 가슴을 다시 통통 쳐올렸다. 덜렁덜렁하는 감각이 썩 좋진 않지만 나름대로 대화가 흥미로웠기에 애써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몰라, 여자로 태어난 거 자체가 고달픈 법이니까 당연히 성격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나 뭐라나. 아무튼, 여자들한텐 늘 잘하라고 교육받았어.”
오윤하의 외할머니는 좋은 뜻으로 어린 오윤하를 교육했겠지만, 안타깝게도 오윤하는 이따금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어 사람 마음을 혼란하게 만드는 바람둥이로 자랐으니 조기 교육이 처절히 실패한 셈이다.
고개를 기울이며 딴생각하는 사이 가슴 튕기는 것에 흥미를 잃은 오윤하가 이번엔 내 귓가로 손을 뻗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오는 손길이 간지러워 고개를 살짝 비틀었다. 할 말이 또 생각났다.
“머리 긴 건 왜 좋아요? 나, 머리 긴 거 별로 안 어울려요. 학교 다닐 때나 좀 길러 봤지 졸업하고 나서부턴 내내 단발이었고.”
“학교 다닐 때?”
“고등학교 때.”
“교복 입고, 머리도 길고?”
오윤하가 눈을 반짝였다. 반응이 확 달라지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질색하며 노려보자 그냥 놀린 거였는지 낄낄 웃는다.
“윤 대린 태어났을 때부터 네, 윤다정 대리입니다. 하고 태어났을 거 같은데.”
혼자 놀리고 혼자 웃고. 진짜 이상한 성격이야. 속으로 투덜거리며 팔의 방향을 바꿨다. 오래 괴고 있었더니 팔꿈치가 아팠다.
“머리 긴 거라, 흠.”
답지 않게 오윤하가 고민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팔을 주무르다 손을 뻗었다. 베개를 받치고 포갠 팔에 뺨을 기댔다. 고개만 비틀어 쳐다보니 오윤하의 콧대 옆으로 세모난 그림자가 진 게 보였다.
“외할머니가 머리가 길어서 그런가?”
“응?”
눈을 동그랗게 뜨자 오윤하가 손을 거둬 제 정수리 위로 올렸다.
“맨날 이쯤에 비녀 꽂고, 그랬거든. 되게 길어서 할아버지나 내가 말려 주기도 하고.”
그러니까 머리 긴 걸 좋아하는 게 할머니를 봉양하던 그 순간을 추억하고 회상하는 거란 말인가? 그냥 물어본 거였는데 막상 좀 이상한 대답이 나오니 몸이 자연스레 슬금슬금 물러났다. 막 침대를 벗어나기 직전 놀래키듯 얼굴을 불쑥 들이민 오윤하가 내 팔을 깨물 듯 덥석 잡았다.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킥, 농담.”
놀라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냥 옆에 있으라는 거였나 보다. 다시 나를 제 옆에 눕힌 오윤하가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난 여자 벗은 등이 좋더라. 제일 야한 거 같아.”
그냥 뻥 차 버리고 튀어 버렸어야 했나.
“왜, 홀딱 벗고 앉아 있는데 등만 보이는 거지. 거기에 머리 풀어서 스르륵 흘러내리게 하면 되게 섹시하더라고? 실제로 전에 만났던 애들 몇은 나 그렇게 꼬셨어.”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것 같다. 어쩐지 성질이 슬슬 나기 시작했다.
“바에서 종종 마주치는 애도 있는데 걔는 아직도 머리가 되게 길더라.”
내가 물어본 건데 저 입이 왜 이렇게 얄밉지? 모기 잡듯 오윤하의 입을 찰싹 내리쳐 막았다. 눈까지 반쯤 내리깔고 나불거리던 오윤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어이 뾰족한 소리가 나갔다.
“그럼 나랑 왜 자요? 전 여자 친구들도 성격 다 참아 줄 정도로 예뻤고, 머리 긴 게 그렇게 좋으면 애초에 머리 긴 여자랑 만나면 될걸.”
저 성질머리로 가방 던져 놓고 찾아오라는 여자의 행동을 참아 줄 정도면 아무튼 되게 예뻤나 보다 다들. 오윤하가 내 손목을 쥐었다. 대답을 들으려고 한 말 아니라 힘을 줘서 눌렀다. 손바닥 아래서 오윤하의 입술이 납작해졌다. 잠시 뒤 질색하며 손을 떨쳐 냈다.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남의 손바닥을 핥아 놓고도 오윤하는 별생각이 없는 표정이었다. 아예 베개로 눌러 버릴까, 고민하던 찰나 오윤하가 내 쪽으로 완전히 돌아누웠다. 허리를 감아 당기는 손에 하체가 밀착됐다.
“무슨 소리야, 윤 대리가 얼마나 근사한데.”
동그랗게 뜬 눈과 마주친다. 천진한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같은. 어디 못 도망간다는 듯 오윤하가 제 종아리를 내 허벅지 사이에 끼워 감았다. 그러곤 팔로 머리를 받치더니 남은 손을 슬슬 움직였다. 허리에서 옆구리로, 가슴을 지나 어깨, 목덜미. 그림 그리듯 차분하게 올라온 손이 입술에 닿았을 땐, 나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았다.
“난, 이 표정이 좋아.”
다시 눈을 떠 오윤하를 본다.
“그 표정도 좋고.”
