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2권)4화 (7/17)

7장

오후의 업무는 거의 실수투성이였다. A업체에 전화한다는 걸 B업체에 전화하질 않나, 프린트했더니 막상 뽑은 것이 인쇄하려던 파일이 아니라 인터넷 화면 창이라던가, 심지어는 다시 걸려온 아나운서의 전화를 대충 네네, 하고 끊어 버리기도 했다. 보다 못한 과장님이 안쓰러운 얼굴로 먼저 퇴근해도 된다고 했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다. 그러곤 모두가 퇴근한 뒤에야 컴컴한 컴퓨터 화면을 보는 걸 관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차장엔 사람이 없었다. 늦게 나온 것에 대해 오윤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가 움직였다. 오윤하도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말로 옥신각신하고 나면 오윤하는 꼭 라디오를 틀곤 했는데 오늘따라 그런 것도 없었다. 내가 어디로 실려 가는지, 오윤하가 왜 나를 태웠는지에 대한 생각 따윈 없이 그냥 창문만 봤다. 어스름하게 비추는 내 얼굴과 거리의 간판 불빛이 어지럽게 섞였다.

“기분 많이 안 좋아요?”

오윤하가 드디어 입을 뗐다. 잠깐 오윤하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말없이 창밖만 보길래.”

그 말에 잠깐 웃었다. 아니, 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에 비친 입꼬리는 그저 굳어 있기만 했다. 바람에 깎이지도 않는 바위 같았다. 창문에 뺨을 기댔다.

“원래 창밖 보는 거 좋아해요.”

중학생 때부터 고민이 있을 때면 특정 목적지 없이 아무 버스나 올라타곤 했다. 가만히 앉아 창문 밖을 넘겨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눈을 감고 창문에 머리를 기대면 차량의 진동이 미세하게 올라오곤 했다. 이따금 둔탁하게 머리가 튕길 때도 있었다. 그럴 땐 혼자 주먹을 쥐고 키득키득 웃었다.

때마침 속도 방지 턱에 걸려 차가 덜컹했다. 머리가 떨어졌다가 아프게 창문에 부딪혔다. 얼얼함 이전에 우스웠다. 킥킥, 웃으려 입을 벌렸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헤어질 때도 배려심 있는 헤어짐은 아니었어요. 배려 있는 이별이 어디 있겠냐마는.”

창밖에 어쩐 일인지 온갖 색으로 반짝이던 불빛이 줄어들었다. 도로에 이따금 보이는 건 가로등뿐이었다. 마치 고속도로에 들어선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멍하니 그 생각을 흘렸다.

“하나는 바람을 피웠고, 하나는 잠수를 탔다가 다른 사람들한테 내 얘기 안 좋게 떠드는 거 정통으로 걸렸었거든요.”

“…….”

“근데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하더라구요. 싫다, 좋다, 그런 것도 없이 좋아만 해 주니까 질린다고.”

거기서 조금 가슴이 일렁였다. 토할 것 같았다. 생전 안 하던 멀미를 하나 싶었다.

“아직 사랑해서 슬퍼요?”

오윤하의 질문에 숨을 크게 들이쉬다 그만, 울컥하고 말았다.

“아니요.”

입술이 버르르 떨렸다. 동시에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난 그냥…….”

얼른 소매로 훔쳤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렇게 별 볼 일 없었다는 게 슬퍼요.”

눈물이 고이고 떨어지는 속도는 몹시 느렸다. 바쁘게 손을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날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내 직장에서 그럴 일은 없는 거잖아요. 사실은 다 알고 있었어. 헤어지기 전부터. 이젠 날 사랑하지 않는구나. 그런 게 느껴져서. 배려 없이 이별을 통보받을 때도 그래, 그렇구나 했는데…….”

코를 훌쩍이자 한 번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히터 덕에 따뜻하게 데워진 공기가 창문을 희뿌옇게 만들었다. 손을 내밀어 문지르자 손가락 모양이 넓게 남았다.

“헤어지고 난 뒤에도 배려가 없을 줄은 몰랐어.”

말을 마치고 빠르게 뺨을 훔쳤다. 눈물이 흐를 줄 알았지만, 손에 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창에서 눈을 뗐다.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곁눈으로 나를 힐끔힐끔 돌아보는 오윤하가 보였다. 코를 한 번 더 훌쩍였다.

“남잔 다 그래요? 사랑하면, 사랑해서 잘해 주니까 하찮게 대해도 되는 것 같고 우습고 그래요?”

오윤하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왜 그게 남자 전체의 문제가…….”

“팀장님도 바람둥이잖아요!”

코를 거칠게 들이켜니 푸르릉 소리가 났다. 사이드 박스를 열어 휴지를 꺼낸 오윤하가 억울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니, 난 한 번에 두 여자 동시에 만나진 않는데…….”

“…….”

“좀 짧게 짧게 사귀긴 하지만 전부 깔끔하게 헤어지고 새로 만나고.”

휴지를 가로챈 뒤 듬뿍 뽑았다. 코를 힘차게 풀며 오윤하를 노려봤다.

“그게 바람둥이거든요? 내가 남자 친구 있다고 할 때도 자자고 했잖아. 그게 바람둥이가 아니면 뭔데요.”

할 말이 없어졌는지 오윤하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갑작스레 제게 튄 불똥이 억울했는지 숨을 거칠게 쉬었다. 좀 더 울고 싶은 듯 가슴이 아직도 답답했다. 하지만 눈가를 문지르고 입을 벌려도 더 나오는 게 없었다. 꼭 막힌 듯 가슴 안에서만 뭔가가 지글지글 끓었다.

“아니 그건 미안하게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내가 또 뭘 억지로 한 것도 아니고. 그리고 내 주변엔 애인 있어도 그냥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하고 자고, 뭐. 그런 애들밖에 없어서. 그래서 얘기했는데. 윤 대리가 그런 사람인 줄 알아서 미안하다고…….”

