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주말, 근 두 달 만에 내려오는 집이었다. 어릴 때 살던 아파트는 아니었다. 나름 지역에서 신축으로 비싼 축에 들던 아파트는 엄마가 아플 때 병원비로 홀랑 날아갔다. 병원에 있는 부모님 대신 외할머니가 내 손을 잡고 이사했다. 따지면 그 아파트보다 이 빌라에 살았던 세월이 많은데도 거무죽죽한 붉은 벽돌을 쌓아 지은 외관을 볼 때마다 외할머니의 주름진 손과 미처 정리하지 못한 짐들 옆에서 웅크리고 잤던 이삿날이 생각났다.
입맛은 없었지만, 아빠가 자꾸 갈비를 권하는 걸 거절도 못 하고 족족 받아먹었더니 배가 더부룩했다. 오랜만에 딸내미 온다고 마트에서 갈비를 사다 재운 모양이라 고작 세 식구 저녁인데 뭘 이렇게 많이 샀냐는 말도 못 했다. 진하게 내린 커피로 어떻게든 배를 꺼트리려 애썼다.
“속 안 좋아? 소화제 줄까?”
계속 배를 문지르는 게 신경 쓰였는지 아빠가 찬장을 열며 물었다. 고개를 젓고 소파 밑에 누우려는 재원이를 소파 위로 끌어당겼다.
“밥 먹자마자 누우면 소화 안 돼.”
기어코 찬장에서 소화제를 꺼내온 아빠가 내 말에 혀를 찼다.
“저놈이 소화가 안 되긴 뭐, 며칠 전에 상한 우유 먹고도 멀쩡하더라.”
“성장기라 그래.”
밥을 많이 먹거나 할 때면 항상 하는 변명을 붙이며 재원이가 투덜거렸다. 이십 대 초반이면 돌도 씹어 먹을 나이긴 했다. 아무래도 돌보단 술을 더 많이 먹는 것 같지만…….
소파에 둘이 나란히 앉고 아빠가 바닥에 앉았다. 양반다리를 한 아빠는 바둑판을 끌어다 앞에 놓았다. 작게 틀어놓은 TV 소리에 딱, 딱. 바둑알 놓는 소리가 섞였다. 드문드문 이어지는 대화는 적당히 뜨뜻미지근했다. 편안한 분위기였지만 계속 속이 불편해 다리를 접었다가 꼬았다가, 그러다 바닥으로 늘어트렸다. 대화 내내 추임새 정도만 넣던 재원이가 은근슬쩍 누워 보려다 아빠에게 엉덩이를 얻어맞았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 말했다.
“얼마나 남았다고 했지? 이제 머리도 밀어야겠네.”
주제를 잘못 잡았는지 재원이 표정이 울적해졌다. 호랑이인지 곰인지 구별이 안 되는 캐릭터가 박힌 쿠션을 끌어안고 한숨을 푹 쉰다.
“진짜 가기 싫어 죽겠어.”
“같이 가는 친구들은 있고?”
기보를 따라 바둑을 두던 아빠가 안경을 밀어 올리며 참견했다.
“일찍 가랄 때 갔어야지. 쟤 친구들은 벌써 상병 달았다더라. 민식인가 민성인가, 걘 벌써 병장이라데.”
“민식이?”
“왜, 여기 뒤에 단독 주택 사는 걔.”
“아, 민재.”
“어어, 응. 민재.”
거기까지 대답한 아빠가 귤을 가지러 일어났다. 먹을 거지, 묻기에 고개를 젓긴 했지만 내 몫까지 가져올 게 뻔했다. 옆에선 재원이가 한껏 투덜거리는 중이었다. 김민재 그 새끼가 이제 군대 간다고 막 놀리는 거 있지. 어쩌고저쩌고.
“요즘 같아선 누가 나 좀 차로 쳐 줬으면 좋겠어.”
퍽, 갑자기 허공에 파리 잡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재원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도 재원이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단 표정을 지은 재원이가 제 뒤통수에 손을 올렸다.
“누나 지금 내 머리 때린 거야?”
눈을 깜박이는 속도가 빨라졌다. 아빠도 계시는데 저런 말을 하면 되겠냐고, 속으로 못마땅했을 뿐인데 손이 먼저 나갔다. 덕분에 하려던 잔소리는 하지도 못하고 재원이를 달랬다.
“에구, 많이 아파? 봐 봐.”
“아니, 아프진 않은데…….”
여전히 얼떨떨한 듯 재원이가 머리를 내주며 조그맣게 대답했다. 머리를 쓸어 주며 한숨을 쉬었다. 뺨에 손을 댔다. 얼떨떨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혹이 날만큼은 아니니까.
“아무리 가기 싫어도 말이 그게 뭐야. 친구들 앞이나 너 혼자 있을 땐 괜찮지만 아빠 앞에선 조심해야지.”
엄마가 죽은 뒤로도 한 몇 개월은 외할머니가 봐 줬지만, 그것도 오래가진 못했다. 치매가 생겨 경상도에서 소 농장을 하는 외삼촌네로 가게 되었다. 덕분에 재원이와 나, 둘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언제 한 번은 제 친구들 앞에서 날 엄마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내가 고1 때였다.
“누나 요즘 좀 변했어. 저번에도 그렇고.”
그게 안쓰러워 언성을 높이는 일도 최대한 자제하곤 했다. 그랬었으니 지금 재원이가 충격받는 것도 이해는 갔다.
“벼, 변하긴 뭐가. 너 아빠 앞에서도 이런 말 하면 그땐 진짜 아프게 때릴 거야.”
대강 얼버무리는 거로 잔소리는 끝냈다. 마침 베란다에 나갔던 아빠가 귤을 바구니에 한가득 가지고 왔다. 껍질에 엄지를 박아 넣다 시린 느낌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껍질을 깐 귤은 몽땅 재원이 입으로 들어갔다. 아빠가 재원이 허벅지를 걷어찼다.