킥킥거리며 덧붙인 오윤하가 좀 더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서로의 코가 맞닿았다.
“옆에서 폭탄이 터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 같고, 맛없는 거 억지로 먹을 때도 이 표정일 것 같고. 누가 짜증 나게 해도 이 표정으로 가만히 쳐다보다 무시할 것 같고.”
무슨 대꾸를 해야 하는 걸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내 턱을 쥔 오윤하가 고개를 비틀어 다가왔다. 더운 숨이 귓가에 쏟아지는 순간, 긴장으로 어깨가 솟구친다.
“그래서 내 것 빨아 줄 때도 그런 표정일까 싶었지.”
잠시 침묵이 지난 뒤, 몸을 뒤로 빼며 오윤하를 노려봤다. 낄낄 웃음을 터트린 오윤하가 내 어깨를 감쌌다. 때려도 소용없었다.
“근데 아니더라고. 윤 대리 내가 박아 줄 때 어떤 표정 짓는지 알아? 꼭…….”
“적당히 좀 하죠.”
오윤하의 입술을 꼬집었다. 그러곤 몸을 빼 오윤하를 노려보며 손을 더듬었다. 베개로 저 얼굴을 당장 눌러 버려야겠단 결심이 섰다. 내가 베개를 찾아 높이 쳐들 때까지 데굴데굴 구르며 웃고 있던 오윤하가 뒤늦게 눈을 뜨고 내 손목을 잡았다.
“이거 안 놔?”
“싫은데.”
“놔, 빨리.”
“싫은데요, 윤다정 대리님.”
그다지 넓지도 않은 침대에서 옥신각신. 애초에 오윤하가 힘으로 눌러 버리면 옴짝달싹 못 할 텐데 어디 성질 맘껏 부려 보라는 듯 실실 웃으며 제대로 힘을 안 주는 게 더 얄미웠다.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그래, 난 섹스할 때 그런 표정 짓는 여자가 있는 거 처음 알았어. 너무 화내진 마. 칭찬이니까. 그렇게 온몸으로 좋아 죽겠다고 하는 여잔 윤 대리가 처음이라 솔직히 좀 감동도…… 아!”
허벅지를 된통 까인 오윤하가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그걸로도 마음이 풀리지 않아 베개로 몇 번 얼굴을 꾹꾹 눌렀다. 오윤하가 엄살을 부리며 나 죽겠다고 내 등을 찰싹찰싹 쳤다. 하지만 내가 싫다고 해도 오윤하가 그러거나 말거나 한 게 대체 몇 번인가. 손가락이 스무 개가 있다고 해도 모자랄 것이다.
“빨리 옷 입고 가요. 나 잘 거야.”
베개를 치우자 새빨간 얼굴의 오윤하가 등장했다. 유감 어린 눈초리로 노려보기에 나도 똑같은 눈빛으로 맞받아쳤다.
“사람 죽일 셈이야?”
“팀장님은 좀 죽어 봐야 정신 차릴 거 같아요.”
“뭐?”
오윤하가 눈을 부라리기에 혼잣말이었다는 척 어깨만 들썩였다. 오윤하가 분을 못 이기고 씩씩거렸다. 이게 다 누구한테 배운 건데. 흥, 콧방귀를 뀌자 오윤하가 내 베개를 덥석 빼앗았다.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굴러떨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똑같이 당해 보라는 듯 베개를 내 얼굴 앞까지 가져다 대던 오윤하가 손을 멈췄다.
미간을 찡그린 채 눈만 굴렸다. 숨이 막혀서 얼굴 빨간 건 여전한데, 어쩐지 오윤하 입가에 드리워진 게 미소 같았다. 내가 미처 표정을 다 해석하기도 전에 오윤하가 베개를 던졌다. 그러곤 내 허리를 당겼다. 다시 자세가 반전되어 내가 오윤하를 깔고 앉은 형국이 됐다.
“내가 누굴 만나왔고, 앞으로 누굴 만나든 당신만큼 재밌는 사람은 없을 거야.”
순간 심장이 쿵 떨어진다. 너무 요란해 내 귀에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덜컥 겁이 날 정도로 그 소리가 무서웠던 탓일까, 나도 모르게 오윤하의 시선을 피했다. 다른 여자들에게도 저랬을까. 나도 모르게 떠올리는 말들이 있다. 윤하는 자기 마음에 들면 원래 잘해 줘요. 다 받아 주고, 맞춰 주고…….
“…….”
“…….”
아직도 킥킥 웃고 있던 오윤하가 내 턱을 쥐었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끌리듯 고개가 힘없이 돌아간다. 오윤하와 눈이 마주쳤다. 어둠에 가려진 눈동자는 짙은 검은색처럼 보인다.
“진짜야.”
내 속을 읽은 듯한 말에 깜짝 놀란다.
“그래서 윤 대리랑 오래 보고 싶어.”
오윤하는 마치 내가 읽어 본 적도 없고, 읽을 수도 없는 악보 같다. 변주가 심하고 너무 난해한. 그래도 누군가 치는 걸 들으면 틀림없이 아름다울 어떤 곡.
“한 번 더 할까? 나, 섰는데.”
덧붙인 말이 질색하기 충분한 말이었음에도, 그냥 뒤통수를 당기는 손에 눈을 감는다. 질문 끝에 하려던 말을 새까맣게 까먹는다.