털을 밀면 다 오윤하 같은 사람인가? 막상 자기는 털도 안 밀었으면서! 코를 한 번 더 힘껏 풀었다. 너무 세게 풀었는지 머리가 순간 멍해졌다.

“근데 내가 윤 대리한테 왜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데? 아니 오늘 회사 찾아와서 난리 피운 건 내가 아니라 윤 대리 전 남자 친구들이잖아.”

얼마 뒤 오윤하가 따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지금 상황이 더 억울한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 내겐 그냥 오윤하가 헤어진 전 남자 친구들처럼만 느껴졌다. 심지어는 생각이 튀어 남자는 다 똑같아. 다신 사랑 안 할 거야. 우리 라라하고 평생 살 거야. 하는 굳은 다짐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코 푼 휴지를 핸드백에 쑤셔 넣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차 세워 주세요.”

“뭐?”

“차 세우라고요. 내리게.”

집으로 가 라라를 품에 안으면 기분이 좀 괜찮아질 것 같았다. 햇볕에 잘 구운 것 같은 고소한 발바닥 냄새와 부드러운 털의 촉감이 그리워졌다. 휴지로 몇 번 문질렀다고 그새 얼얼한 코밑을 문질렀다. 오윤하가 속도를 줄였다.

“집에 어떻게 가게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쳐다보는 게 진심으로 그게 궁금한 눈치라 잠깐 한심하게 쳐다봤다.

“택시 타고 가면 돼요.”

그러나 오윤하는 바로 납득하지 않았다. 뺨을 긁적인 뒤 다시 물었다.

“고속도로에도 택시가 다니나?”

이번엔 내가 오윤하를 의아하게 봤다.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기만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간 불길한 생각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아무것도 없이, 마치 고속도로 같다고 생각했던 창밖을 넘겨봤다. 입이 떡 벌어졌다.

“내가. 왜, 고속도로.”

너무 황당한 나머지 입에서 제대로 된 말이 안 나왔다.

“왜?”

그래도 의문은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다. 오윤하가 어깨를 들썩였다. 표정은 별로 안 좋았다. 생각해 보면 카페에서 나를 봤을 때부터 안 좋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를 증명하듯 오윤하가 투덜거리는 투로 중얼거렸다.

“왜긴. 우리 놀러 가기로 했잖아요.”

그제야 오윤하가 며칠 전 크리스마스 연휴를 겸해서 놀러 가자고 했던 말이 기억났다.

“아니, 생각해 본다고 했지 내가 언제 간다고 했어요?”

그리고 내가 생각해 본다고 했던 것도. 마구 따지고 들자 오윤하가 움찔거리며 내 쪽으로 난 오른쪽 귀를 틀어막았다.

“그게 그거지.”

시큰둥하게 투덜거리는 말투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상하게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오윤하의 옆얼굴을 보다 입술만 달싹이길 몇 번, 겨우 입을 열었다.

“나, 갈아입을 옷도 안 가져왔는데.”

오윤하가 바로 말했다.

“여자 옷 몇 개 사 놨어요.”

“내, 내 사이즈를 어떻게 알고.”

그러곤 잠깐 속도를 늦춘 뒤 내 몸을 빠르게 훑었다.

“잘 맞을걸. 몇 날 며칠 주물럭거렸는데 사이즈는 내가 잘 알지.”

목 뒤가 얼얼하게 당김과 동시에 눈앞이 아득해졌다. 나를 잠깐 본 오윤하는 어깨를 으쓱한 뒤 다시 전방에 시선을 줬다. 어깨를 으쓱하는 행동이 너무 얄미웠다. 가슴에서 뭔가가 끓었다.

“라라 챙겨 줘야 하는데요?”

“걘 좀 혼자 있어 봐야 해. 사람을 막 할퀴고 말이야.”

입술이 움찔거렸다.

“나. 오늘, 기분 안 좋은데…….”

말을 마치지도 못하고 고개를 밑으로 툭 떨어트렸다. 내려간 입꼬리가 씰룩쌜룩했다. 아직 내 모습을 발견 못 한 오윤하는 곁눈으로 날 한 번 쳐다보고 말았다.

“그럼 기분 전환하는 셈 치면 되겠네.”

견뎌야 한다, 참아야 한다 생각했지만, 턱까지 간질간질한 기분에 더는 참지 못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오윤하를 노려보다가 무릎 위에 놓은 휴지를 다시 한 뭉텅이 뽑았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렸다. 가슴에서만 끓던 것이 크게 터졌다. 동시에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으허엉…….”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어린애처럼 와앙, 소리를 내며 터진 울음에 오윤하도 놀랐지만 정말 놀란 건 나였다. 정작 슬프고 화나는 일엔 눈물 몇 방울이 고작이었고 더 울고 싶어도 나오는 게 없더니 오윤하의 몇 마디에 이렇게 복받칠 일인가 싶었다. 어쩌면 이성이란 여과망에 갇혀 꾹꾹 눌려 있던 감정이 복장을 뒤집는 오윤하 때문에 터져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내가 휴지를 몽땅 뽑아 쓰고도 모자라 이미 쓰고 구겨 버린 휴지를 다시 접어 쓰는 동안에도 오윤하가 운전하는 미끈한 차는 착실하게 남양주 톨게이트를 지나 춘천분기점까지 들어섰다. 저도 제 죄를 알긴 아는지 입을 꾹 다물고 운전만 하던 오윤하가 슬쩍 물었다.

“좀 더 가야 하는데…… 휴게소 들를까?”

대답 대신 코를 잔뜩 푼 휴지를 오윤하 얼굴에 던졌다. 오윤하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어찌나 눈물을 많이 흘렸는지 눈가며 인중이 쓰라리다 못해 따가웠다. 심지어는 머리도 얼얼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아직도 마를 기세 없는 눈 밑을 꾹꾹 눌렀다.