“이 자식이, 네 손으로 안 까먹어?”
“아! 아파아.”
“이놈 자식이. 군대 가는 게 벼슬이야? 요즘 군대는 당나라 군대야 인마. 핸드폰도 쓸 수 있다는 데 그거 가지고 제 누나한테 죽는소리는. 다정아, 너도 얘 좀 그만 받아 줘. 덩치는 산만 한 놈이 아직 누나한테 자꾸 치대고.”
두두두 말을 퍼부은 아빠가 귤 바구니를 통째 재원이 무릎에 올렸다. 그러곤 내가 먹을 몫을 까 놓고 설거지도 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시키는 건 군말 없이 잘하는 성격이라 입술을 내밀면서도 고개는 끄덕끄덕. 남은 귤 일곱 개를 순식간에 까 놓은 재원이가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내 몫으로 넘겨진 귤은 하얀 껍질이 얼마 없었다. 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더 안 먹고?”
“아빠 많이 먹어.”
다 식은 커피를 들고 베란다 쪽으로 갔다. 베란다 안쪽엔 다리가 부실하단 이유로 부엌에서 쫓겨나 짐을 올려놓는 용도로 전락한 식탁이 있었다. 아직 배가 더부룩했다. 무심코 배를 만지던 손으로 어깨를 만지다 움찔했다. 집에 내려오기 전 벼르던 캣휠을 치우다 든 어깨의 멍을 만진 탓이었다. 가까스로 다시 분리한 캣휠은 중고로 되팔 예정이었다. 안타깝게도 우리 집 애가 한 번도 쓰지 않았어요, 하는 말도 곁들인 채.
팔리면 그 돈으로 개박하를 넣은 쿠션이나 새로 사 줄까, 생각하며 시선을 밖에 뒀다. 라라는 혼자 잘 있을지.
골목에 떠오른 가로등이 느리게 깜박였다. 그림자 같은 것이 언뜻언뜻 지나갔다.
“큼큼, 다정아. 너 요즘 만나는 사람 없댔지?”
고개를 돌렸다.
“뭘 그렇게 놀라. 만나는 사람 없으면 아빠 아는 사람 아들 한번 만나 보라고.”
내가 놀랐나. 별로 그런 것 같지 않은데. 어쨌든 대답은 충실히 했다.
“됐어, 무슨.”
“얘기도 안 들어 보고 왜. 들어 보니까 사람 참 착하고 건실한데 해외 출장을 좀 많이 다니느라 여자 친구가 없다더라. 나이는 너보다 연상인데 세 살 밖에 차이 안 나고. 생긴 것도 아주 남자답게 잘생겼대.”
밀어붙이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넘어가는 내 성격이야, 아빠가 제일 잘 알았다. 계속 부연설명이 뒤따랐다. 대학도 좋은데 나왔더라, 이상형도 딱 다정이 너 같은 여자래. 얌전하고 말 없고 착하고……. 그렇게 옆으로 온 아빠가 고개를 쑥 내밀고는 혀를 찼다.
“아이고, 눈 오네.”
커피 잔을 쥔 손이 꼼지락거렸다.
“많이 오는 거 보니까 너 오늘 자고 가는 게 낫겠다. 전기장판 꺼내 줄 테니까 너 옛날에 쓰던 침대에서 자고 가.”
고개를 살며시 기울였다. 왼손이 오른쪽 팔꿈치를 감쌌다. 한쪽 발이 뒤로 조금 빠졌다. 그림을 그리듯 장판 위에서 슬며시 움직인다. 모든 행동이 무의식중에 이어졌다. 원래 이런 버릇이 있었다는 것처럼. 그러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가야 해. 라라 밥 주고 나오긴 했는데, 요즘 내가 늦게 들어가는 바람에 밤에 간식 먹는 버릇이 들었거든.”
“아유, 그놈의 고양이 새끼. 결혼해서도 키울 거야?”
아빠가 라라 이름을 듣고 단번에 진저리를 냈다. 킥킥 웃었다.
“결혼은 우리 라라랑 할 건데.”
커피를 다 마시고 걸음을 옮겼다. 자고 가라니까, 하는 말이 계속 따라왔지만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빠도 거기선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점퍼를 챙겨 입을 무렵 설거지를 다 마친 재원이가 튀어나왔다. 손에 웬 묵직한 반찬 통을 들고 있었다.
“누나 김치 가져가.”
“응?”
“누나 섞박지 좋아하잖아. 내가 그거 담갔어.”
아빠가 재원이에게 눈을 흘겼다.
“야, 말은 똑바로 해라. 내가 김장 다 하고 니가 옆에서 깐죽거리기만 했지 뭘 네가 담가?”
“왜 이래, 무 다 깎은 건 나거든.”
“얼씨구. 무만 다 깎으면 김치가 되나.”
둘이 투덕거리는 걸 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그러곤 군말 없이 재원이 손에서 김치 통을 받았다.
“김치도 담그고, 너 장가가도 되겠다. 여자 친구한테도 자랑했어?”
“아, 누나!”
“자랑해, 김치 담글 줄 아는 것도 요즘은 매력이라더라.”
투정 비슷한 배웅을 뒤로하고 빌라를 나섰다. 수북한 건 아니었지만 아스팔트가 제 색을 잃어 가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얼른 몸을 움츠리고 갈 길 갔을 텐데, 괜히 발만 내밀어 발자국을 내봤다. 쌓인 게 아니라 그냥 그랬다.
“……오윤하는 좋아하겠네.”
혼자 중얼거리고 목도리를 여몄다. 부지런히 걸으면 버스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그러나 시외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버스가 떠난 뒤였다. 멍하니 텅 빈 정류장을 훑어보다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만 따뜻한 게 기분이 이상했다.