그날 잊었던 말을 다시 떠올린 건, 생일날 아침이 되고 나서였다. 아침부터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자 라라가 깨 부스스하게 다가왔다. 잠에서 막 깬 고양이는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손을 대는 곳마다 힘없이 휘어지며 몸을 맡기는 작은 생명체를 끌어안았다. 일찍 눈이 떠진 덕에 준비할 시간은 넉넉했다.
거울 앞에 서자 옷장에서 꺼낸 옷가지가 침대에 가지런히 누운 게 비쳤다. 거울 앞에서 라라를 안은 손을 들썩이며 라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라라야, 이거 누구야? 이건 누난데, 여기 이 고양이는 누굴까?”
부스스한 표정으로 거울을 노려보던 라라가 야옹, 한다. 미소가 넘쳤다. 어쩐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어, 그래 라라지. 멋쟁이 고양이 라라.”
몇 번 더 그러자 귀찮았는지 팔을 꾹 누르며 몸을 빼낸다. 바닥에 우아하게 착지한 라라가 침대 위로 훌쩍 올라갔다. 어, 안 돼. 놀라 서둘러 라라를 들어 올렸다.
“누나 오늘 입을 옷이야. 안 돼.”
어묵 국물 봉지처럼 따끈따끈한 라라를 안고 거실 소파로 갔다. 내려놓자 손에 정수리를 비비며 야옹, 야옹, 울더니 이내 자리를 잡는다. 입을 맞추자 귀를 파르르 떤다. 털이 난 방향을 따라 쓱쓱 문질러 주고 화장실로 향했다. 털 몇 가닥이 물줄기를 따라 하수구로 흘러갔다.
그리고 다시 거울. 잠옷 바지와 티셔츠를 벗어 세탁 바구니에 넣었다. 그리고 서성인다. 평소라면 색깔이 너무 언밸런스하지 않는 이상 맞춰 입고 나가곤 하는데 오늘따라 손길이 유난스러웠다. 이내 집어 든 건 오윤하가 셔츠를 찢은 대가로 사 준 블라우스다.
평소 입는 것과 별다를 것도 없는 흰 블라우스인데 칼라에 레이스가 들어간 탓일까, 아니면 칼라 밑으로 길게 늘어진 검은 리본 탓일까. 파운데이션만 펴 바른 밋밋한 얼굴과 리본이 대비되자 19세기에 살았을 것 같은 가정 교사 같다.
블라우스에 얼추 어울리는 치마를 입고 서랍 겸 화장대 앞에 섰다. 망설이다 색이 너무 튀는 것 같아 바르지 않던 립스틱을 쥐었다. 작년에 세희에게 받았던 선물이었다.
“저, 팀장님.”
노크하며 팀장실에 들어서다 멈칫했다. 뭔갈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오윤하가 고개를 들었다. 오윤하가 들여다보고 있던 것에서 쉽사리 눈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문을 닫고 다가오는 걸 지켜보던 오윤하가 입을 열었다.
“왜?”
여탠 구색 상이라도 회사에선 존댓말을 하더니 이젠 둘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반말이다. 딱히 지적하고 싶진 않아 그냥 어색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지금 일하세요?”
솔직히 아무 종이나 잡고 혼자 하는 빙고 같은 걸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오윤하가 쥐고 있는 건 어제 회의에서 나온 안건을 추린 서류였다. 눈을 깜박이자 오윤하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회사에서 회사원이 일하는데 뭐가 그렇게 놀라워.”
그 당연한 걸 전혀 안 지키시던 분이 지키니까 놀라운 게 아닐까? 이 말이 오윤하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게 뻔해 굳이 말로 뱉진 않았다. 하지만 이미 오윤하는 지금 일하냐는 물음에 마음이 상했는지 눈썹을 못마땅한 각도로 튼 뒤였다.
“나 바빠.”
그래 봤자 회의록 들여다보는 게 전부면서…….
“궁금하거나 이해 안 가는 거 있으면 물어보세요. 관련 자료 요청하셔도 되고…….”
달래듯 말을 덧붙이며 오윤하 옆에 섰다. 블라인드 사이를 통과한 햇살이 책상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오윤하와 내 그림자 사이에 늘어진 햇빛은 아주 가늘었다. 손가락으로 다른 서류를 몇 개 짚으니, 이미 관련 자료들이라 한 번 더 소리 없이 놀랐다.
“정수 형이 요즘 따라 자꾸 우는소리 해서 좀 보는 거야. 별거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슬쩍 노트북까지 기울이는데, 웃음이 나올 뻔했다. 보여 주려 하니 보자 싶어 몸을 기울이다 잠깐 노트북 옆에서 시선이 멎었다. 별생각 없이 다시 지나치려던 눈길이 다시 돌아갔다.
“내가 본다고 뭐 달라지나. 어차피 다음 달이면 다른 부서로 옮기는데 뭣 하러.”
기왕 불평을 시작한 것 아예 서류까지 내려놓고 투덜거리던 오윤하가 내 허리에 손을 감았다. 옆구리에 따뜻한 뺨이 닿았다. 그사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동그란 감촉을 더듬었다. 작고, 가냘프게 느껴지는 감촉. 손가락을 조금 비틀자 그 안에 새겨진 글씨가 보인다.
“점심 뭐 먹을 거야. 둘이 따로 나갈까?”
LOVE, JS.
“응?”