“……혹시 휴지 더 필요하면.”

휴게소에 차를 세운 오윤하가 나를 돌아보다 흠칫했다. 그러곤 재빨리 운전석 문을 열었다.

“사 올게. 사 온다고.”

눈을 한번 깜박일 때마다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제일 큰 문제는 이거였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단 거였다. 사람 몸에 수분이 이렇게 많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금요일 밤인데도 휴게소 화장실엔 제법 사람이 많았다. 변기에 앉아서 이렇게 울어 본 게 대체 언제인지를 가만히 생각하다 다시 입꼬리를 축 늘어트렸다.

“어, 엉…….”

훌쩍이며 화장실 칸에 들어간 여자가 갑작스레 괴성을 지르자 바깥 세면대를 차지하고 삼삼오오 떠들던 아줌마들이 어머 이게 무슨 소리야, 하고 깜짝 놀랐다. 화장실에서 나오자마자 화살처럼 시선이 다닥다닥 꽂혔다. 눈물로 푹 젖은 소매를 접고 손을 씻는 내내 아줌마들이 힐끔거렸다. 한 사람은 이렇게 묻기도 했다.

“아가씨 무슨 일 있어?”

“흐, 윽. 아니, 요.”

정말 어린애처럼 히뜩거리는 딸꾹질도 나오니 나로서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이유 대부분은 오윤하였고 그다음은 부끄러움이었다. 나를 호위하듯 같이 화장실에서 나온 아줌마들은 그만 울라며 내 손에 비닐봉지에 담은 땅콩을 쥐여 주기도 했다. 고맙다며 고개를 푹 숙였다. 중력이 눈물을 잡아당겨 몇 방울이 신발코를 적셨다.

비닐봉지를 달랑거리며 훌쩍훌쩍. 그러다 보닛에 기대 있는 오윤하를 발견했다. 오윤하는 이 추운 겨울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는 웬 여자와 눈인사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좋다고 히죽거리는 꼴이 어이가 없었다. 킁킁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돌아본 오윤하가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뭐라 말하려던 오윤하가 됐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내게 뭔갈 내밀었다. 따끈따끈한 커피였다.

“팔 떨어지겠네. 진짜.”

직접 손을 당겨 쥐여 주고는 춥다며 먼저 홀딱 운전석에 올라탄다. 물끄러미 보다가 나도 조수석에 올라탔다. 그러곤 오윤하가 건네주는 물티슈를 왕창 뽑았다. 다시 쪼르륵 떨어지는 눈물을 닦았다. 오윤하는 내가 덜렁덜렁 들고 온 비닐봉지에 관심을 보였다. 뭐냐고 가져가 열어 보더니 냉큼 땅콩을 쥐고 입에 쏙쏙 집어넣는다. 턱을 덜덜 떨며 말했다.

“내, 거, 거든.”

비닐봉지를 확 빼앗았다. 속으론 유치한 행동이란 생각이 들긴 했지만 멋대로 집에 가려는 사람을 납치하다시피 데려온 주제에 웬 여자랑 노닥거리고 있던 게 괘씸했다. 오윤하가 입맛을 쩝 다셨다.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시무룩하게 날 응시하던 오윤하가 불쑥 말했다.

“그만 좀 울지.”

불어터진 눈으로 쳐다봤다. 막 코를 풀려던 찰나였다.

“뭐 이렇게 눈물이 많아. 막상 가면 윤 대리도 좋아할…….”

코를 팽 풀었다. 그 소리에 말이 뚝 끊겼다. 날 흘겨보던 오윤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막상 가면 윤 대리도 좋아할 거라고. 요 며칠 눈도 좀 와서…….”

다시 코를 풀었다. 이제야 내가 코를 푸는 게 고의라는 걸 알았는지 쳐다보는 눈빛이 사뭇 시무룩했다. 에이 씨,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박박 긁던 오윤하가 핸들을 붙잡으며 성질을 버럭 냈다.

“그만 울라니까?”

이게 누구 때문인데 성질이냐? 안 그래도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 자꾸 엉엉 우는 게 창피하던 찰나라 나도 성질이 났다.

“누군 울고 싶어서 우는 줄 알아?”

콧물을 잔뜩 푼 휴지를 오윤하 얼굴에 던졌다. 이미 한번 맞아 봤다고 예상하고 있었는지 오윤하는 고개를 까닥여 쓱 피해 버렸다. 애꿎은 창문에 퉁 부딪힌 물티슈가 오윤하 허벅지로 떨어졌다. 무슨 폐기물을 집는 것처럼 검지와 엄지만 살짝 이용해 그걸 들어 올린 오윤하가 짜증을 냈다.

“그럼 그치면 되잖아!”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윤 대리가 이상한 남자 사귄 탓이지!”

서로 씩씩거리며 노려보다 뭐 또 던질 게 없나 싶어 두리번거렸다. 아까 내가 사용했던 휴지는 전부 오윤하가 가져다 버렸는지 산더미처럼 휴지가 쌓여 있던 사이드 박스 위는 깨끗했다. 눈가를 쓱쓱 문질렀다. 눈물이 찔끔찔끔 배어났다. 정말 왜 이러냐? 내가 다 울고 싶, 아니. 내가 다 답답했다.

“누군 울고 싶어서 우는 줄 알아…….”

숨을 들이켜며 입을 벌렸다. 들어오는 숨보다 목구멍 안쪽에서 나오는 소리가 더 컸다. 히뜩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눈물을 방울방울 단 채 훌쩍거리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나도 그만, 울고, 싶다고. 어떻게 좀 해 봐요.”

눈물을 콕콕 찍으며 오윤하를 닦달했다. 오윤하가 황당한 얼굴로 날 봤다.

