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윤 대리님. 점심 구내식당에서 안 드세요? 오늘 오징어 불고기 나온다는데.”
점심시간이 됐다. 코트를 챙기자 막 복사를 마친 프린트물을 내려놓던 지은 씨가 물었다. 윤주 씨와 한성 씨는 홀딱 내려가 버린 뒤였다. 얼른 뛰어 내려가 뭘 하려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밥을 씹는 횟수보다 그 입에 오윤하가 오르내리는 횟수가 더 많겠지.
“잠깐 누구 만나야 해서요. 지은 씨 먼저 가서 먹어요.”
“오늘 소면도 나온다는데, 늦게 가면 소면 다 떨어지고 없을걸요.”
귀엽게 고개를 까닥이는 지은 씨에 손을 잠깐 뻗어 팔꿈치를 툭 쳤다. 지은 씨가 배시시 웃었다.
“점심 약속이에요.”
“와, 맛있는 거 드세요? 이따 점심 뭐 드셨는지 꼭 말씀해 주셔야 해요.”
“그럴게요.”
팀장실 문을 힐끔거리던 지은 씨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사무실을 나섰다. 그 등을 쳐다보다 나도 닫힌 팀장실 문을 힐끔 쳐다봤다. 비어 있는 과장님의 책상도 봤다. 오전 회의가 길어진다고 연락은 받은 터였다. 과장님이 서승연이 왔다는 걸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 이마를 매만지다 관뒀다.
라라를 보살펴 줬으니 맛있는 걸 사 달라는 재원이의 요구가 있었다. 기왕이면 저녁에 만나자고 했지만, 저녁엔 약속이 있으니 점심을 사 달라고 한사코 우기는 통에 어쩔 수 없었다. 대신 회사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평소라면 회사 앞으로 가서 남자 친구 행세를 하겠다느니 어쩐다느니 고집 피웠을 녀석이 쉽게 수긍하는 행동이 좀 이상하긴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이 재원이에게로 넘어갔다.
사무실이 텅텅 빈 건 아니겠지만 복도는 조용했다. 꼭 혼자 야근하고 퇴근하는 길 같았다. 야근할 때와 다른 점은 복도에 난 창문에서 햇살이 화사하게 들어온다는 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구두코로 바닥을 툭툭 찼다. 옆에 누군가 조용히 다가와 섰다. 그저 다른 팀 누구겠지, 하고 말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재원이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올라탔다. 내 옆에 있던 사람도 탔다. 더듬더듬, 손을 뻗자니 나보다 먼저 엘리베이터 번호판을 누르는 손이 있었다. 모양이 좋고 예뻤다. 동시에 우아한 향수 냄새가 훅 풍겼다.
“윤하 말이에요.”
1층 버튼이 눌렸다.
“잘해 주죠?”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정면을 보고 있던 서승연이 내 시선을 느끼고 살짝 고개를 돌렸다. 마스카라로 정성스럽게 속눈썹을 올린 눈이 마주치자마자 부드럽게 휘었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말없이 서승연을 쳐다봤다. 서승연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턱 끝에서 살랑이는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잘해 줄 거예요. 걔네 외할머니가 그쪽으론 엄하시기도 했고, 어린 시절은 페미니스트들이 많다는 프랑스에서 보내기도 했으니까. 특히나 사소한 데선 자존심 안 세우고 여자한테 져 주는 게 윤하의 제일 큰 장점이죠.”
서승연 귀에 달린 귀걸이가 머리카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머릿결이 무척 좋아 머리카락이 길었을 땐 흑색 비단 같았겠단 생각을 잠깐 했다. 머리를 묶고 싶다는 듯 서승연이 머리카락을 훑었다. 그리고 다시 날 봤다.
“놀란 표정이네요.”
놀란 게 아니라……. 서승연이 말하는 윤하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싶어 그걸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한테 잘해 줘? 오윤하가 여태 나한테 했던 일을 다섯 개만 딱 뽑아 세상에 내놓는다면 세상 사람 모두가 나를 안타까워할 거다. 죽겠다고 늘어지는 사람 붙잡고 기어이 한 번 더 하는 건 순위에도 못 꼈다. 내 표정을 살피고 있던 서승연이 잠깐 웃음을 터트렸다. 길진 않았다.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긴 해요. 그렇죠?”
살짝 고인 눈물을 훔쳐 내던 서승연이 그대로 손가락을 흘려 뺨 언저리에 가져다 댔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애가 머리는 좋은데 가끔 보면 살짝 백치미도 있고…….”
잠깐 서승연과 공감대를 형성할 뻔했다.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서승연이 뭘 하자는 건진 모르겠지만 공공연한 오윤하의 연인이었던 사람과 오윤하에 관한 토론을 할 마음은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네요.”
거기에 서승연이 갑자기 내게 왜 이러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오윤하를 좋아해 단순 부하 여직원을 질투한다기엔 말도, 상황도 내밀했다. 분명 서승연은 뭔갈 알고 있는 거다. 오윤하가 말했나, 한숨을 쉬었다.
“사람 착각하신 게 아닐까요.”
차분하게 말하며 서승연과 눈을 마주했다. 오윤하가 말했다고 한들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오윤하와의 관계는 섹스 파트너 그 이상이 아니었고 그건 어디에 꺼내 놓을 만한 관계가 아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를 꼼꼼히 관찰하고 있던 서승연의 입꼬리가 우아하게 올라갔다. 호감을 표시하는 건 아닌 것 같았고, 한 번에 여러 사람을 상대하는 데 익숙한 직업적인 버릇 같았다. 엘리베이터 계기판을 확인한 서승연이 다시 머리를 흔들었다. 향수 냄새가 훅 풍겼다.