순간 멎었던 사고가 엉덩이를 움켜쥐는 손길에 다시 움직였다. 손을 찰싹 쳐 내고 걸음을 물렸다. 내가 정신이 나갔나 보다. 틈만 나면 이러는 인간 옆에서 정신을 놓고 알짱거리다니.
“회사에서 이러지 말랬잖아요.”
“언제?”
“우리 사인한 서류에요.”
허, 오윤하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는 윤 대리는 야한 속옷…….”
서둘러 오윤하의 입을 막았다. 야한 속옷 얘기는 당분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날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속옷을 걸친 오윤하의 몰골이 얼마나 흉악했는지.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도 생각하는 것조차 진저리나 입에 담기도 싫었다.
“됐어요. 됐고, 여기 사인받으러 왔으니까 사인이나 하세요.”
“어허, 상사가 보고서를 받았으면 충분히 검토한 뒤에 사인해야지. 나랑 그런 사이라고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야?”
서류 좀 본다고 무슨 행세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니면 무슨 상황극을 하고 싶거나……. 슬그머니 엉덩이에 올라오는 손을 보자니 아무래도 후자 쪽인 것 같다.
“검토 서류는 저번 주 금요일에 올렸고 지금은 다 확정 난 사안이니까 사인만 하면 되거든요.”
오윤하의 손을 잡아 책상 위에 꾹 눌렀다. 한심하게 생각한 적 없다면서 너무한 거 아니냐는 둥, 윤 대리 정말 태어날 때부터 윤다정 대리입니다, 하고 태어난 거 아니냐는 둥 실컷 투덜거린 오윤하가 대충 사인을 갈긴 뒤 만년필을 아무렇게나 굴렸다. 그러곤 서류를 챙기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려는 내 치마를 당겼다.
“치마 벗겨져요.”
“점심 같이 먹자니까.”
“팀원들이랑 같이 먹던가요. 그럼. 오늘 다 같이 구내식당에서 밥 먹기로 했으니까.”
“누가 다 같이 먹자고 이래?”
오윤하가 의자까지 끌며 치마를 좀 더 단단히 붙들었다. 몸에 꼭 맞는 정장 치마가 이대로 쭉 내려가 버릴 것 같은 불길함에 시달리며 나도 치마를 붙들었다. 눈싸움이 잠시 오갔다.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나였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돌린 눈길이 책상 위에서 반짝이는 반지에서 멎었다. 눈을 깜박이다 오윤하의 발을 콱 밟았다.
“아!”
오윤하가 몸을 웅크리며 낑낑거렸다. 그래도 치마는 놓지 않기에 그 윗부분을 잡고 확 뺐다.
“진짜 점심 같이 안 먹어?”
“안 먹어요. 체할 일 있어요?”
“안 괴롭힐게.”
“됐어요.”
“진짠데.”
나도 모르게 오윤하의 코앞에 대고 눈을 번뜩였다.
“됐다고!”
눈을 몇 번 깜박인 오윤하가 그대로 딸꾹, 소리를 냈다.
화를 냈다고 할 것까지도 없는 일을 가지고 오윤하는 오후 내내 삐져 있었다. 요새 얼굴이 핀 과장님이 팀장실에 잠깐 들어갔다가 큰 소리가 난 이후로는 다시 예전의 혈색 없는 얼굴로 돌아와 비슬거리며 자리에 앉기까지 했다. 그걸 두고 팀원들은 역시 서승연이 결혼해서 오윤하의 기분이 안 좋은 게 분명하다는 입방아를 찧었다.
그런 수다도 잠깐이었다. 오후 일과는 내내 바쁘게 돌아갔다. 덕분에 오윤하한테 내가 왜 화를 냈지, 그때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던 반지를 다시 찾아서 책상에 뒀다고 내가 화낼 이유는 없잖아. 하는 고민도 없이 그냥 화를 냈던 게 민망해졌다. 무슨 사이면 모를까.
여섯 시 땡, 하자마자 코트를 챙겨 입고 나서는 오윤하를 바로 쫓은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조금 민망하고, 오윤하가 점심 먹자고 조르는 걸 너무 야멸차게 거절한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함도 조금. 나머지는 모르겠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삐졌단 티를 팍팍 내며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고도 날 모른 척하던 오윤하는 내가 주차장까지 같이 내려가고 나서야 아는 척을 했다.
“왜.”
저 말이 오리 꽥꽥처럼 들린다고 생각하면 내가 너무 못된 건가.
“저…….”
오윤하가 늘 짓는 오만한 표정을 보며 입을 열었다. 시종일관 밥 먹자, 같이 자자, 졸라 대는 오윤하에 비하면 별것 아닌 제안인데 왜 이렇게 겸연쩍은지.
“오늘 저녁 같이 안 먹을래요?”
말을 해 놓고 괜히 땅을 봤다. 초록색 페인트로 칠해진 바닥 위로 내 그림자가 발을 톡톡 움직였다. 솔직히 내가 밥 먹자고 했다고 그대로 나를 자기 집으로 납치해가 섹스까지 이어갈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오늘은 평일이니까. 좀 익숙해졌다고 해도 내 체력으론 여전히 오윤하와의 섹스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슬쩍 고개를 들다 그만 목격하고 만다. 오윤하의 눈썹이 곤란한 모양새로 찡그려져 있었다. 혀 밑에 고인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그게 오늘 라라 생일이거든요.”
허벅지 옆으로 늘어져 있던 손이 치마를 움켜쥐었다.