주말이 지나고 언제나 와 같은 아침이 왔다. 발그레한 볼로 활기차게 인사하는 지은 씨, 오늘도 아침으로 먹을 뭔가를 싸 온 한성 씨, 그리고……. 윤주 씨가 이상하게 아침부터 나를 힐끔거렸다. 할 말이 있으면 대놓고 하는 게 윤주 씨 성격이라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냥 넘겼다.
그리고 월요일 출근을 가장 반겨 준 건 과장님이었다.
“다정 씨, 다정 씨.”
집에서 푹 쉬었는지 살이 조금 올라 과장님의 턱이 마름모가 됐다. 왜 살이 쪘다고 마름모가 되냐면, 그건 나도 모르겠다. 그냥 마름모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이 좀 지난 오후, 살짝 나를 불러 낸 과장님이 커피 두 잔을 내왔다.
“얘기 들었어요. 회장님이 식사 제안했다면서요.”
내내 누워 있다가 오늘 출근한 사람까지 들었으니 소문이 참 빨랐다. 회장님이 우리 테이블 앞에 머물렀던 시간은 삼 분도 안 됐고 언제 한번 식사하자는 말을 들은 것도 우리 팀원들과 옆 테이블의 재무팀 사람들 정도였다. 잘 마시겠다는 인사와 함께 커피를 들다 그만 엎을 뻔했다. 과장님이 내 손을 꼭 붙잡고 붕붕 흔들었다.
“잘됐어요, 잘됐어.”
“대체 뭐가…….”
떨떠름하게 흘린 말에 과장님이 헤벌쭉 웃었다.
“저번에 살짝 보고했었거든요.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윤하, 아, 아니. 팀장님이 직접 자기 사람을 뽑았다는 건 정신 차리고 이제 일 제대로 해 보겠다, 그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직접 보겠다는 건, 팀장님 눈이 어떤지 보겠다는 건데 나는 그 점에서는 전혀 걱정이 안 돼요.”
그렇게 말하며 과장님이 날 힐끔힐끔 쳐다봤다. 왜 걱정이 안 되는지를 물어봐 주길 바라는 눈치라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뺐다.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미안해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내 골골거리며 핼쑥한 유령처럼 다니던 사람이 활기를 되찾은 건 좋은 일이었다.
“왜 걱정이 안 될지 여쭤봐도 될까요?”
커피를 후후 불고 한 모금 머금었다. 한동안 고장 났다가 고친 휴게실 에스프레소 기계에선 탄 맛이 진하게 났다. 커피 믹스보단 나아서 참고 마시다 미간을 좁혔다. 단 걸 먹었을 때처럼 혀에 텁텁한 맛이 찰싹 달라붙었다. 바라던 질문을 들은 과장님이 입을 크게 찢었다.
“다정 씨니까.”
…….
“네?”
과장님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커피 때문에 일그러졌던 미간이 더 좁혀 들었다.
“나는 다정 씨 관련해서는 정말 걱정이 하나도 안 돼요. 프로페셔널하고, 차분하고, 논리적이고. 일도 잘하고. 그렇다고 사회 생활하는데 모난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
“그러니까 회장님 앞에 가서도 평소처럼 하면 돼요. 회장님이 사람들 보는 앞에서 대놓고 다정 씨한테 식사 제안했다는 거, 이거는 지금 다들 쉬쉬하기만 하는 거. 팀장님이 상무로 승진하는 걸 확실하게 해 주시겠단…… 어, 오셨어요.”
과장님이 눈을 돌린 사이 어깨를 주물렀다. 근육통이 아니라 멍이 든 거라 주무를수록 아프기만 했지만 뭔가 이래야 통증이 가실 것 같았다. 몇 번 더 조몰락거리다 과장님을 따라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오윤하와 눈이 마주쳤다.
“병원은 다녀오셨어요?”
삐딱하게 다리를 짚은 오윤하의 손에서 가벼운 브리프 케이스가 달랑거렸다. 왜 이제 오느냐고 잔소리하고 싶은 표정으로 과장님이 헛기침했다. 나를 슬쩍 쳐다보는 것에서 병원 다녀오셨어요, 따위가 오윤하 체면을 세워 주려는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다.
내 얼굴을 보던 오윤하의 눈길이 아직 어깨에 올라가 있는 손으로 떨어졌다. 얼른 손을 뗐다. 그리고 눈을 내리깔았다. 점심이 얹혔는지 속이 갑자기 더부룩해졌다.
“오셨어요.”
목소리가 생각보다 더 덤덤하게 나왔다. 오윤하의 눈길은 한참 뒤에 떨어졌다.
“형, 커피 들고 내 방으로 좀 와.”
차갑게 뇌까린 오윤하가 그대로 등을 보이는 게 그림자로 보였다. 애꿎은 과장님만 당황했다. 아무리 다정 씨가 안다고 해도 회사에서 형이라고 부르면 어떻게 해……! 다 들리게 속닥거리며 오윤하 뒤를 따라간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 커피가 다 식은 뒤에야 일어났다. 남은 커피는 싱크대에 버리고 물로 헹궜다. 손가락으로 문질러 번진 립스틱 자국은 거품이 인 수세미로 문지르고 나서야 사라졌다.
“윤 대리님, 영업팀에서 전화가 왔는데 자리 비우셨다고 일단…….”
“아, 네. 내가 전화해 볼게요.”
한성 씨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를 당겼다. 막 유선 전화 앞에 붙은 내선 번호를 살피다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윤주 씨가 잽싸게 고개를 돌렸다. 소리 없이 한숨이 나왔다. 3, 까지만 누르고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윤주 씨.”
“어, 네. 네? 어, 왜요?”
윤주 씨가 크게 당황하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이미 크게 당황한 대목부터 아무렇지 않은 척은 실패했다는 걸 본인도 아는지 입술을 깨물며 눈을 슬슬 굴려 피한다. 눈을 깜박이다 최대한 부드럽게 웃었다.
“……아니에요.”