“말을 길게 할 만한 상황은 아니네요. 아쉽네.”
말 하나하나가 전부 묘하게 의뭉스러웠다. 뭐라 딱 꼬집을 순 없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렀다. 오른팔을 접어 늘어진 왼팔을 붙잡았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뭘 착각하고 계신 것 같네요.”
“그래요?”
서승연이 순간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그럼 말고요.”
그러다 내 착각이었는가 싶게 다시 눈을 부드럽게 바꿨다.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돌렸다. 서승연에게서 눈을 떼면서도 찝찝했다. 계기판의 숫자가 5에서 4로, 4에서 3으로 떨어졌다.
“근데.”
저번에 오윤하와 붙어 앉아 있을 땐 그림 같은 선남선녀라고 생각했는데 이젠 그 생각을 전부 뜯어고쳐야 할 판이었다. 자기들 하고 싶은 말은 꾸역꾸역 다 하는 게 똑같았다. 미간을 찡그렸다. 할 말을 고르던 찰나,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윤하가 할 줄 아는 건 그게 전부예요.”
어느새 서승연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표정한 서승연은 어딘가 무섭게 보이기도 했다. 워낙 눈이 커서 그런지, 아니면 사람 눈을 뚫어지게 보는 것 때문인지.
“성질이 더럽던 행실이 나쁘건 오윤하는 자기 맘에 든 여자한텐 일단 잘해 줘요. 흥미를 끄는 구석이 있으면 더 잘해 주죠. 토라지면 정성껏 달래 주고, 취미나 취향도 맞춰 주고.”
입을 벌렸지만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다시 닫았다.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
“오윤하한텐 마음이 없거든. 장난감 가지고 놀 줄은 알아도.”
기분 나빠야 할 타이밍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여기서 화를 내도 무방하다는 것도. 하지만 서승연은 조금 전의 나만큼이나 차분했다.
“못 믿겠어요? 재밌는 거 말해 줄까요.”
서승연은 어떤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윤하.”
그게 무엇인진 파악할 수 없었다. 서승연의 입매가 삐뚤어졌다. 여태까지 보이던 친절한 미소와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나를 비웃는 것 같지도 않았다.
“자기 형이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렸어요.”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달했다. 문이 열리자마자 서승연이 고개를 반듯이 돌렸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서승연에게 모욕적인 말을 들은 탓이 아니었다. 머릿속에 뭔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별장에 놓여 있던 사진. 두 개의 책상. 생각을 단번에 정리하긴 어려웠다. 내가 알기로 오윤하는 외아들이었다. 먼저 엘리베이터를 나서던 서승연이 깜박했다는 듯 핸드백을 열었다. 자그마한 명함이 내밀어졌다.
“나중에 만날까요. 더 듣고 싶은 말 많을 거 같은데.”
명함에도 향수가 뿌려져 있는지 손에 닿는 감촉이 부드럽다 못해 끈적끈적했다. 로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서승연의 얼굴은 다시 부드럽고 우아한, 대중 앞에 서는 배우의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서승연은 이름만으로도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나도 시선은 달갑지 않았다.
“아뇨. 필요 없어요.”
명함을 돌려주자 서승연의 얼굴에 살짝 금이 갔다. 놀랍진 않았다. 그저 내 생각보단 서승연의 성격이 그렇게 좋지 않을 것 같다는 어림짐작이 잠깐 있었다. 서승연을 지나쳐 먼저 걸었다. 먼저 도착했다는 재원이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사람들이 보는 게 민망해 재원이가 설정해 둔 저장명은 다시 바꾼 지 오래였다. 또각또각, 회사에 어울리지 않는 높은 하이힐이 내는 소리가 귀에 몹시 거슬렸다.
점심시간에 맞춘 직장인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돌아보자 서승연의 얼굴이 커다란 선글라스에 가려진 게 보였다. 그래도 특유의 태를 감추진 못해서 몇몇이 힐끔거렸다. 제멋대로 떠드는 직장인들을 요령 좋게 피하다 걸음을 돌렸다.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서승연은 택시를 잡으려는 듯 인도에서 한걸음 내려가 도로가에서 손을 뻗고 있었다.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죠?”
햇빛이 들치자 진한 갈색의 선글라스 아래로 서승연의 눈이 보였다. 문득 서승연이 하, 웃었다. 거기서 확신했다.
“윤하한테 물어봐요. 쪼르르 가서 내가 한 말 고스란히 일러도 좋고…….”
서승연은 화가 나 있었다. 나로선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웃는 서승연을 말없이 지켜봤다. 서승연의 미소가 차츰차츰 줄어들었다. 이내 서승연의 입이 다물렸다. 혹시 서승연 씨 아니세요? 누군가 용기 내 다가왔다. 서승연은 조용히 대답했다.
“난 말이에요.”
그리고 다시 날 봤다. 서승연의 표정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예쁘고 유명하고 돈도 많고. 누가 무시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난 내가 지금 짓는 표정이 어떤지, 눈빛이 어떤지 알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게 내 직업이고 장기니까.”
“…….”
“그래서 그런지 다른 사람 얼굴도 알겠더라고요. 물론 틀릴 때도 있지만.”
택시가 서승연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서승연이 주머니에 넣어 둔 손을 뺐다. 물러났다.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재원이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서승연도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생각은 없어 보여 그쯤 해서 물러나려고 했다.