“내가 뭘 어떻게 해?”

“팀장님 바람둥이잖아요. 여자 많이 울려 봤을 거 아니야.”

“뭐?”

오윤하가 방심한 틈을 타 눈물을 한껏 흡수한 물티슈를 다시 오윤하 얼굴에 던졌다. 이번엔 오윤하도 피하지 못해서 이마에 정통으로 맞고 떨어지는 물티슈를 그저…… 시무룩하게 봤다.

오윤하가 어떤 말을 하려고 입을 뗄 때, 갑자기 운전석 창문 밖에 시커먼 그림자가 졌다. 창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에 오윤하가 성질난 얼굴로 창문을 내렸다. 눈물을 닦으며 보니 아까 오윤하와 눈인사를 나눈 여자였다.

“안녕하세요.”

여자가 수줍게 웃으며 눈을 깜박였다. 불어터지고 쓰라린 눈으로 잠깐 봐도 귀엽고 예쁜 얼굴이었다. 거기에 나이도 몹시 어려 보였다. 스물하나, 스물둘?

“아, 네.”

오윤하가 좀 누그러진 투로 대답했다. 그래도 불퉁하긴 마찬가지였는데, 여자한텐 영 신경이 안 쓰인 모양이었다. 조수석에 처박혀 훌쩍거리는 내가 보이지도 않는지 오윤하의 잘나 빠진 얼굴을 보는 여자의 눈에선 하트가 마구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저, 날씨 추운데 커피 드시라고요.”

여자가 수줍게 웃으며 두 손에 들고 있던 커피를 내밀었다. 살짝 보니 컵 홀더 아래 뭔 글씨가 쓰인 게 보였다. 대충 보니 핸드폰 번호 같았다. 어이도 없고 한편으론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잠깐 눈인사를 주고받기만 해도 저런 미인이 바로 관심을 보이니 그것도 신기했다.

어쨌든 오윤하가 나 대신 저 미인과 크리스마스 동안 하하 호호한다면 나로선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오윤하가 쥐여 준 커피를 홀짝거리며 곧 피어오를 두 남녀의 핑크빛 기류를 상상했다. 그러다 깜짝 놀랐다.

“내가 커피를 싫어해서. 이만 비켜 줄래요?”

고개를 비스듬히 꺾은 채 여자를 보던 오윤하가 시큰둥하게 지껄였다.

“네?”

여자가 당황했다. 그러나 오윤하는 대단한 놈이었다.

“비켜 달라고요. 차 나가야 하니까.”

여자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창문을 띡 올리더니 내가 홀짝이던 커피를 강탈했다. 뜨겁지도 않은지 커피를 홀딱 마시며 한 손으로 핸들을 돌린다. 백미러로 황망하게 차 꽁무니를 보는 여자가 보였다. 내가 여자 대신 오윤하의 멱살을 잡아 줄까 고민하다 도로 돌려주는 커피를 얼떨결에 받아 들었다. 혀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신 오윤하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리 어디까지 얘기했죠?”

“어?”

얼빠진 채 대답하자 오윤하가 짜증을 냈다.

“하던 얘기는 마저 끝내야 할 거 아니야.”

그래 봤자 좀 전에 주고받던 것은 만담에 가까운 말다툼이었다. 의미도 없고 생각하고 뱉는 문장도 없었다. 커피를 만지작거리다가 다른 걸 물었다.

“방금 그 여자 커피는 왜 안 받았어요? 예쁘고, 어리고. 커피 잔에 번호 써넣은 거 보니까 마음 있어 보이던데.”

오윤하가 눈을 내리깔며 볼을 씰룩거렸다.

“……그걸 왜 이제 말해?”

진짜 뭐 이런 놈이 다 있지.

“그럼 지금이라도 차 돌려서 커피 받아 오던가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눈을 치켜뜬 오윤하가 입술을 씹었다. 그리고 얼마 뒤…… 아주 귀엽게 고개를 돌렸다.

“계속 울든가 말든가 마음대로 해!”

왜 나한테 성질인지 모를 일이었다.

오윤하가 운전하는 차는 거리낌 없이, 나는 듯이 움직였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도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도로는 한산했다. 창밖을 보기엔 구경할 것도 없어서 그냥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다 재원이에게 문자를 넣었다. 갑작스럽게 출장을 가게 됐으니 내일 집에 가서 라라 좀 봐 달란 거였다.

이제 입을 멋대로 뚫고 나오는 괴성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그쳤다고 하긴 뭐하게 눈물이 조금씩 글썽거렸다. 막혔던 댐이 터진 것도 아니고 이게 뭐람. 답장을 기다리며 핸드폰 화면을 껐다가 켜길 반복할 때였다.

계속 조용하던 오윤하가 운을 뗐다. 그러곤 한쪽 손으로 골이 팬 미간을 매만졌다.

“그래서 언제 그칠 건데요.”

골칫덩이 취급하듯 한숨을 동반한 말에 오윤하를 노려봤다. 눈두덩이에 얼얼한 통증이 앉았다. 그러다 슬쩍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이젠 민망하다 못해 속된 말로 쪽팔렸다.

“이제 안 울어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나도 모르게 코를 훌쩍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를 일이었다. 오윤하 몰래 허벅지를 꼬집었다. 아프게 꼬집어 앓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걸 오해했는지 오윤하의 한숨이 좀 더 깊어졌다. 아예 한쪽 팔을 창틀에 걸치고 이마를 매만지던 오윤하가 불쑥 말했다.

“확실히 울린 여잔 많아.”

힐끔거리는 시선이 다녀갔다.

“근데 내 앞에서 다른 남자 때문에 운 여잔 없었거든.”