“라라랑 사이 안 좋으니까, 이 김에 친해지면 어떨까 싶어서.”
그렇게 말을 하며 눈을 깜박였다. 어두운 주차장을 밝히는 긴 형광등에 오윤하의 그림자가 내 발치까지 늘어졌다. 다가올 듯 들썩이던 그림자가 막 열린 엘리베이터를 인식했는지 그냥 방향을 조금 트는 것으로 움직임을 그쳤다.
다시 오윤하의 얼굴을 봤을 때 오윤하는 조금 전과 한 치 다를 것 없는, 고약한 선택지 두 개를 두고 고민하는 듯한 어린애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박인 오윤하가 이내 차 문을 열고 제 브리프 케이스를 뒷자리에 던졌다.
“선약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은데.”
“아.”
예기치 못한 딸꾹질이 꺽, 나오듯 짧은소리가 나왔다. 뒷좌석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라타던 오윤하가 문득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곤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슨 애완동물 생일까지 챙겨. 참 유난이야.”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 뒤 오윤하의 차가 부르릉 소리를 내며 떠났다. 오윤하가 없으니 나도 그 자리에 계속 있을 이유가 없었다. 걸음을 옮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다시 올라가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힘과 동시에 벽에 기대며 입을 벌렸다.
“아…….”
꺽, 소리가 나듯 다시 아.
별로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다. 엘리베이터 문이 로비에서 열리자마자 목적지를 정했다.
내게 연락 없이 불쑥 가도 반겨 줄 사람이란 그리 많지 않았다. 세희의 번호를 꾹꾹 누르다 그냥 관뒀다. 이유 없이 어깨가 축 처졌다. 대신 눈에 띄는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세희가 좋아하는 치즈 케이크를 샀다.
얼마간 제자리걸음하는 듯 진도가 안 나가던 걸음이 치즈 케이크를 손에 쥔 이후부터는 쑥쑥 움직였다. 세희의 가게는 여기서 버스만 타면 한 번에 갈 수 있었다. 버스를 기다리고, 타고, 내리고. 세희의 가게가 있는 주택가까지 가려면 정류장에서 조금 걸어야 한다.
케이크를 조심히 안고 걸음을 옮겼다. 세희가 오늘 못 온다더니 어쩐 일이야, 윤다정. 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웃는 모습을 생각하자 웃음이 나왔다. 금방 그쳤다.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니 금방 세희네 가게 앞이었다. 슬쩍 창문을 통해 가게를 살폈다. 손님이 거의 없었다. 가볍게 가게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 어, 윤다정?”
아니나 다를까. 상상과 똑같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반기는 세희를 보자 그쳤던 웃음이 다시 비실비실 나왔다. 세희가 꼭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눈을 크게 끔벅였다. 케이크를 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너 오늘 못 온다고 하지 않았어? 바쁘다며.”
“그냥 그렇게 됐어.”
“아, 그래…….”
다만 이후의 반응은 내가 예상한 것과 조금 달랐다. 어색하게 눈을 굴리며 다시 끔벅끔벅. 어깨에 닿는 친밀하다 못해 따가운 반김이 없는 게 이상해 고개를 까닥인다.
“너 일 있으면 나 다시 갈까?”
“아니야. 아니 무슨. 그냥 있어. 기다려 봐.”
찬물 한 잔을 부리나케 내준 세희가 바쁘게 발을 움직였다. 화장실이 급했나. 세희의 목적지를 쫓아 눈을 옮기다 물컵을 내려다봤다. 오늘은 맥주가 아니라 소주 한잔하자고 하면 놀라려나. 쓸데없는 생각이 줄을 이었다.
가게에 흘러나오는 재즈곡에 맞춰 발을 까닥였다. 그러고 얼마나 지났을까, 아마 조금이었던 것 같다. 뒤에서 들리는 다툼 같은 말소리에 고개를 돌리다 눈을 크게 깜박였다.
세희는 누군가를 말리는 중이었고, 그 누군가는 뭔데, 왜 그러는데. 하며 짜증을 내는 찰나였다. 때마침 나와 눈이 마주친 세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물컵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세희와 말을 나누던 사람도 놀란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세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던 이가 입술을 꽉 말아 물고는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말했다.
“윤다정이네.”
아, 이송희다.
셋이 되었으니 자리는 바에서 테이블로 옮겼다. 얼마 안 되는 손님들도 다 나간 뒤엔 음악도 꺼 버렸기 때문에 세희의 카페 겸 바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이따금 포크와 접시가 부딪치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정작 대강 썰어 올려 둔 치즈 케이크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다. 내 앞에 놓인, 탄산음료가 담긴 잔만 쳐다봤다. 거품이 올라오는 걸 오래 쳐다보니 이젠 환시로 김이 피어오르는 착각까지 일었다.
툭툭, 하는 소리에 시선을 잠깐 들었다. 예쁘게 손질한 송희의 손가락이 핸드폰 위에서 춤을 췄다. 누구와 연락하는지는 궁금하지 않다. 코로 한숨을 다시 쉰다. 아무래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낫겠단 판단이 든 건 한숨 뒤로 십 분이 더 흐른 다음이었다. 별안간 세희가 만지작거리기만 하던 포크를 내려놓고 내 어깨를 툭 쳤다.
“생일 축하해, 다정아.”