“저번엔 짐작이었지만 오늘 확신했어요.”
몸을 돌린 상태로 어깨너머의 서승연을 봤다. 택시 문을 잡고 있던 서승연이 조용히 속삭였다.
“그쪽, 그때도 오늘도 지금 나 같은 표정으로 날 봤거든요.”
서승연의 표정이 어떤지 파악하기도 전에 택시 문이 닫혔다. 슬금슬금 앞으로 간 택시는 저 앞의 건널목 앞에서 멈췄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택시 뒤꽁무니를 보다 핸드폰을 들었다. 엄지가 화면을 훑었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 재원아. 먼저 들어가서 주문하고 있어. 나 금방 가.”
다시 돌아봤을 땐 서승연이 탄 택시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누나 입맛 없어?”
맛집으로 유명한 낙지볶음집엔 사람이 많았다. 지글지글 끓는 낙지를 지켜보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
“입맛 없냐고. 왜 먹지도 않고 낙지만 노려봐.”
“어, 응. 아니야 먹고 있어. 너도 많이 먹어.”
점심에만 주문할 수 있는 세트엔 신메뉴라는 갈비만두도 포함되어 있었다. 만두 접시를 밀어 주자 재원이가 만두를 집어 간장에 콕 찍었다. 손바닥만 한 만두를 입 안에 통째로 집어넣고 우물거리는 걸 보며 잠깐 웃었다. 다시 시선이 흩어졌다. 뺨을 때리듯 두드렸다.
“그건 그렇고. 왜 점심에 보자고 했어. 무슨 일 있어? 말투도 시무룩하고.”
하나 남은 만두를 젓가락으로 찌르고 있던 재원이가 시무룩하게 날 봤다. 대체 무슨 일이길래 그러나 싶어 긴장했다. 그리고 허탈해졌다.
“나 다음 달에 입대하래. 영장 왔어.”
눈을 깜박이다 멍하니 대답했다. 재원이 입 속으로 사라질 줄 알았던 만두는 내 접시 위로 올라왔다. 만두 끄트머리를 베어 먹으며 대답했다.
“아…….”
재원이가 볼멘소리를 냈다.
“아, 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누난 나 걱정도 안 돼?”
재원이 나이가 스물둘이니 오히려 요즘 추세엔 좀 느린 감이 없잖아 있었다. 요즘은 빠르면 1학년 1학기만 마치고 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만두를 좀 더 베어 먹다 아무래도 식욕이 없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다들 가는 거니까 뭐…….”
“와, 나 진짜 누나 울 줄 알았는데.”
“뭘 그런 거 가지고 울어. 요즘 군대 잘 돼 있다는데.”
다소 퉁명스럽게 말이 나왔다. 그러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원이 얼굴엔 온통 섭섭하단 글씨가 쓰여 있었다. 젓가락을 쿵 내려놓은 재원이가 입술을 댓 발 내밀었다.
“이제 나 다 컸다 이거지. 나 면회도 안 오겠네.”
쩔쩔매며 재원이를 달랬다. 손을 붙잡고 그게 아니라고 하는데도 재원이의 입술은 쉬이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이어지는 버릇이었다. 아빠가 워낙 엄하게 키워 둘 다 버르장머리 없다는 소리는 어디 가서 들어 본 적 없지만, 재원이는 유독 내게 투정이 많았다. 투정이 많은 만큼 애정도 깊었다. 꼬박꼬박 우리 집에 들르고 자기 허락 없이 남자 사귈 생각은 하지 말라는 둥, 전화번호 명을 바꿔 놓으며 걱정하는 것도 그 애정의 결과였다.
“아니야 그런 거. 얼른 밥 먹어. 응? 누나 회사 일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살살 달랬다. 재원이가 불퉁하게 대꾸하며 내가 낙지볶음과 비빈 밥에 참기름을 뿌렸다.
“그 회사엔 누나만 일해? 크리스마스 같은 때 출장을 간다고 하지 않나.”
잠시 헛기침이 나왔다. 반 정도 베어 먹은 만두가 얹힌 기분이었다.
“돈 많이 벌어야 너 면회 갈 때 맛있는 것도 사 들고 가지. 너 여자 친구보다 누나가 면회 더 많이 가 줄게.”
“아, 나 여자 친구 없다고!”
나와는 눈도 안 마주친 채 밥을 떠먹으려던 재원이의 얼굴이 붉어졌다. 거기서 살짝 웃음이 나왔다. 여자 친구 이야기만 나오면 펄펄 뛰는 걸 보면 분명 누굴 만나는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재원이의 투정이 그치긴 했다. 여전히 입을 내민 채 밥만 퍼먹긴 해도. 웃음기 어린 눈으로 재원이를 봤다. 밥그릇을 깨끗하게 비운 재원이가 뒤늦게 투덜거렸다.
“누나나 잘해. 이상한 놈한테 또 걸리지 말고. 나 군대 가는 것보다 나 없는 동안 누나 또 이상한 놈 만날까 그게 걱정이야 나는. 아니다. 내가 회사 앞까지 데려다줄게. 어, 내가 누나한테 막 자기야 그럴 테니까 누나도 협조…….”
“안 돼!”
목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나왔다. 재원이가 눈을 똥그랗게 떴다. 입술을 달싹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먹었으면 가자. 나 회사 들어가 봐야 해.”
“어?”
“그리고.”
계산서를 쥐다 재원이를 봤다. 서승연만큼은 아니라도 나도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심란하게 재원이를 보다 입술을 물었다. 손을 뻗어 재원이의 앞머리를 흩트렸다.