나름 심각한 어조인데 말은 가볍기 그지없는 바람둥이라 그냥 할 말을 잃었다. 코를 먼저 풀었다. 눈물보다 투명한 콧물이 쏟아졌다. 물티슈를 야무지게 접었다. 그러곤 하나 더 뽑다 무겁게 눈꺼풀을 들썩였다. 얼마나 많이 썼는지 두툼했던 물티슈가 그새 얄팍해졌다.

“팀장님 때문에 울었던 여잔 어떻게 달랬는데요.”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따로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냥 물어봤다. 한 손은 핸들, 한 손은 이마에 둔 자세 그대로 오윤하가 어깨를 들썩였다.

“뺨 때리고 알아서 눈물 그치던데.”

……참 자랑이다 그래. 보이지 않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곤 창문을 조금 열었다. 따뜻하게 쏟아지는 히터 바람을 몰아내고 차디찬 겨울바람이 쏟아졌다. 어느덧 도로라기엔 좁은 시골길을 달리는 중이었다. 바람은 눈물까지 얼려 버릴 듯 시원했다. 그래서였는지 상훈 선배나 주원 씨를 생각하는데도 마음이 아까보단 가벼웠다.

이제 와서 고민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생각을 멈출 순 없었다. 내 사랑이 우스웠을까. 뒤늦게라도 손을 뻗으면 얼마든지 내가 그 품으로 뛰어가 안길 거라고 생각한 걸까. 지금까지 생각해 온 바였다. 사랑해서 잘해 주고 사랑해서 사랑하는 게 나쁜 걸까. 그럼 그 사람들은 내가 그렇게 만든 걸까, 하는 생각.

바보 같은 걸 알지만 세상엔 연애에 통달한 듯 충고를 빙자한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하다못해 TV를 틀어도 소위 말하는 ‘밀당’이 필수라는 듯 말하는 사람이 넘쳐 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밀고 당기는 게 없으면 상대가 질리는 건 당연하다고 말했다.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으려 해도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었다.

“……계속 이럴 거면 그 새끼들 뺨이라도 때리던가.”

따지면 슬프고 억울한 생각을 하는데 방금까지도 그칠 기세 없이 흐르던 눈물이 뚝 끊겼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길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나 참, 놀러 가는 데 이게 뭐야?”

방금 내가 이상한 말을 들은 거 같은데. 그런 표정으로 오윤하를 봤다. 뭔 생각을 하는지 주먹 쥔 손을 입가에 대고 있던 오윤하가 차를 세웠다. 가로등이 뒤에 하나, 저 앞에 하나. 그렇게 어둡진 않았다. 안전벨트를 푼 오윤하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 그럼 나라도 때리던가.”

멍하니 오윤하의 얼굴을 봤다. 옆얼굴과 높이 솟은 콧대 부근이 멀리서 퍼진 옅은 주황빛에 젖어 있었다. 눈을 깜박이다 깜짝 놀랐다. 눈을 감고 기다리던 갑자기 눈을 뜨고 오윤하가 검지를 내 얼굴 앞에 대고 흔들었다.

“한 대만이야. 그리고, 이 나가면 고소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때리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그렇게 윽박지른 오윤하가 불퉁한 표정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가만히 숨을 쉬었다. 조금 열어 놓은 창문에서 이따금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내 숨결이 닿을 때마다 오윤하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웃기고, 어이없고, 철도 없고.

“팀장님.”

오윤하의 뺨에 손을 올렸다. 오윤하도 눈을 떴다. 따끔한 따귀 한방 대신 내려앉은 게 가벼운 손길이라 그런지 의아하단 얼굴이었다. 오윤하의 뺨을 매만지며 입을 뗐다.

“그냥 집에 보내 줘요. 나 피곤해.”

손은 금방 떨어졌다. 그러나 오윤하는 그대로였다. 왜 저렇게 쳐다보나 부담스러워 내가 괜히 문 쪽으로 등을 붙일 때야 오윤하가 움직였다. 운전대를 다시 잡겠거니 했다. 한참 엉엉 운 탓에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다 와 놓고 뭘 또 간대.”

오윤하가 투덜거렸다. 귀를 의심했다.

“…….”

“…….”

“뭐라고요?”

오윤하가 운전석 문을 열고 훌쩍 내렸다. 그러곤 문을 닫기 전에 나를 힐끔 쳐다봤다.

“다 왔으니까 잠깐 내려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조수석에서 내렸다. 조금 전보다 한층 더 지끈거리는 게 아무래도 오윤하 때문이 확실했다. 내리자마자 커다란 바위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밑에 오윤하를 깔아 버리면 지금보단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한숨 비슷하게 숨을 흘리며 고개를 들다 그만 어, 하고 말았다.

인공적인 건축물이라곤 가로등뿐이었다. 조그맣게 입을 벌렸다. 알 수 없는 절대자가 나를 잡아다 공들여 그린 그림책 속에 집어넣은 것 같았다. 내 옆에 있는 오윤하의 비싼 외제 차가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고개를 찬찬히 돌리자 저 끝까지 뛰면 십오 분은 걸린 것 같은 평원이 눈에 들어왔다. 누군가 공들여 만든 것처럼 그 평원을 거대한 소나무들이 동그랗게 감싸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면 싱그러운 솔잎 향과 함께 눈이 펑펑 내릴 때나 맡을 수 있는 서늘한 물 냄새가 났다.

눈앞에 펼쳐진 설원엔 누군가 지나다닌 흔적이 전혀 없었다. 도시에도 아직 눈이 한가득 쌓인 곳이 종종 있었다. 대부분 흙이나 먼지가 뒤섞여 본연의 색을 잃어버린 모습이 대부분 이었다. 신이 세상 가장 순결한 것들만 모인 곳을 만들어라, 명한 것처럼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을 덮은 채 보석처럼 빛났다. 앞서 걷고 있던 오윤하가 히죽 웃으며 돌아봤다.

