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관심이 없다 (2권)3화 (6/17)

6장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당시 나는 피아노 학원을 하나 다녔다. 학교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조용한 주택가 골목에 자리한 곳으로 나뿐만 아니라 내 또래 아이들은 거진 그곳에서 피아노를 배웠다. 원장 선생님은 마치 가발처럼 풍성한 파마머리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는데, 우아한 말투와 달리 성격이 썩 좋진 못했다.

자그마한 쇠막대 자를 들고 다니며 피아노 치는 아이들 손등을 내려치는 건 예사였고 오 분이라도 정해진 레슨 시간에 늦으면 다들 보는 곳에 앉혀 놓고 손을 드는 벌을 줬다. 벌을 받는 아이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벌겠다. 팔이 아픈 것보다 아는 얼굴들이 이따금 힐끔거리는 시선에 수치심으로 달아오른 거였다. 그런 벌을 받은 아이들은 피아노를 그만 배우고 싶다거나 학원을 옮기고 싶다며 부모님을 졸랐으나 돌아오는 말은 그저 꾀부리지 말고 열심히 해, 선생님이 엄하니 애들 버릇을 잘 잡네. 가 전부였다.

지각뿐만 아니라 사소한 일들에도 트집을 잡아 벌을 세우기도 했다. 어느 날 내가 벌을 받았던 이유는 먹다 남은 슬러시 컵을 학원에 들고 왔다는 것이었다. 힐끔힐끔 오가는 시선들과 아프다 못해 뻐근한 어깨, 밀려오는 창피함에 내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도 똑같이 벌건 얼굴로 피아노 학원을 나섰다. 집으로 가는 건널목에서 찔끔 눈물도 몇 방울 흘렸다.

다른 아이들이 피아노 학원 벗어나기를 실패하는 걸 수시로 목격해 왔기 때문에, 나는 부모님을 조르는 대신 피아노 학원에서 단짝으로 지내던 수진이와 함께 땡땡이를 계획했다. 계획은 단순했다. 슬러시를 제일 큰 컵으로 산 뒤, 피아노 학원이 아니라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만화책 대여점에 가서 놀자는 거였다.

만화책 대여점 사장님은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였고 아이들을 예뻐해서 빌려 가지도 않고 책만 뒤적거리며 노는 아이들을 이따금 모른 척 눈감아 주기도 했다. 계획이라고 할 것도 없으니 그냥 실행했고, 처음 하는 일탈은 너무나 흥분되고 즐거웠다. 거기에 대여점 할머니가 치마에서 쿰쿰한 사탕 하나를 꺼내 줬다. 그렇게 한 번이 두 번, 두 번이 세 번이 되어 가는 어느 날이었다.

수진이와 돈을 합쳐 대여점에서 커다란 만화 잡지를 빌렸고, 가위바위보에서 이긴 덕분에 내가 먼저 보고 내일 수진이에게 건네주기로 했다. 아빠는 회사에 있을 시간이었고 엄마는 재원이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시간이라 걸음은 마냥 신나 가볍기만 했다. 그리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심각한 얼굴로 거실에 마주 앉아 있는 부모님을 발견했다.

내가 왜 그때를 회상하느냐면, 지금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떡 벌린 과장님을 보자니 심장이 내려앉는 게 그때 부모님을 마주쳤던 기분이 마냥 똑같지는 않아도 몹시 유사하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무릎이 후들거리고 정수리부터 아주 찬 뭔가가 훅 끼얹어진 기분. 무슨 말을 하려고 해도 목구멍이 조여들어 종국엔 숨까지 쉬기 어려웠던 그 순간.

“오, 오윤, 오.”

단어의 파편 몇 개만 내놓던 과장님이 몹시 떨리는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부릅떠진 눈이며 벌어진 콧구멍, 과장님의 얼굴은 동그라미가 가득했다는 수식어가 딱 어울렸다. 과장님의 충격은 입을 틀어막은 것에서 끝나지 않았다. 입을 틀어막은 손만큼이나 떨리는 나머지 손으로 나와 오윤하를 번갈아 가리키다 종국엔 눈을 질끈 감기도 했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놀란 가슴이 차분해진 건 아니었지만 차분한 척은 할 수 있었다.

“팀장님?”