예상이 안 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예상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뭐든 상관없었다. 쳐다보다 들켰는데 막상 아니라고 하니 그쪽이 더 당황스러운 듯 윤주 씨가 몸을 들썩였다.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 짧은 몇 마디가 오간 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보험 회사 전화번호를 찾을 때, 윤주 씨가 의자를 굴려 내 옆으로 왔다. 별생각 없이 내 어깨를 짚는 것에 살짝 미간이 찡그려졌다.
“아니, 그게. 그러니까요…….”
윤주 씨가 막 운을 떼려는 순간 팀장실 문이 벌컥 열렸다. 뚱한 얼굴의 과장님이 먼저 나왔다. 그리고 뒤 따라 나올 듯하던 오윤하가 문틀에 기댔다. 나를 한 번 쳐다본 과장님이 자리에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 오윤하가 헛기침했다.
“흠!”
재능이긴 했다. 짧은 헛기침으로 사람들 이목을 한 번에 끌어당기는 것. 윤주 씨가 재빨리 내 옆에서 멀어졌다. 뒤늦게 어깨를 매만졌다. 성격답지 않게 헛기침을 몇 번 더 한 오윤하가 입을 뗐다.
“저기, 큰 행사 잘 치렀고 회장님도 괜찮았다고 하셨으니까. 오늘 회식 좀 할까 하는데.”
그 말에 지은 씨가 대뜸 일어났다.
“오늘요? 오늘은, 제가 약속이.”
오윤하가 눈만 굴려 지은 씨를 봤다. 별말도 안 했는데 그 한 방에 지은 씨가 시무룩하게 자리에 앉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한성 씨만 신이 났다. 먹는 걸 좋아해서 그런지 사무실에서 신난 게 자기뿐이라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윤주 씨를 슬쩍 봤다. 지은 씨는 그렇다고 치고, 보통 회식엔 오윤하가 없고 우리끼리 카드를 받아 맛있는 걸 사 먹는 일이 대부분이었던 터라 평소라면 좋아할 법도 했는데 지금은 이상하게 반응이 없었다.
“소고기 가나요?”
한성 씨가 신나서 까불었다. 뭐든 상관없다는 듯 오윤하가 고개를 까닥였다. 사무실을 둘러보던 눈길이 내게 닿았다. 오윤하의 미간이 뭔가 언짢은 듯 들썩거렸다. 그리고.
“……윤 대리님도 갈 겁니까?”
눈을 들었다. 오윤하와 다시 눈이 마주친다.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네.”
왜일까. 지난 주말이 슬펐었던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약속도 없고, 안 갈 이유도 없으니까요.”
생각대로 차분하게 나온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대답 후 바로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곤 보험 회사 번호를 찾아 수화기를 들었다. 오윤하는 좀 더 문틀에 기대 있다가 문을 닫았다.
한우를 싸게 파는 가게야 회사 근처에 많았다. 그런데도 굳이 들어간 곳은 1인분에 사만 원 돈이 넘는 곳이었다. 평소에 돈 주고 사 먹을 일 없는 비싼 소고기가 흥을 돋웠는지 일과 내내 이상했던 윤주 씨는 없었다는 것처럼 윤주 씨와 한성 씨, 그리고 약속이 있어 회식은 좀……. 하던 지은 씨까지 짝꿍이 맞아 잘 놀았다.
웬만해선 잘 나오지도 않는 윤주 씨의 특제 소맥도 등장했다. 잔뜩 흔든 맥주를 이미 만든 소맥 잔에 벌레 죽이는 약을 뿌리듯 취익, 뿌렸다. 세 번째 만들 땐 윤주 씨도 취해서 벽지에 맥주 거품이 튀었다. 그걸 보고 과장님이 숨넘어가게 웃었다.
소주 마시는 척 물을 마시고 바로 내려놨다. 취하고 싶지 않았다. 소고기가 익는 족족 사람들 입으로 사라지고 새로 주문하고 다시 한성 씨가 팔까지 걷어붙인 모습으로 열심히 구울 때도 오윤하는 물만 마셨다. 팔짱을 끼고, 뭔갈 생각하는 얼굴로. 그러다 잠깐 눈이 마주치고.
“뭐 할 말 있어요?”
까칠한 말투에 뭔가 속에서 울컥했다.
“아, 나 윤 대리님한테 할 말 있는데. 다정 쒸, 다정쒸이이이 어디 가쏘오오.”
가게에서 나올 즈음엔 어지간해선 취하지 않는 윤주 씨가 취했다. 내 팔을 붙잡고 한다는 소리가 아까부터 계속하는 말이었다. 윤주 씨가 제조하는 족족 특제 소맥을 주워 마신 지은 씨도 팔랑거리다 내 쪽으로 뛰어왔다. 술을 안 마신 과장님과 그나마 멀쩡한 한성 씨만 진땀을 뻘뻘 뺐다.
“윤 대뤼뉨 줴가 윤 대뤼님 조아하는 거 아시져. 나도 윤 대뤼님 같은 여자가 대꼬야. 차분하고 어른스뤕고…….”
혀가 진탕 꼬여 지은 씨가 하는 말 대부분이 허공에 그냥 흩어졌다. 사실 혀가 안 꼬였다고 해도 저런 말을 귀담아듣는 사람이야 있을 리 없다. 양쪽에 물먹은 솜 같은 진상 둘이 매달리니 걸음을 떼기는커녕 제자리에서 중심을 잡기도 어려웠다.
과장님이 지은 씨를 달래며 내게서 떼어 내려 하다 빙판에 미끄러졌다. 윤주 씨가 먼저 으하하, 괴상한 소리로 웃었다. 한성 씨까지 킬킬 웃었다. 이 와중에 웃음이 나오냔 유감스러운 눈길을 보내려 할 때 지은 씨가 매달려 있던 팔이 가벼워졌다. 고개를 돌리니 오윤하가 있었다.
“아, 튐좡뉨.”
월요일인데 다들 왜 이렇게 많이 마셨는지. 회식은 한 자리에서, 한 가지 술로만, 아홉 시 전에, 그런 당부가 새해로 바뀌자마자 위에서 내려왔으나 아직까진 별 효과가 없는 듯했다.