입가에 단 미소가 어색하긴 하지만 말에 진심이 듬뿍 담겨 있어, 나도 마주 웃었다. 그러다 입술을 핥았다.
“아!”
갑자기 송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세희를 노려봤다. 세희가 나 몰래 눈을 부라렸다. 안타깝지만 이미……. 세희가 테이블 아래로 송희의 다리를 걷어차는 걸 본 뒤였다. 세희와 소리 없는 눈싸움을 하던 송희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내리깔고 한동안 입술을 씹던 송희가 영 어색한 말을 던졌다.
“나도 생일 축하해.”
덧붙이는 말은 첫 말보다 더 작았다.
“그리고, 그때 내가 좀 지나쳤던 거 같아.”
영락없이 엄마한테 등 떠밀린 꼬마의 모습 같다. 시켜서 하지만 그게 내 진심은 아니야. 이런 투. 굳이 지적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사과를 받을 생각도 없었다. 나름 몰래 한다곤 하지만 송희에게 그게 사과냐는 듯 눈을 부릅뜨는 세희의 손을 잡았다. 눈이 마주친다. 고개를 살짝 저었다. 인상 쓴 채 나를 보던 세희가 커다랗게 한숨을 뱉었다.
“이 새끼들, 내가 오라고, 오라고 할 때는 죽어도 안 오더니 오늘따라 갑자기 들이닥치고 그러냐.”
핀잔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딱히 우리를 뭐라 한다기보단 상황의 어색함을 타파하려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벌떡 일어난 세희가 술을 한 아름 가지고 왔다. 티를 안 낸다곤 했지만, 송희도 나와 말없이 얼굴을 맞대는 게 불편했는지 술잔을 냉큼 받았다. 망설이다 나도 잔을 쥐었다.
어색하니 술잔이 빠르게 돈다. 침묵을 지우기 위해 다들 빠르게 술을 마셨다. 특히나 송희는 거의 소주를 물 마시듯 마셨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근황을 묻고 심심한 대답이 짧게 이어진다. 침묵의 간격은 술잔 부딪히는 소리가 좁혔다. 분위기는 송희와 세희의 얼굴이 불그죽죽해질 때쯤에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술에 취했는지 아까부터 픽픽 웃던 송희가 턱을 괴며 세희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다, 의자 밑으로 떨어질 뻔했다. 술에 취한 몸이 진작 기울어 있던 탓이었다.
“야, 김세희.”
방금까지 세희와 송희는 가게에서 담배를 피워도 되니, 안 되니로 가볍게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결론은 송희보단 멀쩡한 세희가 담배를 가로채 제 팔 안쪽에 두는 거로 끝났다. 되는대로 라이터를 가지고 놀던 송희가 눈을 엉성하게 찡그렸다.
“그래서 누가 본처고 누가 세컨드야.”
뜬금없는 질문에 세희가 나와 눈이 맞췄다. 나도 무슨 소리인진 알 수 없으니 그냥 눈만 깜박이고 만다. 또 픽픽 웃던 송희가 검지를 세워 나를 가리켰다.
“윤다정이 본처고, 내가 세컨드지?”
그쯤에선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대충 감을 잡았다. 송희만큼은 아니더라도 역시 얼큰하게 취한 세희는 목을 몇 번 긁은 뒤에야 그 말을 알아들었다.
“취했냐?”
침묵을 지키던 송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콧방귀를 뀌었다.
“대답 안 하는 거 보니까 내가 세컨드네, 하긴. 먼저 만났다고 본처인가. 딱 마주쳤을 때 숨기는 쪽이 첩이지.”
송희가 더듬더듬 술병을 찾는다. 손에 들린 초록색 소주병이 기울자 투명한 액체가 콸콸 쏟아졌다. 송희의 잔이 아닌 테이블에. 테이블에 완전 홍수가 나기 전 가까스로 세희가 술병을 잡아챘다. 테이블을 본 세희의 미간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좆도 안 달린 애들 내가 처첩 삼아서 뭐 하게. 야, 팔 들어 봐.”
“나한테 좆 달렸으면 윤다정이 아니라 나 본처 시켜 주나?”
“근데 이게 자꾸. 가만히 앉아 있는 다정이는 왜 자꾸 걸고넘어지는데? 팔이나 들어 보라고.”
세희가 닦달하다 지쳐 결국 직접 송희의 팔을 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어 송희가 입은 연보라색 니트 소매는 짙은 색으로 얼룩진 뒤였다. 심지어는 손목을 따라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휴지를 한 움큼 쥐고 소매를 닦아 주던 세희가 짜증 났는지 송희에게 쏘아붙였다.
“질린다, 질려. 너 요즘 왜 이러냐. 가만히 있는 애한테 자꾸 시비 걸고, 내가 다정이한테 사과할 생각 없으면 여기 오지 말라 그랬지. 근데 너 왔지. 사과도, 씹, 그래. 사과도 했지. 그럼 얌전히 다신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는 곱게 술 마시면 되는 거 가지고……. 됐다 됐어. 취한 애 잡고 내가 별소리 다 하네.”
세희와 송희는 입학하면서부터 빠르게 친해진 사이였다. 어찌나 스스럼도 없고 싸우기도 자주 싸우면서 쌍둥이처럼 붙어 다니는지 가끔 사람들이 너희 원래 아는 사이였니, 물을 정도였다. 나와 세희가 친해진 건 송희가 잠깐 어학연수를 갔던 2학년 때부터였다.