그리고 오윤하를 돌아봤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나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골치 아프게 됐단 표정을 짓고 있던 오윤하가 내 말에 눈을 크게 끔벅였다. 과장님에게 안 보일 각도로 입을 벙긋거렸다. 내 입모양을 유심히 본 오윤하가 어, 하는 소리를 내자마자 바로 말했다.

“저, 그런데 허리에 손 좀 떼 주시겠어요.”

잠깐이지만 오윤하의 얼굴에 재밌단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속으로 오윤하의 멱살을 잡아 흔드는 상상을 하며 뭐 묻은 것도 없는 옷자락을 털었다. 오윤하는 그걸 지켜보다 팔짱을 꼈다.

“윤 대리 여기 어쩐 일이에요.”

“식사하러 왔어요.”

“일행이 안 보이는데?”

나도 모르게 오윤하를 노려봤다. 누가 재밌자고 팔자에도 없는 상황극을 하는 줄 아나? 싶었던 것이다. 내 뺨에 닿는 과장님의 시선을 의식하고 헛기침했다.

“큼, 먼저 주차장으로 내려갔어요.”

그사이 과장님이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뗐다. 그러곤 손을 허둥거리며 재빨리 나와 오윤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잠깐, 잠깐!”

과장님의 행동이 우스웠는지 볼이 빵빵한 꼬마가 팔을 휘적거리며 제 아빠의 행동을 따라 했다. 눈이 마주쳐서 잠깐 웃어 주고 말았다. 속으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난 지금부터 너희 아빠 코를 눈 뜨고 베어 갈 거야…….

“지금 두 사람 무슨 말 하는 거예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글쎄, 저도 잘…….”

그리고 오윤하에게 칼자루를 넘겼다. 그때까지도 히죽거리고 있던 오윤하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영 엉뚱한 말을 꺼냈다.

“요즘 여자들 사이에 이런 옷이 유행인가요?”

심지어 내 코트 자락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오윤하가 나와 봤자 당나라 군대처럼 빈둥거리기만 하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그날로 동대문 옷 장수가 되겠다고 선언한들 내 알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 상황이 곤란한 건 피차 마찬가지일 것 아닌가.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오윤하가 더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말을 끊고 도망칠 만한 말이 뭐가 있을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흠.”

내 코트 자락을 놓은 오윤하가 천천히 호텔 로비를 둘러봤다.

“혹시 이거랑 비슷한 코트 입은 여자 못 봤어요? 머리 길이도 윤 대리랑 비슷한데.”

이제야 오윤하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다. 헛기침하는 척 과장님을 살폈다. 과장님은 얼빠진 얼굴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다 막 안아 달라는 성화를 못 이기고 아이를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글쎄요. 저는 방금 로비로 와서.”

“형은?”

과장님이 긴가민가한, 멍청한 얼굴로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니, 나도 잘 모르겠는데.”

한 번 더 로비를 훑어보는 척한 오윤하가 능청을 떨었다.

“어디 갔지. 먼저 올라갔나.”

잠깐 오윤하와 과장님을 봤다. 오윤하가 친근하게 내놓은 ‘형’이라는 호칭도 그랬고 얼이 빠진 과장님의 대답이 반말이었다. 둘이 사적으로 아는 사이인가 하는 호기심이 잠깐 들다 그쳤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어쨌든,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일행이 기다릴 것 같아서요.”

오윤하가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오윤하가 치근덕거리기 전엔 항상 봤던, 무신경한 얼굴이었다. 개월 수로 따지면 그런 표정을 본 시간이 훨씬 기니 그쪽이 더 익숙해야 하는데 어쩐지 낯설어 시선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호텔에서 무슨 정신으로 빠져나왔는지 모르겠다. 내가 자리를 뜨고 나서도 과장님에게 좀 더 붙잡혀 있던 오윤하가 뒤늦게 나와 나를 차에 태웠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내가 사는 빌라 단지 앞이었다. 오윤하가 틀어 놨는지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경북 일대에서 수억 원을 갈취한 부부 사기단이 검거되었습니다. 이들은 피해자에게 접근한 뒤 각자 모르는 사이인 척 연극을 하며…….」

손을 뻗어 라디오를 껐다. 그러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각한 얼굴로 창턱에 팔을 기대고 있는 오윤하를 봤다. 과장님을 속여 넘기는 게 재밌다는 듯 히죽거릴 땐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는데 막상 저렇게 있으니 자기도 걱정이 되긴 되나 보다, 싶었다.