오윤하의 손에 뒷덜미가 잡힌 채 지은 씨가 해롱해롱했다. 그대로 질질 끌려간 지은 씨는 손님임을 직감하고 슬슬 속도를 늦춘 택시 뒷좌석에 들어갔다. 오윤하가 지은 씨를 지켜보던 자세 그대로 고개만 돌렸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한성 씨가 뛰어갔다.
“집에 들여보내고 과장님한테 문자 남기세요.”
“넵, 넵.”
남은 건 윤주 씨뿐이었다. 넘어졌던 과장님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윤주 씨를 붙들려고 했지만 힘이 어찌나 센지, 과장님은 한 번 더 뒹굴어야만 했다. 주말에 눈이 많이 와 길바닥 곳곳에 함정 같은 얼음판이 생겨나 있는 탓이었다.
“2차! 2차 가여, 2차!”
성난 코뿔소처럼 콧김을 우렁차게 뱉은 윤주 씨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힘이 없어 되는 대로 끌려가다 윤주 씨와 함께 엎어졌다. 다행히 무릎부터 엎어진 데다 손도 짚어 머리가 깨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아야, 손바닥을 들여다보다 내 앞에서 멈춰선 깨끗한 구두를 발견했다. 고개를 돌리는 대신 무릎을 털고 일어났다.
무릎을 다 털고도 핸드백에서 물티슈를 꺼내 손바닥을 문질렀다. 그리고 고개를 드니 조금 떨어진 도로에서 윤주 씨에게 헤드록을 당하는 오윤하가 보였다. 냅다 인상 쓰고 짜증을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덤덤한 표정으로 윤주 씨를 택시 뒤에 넣어 준다. 골반을 붙잡고 끙끙거리던 과장님이 뒤뚱뒤뚱 걸어갔다.
“아이고, 다들 새해라고 신난 건지 뭔지.”
한탄하듯 중얼거린 과장님이 빠져나오려는 윤주 씨 머리를 누르며 택시 문을 붙들었다. 그리고 몸을 쑤셔 넣기 직전, 고개를 들고 나와 오윤하를 번갈아 봤다. 느리게 눈을 깜박이던 과장님이 오윤하를 봤다.
“다정 씨는 안 취한 것 같긴 한데…….”
오윤하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잠깐 둘 사이에 눈빛이 오갔다. 그냥 고개를 숙이고 손바닥을 닦았던 티슈를 다시 핸드백 안으로 넣었다. 택시 문이 쾅 닫혔다. 오윤하는 택시가 슬금슬금 자리를 떠났을 때도 그 자리에 계속, 내게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바닥을 짚었던 손바닥을 쓸자 까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난 할 말 있어.”
대뜸 고개를 돌리며 그런다.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나한테 한 말인 걸 알았다. 마침 한 무리의 넥타이 부대가 마주치는 시선 사이로 지나갔다. 잠깐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쉰다. 타이밍이 좋았다.
한숨은 길지 않았다. 바로 고개를 들다 조금 놀랐다. 오윤하가 바로 앞까지 왔다. 언제 여기까지 왔지. 거리야 애초에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꼭 마술 같기도 하고…….
“들을 생각 없어도 들어. 난 할 거니까.”
바람이 추워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이 꿈틀거린다. 툭 말을 뱉은 오윤하가 탈 거야? 탈 거야? 하듯 빵빵거리는 택시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다시 속이 일렁인다. 내내 안 좋던 속이 소고기로 완전 맛이 간 건지 아니면 오윤하 때문인지. 먼저 등을 보이는 오윤하를 냅다 밀어 버렸다.
“잘됐네요. 나도 할 말 있어요.”
먼저 택시에 올라타며 오윤하를 힐끔 봤다. 폼은 있는 대로 잡다가 갑자기 미끄러질 뻔한 오윤하가 별안간 당한 봉변에 눈을 부릅뜨고 있다. 뭘 봐? 하는 표정 거기서 이 속에서 욱하고 올라오는 것의 정체를 알아챈다.
“왜.”
가로등이며 즐비한 가게들이 내뿜는 조명이 화려해 그림자가 흐렸다.
“이번엔 때릴래?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까부는 여자한테 막말했을 때처럼?”
눈이 내린 도시는 질척질척 더럽다. 차분한 말에 오윤하가 눈썹을 꿈틀했다. 그리고 딱 한 마디 했다.
“나 여자 안 때려.”
그러냐? 근데 막말은 하시겠지. 오윤하가 어떤 주소를 부르는 걸 들으며 최대한 문 쪽에 붙었다.
월요일인데도 언제나 이 거리엔 사람이 많다. 대부분 무리를 지었는데 간혹 혼자 걷는 사람도 있다. 열심히 쉬고 있는데도 숨이 막혀 답답했다. 생각의 끝은 아까 가졌던 결심이다.
“오윤하 아니야? 난 너 죽은 줄 알았어. 연락도 없고.”
오윤하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골목 골목을 지나 주변에 있는 후미진 건물들과 달리 반짝반짝하니 근사한 건물 지하에 있는 바였다. 처음엔 바인 줄도 몰랐다. 별다른 간판도 없는 계단을 한 층 내려갔을 때야 등장한 간판을 보고 알았다.
“그건 그렇고, 근데…….”
친분이 있는 듯 반말로 오윤하를 반기던 젊은 남자가 뒤늦게 내게 눈길을 줬다. 남자의 눈썹이 과장되게 위아래로 들썩였다.
“동행이 있네?”
그게 굉장히 의외라는 말투여서 안 그래도 좋지 않던 기분이 싹 가라앉았다. 그걸 티 내는 대신 바 내부를 살폈다. 높은 천장을 받치는 기둥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그림에서 볼 법한, 천장부터 이어진 아름다운 조각이 섬세히 새겨져 있었다.