송희가 다시 복학한 뒤론 몇 번 셋이 같이 다니기도 했지만 잠깐이었다. 친해지라고 우리를 모았던 세희도 몇 번의 만남 뒤에도 관계가 부진해 보이자 더는 셋만 만나는 자리를 만들지 않았다. 졸업 뒤엔 아예 이따금 얼굴을 마주할 기회도 없어 그냥 학교 다닐 때 그런 동기가 있었지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세희가 여자 동기들끼리만 만나는 술자리를 기획한 이후부터는 달에 한 번은 얼굴을 봤지만, 그때도 둘이 말을 섞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전에 들었던 기억이 정확하다면, 세희가 가게를 낼 때 금전적인 도움을 줬던 게 아버지가 사업을 크게 한다는 송희였다. 나와 세희가 계속 얼굴을 보고 지냈던 것처럼 송희와 세희도 마찬가지였다. 송희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좋아하는 친구에게 잘해 주는 사람이면 내가 딱히 미워할 이유는 없었다.
“윤다정, 우리 까놓고 얘기 좀 하자.”
친구는 아니지만, 따로 칭할 말이 없이 친구라고 부르기는 하는 사이. 송희와 나는 딱 그 정도 선을 유지해 왔다.
“이송희!”
“김세희 너 유난 떨지 마. 시비 걸려는 거 아니니까.”
송희가 세희의 손을 밀어냈다. 세희가 발끈하고 일어나려는 걸 내가 눈짓으로 말렸다.
“뭐가 궁금한데?”
뭐가 웃긴지 송희가 또 픽픽 웃었다. 그냥 담담하게 눈을 마주했다. 세희가 가지고 있던 담배를 가져간 송희가 조금 떨리는 손으로 불을 붙였다. 입에서 불이 난 것처럼 연기가 샜다.
“너도 필래? 아, 너 담배 안 피우던가. 미안하다, 내가 너한테 관심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느릿하게 시비 걸던 눈이 한순간 찌푸려졌다.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던 세희가 한숨을 푹 쉬고 일어났다. 잠시 뒤 물이 조금 담긴 종이컵이 테이블 가운데 놓였다. 자기가 있는 걸 잊지 말라는 듯 송희를 똑바로 보며 툭. 송희가 눈만 굴려 세희를 잠깐 봤다. 그러곤 다시 입술을 깨문다. 이마를 짚은 손끝엔 담뱃재가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그래, 그땐 내가 한쪽 말만 일방적으로 듣고 너한테 지랄했지. 인정해. 사과할게. 너한텐 그냥 상훈 선배가 나쁜 놈일 수 있으니까. 근데 말이야.”
또 피식거리며 웃는다. 막 재가 테이블로 떨어지기 직전 송희가 종이컵에 재를 털었다.
“너, 상훈 선배랑 헤어지기 직전까지 엄청나게 집착했다며?”
“야!”
세희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 바닥에 철제 의자 끌리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덕분에 대답할 타이밍을 놓쳤다. 매섭게 눈을 뜬 세희가 송희의 어깨를 떠밀었다. 담배가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다정이 앞에서 그딴 소리 꺼내지 말랬지. 어디서 개소리를 듣고 와서. 지금 그 소리가 시비 거는 게 아니면 뭔데?”
“와, 완전 윤다정 보호자 납셨네.”
송희도 이를 갈며 일어났다. 방향은 세희가 아닌 나였다.
“윤다정 네가 말해 봐. 나 지금 시비 거니? 나 악감정 없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널 두고 내가 무슨 악감정을 가지겠어. 그치? 어?”
테이블을 짚은 송희가 몸을 기울이며 손을 뻗었다. 길게 기른 손톱이 아프게 뺨을 찔렀다. 세희가 입술을 깨물며 송희의 팔을 잡아 내렸다. 그러곤 입구 쪽으로 밀쳤다.
“이게 진짜. 너 취했어. 집에 가. 자, 여기 네 가방이고. 코트는 저기 있으니까 알아서 집어 들고 가. 어?”
“놔 봐.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아니, 취업 준비 때문에 우울하고 힘든 사람한테 왜 연락이 안 되느냐, 왜 안 만나 주냐 전화 계속하고 피곤하다는 사람 집 앞까지 찾아가서 기다리고 있고. 그게 집착이 아니면 뭔데? 뭐, 드라마에 나오는 잘생긴 미친놈들이 손목 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하곤 말도 못 섞게 하는 거, 그게 집착이야?”
목덜미가 빳빳해진다. 아픈 것과는 다른 의미로.
어떻게든 가게 밖으로 끌어내려는 세희와 버티는 송희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점점 몸싸움이 거칠어진다 싶더니 세희가 뭔갈 밟고 삐끗했다. 늘어난 니트 소매를 짜증스럽게 턴 송희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윤다정 너도 뭐 사람 좋아하면 그럴 수 있지. 내가 그때 네 행동 뭐라는 거 아니야. 근데 적어도 사람이 그때 미안했다고, 그렇게 사과하려고 하면 좀 받아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너 혹시 아직도 상훈 선배한테 미련 남았니? 그땐 상황이 그랬잖아. 상황이. 헤어진 거에 네 잘못 없는 것도 아니고.”