“누나 어른이야.”
“어, 어.”
“그리고 그건 무슨 일이 있어도 누나가 해결할 수 있단 뜻이야.”
곱씹을수록 화가 나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람한테 알쏭달쏭한 말을 꺼내 놓고 돌아선 서승연도 서승연이었지만 서승연을 그렇게 만든 오윤하에게 더 화가 났다. 그러곤 입 싸게 나와의 관계를 불어 버린 것도. 아니면 서승연이 오윤하와 내 관계를 눈치챘을 리 없다.
오윤하한테 들었다고 하면 되는 거 가지고 사람 눈빛이 어쩌고저쩌고. 됐다는 재원이에게 기어코 용돈을 쥐여 주고 회사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팀원들은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리고 있었다. 과장님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윤 대리님! 엘리베이터 서승연이랑 같이 탔었다면서요? 어때 보였어요?”
윤주 씨가 한달음에 달려와 속닥거렸다. 내 일은 별것도 아니라며 위로하던 오전의 사람과 이 사람이 같은 사람이 맞나 잠깐 의심이 갔다.
“글쎄요. 팀장님 안에 계신가요?”
“아마 계실걸요? 근데 갑자기 왜.”
대꾸 없이 윤주 씨에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과장님에게 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는 갑자기 터진 일련의 사건들로 어물쩍 넘어갔지만, 이번은 아니었다. 기왕이면 이번에 어떤 말을 했는지 탈탈 털어 보는 것도 좋을 듯했다.
문을 벌컥 열었다. 오윤하는 의자에 반쯤 누운 것처럼 기댄 채 노크도 없이 쳐들어온 이가 누군지 관심도 없는지 어깨까지 수그리고 뭔가에 열심히 집중하고 있었다. 일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오윤하를 똑바로 본 순간, 입에 곧 터질 듯 가득 차 있던 날카로운 말들이 목구멍으로 꼴깍, 넘어갔다.
“어, 윤 대리네.”
오윤하가 해맑게 웃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꽃이라도 귓가에 찔러 넣은 것처럼 화사한 얼굴에 화가 나 딱딱해져 있던 어깨가 잠시 흐물흐물해지기까지 했다.
“흠, 윤 대리님. 내가 점심 먹자마자 바로 오라고 하지 않았나요? 점심을 무슨 한 시간 넘게 먹습니까?”
턱을 치켜든 오윤하가 곧 웃음을 지우곤 까칠한 척했다. ‘척’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오윤하의 눈이 장난기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를 빨래 쥐어짜듯 짜 버릴 계획이었다는 걸 전혀 모르는, 해맑기만 한 얼굴에 남아 있던 전의를 거기서 모두 상실했다. 허탈해서 이마를 짚었다.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서승연 씨 만났어요.”
고개를 갸웃한 오윤하가 한 손에 들고 있던 큐브를 책상 위로 굴렸다. 뭘 하는가 봤더니 큐브를 맞추고 있었던 모양이다. 면마다 색이 혼잡했다. 책상에 걸터앉은 채 다리를 꼰 오윤하가 눈을 굴렸다.
“걔가 지랄이라도 했어? 윤 대리보고 욕하고 그래?”
갑자기 골이 지끈거렸다. 계속 이마를 짚은 채 관자놀이를 눌렀다.
“서승연 씨가 그럴 사람은.”
“걔 그러고도 남아.”
다시 큐브를 집은 오윤하가 허공에 큐브를 던졌다. 손 높이로 떨어지기도 전에 멋지게 잡아챈다. 그걸 심란하게 쳐다봤다.
“TV에 나오는 성격 다 생구라야. 가식.”
이놈이고 저놈이고 왜 자기 전 애인 욕을 나한테 하는지…….
“서승연 씨랑 무슨 얘기 했어요?”
전의를 상실하긴 했지만 오윤하에게 따질 말까지 잊은 건 아니었다. 큐브를 던졌다가 받으며 손을 놀리던 오윤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서승연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오윤하한텐 마음이 없어요. 오윤하는 자기 형 죽었을 때도 눈물 한 방울…….
“결혼한다길래 청첩장 달라고 했는데.”
뭐?
“뭐, 가진 않을 거지만.”
오윤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찌나 황당했는지 이마를 다시 짚는다는 걸 코를 꼬집어 버렸다. 막상 해 놓고 보니 코를 꼬집는 게 정신을 차리는 데 더 도움이 됐다.
“정말 그게 다예요? 내 얘기 한 거 아니고요?”
오윤하가 무슨 뜬금없는 소리냐는 듯 날 뚫어지게 봤다. 그리고 드디어 내 표정이 진지하다는 걸 눈치챘다. 큐브를 쥔 채 팔짱을 낀 오윤하가 뭘 생각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곤 조금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저번에 왔을 때도 청첩장 주겠다고 온 거였어. 그땐 갈 생각 없다고 안 받았는데 뭐, 핑계가 그거밖에 없더라고.”
혹시 내가 멍청한 건가 의심이 들었다. 서승연도 그렇고 오윤하도 그렇고 하는 말이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데 나만 못 알아듣고 있는 게 그랬다.
“……핑계가 대체 왜 필요했는데요?”
허탈하게 내놓은 말에 오윤하가 돌연 히죽 웃었다. 큐브를 내려놓고는 손을 까닥거렸다. 마지못해 몇 걸음 다가가자 손을 확 잡아챈다.
“어때. 밖에 사람들 이제 윤 대리 얘기 안 하지?”