일단 얼렁뚱땅 연극을 하며 넘어가긴 했지만 목격한 게 있으니 과장님도 쉬이 의심을 거두진 않을 것이다. 오윤하와 이렇게 만나는 걸 이젠 다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닌가까지 고민이 파고들었을 때 오윤하가 무거운 침음성을 내며 입을 벌렸다.

“아, 배고파.”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윤하를 봤다. 동시에 오윤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

“…….”

할 말을 잃고 쳐다보자 오윤하가 어깨를 들썩였다.

“뭐.”

그 뻔뻔한 말이 직격타였다. 목구멍까지 차올라 끓던 것이 기어코 튀어 나갔다. 불식간에 멱살을 붙잡힌 오윤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배고파? 지금 배고프단 말이 나와요?”

오윤하의 입에서 성질이 튀어나오기 전, 내가 먼저 오윤하를 마구잡이로 흔들기 시작했다. 여태 쌓였던 감정이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야 이 나쁜 놈아! 지금 까닥 잘못하면 누군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생겼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폭력적인 사람이냐. 그건 절대 아니다. 나를 아는 지인들이나 가족들에게 물어봐도 한결같이 대답할 것이고 스스로의 인생을 돌이켜 봐도 그렇다. 하다못해 엄마가 돌아가신 뒤 내가 키우다시피 했던 재원이가 말을 안 들을 때도 매를 들어 본 적은 없었다. 내가 큰 소리를 내며 누군가와 싸웠던 건 중학교 때, 그것도 딱 한 번이 전부였다.

“야! 네 인생에서 나는 그냥 몇 번 만나다 말 백서른한 번째 여자라 사람들이 쑥덕거릴 거 아무렇지 않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란 말이야!”

그런데 오윤하를 대할 때는 여태 사용했던 어떤 방식도 안 먹히니 자꾸만 손이 나갔다. 혼비백산한 얼굴로 흔들리며 창문에 한 번, 천장에 한 번 머리를 박은 오윤하가 뒤늦게 내 손목을 붙잡고 떼어 냈다. 힘으로 오윤하를 이길 수는 없어 어쩔 수 없이 물러나긴 했지만, 아직도 분통이 안 가셔 숨이 거칠었다.

“왜 나한테 화풀이야. 내가 서 과장 거기로 불렀어요?”

창문에 박은 옆통수를 만져 보던 오윤하가 이를 바득 갈며 따졌다. 잘 걸렸다 싶어 눈을 번쩍 빛냈다.

“그럼 로비에서 왜 허리에 손 올렸는지 말해 봐.”

무슨 말을 하든 바로 맞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 씩씩거리던 오윤하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해! 말 안 해?”

따지며 다시 오윤하를 쥐어뜯을 기회를 노렸다. 그런 눈치는 또 빠른 오윤하가 얼른 내 어깨를 시트에 내리눌렀다. 그러곤 시무룩하게 날 봤다.

“난들 그게 서 과장인 줄 알았나, 난 그냥 웬 남자랑 손 붙잡고 하하 호호하길래…….”

이게 진짜!

“이렇게 내 인생에 똥물 튈 줄 알았으면 쫓아다니건 말건 그냥 내버려 뒀어야 했어. 너 좋다는 여자 한 트럭이라며, 나한테 왜 그러냐 진짜…….”

화가 너무 나니 눈물까지 글썽했다. 코를 훌쩍이자 오윤하가 슬그머니 내 손목을 놓았다.

“상황만 이렇지 않았으면 나도 윤 대리한테 그렇게까진 안 했지. 그리고 다 끝난 얘기를 지금 와서 또, 왜.”

상황 같은 소리하네. 그냥 자기 마음대로 안 되니까 짜증 나서 더 그런 거면서. 오윤하와 그냥 말없이 섹스만 했다면 좋았겠지만 일련의 작고 사사로운 사건을 통해 오윤하가 싫어, 싫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 쫓아가고 그 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청개구리 기질이 있단 걸 일찌감치 파악했던 터라 그냥 한숨만 나왔다. 얼마간 더 오윤하를 노려보다 핸드백을 챙겨서 내렸다.

“어디 가요.”

내가 다시 폭주할까 무서운지 거리를 좀 벌리고 따라오던 오윤하가 시무룩하게 따졌다. 씩씩거리며 걷다 눈길에 한 번 미끄러질 뻔한 뒤라 속도는 느려지긴 했지만 이대로 영영 오윤하와 멀어지고 싶은 마음은 여전했다.