전화는 단 세 통이었다. 일주일간, 딱 세 통을 걸었었다. 연락이 안 돼 걱정되는 마음에 자취방으로 찾아갔던 건 일주일 하고도 삼일 뒤였다. 그나마도 부담스러워할까 봐 많이 망설였었다. 뭐, 지금 와서 따질 건 없는 이야기다. 상훈 선배와 내가 헤어진 이야기를 제게 유리하게 바꿔 말하고 다닌다고 해도 상관없다.
“지금도 입 꾹 닫고 있는 게 너는 네가 전적으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나 보다? 어?”
“야, 이송희 그만하라고!”
“뭘 그만해! 물어보고 있는 건데 그냥!”
무심코 테이블을 훑었다. 내가 마신 건 맥주 두 잔이 전부였다. 조금만 더 마시면 아마 정신 못 차리고 길에서 꾸벅꾸벅 졸 정도가 되겠지. 맥주잔으로 향하던 손을 비틀었다. 세희의 잔에 가득 담긴 소주를 꿀꺽 삼켰다. 쓰다 못해 매운 향이 코 뒤를 찔렀다. 테이블을 짚고 일어났다. 세희가 일어날 때와는 달리 의자는 얌전하게 밀린다.
“송희야, 너 상훈 선배 좋아하니?”
순간, 공간은 어색함보다 더 무거운 침묵에 휩싸인다.
“……뭐?”
한마디 말에도 소주 내음이 가득 딸려 나왔다. 가방을 챙겼다. 코트는 바 테이블 위에 얹어 두었다. 현기증이 나는 듯 잠깐 어지러워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송희 앞으로 걸어갔다.
“너 가지고 싶으면 가져. 난 상훈 선배한테 더 관심 없거든. 누굴 만나든, 무슨 말을 하고 다니든. 혹은.”
“…….”
“어디 크게 다쳐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도.”
내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송희는 할 말을 잃은 채 내 얼굴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삔 발목을 만지고 있던 세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걸 기점으로 방향을 틀었다.
“내가 갈게, 미안해 오늘 연락 없이 와서.”
그대로 얼어 버린 송희의 뒷모습을 힐끔거리던 세희가 고개를 저었다. 희미한 미소. 어깨에 손이 올라온다. 생일인데 미안해. 그 마음이 전해져 세희 손 위에 내 손을 겹쳤다.
“택시 불러 줄까? 아니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갈래?”
“내일 출근해야지. 집에 라라도 있고.”
“그놈의 고양이. 그래, 내가 다음 주쯤에 너희 집에 놀러 갈게. 그래도 되지.”
세희의 손이 힘있게 내 어깨를 쥐고 떠나갔다. 응,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은 말짱한데 너무 피곤했다. 아마 오늘은 쉽사리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이럴 때가 몇 번 있다. 몸 곳곳이 날 선 감각으로 가득 차 취기도 못 느끼는 때가. 손잡이 없는 칼을 쥔 것 같은 불안함. 두려움. 커다란 돌이 짓누르듯 어깨가 무거운 날.
코트를 주섬주섬 입었다. 남은 케이크 가져가라는 말에 고개를 젓는다. 너 먹어, 나 단 거 안 좋아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허리끈을 묶다 내가 오늘 저녁도 안 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뱃가죽이 납작하게 들러붙었다. 잠깐 쓸어내려 보다 고개를 돌렸다.
“야, 김세희.”
누가 ‘땡’ 해 주기만을 바라는 듯 우두커니 서 있던 송희가 그대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이번엔 이름과 방향이 맞았다. 송희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역한 걸 토해 낼 것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네가 말했어? 내가 상훈 선배 만나는 거?”
예상 못 한 전개에 입술이 벌어진다. 세희가 탄식을 흘렸다. 막 세희가 아니야, 하며 다가가려는 때 송희가 뒤로 물러나며 세희의 팔을 쳐 냈다.
“나는 너한테 세컨드도 못 되는 친군가 보다. 그래? 너한텐 윤다정만 친구야? 나는 네 친구 아니야? 너랑 제일 친했던 게 난데, 1학년 때부터 내내 붙어 다녔던 것도 난데. 하다못해 너 힘들 때…….”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송희가 이내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세희가 송희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쓱쓱 쓰다듬어 주는 손길에 송희의 숙인 고개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것도 잠시, 떨리는 숨을 삼킨 송희가 세희를 떠밀었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세희가 바닥에 엎어졌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세희야! 놀란 말은 조금 늦었다.
“아, 씨. 아파.”
테이블에 부딪힌 허리를 붙잡고 끙끙거리던 세희가 송희를 노려봤다.
“말 안 했어. 괜히 넘겨짚지 마!”
“웃기지마, 그럼 저 계집애가 어떻게 아는데!”
“씨발, 네가 계속 시비 거는 데 다정이라고 왜 참겠어! 네가 계속 과잉 반응하니까 그런 거 아니냐고! 다정아, 얼른 가. 얘는 안 되겠다. 얼른 가고. 집에 들어가면…….”
엉거주춤 일어난 세희가 내게 손을 저었다. 다가가려 해도 계속 입구를 턱짓하는 것에 걸음을 멈췄다. 입술을 깨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잠깐 내려 두었던 가방을 쥐었다.
“말끝마다 다정이, 다정아. 윤다정!”
송희가 휘두른 손에 테이블 위 술병이 몸을 눕혔다. 몇 개는 바닥으로 추락했다. 숨을 삼켰다. 울분을 토해 내듯 테이블까지 밀어 버린 송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