내가 멍청한 게 맞는 모양이다. 오윤하의 이야기를 단번에 알아듣기 힘들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오윤하는 신나게 내 두 손을 마주 잡고 흔들기까지 했다. 영락없이 칭찬을 바라는 얼굴이었다.
“당분간 시끌벅적할걸. 걔야 그냥 길거리만 걸어도 사람 한 트럭씩 끌고 다니니까. 윤 대리 얘기야 이제 뭐, 윤 대리가 눈에 띄는 사람도 아닌데 얘기를 더 한대도 금방 조용해지겠지.”
뭐에 홀린 것처럼 오윤하를 들여다봤다. 반짝반짝한 눈에 온전히 내가 비치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별장에서도 내내 그거 걱정했잖아.”
오윤하가 미간을 찡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여전히 오윤하의 갈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여러 생각을 했다. 오윤하도 자기 소문이 가십처럼 소비되는 걸 아는구나. 그 짧은 생각보다 더 큰 건, 놀라움이었다. 놀라움? 아니. 하지만 모르겠다.
“……팀장님.”
입술이 떨렸다. 오윤하의 손아귀에서 손을 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제 앞에 내민 손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오윤하가 눈을 깜박였다.
“이거, 별장에서. 그러니까, 별장에.”
눈을 감고 침을 삼켰다.
“별장에서 주웠는데 주머니에 들어가 있더라고요.”
미간을 찡그린 채 내 손을 들여다보던 오윤하가 팔짱을 풀었다.
“……주인이 따로 있는 것 같아서.”
그러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반지를 집었다. 그게 왜 그렇게 느리게 보이는지. 오윤하는 내가 멋대로 이 반지를 집어 왔다는 것에 화를 낼까. 아니면 변명을 할까. 그것도 아니면 슬픈 표정을 지을까. 누구의 것인지 모르니 오윤하의 반응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마른 침이 넘어갔다.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천둥같이 들렸다.
오윤하 미간에 팬 골은 쉬이 펴지지 않았다. 반지를 뒤집은 오윤하의 시선이 안쪽에 새겨진 LOVE, JS에서 멎었다. 초조함에 손에 땀이 찼다. 이윽고 오윤하가 눈을 뗐다.
“누구 거지.”
오윤하가 뚱하게 말했다. 그러곤 영 엉뚱한 소리를 내놨다.
“이런 반지 가지고 싶어?”
뺨을 긁적인 오윤하가 그대로 반지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이었다. 반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퉁, 퉁. 바닥에 튕기는 작은 소리가 내 심장 소리 같았다. 오윤하가 흠, 하며 다시 내 손을 찾았다.
“아무튼, 내가 윤 대리 소문 재워 줬으니까 뭐 해 줄 거야.”
반지는 구르고 굴러 소파 밑으로 쏙 들어갔다. 오윤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내가 큰 기대는 안 해. 윤 대리 워낙 재미없는 사람인 거 진작 알고 있으니까. 뭐, 내가 저번에 사 준 속옷이나…….”
손을 뺐다. 거칠게 느껴졌는지 오윤하가 인상을 썼다. 그러다 내 얼굴을 보고는 조금 당황했다.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는 걸 유심히 지켜보다 입술을 축인다.
“왜 그래.”
손을 입술 위로 올렸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표정이 이상한데.”
“아니요.”
오윤하가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흠칫 놀랐다. 걸음이 먼저 뒤로 물러났다. 오윤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곧이어 성질 나쁜 표정이 드러났다.
“누가 뭐 나 기분 나쁠 때면 무릎 위에 올라와서 브래지어만 입고 살랑거려 달라고 했어, 그것도 아니면 폰섹해 보자고 한 것도 아닌데. 아니 그깟 속옷 좀 입어 달라는데 그게 그렇게. 어?”
예시랍시고 드는 게 몽땅 질겁하도록 음탕했지만, 그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오윤하를 쳐다보다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전 이만 나가 볼게요. 할 일이 있어서.”
오윤하가 나를 붙잡기 전에 서둘러 문을 열고 나왔다. 사무실 문을 밀자마자 누군가와 부딪혔다. 죄송합니다,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말을 뱉다 웬 손이 강하게 나를 붙드는 힘에 화들짝 놀랐다. 오윤하는 아니었다. 마라톤이라도 한 사람처럼 땀범벅인 얼굴로 과장님이 헐떡거렸다.
“헉헉. 서, 승. 헉.”
“네? 과장님 괜찮으세요?”
부딪힌 사람도 과장님이었던 모양이다. 과장님이 숨을 꿀떡꿀떡 삼켰다. 금방이라도 과장님의 다리가 주저앉을 듯 휘청거렸다. 숨을 한참 고른 뒤에야 과장님이 입을 뗐다.
“서승, 서승연이 왔다면서요.”
안 그래도 서승연이랑 오윤하 때문에 마음이 복잡하던 찰나라 한숨 먼저 나왔다. 그걸 어떻게 생각했는지 안 그래도 파리한 과장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결혼한다고…….”
그냥 결혼한다고 청첩장 주러 왔대요. 라는 문장은 끝을 맺지 못했다.
“과장님?”
막 기분 상했다는 티를 팍팍 내며 팀장실 문을 걷어차고 나온 오윤하도, 그리고 뭔 일인지 몰라 흥미진진하게만 듣고 있던 팀원들도 놀랐다. 제일 놀란 건 과장님에게 붙잡혀 있던 나였다.
“과, 과장님!”
허옇게 질린 과장님이 배를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억, 서승연이랑 결혼……!”
그러곤 쓰러졌다.