“따라오지 말아요. 그리고 나 쫓아오지도 말아요.”

“언제까지?”

입술을 물고 오윤하를 노려봤다.

“평생!”

오윤하가 입술을 삐죽였다.

“아니, 과장님한텐 내가 잘 얘기할 거고. 나도 윤 대리랑 이렇게 만나는 거에 대한 변명 생각 안 해 놓고 수작 건 거 아니니까 화 좀 풀지.”

퍽이나 그렇겠다.

“뭐라고 할 건데요.”

여전히 입술을 삐죽이고 있던 오윤하가 불퉁하게 대답했다.

“그건 윤 대리가 알 거 없고.”

한 번 더 멱살을 잡아야 하나 고민할 때 오윤하가 약간 경사진 비탈길을 미끄럼틀 타듯 내려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내 핸드백을 붙잡았다.

“……이거 놔요.”

“싫어.”

“놓으라니까?”

“아, 싫어.”

내 핸드백을 가지고 옥신각신, 지나가는 아줌마가 신기한 구경 하듯 빤히 쳐다보며 지나가는 것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직 가시지 않은 화기와 더불어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오늘 하려던 말은 하지도 못했는데 그냥 들어가면 어떻게 해요?”

“하려던 말이 뭐든, 평생 들을 생각 없으니까 좀 놓으라고요.”

방금 봤던 아줌마가 한 번 더 앞을 지나갔다. 이번엔 걸음을 멈추고 우리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기까지 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곤 핸드백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오윤하가 순간 중심을 못 찾고 휘청거렸다. 그걸 한심하게 쳐다보며 손을 털었다.

“그럼 너 가지던가.”

톡 쏘아붙이고 몸을 돌렸다. 아무리 인생이 바라는 대로 되는 거 하나 없는 미지로 이루어져 있다지만 오윤하는 그 범주를 넘어서다 못해 내 인생에 닥친 재앙처럼 느껴졌다. 미로에 갇혔는데 유일하게 갈 수 있는 길에 괴물이 버티고 선 기분이었다.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욕설을 있는 힘껏 쥐어짜 보려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새빨간 색의 통을 뒤에 단 치킨집 오토바이가 나를 당장이라도 덮칠 듯 빠르게 달려왔다. 처음 몸의 반응은, 다리가 뻣뻣하게 굳는 거였다. 그다음은? 모르겠다. 그저 얼어붙은 채 점점 가까워지는 오토바이 불빛을 바라봤다. 홀린 듯 눈이 질끈 감겼다. 몸에 닿을 거대한 충격을 무기력하게 기다리는 것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머릿속으론 아주 웃기는 상상을 했다. 미로 길목에 버티고 있던 괴물이 내게 손을 뻗어 끌어안는 장면이었다. 괴물의 손은 아주 예뻤다.

“십팔, 눈구멍 집에 두고 다니나.”

걸걸한 욕설과 함께 눈을 떴다. 그리고 오윤하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오윤하의 품에 안겨 있는 나를 느낄 수 있었다. 놀란 오윤하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길게 찢어진 눈 안엔 마찬가지로 놀라 허덕이는 내 얼굴이 있었다.

치킨집 오토바이는 좀 떨어진 곳에 멈춰 있었다. 오윤하가 나를 붙들어 당기지 않았다면 필시 나를 쳤을 것이다. 별꼴 다 보겠다는 둥, 누구 인생 조지려 그러냐는 둥 몇 마디 더한 오토바이 주인은 치진 않았지만, 혹시나 치료비라도 청구할까 무서웠는지 어마, 뜨거라 서둘러 자리를 떴다. 오윤하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괜찮아요?”

오윤하가 무릎을 굽히며 눈을 맞췄다. 아직 내가 쥐어뜯은 것에 대한 유감이 남았는지 목소리는 불퉁했지만, 오윤하도 놀란 건 마찬가지라 나처럼 숨이 거칠었다. 말이 없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오윤하가 시큰둥하게 내 팔을 들어 겨드랑이도 살펴보고 무릎도 살펴봤다. 그러곤 멀쩡하단 판단을 내렸는지 쪼그려 앉은 채 자기 무릎 위에 가지런히 두 손을 올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오윤하의 입술이 꾸물거리다 닫혔다. 몇 번 더 그랬다. 서로 멀뚱멀뚱 보기만 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오토바이가 나를 치기 직전부터는 아예 자리를 펴고 구경할 태세이던 아줌마는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그때 침묵을 깨고 어떤 소리가 났다. 꼬르륵…….