바닥은 그냥 운동화를 신어도 발소리가 다각다각 날 것 같은 대리석이었고, 좀 더 들어가니 십일 자형으로 늘어진 커다란 바가 나왔다. 저기서 동창회를 해도 의자가 남아돌 것 같다. 테이블 몇 개가 그 정면으로 있고 그 뒤로는 계단 두 개 정도를 쌓아 만든 단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단상 위엔 어떤 걸 봐도 감흥이 없을 것 같은 마음에도 우와 소리가 나올 뻔한 투명한 피아노가 있었다.
“어떻게 딱 쉬는 날을 맞췄대. SNS에 공지도 안 했는데.”
그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현대적인 복장을 한 나와 오윤하가 안 어울리긴 했지만, 제일 안 어울리는 건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의 복장이었다. 아무리 난방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다지만 겨울에 하와이언 셔츠가 다 뭔가. 그것도 웬만한 조명은 명함도 못 내밀 것 같은 형광 분홍색이었다. 오윤하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멀끔한 얼굴이 요란한 색감에 다 죽었다.
“술이나 줘.”
남자가 살갑게 붙이는 말을 대충 고갯짓으로 넘긴 오윤하가 바 의자에 앉았다. 가만히 서 있다 뒤늦게 돌아본 오윤하의 눈짓에 한 칸 떨어진 의자를 당겨 앉았다. 뭐가 웃긴지 실실 웃던 남자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또 한 번 위아래로 훑는 시선이 다녀갔다.
“선호하는 주종 있으세요? 있을 건 다 있는데.”
남자가 내 앞에 기대며 과장되게 눈을 찡긋거렸다. 대답은 엉뚱하게도 옆에서 날아왔다.
“술 못해. 물이나 한잔 내줘.”
오윤하를 봤다. 다소 뚱하게. 지금 심정으론 오윤하가 여기서 저 남자와 멱살 잡고 싸운다고 해도 감흥 없이 지켜볼 것 같았다. 미간을 올렸다 내린 남자가 내 앞에 뭔갈 내밀었다.
“술 못 하시는구나. 그럼 이건?”
담배였다. 남자의 다른 손은 라이터를 쥐고 있었다. 얼마든지 시중을 들어 주겠다는 듯.
“요즘은 법이 엄해서. 이럴 때만 누릴 수 있는 호사죠.”
손을 뻗으려다 말았다.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끊은 지 좀 돼서요.”
옆에서 켁, 소리가 들렸다. 힐끔 보니 턱으로 줄줄 흐르는 술을 손등으로 훑으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보는 오윤하가 있었다. 뭐에 그렇게 놀랐는지 같은 자리만 계속 문지르는 통에 셔츠 소매가 술에 젖었다.
오윤하와 말없이 마주하고 있는 사이에 척척 얼음도 꺼내고 술도 꺼내 오윤하 앞에 대령한 남자가 오윤하의 팔을 툭툭 두드리고 떠났다. 필요한 거 있으면 알아서 꺼내 먹어, 그런 말과 함께. 잠자코 있던 오윤하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다소 심사가 사나워 보이는 동작이라 드디어 할 말 하려나 보다, 생각했다.
“왜 그런 걸 쟤한테 먼저 말해?”
하지만 아무래도 내가 오윤하를 좀 얕본 모양이다. 황당해서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안 물어봤잖아요.”
생억지가 돌아왔다.
“묻든 안 묻든 나한테 먼저 말해야지. 왜 쟤가 먼저 그런 걸 알아야 해? 윤 대리랑 자는 사람은 난데…….”
세 번째 울컥. 이게 뭔지는 아까 알아챘지만, 뭐라 정확히 표현할 말이 없어 아껴 놓고 있었다. 단순 화가 났다고 하기엔 짜증이 컸고 그렇다고 짜증 났다고 표현하기엔 가슴이 뜨거울 정도였으니 그럴 수도 없었다. 세희였으면 뭐라고 했을까.
당황스럽고 곤란한 상황에 세희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건 오래된 버릇이었다. 이윽고 적당한 표현을 찾아냈다. 속어이긴 해도 입 밖으로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빡치게 구네 진짜.”
오윤하가 들이켜고 있던 술이 다시 잔으로 돌아갔다. 펍, 하는 소리와 함께. 일단 입 밖에 내놓긴 했는데 그다지 후련하진 않았다. 물잔만 달그락거렸다. 뭔갈 더 퍼부으라고 가슴이 종용했다. 그래야 이 관계를 미련 없이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축축한 유리컵 표면을 훑다가 문득 생각해 낸다.
내가 뭔갈 잘못한 사람을 앞에 두고 따져 본 적이 없단 사실을.
일방적이어도 사과를 받아 내려 해 본 적이 없었고 사과를 하면 표면상으론 받아 줬다. 내 기준에서 그게 한참 웃돌면 시비를 가리는 대신 관계를 끊어 냈다. 깨달음 속에서 끝내 어떤 결론을 찾았다.
“무슨 생각으로 과장님한테 그런 말을 했어요.”
사실 속으로는 오윤하가 사과하길 바랐구나. 그런 거.
“무슨 말.”
“나 기획실로 데려간다고 했다면서요.”
그래서 그런 말을 듣고도 주말 내내 오윤하와 그만해야지, 그 생각을 바로 못 했던 거구나. 좀 더 생각한 뒤엔 다른 것도 깨닫는다.
“차라리 그냥 벗고 뒹구는 사이라고 하지 그랬어요. 잠깐 창피하긴 해도 그게 나았을 텐데.”
나야말로 오윤하에게 사과하고 싶었다는 걸.
“하긴 뭐. 이젠 상관없죠.”
예상은 했다만 나를 보는 오윤하의 시선이 썩 곱지 않았다. 눈이 찢어져서 그런지 좀만 찡그려도 저렇게 무례하고 날카롭게 보인다. 입술을 달싹이던 오윤하가 시선을 거뒀다. 그러곤 술과 섞인 얼음을 천천히 흔들었다.