오후는 혼비백산 그 자체였다. 서승연의 이상한 말부터 재원이의 입대 소식, 오윤하에 대한 이상한 감정. 거기에 과장님까지 쓰러졌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울적한 얼굴로 병원 침대에 누워 있는 과장님을 내려다봤다. 오윤하가 구급차를 부른 것까진 좋았는데 나까지 잡아 태우는 바람에 여기 있게 됐다. 그리고 날 데리고 온 장본인인 오윤하는 응급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진 과장님을 한 번 들여다보고 답답하다며 나갔다.
“아직 안 깼나?”
어느새 돌아온 오윤하가 내게 뭔갈 내밀었다. 자판기 커피였다. 온갖 좋은 거 입고 먹는 놈이 이런 것도 마실 줄 아나 싶어 잠깐 우울하게 쳐다보고 다시 과장님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모님께 연락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차지하고 있던 보조 의자를 내주자 오윤하가 냉큼 앉았다. 오윤하는 자판기 커피를 무려 다섯 번에 걸쳐 홀짝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그냥 자는 거라는데 뭐.”
지금은 그냥 기절한 김에 자는 거라고 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배를 움켜잡으며 쓰러졌다는 말에 이것저것 검사를 한 뒤 나타난 의사는 갑자기 스트레스를 받아 위경련이 온 것 같다는 소견을 내놨다. 쓰러지지 않았어도 가족에게 알려야 할 판인데 사람이 쓰러지기까지 한 상황에 태평하게 자는 거라는데 뭐, 하는 오윤하를 보자니 뭐 이런 나쁜 놈이 다 있나 싶어 좀 더 심란해졌다. 시선을 느낀 오윤하가 고개를 돌렸다.
“왜,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오윤하에게 어떤 말을 해야지 싶은데, 그게 자꾸만 명확하지 않은 모양으로 목구멍에 턱턱 걸렸다. 긴 다리로 침대 의자를 툭툭 차는 오윤하의 옆얼굴은 불퉁했다. 좀 더 쳐다보다 시선을 옮겼다.
“아, 과장님 일어나셨어요?”
힘겹게 눈을 들어 올린 과장님이 내 부름에 눈을 두어 번 끔벅였다. 빛이 흐린 게 아직 상황 파악이 덜된 것 같았다. 몸을 건드려도 되나 망설이다 발치에 선 김에 과장님 종아리를 몇 번 흔들었다.
“과장님 회사에서 쓰러지셨어요. 의사 말로는 스트레스성 위경련이라는데 자세한 건 과장님이 의사 선생님한테 직접 들으셔야 할 것 같아요. 일단 사모님 연락처 알려 주시면 제가 연락을…….”
별 반응이 없는 게 이상해 말을 중간에 끊었다. 과장님은 아직 아리송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는데, 그러다 시선을 천장에 올리고 얼마 떨어지지 않은 베드에 엎드려 누워 있는 아주머니 한 분을 쳐다봤다. 저 아주머니는 아까부터 안 그런 척 우리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엿듣는 중이었다. 과장님의 고개가 왼쪽으로 힘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오윤하를 발견했다. 뭔가 이상해서 과장님을 다시 불렀다.
“과장님……?”
그리고 그다음 순간, 과장님이 언제 아팠냐는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이……, 나쁜 놈!”
그러곤 내 몫의 자판기 커피까지 홀딱 해치우고 턱을 괴고 있던 오윤하의 멱살을 붙잡았다. 오메, 엄마야. 하는 비명이 제각각 나와 섞였다. 엄마야는 내 것이고, 오메는 아까부터 지켜보던 아주머니의 것이었다.
“야 이 자식아. 뭐가 어쩌고 어째? 결혼? 그간 자기 멋대로 굴면서 나한테 이일 저일 다 떠맡기는 거 내가 그래 언젠간 정신 차리겠지. 너도 철들 날이 오겠지. 하면서 여태 버티고 버텼는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결혼을 해? 그것도 이런 중요한 시기에! 서승연이랑? 네가 인간이냐? 인간이야!”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넋을 놓고 그냥 오윤하의 멱살을 잡아 흔드는 과장님을 지켜봤다. 과장님이 워낙 마른 데다 막 기절했다 깨어난 탓인지 멱살을 잡은 행위가 과격한 데 비해 오윤하는 별반 흔들리지도 않았다. 눈만 깜박이다 서둘러 손을 뻗었다.
“과장님, 저기 진정하시고.”
내가 막 과장님의 손을 떼어 놓기 전에 오윤하가 움직였다. 사실 오윤하가 여태 나한테 군소리 없이 멱살 잡혀 주고 얻어맞은 일이 있긴 해도 오윤하가 남자에겐 친절하지 않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장님이 환자라는 걸 참작하자면……. 오윤하가 나빴다.
“깩!”
이상한 소리를 내며 과장님이 침대 위로 엎어졌다. 오윤하가 과장님을 침대에 메다꽂아 버린 탓이다.
“에이 씨, 진짜. 누가 누구랑 결혼해.”
과장님이 오윤하의 팔을 어떻게든 떼 내려 발버둥 쳤다. 내내 허옇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하는 걸 보니 이젠 좀 안쓰럽기까지 했다. 결국, 오윤하의 힘을 못 이긴 채 과장님의 힘이 소진되었다. 씩씩거리며 오윤하를 노려보던 과장님이 더 좁혀질 곳도 없는 미간을 사정없이 구겼다.
“어엉…….”
그러곤 울음을 터트렸다.