“…….”

“…….”

“…….”

오윤하가 눈썹을 들썩이며 조금 물러났다. 내가 또 쥐어뜯을까 걱정된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오윤하의 걱정은 기우였다. 왜냐하면, 방금 꼬르륵은 내 뱃속에서 난 소리였기 때문이다. 놀란 표정으로 눈치를 살살 보는 오윤하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오윤하를 쥐어뜯으며 이걸 죽여, 살려, 화를 냈던 게 되게 바보 같은 짓이었던 것 같단 생각이 불쑥 들었다. 참 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는 점도. 눈을 깜박이다 이내 멍하니 말했다.

“수제비 먹을래요? 이 근처에 잘하는 집 있는데…….”

죽다 살아나니 식욕이 도는 건지 아니면 그냥 먹고 싶었던 걸 먹으니 맛있어서 그런지 오윤하가 숟가락만 쪽쪽 빨며 나를 구경하건 말건 접시에 코를 박고 먹었다. 따끈한 국물이며 통통하고 넓적한 수제비를 꿀떡꿀떡 삼키니 배가 따뜻해지는 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흉흉하던 속이 단번에 가라앉았다.

내친김에 공깃밥도 청해서 남은 국물에 말았다. 그러곤 깨가 뿌려진 겉절이를 숟가락 위에 올리다 오윤하를 봤다. 오윤하 몫의 수제비는 처음 나올 때와 상태가 똑같았다.

“안 먹어요?”

오윤하가 힐끔 수제비를 내려다보고 내 쪽으로 수제비 그릇을 밀어 줬다.

“난 물에 빠진 해산물은 안 먹어서. 윤 대리 많이 먹어요.”

사양할 것도 없어서 오윤하의 그릇에서 오징어와 바지락만 쏙쏙 골라가다 오윤하를 쳐다봤다.

“말하지 그랬어요.”

내가 묻지도 않고 청하지도 않은 말은 넙죽넙죽 잘만하면서 왜 중요한 건 말을 안 하나 싶어서 의아하기도 했다.

“2인분부터 주문 가능한 곳이라면서요.”

오윤하가 별걸 다 묻는단 투로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곤 아예 직원에게 국자를 청해 자기 그릇에 있는 수제비를 내 그릇으로 퍼 담아 줬다. 먹지 않고 멀뚱히 보기만 하자 오윤하가 손을 휘휘 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난 집에 가서 딴 거 먹으면 되니까, 얼른 먹기나 해요.”

오윤하가 그렇게 말했지만 한번 흐름이 끊기니 갑자기 배가 부른 게 입맛이 떨어졌다. 깨작거리며 오징어만 골라 먹다 그냥 숟가락을 내려놨다.

“돌아가신 엄마가 이렇게 오징어랑 바지락 넣어서 수제비 해 줬어요. 바지락 넣어 주는 집은 많은데 오징어도 넣어 주는 집은 이 동네에 여기뿐이라.”

거기까지 말하다 인상을 딱 찌푸렸다. 괜한 말을 했다 싶었던 것이다. 슬쩍 오윤하를 봤지만, 오윤하는 시큰둥한 얼굴로 여기저기 부딪혔던 머리를 만지작거리다 눈이 마주치자 뭘 봐, 하듯 눈썹만 들어 올렸다. 괜한 말로 부끄러움이 몰리려던 찰나라 차라리 잘됐단 생각이 들었다.

“이만 가요.”

벌떡 일어났다. 계산대 앞에서 핸드백을 찾다 오윤하를 봤다. 이거 찾냐는 듯 껄렁이며 다가온 오윤하가 핸드백을 높이 들고 덜렁거렸다. 손을 내밀었다. 오윤하가 턱을 치켜들었다.

“나 가지라며?”

그러곤 냉큼 핸드백을 자기 옆구리에 껴 버렸다. 속사정을 모르는 가게 사장님만 오윤하의 얼굴을 힐끔거리다 내게 말을 걸었다.

“아유, 요즘 남자들 참 유난이야. 여자 친구 핸드백도 들어 주고. 호호. 보기는 좋네, 좋아. 근데 지금 눈 엄청 오는데 우산들 있어요? 가게에 손님들이 두고 간 우산 있는데 줄까요?”