“정수 형이 의심했든 아니든 어차피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같이 일하면 좋겠다 싶어서.”
“왜요.”
오윤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시선은 직선이었다. 내가 먼저 말했다.
“가방 사 달라 조르지도 않는 잠자리 상대, 도시락처럼 옆에 끼고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오윤하의 고개가 좀 더 기울었다. 눈썹을 찡그린다.
“그런 거 아니야.”
“그래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넘어감과 동시에 이곳에 음악이 없다는 걸 알았다. 깊숙한 지하라 그런지 몸을 비틀 때도 소음이 발생하듯 느껴졌다. 손이 달달 떨렸다. 다른 손으로 재빨리 감쌌다.
“얌전히 다리나 벌리라기에 그런 줄 알았지.”
나쁜 놈. 차라리 전 남자 친구들이 나았단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올 줄 몰랐다. 자기들을 너무 좋아해서 재미없단 말로 상처 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내게 그런 식의 말을 한 적은 없었다. 어쨌든 한때 사랑했던 사이니까. 속이 답답했다. 할 수만 있다면 손을 집어넣어 잡히는 걸 몽땅 꺼내 놓고 싶었다.
“그건…….”
오윤하의 시선은 제가 빙빙 돌리고 있는 술잔에 고정되어 있다. 말을 하던 오윤하가 이로 입술을 짓이겼다. 잘근잘근 씹히던 입술이 다시 색을 찾았다.
“그러니까, 그건.”
오윤하의 말이 막 끝을 맺으려 할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듣기 싫게 귀청을 때렸다. 오윤하가 고개를 돌렸다. 언제 봐도 예쁜 눈동자가 밀려오는 파도에 흔들리듯 일렁이고 있었다.
“앞으로…… 사적으로 만나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눈이 크게 떠지니 눈동자가 더 잘 보인다.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그 어떤 식으로도, 앞으론 팀장님하고 엮이고 싶지 않아요.”
못된 망나니, 양아치, 나쁜 놈. 속으로 할 줄 아는 욕은 다했다. 오윤하의 이름이 오쌍놈이었으면 좋았을 거란 생각도 했다. 그럼 속에서 툭툭 걸리는 거 없이, 거리낌 없이 쌍놈아. 그렇게 부를 수 있었을 테니까.
“윤…….”
오윤하가 금방이라도 일어날 듯 의자가 덜컹거렸다. 고개를 흔들어 말을 잘랐다.
“할 말 끝났으니까 이만 가 볼게요.”
조그맣게 벌어진 오윤하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멍청한 얼굴로 나를 보던 오윤하의 얼굴이 이내 성질 나쁜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술잔을 내려놓은 손이 천천히 움직이다 바 테이블 위를 툭툭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음대로 해.”
툭 뱉듯 말을 마친 오윤하가 남은 술을 비웠다. 몇 걸음 걷다 돌아봤다. 오윤하는 돌아보지 않았다. 문득 화려하고 아름답지만, 너무 크고 사람이 없어 삭막하게 느껴지는 이곳과 오윤하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젓고 걸음을 뗐다.
술도 안 마셨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열어 놓았던 코트 앞섬을 추스르다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복도를 꺾자마자 어디 숨어 있었는지, 바 사장인 남자가 툭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놀란 얼굴로 눈만 깜박이는 내게 남자가 손을 뻗었다.
“아이고, 화장실 찾으시는구나. 여기, 여기. 내가 안내해 드릴게.”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헷갈리는 말투로 남자가 내 등을 떠밀었다. 나갈 생각이었단 말을 할 틈도 없었다. 요령 좋게도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이끌며 이리저리 복도를 돌던 남자가 화려한 문 앞에 나를 세웠다. 무슨 화장실 문이 출입문보다 더 화려한가 싶어 얼떨떨했다.
“자자. 내가 요 며칠 쉰 이유가 화장실 공사 때문이었거든요. 난 이상하게 화장실이 예뻐야 마음이 놓이고 좋더라.”
어깨에서 손 좀 떼 주지, 하는 생각이 들기 무섭게 남자가 손을 뗐다.
“안 좋은 마음도 좀 비울 수 있어서 그런가.”
입을 다물었다. 남자가 성격 좋게 웃으며 걸음을 물렸다.
“옛말에 화장실을 해우소라고 했다잖아요. 그럼 저는 이만.”
친군지 뭔진 모르겠지만 사람 정신 쏙 빼놓는 건 오윤하랑 똑같네……. 남자가 사라진 복도를 보다 화장실 문을 밀었다. 기왕 온 거 손이나 씻고 갈 생각이었다. 아까 넘어지기도 했으니까. 문을 밀자마자 쏟아진 빛은 어둑했다. 그런데도 잠깐 눈이 부셔 미간을 좁혔다.
바닥부터 벽까지 온통 옅은 장밋빛 대리석이었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세면대 바로 위엔 사자인지 갈기를 쓴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는 부조가 붙어 있었는데, 물을 어떻게 트는지 몰라 손을 대자마자 입에서 물이 졸졸 나와 놀랐다. 무슨 수도꼭지가 이렇게 화려하고 기괴한지. 묘하게 능글맞아도 성격은 좋아 보이던 남자였지만 오윤하 친구가 맞긴 하구나 싶었다.
물은 적당히 따뜻했다. 까진 손바닥을 들이밀자 따끔따끔한 감각이 피부 안쪽에서 쿵쿵거렸다. 하얗게 질려 있던 손바닥이 혈기가 돌아 분홍빛이 될 때까지 계속 물을 흘려보냈다. 다만 까진 상처에서 올라오는 통증의 강도가 세졌다. 피가 났다고 하기도 뭐하게 살짝 비쳤을 뿐인데 이렇게 아플 수가 있나. 덩달아 욱신거리는 듯한 손목을 꾹 눌렀다. 그리고 한숨.