과장님의 눈물이 진정된 건 세상 떠나가라 우는 과장님을 지켜보던 오윤하가 병실을 박차고 나간 뒤로도 장장 삼십 분에 걸쳐 내가 오윤하와 서승연이 결혼하는 게 아니고 서승연 씨가 따로 결혼하는데 그 청첩장을 주러 팀장님을 찾았다는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 뒤였다.
“내가, 진짜. 변호사도 아닌데. 회장님 앞에서, 쟤 변호를, 맨날.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그거 생각하느라. 내가 조기 탈모 얘기도 듣기까지 하면서. 엉엉.”
말을 할 정도로 진정됐다뿐이지 눈물은 여전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보조 의자에 앉아 과장님에게 휴지를 건네주는 중이었다. 침대 옆에 비치되어 있던 휴지는 이미 다 쓴 지 오래라 옆자리 아주머니에게까지 빌리기까지 했다. 과장님은 쉬지 않고 눈물을 콕콕 찍어 냈다.
“에휴 그래. 젊은 양반이 고생이 많네. 어쩐지 생긴 것도 뻔지르르 한 게 싸가지 없게 생겼더라.”
어느새 홀딱 과장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아주머니가 과장님의 어깨를 투박하게 두드렸다. 한창 눈물을 쏟는 와중에 따뜻한 위로가 감동으로 와닿았는지 과장님이 다시 눈물, 아니 콧물을 다시 한 바가지 쏟아 냈다.
“그래도, 원래부터 막 나가는 애는, 아니었어요.”
콧물을 킁킁거리며 과장님이 말을 했다. 그 와중에도 은근슬쩍 오윤하를 변호하는 게 오윤하와 정말 친하거나 아니면 오윤하에게 큰돈을 빌렸는가 싶었다. 사실 오윤하의 태도를 보면 후자가 좀 더 신빙성 있었다.
“제가 스물일곱 때, 쟤가 대학 신입생으로 들어왔는데. 그땐 진짜 순진했거든요. 막 시간표 보고 학교 사 일 밖에 안 나오길래, 너 김일성 존경하냐고 놀렸더니. 깜짝 놀라서.”
“응?”
아주머니와 눈을 맞췄다. 과장님이 한숨과 함께 울음을 토해 냈다.
“주, 주사파요. 엉…….”
한숨을 쉬었다. 아주머니는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우는 과장님을 앞에 두고 모르는 사람한테 대학생들 은어를 설명할 상황은 아니라 그냥 의자를 좀 더 당겨 앉았다. 그러곤 과장님 무릎에 수북이 쌓인 휴지를 쓰레기통에 몰아넣었다.
“과장님 팀장님이랑 대학생 때부터 아는 사이셨어요?”
과장님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스터리가 하나 풀린 셈이었다. 가끔 과장님을 형이라고 부르던 오윤하나 내 앞에서 실수긴 해도 오윤하의 이름을 불렀던 게 대학 선후배 사이여서 그랬던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잠깐, 대학 선후배?
“쟤, 아니 팀장님이 과장님이랑 같은 대학 나왔다고요? 과도 같아요?”
시뻘게진 코를 벌름거리며 과장님이 날 봤다. 그러곤 눈물로 너덜너덜해진 마지막 휴지의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기부 입학은 아니에요. 유, 윤하 수능 봐서 드, 들어온 거니까.”
기부 입학까진 생각은 안 했지만, 그 대학에, 그것도 입결이 낮은 편도 아닌 경영학과에 수능으로 들어갔다니. 양파 같은 오윤하의 실체는 대체 뭘까 싶어 입이 썼다. 그간 머리가 나빠 한량 짓만 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럼 대체 왜 그렇게 사는 걸까. 막 그 생각을 할 때 과장님이 똑같이 말했다.
“대학 다닐 때도 싸가지가 없긴 했어도, 나름 성실하고. 성적도 좋았는데. 대체 왜 그러고 사는지.”
과장님과 내가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아주머니는 이제 자기가 알아듣지 못할 이야기라 생각했는지 그새 흥미를 잃고 자리로 돌아갔다. 핸드폰으로 화투를 치는지 앗싸, 쓰리고! 하는 효과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잠깐 계세요. 깨셨으니까 간호사 선생님 불러올게요.”
너스 스테이션에 말을 하고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화장실로 걸어갔다. 나간 김에 화장지도 뽑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두 개, 세 개? 지갑에 동전이 얼마나 있는지 확인하며 걷다 걸음을 멈췄다. 시선이 뚝 떨어졌다. 화장실 바로 앞에 비치된 의자에 앉아 있던 오윤하도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지나치려는 내 팔을 오윤하가 붙잡았다.
“왜 화가 났지?”
입술을 깨물었다.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저 화 안 났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윤하의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그럼 왜 아까부터 나랑 눈 안 마주치는지 설명해 봐.”
그 말에 오윤하를 봤다. 눈가가 짜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 위로 화도 못 낼만큼 해맑게 나를 반기며 웃던 얼굴이며 아무렇지 않게 반지를 던져 버리던 얼굴이 겹쳐졌다. 이상하게 속이 답답했다. 고개를 저으며 손을 뺐다.
“과장님 좀 진정되셨으니까 들어가서 얘기해 보세요.”
오윤하는 두 번 붙잡지 않았다. 내가 화장실 자판기에서 휴지를 세 개 뽑아 나왔을 땐 이미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과장님 병실로 갔나 했지만, 거기도 오윤하는 없었다. 대신 과장님이 간호사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간호사가 과장님 코앞에 뭘 흔들었다.