“내가 마음에 들 거라고 했잖아.”

능글거리는 지껄임이 지금만큼은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도시 생활에 익숙하다 못해 찌든 탓에 언제나 눈은 내게 골칫덩이였을 뿐이었다. 첫눈이라는 감상도 십 분을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출근길과는 전혀 관련 없는, 하다못해 사소한 일상과도 전혀 관련 없을 거대한 설원은 나를 압도하다 못해 가슴 한편을 짜릿하게 만들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무릎이 스르르 굽어졌다. 손에 닿는 눈은 부슬부슬하니 보드라웠다. 차갑지만 않으면 마치 목화솜을 한가득 부어 놓은 것이라 해도 믿었을 터였다. 모래 장난을 하는 것처럼 손이 시린 줄도 모르고 눈을 쥐었다 놓길 반복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팀장님, 여긴.”

이런 곳은 어떻게 알았냐고 물을 참이었다. 말을 하다 그쳤다. 오윤하가 시야에서 사라진 까닭이었다. 도깨비도 아니고 어디로 갔을까. 두리번거리다 너무 순식간에 오윤하가 없어진 게 이상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발을 엉거주춤 뗐다. 눈이 깊게 쌓여 조금 더 들어갔는데도 금세 무릎까지 발이 푹푹 빠졌다. 팀장님, 하고 다시 부르려다 으악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엄마야!”

얼굴을 때린 눈 뭉치가 부스스 흩어졌다. 눈을 깔고 앉은 엉덩이가 축축했다. 뺨을 매만지다 고개를 돌렸다. 가장 가까운, 아직 울창한 소나무들과 비교되게 가지만 남은 나무 뒤에서 오윤하가 종종 입는 낙엽색의 코트 자락이 보였다.

“뭐 하는…….”

입을 떼기 무섭게 다시 눈덩이가 날아왔다. 이번 것은 제법 둔탁했다. 아프진 않았지만, 짜증이 나기엔 충분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대체 뭐야. 한심하게 생각하며 겨우 중심을 잡고 일어났다. 엉덩이를 털며 입을 뗐다.

“하지 말아요.”

대답 대신 눈덩이가 하나 더 날아왔다. 골반 부근을 맞고 떨어진 눈덩이를 보자니 성질이 팍 났다.

“하지 말라니까?”

버럭 낸 짜증에 오윤하가 나무 뒤에서 나타났다. 눈치를 보듯 나를 훑더니 두 손을 으쓱했다.

“내가 뭘?”

방금까지도 멀쩡하던 소매에 눈이 묻은 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아름다운 설원이고 뭐고 기분을 다시 잡쳤다. 오윤하는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나? 투덜거리며 차 쪽으로 다가가다 다시 엎어졌다.

“야!”

마치 저격수처럼 낮게 쭈그린 채 눈덩이를 던진 오윤하가 다시 제 두 손을 얼굴 옆으로 들고 흔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하지 마시라고요.”

오윤하가 이번에 한 대답은 모른 척이 아니었다. 하지만 뻔뻔하기론 더 했다.

“싫은데.”

거기서 울컥했다. 오윤하는 내가 이성을 잃어버리게 하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짐이 분명했다. 아니, 여기까지 오는 두 시간 가까이 엉엉 울게 했으면 됐지! 안 그래도 오윤하 앞에서 어린애처럼 소리 내며 우는 것도 모자라 계속 훌쩍거렸던 게 민망하던 터라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야, 이! 오윤하!”

“아유 윤 대리 안 되겠어. 저번부터 자꾸 성질나면 상사 이름을 마음대로 부르고 말이야.”

내가 던진 눈 뭉치는 오윤하의 발치에도 못 갔다. 그걸 놀리듯 양아치처럼 휘파람을 분 오윤하가 이상한 각도로 몸을 움직였다. 자세히 보니 춤이었다. 거기서 이성이 뚝 끊겼다. 얼굴을 싸늘하게 굳힌 채 일어났다. 그러곤 오윤하와 좀 더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등을 굽힌 채 어깨만 들썩였다.

“아니, 왜. 또 울어?”

오윤하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박사박, 눈이 밟히는 소리가 조심스러웠다. 뺨을 훔치며 재빨리 일어났다. 오윤하가 기겁하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웅크린 채 만들었던 눈 뭉치를 품에 안고 마구 던졌다. 거리가 가까워 명중률이 칠십 프로는 됐다.

“그만. 그만! 아, 치사하게 진짜!”

눈 위로 엎어진 오윤하가 항복이라는 듯 두 손을 높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입은 잘도 살아 움직였다.

“하지 말라는 데도 했던 건 누군데.”

마지막 남은 것까지 모조리 던지고 손을 털었다. 슬금슬금 다시 눈 뭉치를 만들었다. 언제 오윤하가 다시 돌변해서 눈을 던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곁눈질로 노려봤다. 성질이 빡, 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오윤하가 코트에 잔뜩 묻은 눈을 털며 일어났다. 저 깔끔한 성정에 얼마나 짜증이 날까 생각하자 괜히 입술이 씰룩거렸다.

“이제 그만 해요. 나 진짜 피곤해요.”

웃을까 말까 하다 입을 다물었다. 내가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어린 나이도 아닌데 섹스 파트너로 지내는 직장 상사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강원도까지 와서 눈싸움이라니. 아마 세희에게 말한다면 네가 그랬다고? 꿈꾼 게 아니고? 하고 웃어넘길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눈 위에 선 오윤하가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허무한 웃음이 빠져나왔다. 애초에 오윤하와 잠만 자는 사이를 하자고 결심했던 것부터가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오윤하와 관련된 일들은 모두 충동과 연관되었다. 그리고 충동은 내가 바라는 삶, 그리고 나와는 백 킬로 정도 떨어진 단어였다. 참 이상하지. 이게 다 상훈 선배나 주원 씨 때문인 걸까. 생각은 어느새 흘러가 신은 왜 외로움이라는 걸 만들었을까, 까지 흘렀다.