얼마나 지났을까, 물을 실컷 낭비하다 못해 손가락 표면이 조금 쪼글쪼글해졌을 때에야 손을 뺐다. 무슨 궁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우아한 인테리어 속에 뜬금없이 핸드 드라이어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화장실이니 영 이상한 등장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이렇게 부조화할 수 있을까 싶게 안 어울렸다. 물기를 대충 말리고 코트에 문질렀다.
가방을 챙기고 화장실을 나섰다. 남자에게 이끌려 올 땐 그다지 빙글빙글 돈단 생각이 없었는데 온통 바닥도 하얗고 벽도 하야니 영 여기가 거기 같은 게 처음 오는 사람은 헷갈려서 방황하기 딱 좋았다. 어떻게 하지, 막 내 앞을 가로막은 어떤 문을 심란하게 노려보다 손을 뻗으려 할 때, 어디서 조그만 소리가 들렸다.
피아노 소리였다.
무슨 곡은 아니었다. 어린애가 심술을 부리듯 뚱, 땅, 뚱, 땅. 이어질 듯싶다가도 뚝 끊기는 음은 제각기 따로 놀았다. 걸음을 옮겼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몇 번 복도를 돌자 오윤하와 술을 마셨던 넓은 홀이 나왔다. 변한 건 없었다. 동창회를 열어도 좋을 법한 넓은 바와 조금 어수선하게 흩어진 테이블과 의자. 다만 오윤하가 앉아 있던 자리엔 술잔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오윤하도 갔겠지. 어디 가서 여자라도 만나겠지. 그리고 내일은 그 여자한테 가방이라도 사주려나. 어깨를 들썩이며 돌아서다 시선이 문득 한구석에서 멎었다. 계단 두어 개를 쌓아 만든 단상 위, 아름다운 피아노 앞에 오윤하가 앉아 있었다.
연주하는 사람이 못돼 먹어 그런지 온갖 빛을 빨아들일 듯 반짝거리는 피아노도 뚱, 뚱, 뚱, 듣기 싫은 소리만 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가 퉁명스레 건반을 두드리는 소리에 섞였다. 손을 뻗으면 건드릴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돌아보지도 않고 오윤하가 말했다.
“간다며?”
이런 놈이라는 걸 실컷 겪어서 그런지 화도 안 났다.
“뭐 놓고 갔어요.”
그때야 오윤하가 고개를 들었다. 금색 빛이 얼기설기 꼰 밧줄처럼 오윤하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한쪽 눈도 물들어 있었는데, 다른 한쪽은 오윤하가 만들어 낸 그림자로 어두웠다. 한쪽 눈썹만 추켜올린 채 날 보던 오윤하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한 손으로 심술궂게 누르던 건반 위에, 두 손이 올라갔다. 볼 때마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손이었다.
무슨 남자 손이 저렇게 예쁠까, 싶을 정도로.
그래 봤자 나비야 같은 거나 치겠지, 했던 삐딱한 마음이 무너졌다.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음에도 치는 사람이 오윤하라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부드럽고 유려한 곡이 흘러나왔다.
“어깨, 내가 그런 거야?”
연주를 멈추지 않으며 오윤하가 말을 걸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쳤을 정도로 부드럽게. 그 말에 어깨의 통증이 새삼스러워졌다. 어깨를 어루만졌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살짝.
“아니에요. 집에서 뭐 하다 부딪혔어요.”
연주는 계속 이어졌다. 서정적인 음이 섬세하게 어우러지며 가슴을 두드렸다. 여전히 피아노 건반만 쳐다보고 있던 오윤하가 다시 말을 꺼냈다. 본래라면 침묵이 채웠을 간격은 피아노가 메웠다.
“내가 성격이 나쁜 편이긴 해. 제멋대로인 면도 크고. 그래도…….”
오윤하가 시선을 내게 줬다.
“상처 주고 싶었던 건 아니야.”
오윤하의 혀가 입술을 적셨다. 그걸 따라 하듯 내 혀도 입술을 적셨다.
“가끔 그래, 예전엔 안 그랬는데 컨트롤이 안 될 때가 있어. 눈이 확 돌아서…….”
“…….”
“나쁜 말도 하고, 그걸로 사람 상처 주기도 하고.”
시무룩하게 속삭인 오윤하가 다시 입술을 축였다. 동시에 오른손이 건반을 연주하며 쭉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미안해.”
순간 목이 콱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뒤늦게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고 있었단 생각이 들었다. 그 때문일까, 눈가가 시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 알지만, 형태가 다듬어지지 않아 뭉툭하게 목구멍에만 턱 걸렸다. 가까스로 입을 벌렸다.
“나도 미안해요. 말이 심했어요.”
오윤하의 눈썹이 다시 휘어졌다. 얼마간 나를 보던 오윤하가 눈을 내리깔았다. 종착지는 건반이 아닌 엉뚱한 곳이었다. 뭔가 마뜩잖다는 듯 한참 피아노 모서리를 노려보던 오윤하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거 때문 아니야.”
연주가 멈췄다.
“틀린 말도 아니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데 앞에서 좀 솔직해졌다고 미안해할 것 없어.”
연주가 멎었으니 이제 간격은 다시 평범한 침묵이 채웠다. 다만 아까까지와는 달리 조금 부드러운 침묵이었다. 연주하기 전처럼 오윤하가 피아노 건반을 건성으로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피아노 위를 짚었다.
“……무슨 곡이에요?”
“브람스, 인터메조.”
뚱, 뚱, 뚱. 건성으로 대답한 오윤하가 건반에서 손을 뗐다.
“듣고 싶은 곡 있어?”
그 질문에 조금 당황했다. 아는 클래식이라고 해 봤자 학교에서 언뜻 들었던 비발디 사계 정도였고 나머진 어디서 들어봤지만, 작곡가 이름이나 곡명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들이 다였다. 더듬거리다 간신히 뭔갈 떠올렸다.
“쇼팽…….”
덧붙였다.
“녹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