“환자분 이런 약 드시면 꼭 문진에 체크 하셔야 한다니까요.”
“아 글쎄 제 거 아니에요.”
“환자분 이름 서정수 님 아니세요? 약 봉투에 환자분 이름이 쓰여 있잖아요.”
“제 이름은 맞는데 그러니까 그게, 아잇! 아무튼 진짜 제 거 아니에요.”
뭔가 하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간호사가 들고 있는 건 웬 약봉지였다. 오전 내내 과장님이 자리를 비웠던 게 회의 때문만이 아니라 위염 때문에 병원에 다녀왔는가 싶었다. 쩔쩔매던 과장님이 나를 발견하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약 봉투를 가로챘다.
“다정 씨 왔어요?”
“아, 네.”
빨간 코로 어색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지난 크리스마스에 썰매를 끌었던 게 루돌프가 아니라 과장님인가 싶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에 약 봉투를 베개 밑으로 쏙 숨긴 과장님이 간호사를 향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간호사가 미심쩍은 얼굴로 과장님을 흘겨봤다.
“진짜로 본인 거 아니시란 말씀이죠.”
“네, 네. 하하. 저랑 동명이인인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약 봉투를 놓고 가서 제가 가지고 있는 거예요. 하하.”
간호사는 끝까지 의심을 풀지 못했으나 막상 환자가 우기니 별수 없는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러곤 갈아입으라며 침대에 잘 개켜진 환자복을 놓고 떠났다. 한시름 돌렸다는 듯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던 과장님이 다시 날 보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내가 참. 윤 대리님한테 이상한 꼴 보였네요.”
드라마를 빼면 다 큰 성인 남자가 저렇게 서럽게 우는 건 처음 보는 터라 놀라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억해둘 만큼 우습지도 않았다. 오윤하 때문에 복장 터지는 심정을 과장님만큼 잘 알기 때문이다.
“사모님 오신대요?”
“아, 네. 온다네요. 많이 놀랐는지 회사 조퇴하고 온다는 거 겨우 말렸어요.”
아직 좀 남은 콧물을 힘껏 풀어 내며 과장님이 머쓱하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뭐 필요한 거 있으면 부담가지지 말고 연락 주세요. 일 생기면 연락드릴 테니 그동안은 푹 쉬시고요.”
벗어 놨던 코트를 쥐고 일어나다 멈칫했다. 뭔갈 말하고 싶은 눈치로 과장님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입술을 축이며 가만히 기다리다 코로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의자에 앉았다. 그런데 앉자마자 손을 냉큼 붙잡는 과장님의 행동에 조금 놀랐다.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는 걸 과장님이 힘줘서 붙잡았다.
“다정 씨도 많이 심란하고 힘들 거 알아요.”
“……네?”
과장님이 다 안단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등을 토닥였다. 손이 어찌나 축축한지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콧물이 묻은 건 아닌가 싶어 찝찝해졌다. 가까스로 어설픈 미소를 만들어 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윤하가 그렇게 막 정신 놓고 사는 건 아니거든요. 다 사정이 있기도 하고…… 애도 속이 말이 아닐 거라 여태 저도 두고 보긴 했지만…….”
눈을 깜박이다 불쑥 물었다.
“팀장님한테, 형이 있었나요?”
과장님이 순간 내 손을 놓쳤다. 과장님의 콧구멍이 백 원 동전만큼 커져 있었다. 퉁퉁 부은 눈도 그만큼은 아니라도 충분히 놀란 것처럼 보였다.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과장님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윤하가 얘기했어요? 아닌데, 애가 그럴 성격이 아닌데.”
서승연한테 들었다는 말을 할까 하다 관뒀다. 그걸 밝히면 서승연이 나한테 갑자기 이상한 말을 쏟아 낸 것도 말해야 하고, 그러면 오윤하와의 관계도 설명해야 했다.
“그냥 어쩌다 들었어요. 전 여태 팀장님이 외아들인 줄 알고 있어서…… 그냥 여쭤본 거예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자꾸만 고개가 울적하게 쳐졌다. 이유를 알면 당장 꺼내서 이리저리 살펴보고 다시 내 안으로 집어넣을지, 아니면 그냥 내버리고 개운해질지를 정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니니 한숨만 계속 까닭 없이 쏟아졌다. 그사이 슬금슬금 손을 뻗은 과장님이 다시 내 손을 쥐었다.
“아무튼, 윤하가 다정 씨한테 그런 제안을 한 것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정신 차리고 살겠단 뜻이니까 벌써 너무 걱정하고 그러지 말아요. 나야 뭐. 나는 원래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어요. 하하.”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번쩍 눈을 떴다.
“네?”
“에?”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고개를 들이민 나 때문에 놀란 과장님이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떨어지려는 손을 내가 잡아챘다. 한참 과장님을 여기저기 뜯어보다 입을 열었다.
“과장님, 전부터 여쭤보려고 했는데요.”
“네, 네.”
“대체 그때 팀장님이 과장님한테 뭐라고 하셨길래 자꾸 저한테 그런 말씀 하시는 건지 저는 정말 모르겠거든요. 그것 좀 말씀해 주실래요?”
상황이 좋다는 말을 하기엔 좀 어색했지만 어쨌든 타이밍은 좋았다. 어버버, 하던 과장님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그걸 왜 묻지, 하고 입을 열었다. 오윤하가 무슨 말을 했든 간에 각오가 되어 있었다. 사실 무슨 말이 나올지 몰라 미리부터 각오하고 있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어떤 말이 나와도 놀라지 않겠단 다짐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