대학을 다닐 때 사회와 심리학이라는 과목을 들은 적이 있었다. 출석만 잘하면 점수가 잘 나온다는 선배들의 추천에 들은 교양이었다. 대학 다닐 때 교양으로 들었던 모든 수업의 내용을 기억하는 건 아니었지만 거기서 들었던 하나의 이론은 아직 기억하고 있다.

태초의 인간은 지금과 달리 발전한 도구도 없을뿐더러 다른 맹수들이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이나 발톱도 없었다. 하여 유전자는 인간의 감정을 움직였다. 외로움을 느끼게 만들어 다른 인간을 만나고 함께 지낼 때만 평화로움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 맹수들은 여럿이 뭉쳐 대항하는 인간을 먹이로 포기했다. 그렇다. 그 이론에 따르면 외로움은 그저 생존하려는 유전자의 수작이었다.

그저 이론일 뿐이지만 내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인간이 혼자 다녀도 목숨을 위협받지도 않는 세상이 왔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지닌 맹수들은 도구를 지닌 인간들에 의해 포획되어 동물원에 갇히고 정해진 구역에 갇혔다. 그런 역사가 백 년 가까이 되었는데도 인간은 어째서 외로움을 느끼는 걸까. 왜, 나와 다른 인간의 체온이 있어야 하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하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어, 어.”

오윤하가 마치 멧돼지처럼 내게 돌진하는 까닭이었다. 어, 어. 만 반복하다 나를 덮치는 오윤하에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푹신한 눈이 받쳐 주는 까닭에 아프진 않았다. 오윤하와 엎치락뒤치락하다 눈밭을 데굴데굴 굴렀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아름답던 설원에 나와 오윤하의 흔적이 남는 순간이었다.

“아, 오윤하 진짜!”

신발은 이미 설원에 발을 디뎠을 때부터 버렸지만 옷까지 버릴 생각은 없었던 터라 온몸에 스며드는 축축하고 싸늘한 촉감에 말을 버럭 뱉었다.

“팀장님은 어느 때고 꼭 자기 마음대로 해야 해요? 내 기분 따윈 생각도 안 하…….”

엎치락뒤치락하는 끝에 오윤하가 나를 누르고 올라탔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애초에 오윤하를 힘으로 이길 순 없었지만 그게 또 괜히 분했다. 나를 짓누른 채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오윤하가 환하게 웃었다.

“이제 눈물 그쳤네.”

거기서 입을 다물었다. 오윤하가 꼭……. 소년처럼 웃고 있었다. 그 옆으로 눈송이가 희미하게 흩날렸다. 오윤하가 고개를 숙여 눈가에 입을 맞추듯 핥아 올렸다.

라라가 뺨을 핥은 적은 많았다. 그리고 고양이의 혀는 까슬하고 오래 핥으면 아팠다. 그러나 사람의 혀는 잠깐 닿는 것도 부드럽고 따뜻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눈을 깔고 누운 상태로 오윤하의 얼굴만 올려다봤다.

“짜다.”

혀를 내민 오윤하가 인상을 쓴 채 제 손을 혀로 훑었다. 깔고 누운 눈 아래서 어떤 냄새가 올라왔다. 해가 다 지고 가로등에 의지하는 마당에 햇볕 냄새가 난다면 이상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햇볕의 냄새였다. 고개를 돌렸다.

햇볕의 냄새를 찾아 파고들면 그 밑엔 오윤하와 내가 뒹구느라 파헤친 땅이 있었다. 겨우내 얼어 버린 흙이었으나 축축하게 젖은 채 봄이 오면 얼마든지 싹을 틔우겠다고 자신하는 듯 흙이 향기를 마구 풍겼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팀장님.”

응? 하듯 오윤하가 날 봤다.

“팀장님은…….”

침을 꿀꺽 삼켰다. 내내 운 탓인지 침을 넘기는데도 목이 껄끄러웠다.

“사랑할 때 어떤 얼굴을 해요?”

순간 오윤하가 어딜 얻어맞은 얼굴을 했다. 나는 어쩐지 오윤하가 하지 않는 대답을 알 것 같았다. 오윤하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졌다. 그 손은 바닥으로 추락하는 대신 어깨보다 좀 더 높을 곳을 향해 올라갔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난 사랑 같은 거 안 해.”

순간 손이 움직임을 멈췄다.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오윤하를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윤하는 나를 여전히 깔고 누운 채, 새빨개진 손으로 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대답하기 영 귀찮다는 것 같기도, 영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것 같기도 했다. 오윤하가 귀를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그러곤 시뻘건 손끝에 입김을 불었다.

“해 본 적도 없고.”

얼마간 오윤하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두운 밤에도 존재가 분명한 갈색 눈동자나 매끈한 턱선, 기다란 속눈썹 아래 감춰졌다가 드러나길 반복하는 눈두덩이. 그러다 나도 모르게…….

“푸흡.”

웃었다.

“하하하.”

어찌나 웃긴지 배가 아프게 당겼다. 왜 웃냐는 듯 멀뚱히 보는 오윤하를 밀치고도 모자라 눈밭을 오래 뒹굴었다. 턱으로 침이 떨어질 정도였다. 턱에 흐른 침을 문지르고도 계속 깔깔거리자 오윤하가 성질을 냈다.

“왜 웃어? 물어봐서 대답한 건데?”

그걸 몰라서 묻나? 숨을 허덕이며 찔끔 고인 눈물을 닦았다. 입이 활짝 벌어졌다.

“하하하. 자기가 드라마 남자 주인공이야 뭐야. 진짜 웃겨.”

그렇게 말하고도 웃음이 안 그쳤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그럴 만했다. 심각하게 물었는데 날아온 게 유치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 같은 대사라면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하여 직접 묻고 대답을 들은 나로선 웃음이 좀 더 길 수밖에 없었다.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허공을 갈랐다. 턱이며 배가 당겨 데굴데굴 굴렀다.

“그만 웃어.”

기분 상한 얼굴로 오윤하가 따졌다.

“생각, 생각해 보고…….”

대답할 때도 웃겨서 말이 끊겨 나왔다. 그러다 웃음을 딱 그쳤다. 오윤하와 눈이 마주쳤다. 얼얼하던 턱과 숨을 급하게 몰아쉬느라 바빴던 배의 통증이 가셨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팀장님.”

“뭐요.”

오윤하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설마. 하며 말을 이었다.

“여기서 하면 동상 걸려요.”

내 옷 속으로 쑥 들어와 살을 주물럭거리는 오윤하의 손등을 꼬집었다. 드러난 배가 시원하다 못해 차가웠다. 주물러지는 살도 땡땡 얼어 있는 오윤하의 손 때문에 춥긴 마찬가지였다. 슬그머니 오윤하의 손을 잡아 뺐다. 생각 외로 오윤하가 쉽게 밀려났다. 아니, 쉽게 밀려나는 척했다.

덥석 입술이 깨물렸다. 순식간에 밀고 들어온 혀가 이리저리 입 안을 헤집다 혀까지 쪽 빨아들이는 것에 정신이 혼미했다. 금세 숨이 엇박자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손의 힘이 풀려 녹다운된 채 늘어질 때까지 키스를 퍼붓던 오윤하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진 모르겠는데. 본인 걱정이나 하지 그래.”

눈 속으로 파묻히기 직전인 내 턱을 쥔 오윤하가 제 좋을 대로 각도를 만들었다. 눈을 마주친 그 상태 그대로 옷 속으로 다시 손이 파고들었다. 나름 땅땅하게 얼었다고 생각했던 엉덩이가 오윤하가 주무르는 대로 모양을 바꿨다. 고개를 숙인 오윤하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윤 대리 앞뒤로 다 따먹고 입에 쌀 생각이거든.”

입을 떡 벌렸다. 화를 내려면 화만 낼 거지, 화를 내면서 엉덩이를 주무르는 남자는 처음 봤다.

“무슨, 여기. 잠깐!”

그것보다, 여긴 야외였다. 아무리 깜깜하고 사람이 없어도 야외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동상에 걸린다는 말을 주장하며 계속 오윤하를 밀쳐 내다 기어이 오윤하의 손에 두 손이 잡힌 채 다시 벌렁 눕혀졌다.

“좀 있어 봐. 막상 해 보면 괜찮을 거라니까.”

어처구니없는 말을 하며 목에 입을 맞추는 오윤하였다. 가만히 하늘을 보다…… 이상하게 갑자기 또 웃음이 나왔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 같은 풍경도, 서른둘 나이에 어린애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는 사실도, 그리고 사랑을 해 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는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도……. 오윤하의 뺨을 쓰다듬었다. 한참 내 귀며 목을 깨물기 바쁘던 오윤하가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냐는 듯 흠칫했다. 오윤하가 눈을 깜박일 때마다 속눈썹이 손끝을 간질였다.

“절대 안 돼.”

양쪽 뺨이 꼬집혀 늘어난 꼴에도 오윤하는 여전히 잘생긴 얼굴이었다.

가로등이 드문드문 이어지던 길이 완전히 끝난 뒤에는 어두컴컴한 설원만 반복되었다. 다 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어서 십 분 정도 가자 울창한 겨울나무 사이로 지붕이 슬슬 드러났다. 사방이 어두컴컴한 데다 젖은 옷자락에 바람이 휘감기자 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감각이 찾아오는 바람에 뭐가 뭐고 어디가 어딘지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오윤하의 뒤만 빠르게 쫓았다. 구석 빈 화분에서 열쇠를 꺼낸 오윤하는 마치 제집처럼 거침없이 들어갔다. 오윤하의 재력을 생각하면 이런 시골에 별장 하나쯤이야 우습긴 했다.

그래도 좀 놀랍긴 했다. 불을 켜자마자 드러난 집 안을 두리번거리다 나도 모르게 오윤하에 대한 편견이 있던가 고민하기까지 했다. 트렌디하진 않아도 별장은 확실히 초라하거나 촌스럽다는 단어를 붙이긴 어려웠다. 어두워서 지금은 잘 안 보이긴 해도 바깥의 숲을 마치 정원처럼 감상하도록 설계한 거실 전면의 유리 벽부터 작은 벽난로 앞을 둥그렇게 둘러싼 크기도 모양도, 색도 제각각인 안락의자와 쿠션을 보면 누군가 아주 공을 들여 터를 잡고 인테리어까지 힘을 쓴 게 분명했다. 비록 오래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듯 빈집에서나 느낄 수 있는 서늘한 공기가 감돌고는 있었지만.

서랍장 위의 소품 하나까지 누군가의 손길을 아주 많이 탄 오래된 물건들이 보였다. 그 옆으론 액자도 몇 개 세워져 있었는데 특히나 분위기가 근사한 노부부 품에 안겨 있는, 얌전하고 착해 보이는 어린아이 사진에 눈길이 갔다. 뻑뻑한 눈을 비비적거리며 잠깐 들여다보다 그냥 돌아섰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기웃거리는 날 오윤하가 덥석 잡아 이끌었다. 계단 뒤로 돌아가자 대충 보면 벽과 비슷해 지나칠 것 같은 미닫이문이 나왔다. 문 너머엔 거실처럼 근사하게 설원을 감상할 수 있는 전면 유리창과 셋이 자도 충분할 것 같은 고풍스러운 침대가 나왔다. 유리창 너머엔 바닥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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