재원이와 몇 번 왔었지만 이런 친절을 받아 본 기억은 없는지라, 그냥 얼떨떨하기만 했다. 반면 오윤하는 이런 이름 모를 사람의 친절이 익숙한 듯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잘생겨서 좋겠다 그래.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오윤하가 계산하는 사이 먼저 가게를 나섰다.

눈이 엄청 온다는 말 자체는 과장이 아니었다. 아침이나 어젯밤 못지않게 펑펑 쏟아지는 게 보기만 해도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은 씨는 좋아하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핸드백을 옆구리에 낀 오윤하가 따라 나왔다. 내게 멱살을 잡힌 뒤로 펴질 길 없어 보이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눈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차 안 가져오길 잘했네.”

오윤하의 손엔 아줌마가 쥐여 준 듯한 우산이 있었다. 오윤하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우산을 펼쳤다. 그 순간…… 수십 마리는 될 거 같은 오리 떼가 눈앞에 펼쳐졌다. 온몸이 샛노란데 주둥이만 주황색인, 눈을 똥그랗게 뜬 오리들을 보다 떨떠름하게 말했다.

“……그거 쓰고 가시게요?”

오리 떼가 바글거리는 배경엔 멀리서 봐도 눈에 띌 거 같은 진한 분홍색이 깔린 데다 심지어 끄트머리마다 꼬불거리는 레이스가 달려 있었다. 주인이 누군지는 몰라도 초등학생 여아가 아닐까 싶은 마음에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냥 같이 있기만 해도 시선을 모으는 오윤하인데, 저런 우산까지 나누어 쓴 채 길거리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싶지 않았다.

“우산이 뭐?”

오윤하가 우산을 힐끔거렸다. 오윤하의 심미안으로 봐도 별로긴 했는지 잠깐 눈썹을 좁히긴 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내 팔을 잡아당겼다.

“누가 본다고. 봐도 내 얼굴 보는 거니까 신경 꺼요.”

그러곤 눈이 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눈의 바다에서 파도가 치는 건지 모를 것 같은 거리로 나를 잡아끌었다. 우려했던 것과 달리 눈이 많이 쏟아지는 터라 거리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길에서 마주친 세 명의 사람이 전부 우산을 쳐다보다 오윤하와 나를 힐끔거리는 것엔 모른 척하려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허기져서 허겁지겁 먹긴 했지만, 막상 천천히 걸으니 배가 무거운 게 속이 더부룩해졌다. 집에 가서 소화제를 먹어야겠단 생각을 하며 오윤하를 봤다. 춥긴 추운지 오윤하의 코끝에 옅은 분홍색이 올라가 있었다. 내 코도 그렇겠단 생각에 주머니에서 손을 빼 코를 만져 봤다.

“미안해요.”

오윤하가 걸음을 멈추고 날 봤다. 시선을 슬슬 피했다.

“미리 먹을 줄 아느냐고 묻고 가는 건데, 그리고 아까 멱살 잡은 것도.”

오윤하가 잠깐이지만 미로를 가로막은 괴물처럼 느껴진 건 화가 나서도 있지만, 여태까지와 달리 내 감정이 이성대로 컨트롤 되지 않는 것 때문도 있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내게 오윤하는 정말 당황스럽고 낯선 존재였다. 몇 번의 잠자리를 통해 나름 익숙해졌다고 해도 완전히 받아들이기란 어려웠다. 오윤하도, 그리고 낯선 내 모습도.

“또.”

오윤하가 콧방귀를 뀌었다. 또라니? 오윤하를 멀뚱히 쳐다보자 오윤하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나를 보다 따졌다.

“나보고 똥물이라고 했잖아.”

그건 좀…… 그리고 오윤하보고 똥물이라고 한 게 아니라 무신경한 오윤하와 자게 된 상황을 똥물이 튄 것 같다고 비유했던 거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과장님한테 들킬 뻔했던 것만 되새기면 아직도 어깨가 삐죽 올라왔다.

“뭐, 그것도 미안해요.”

대충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는 자기는 나한테 미안하다고 했나. 자기 태도에 대한 미안하단 말은 쏙 빼고 언급도 안 하는 게 괘씸했지만, 꾹 눌렀다. 언제나처럼.

“하려던 말이나 해 봐요. 오늘 하려던 말이 뭐예요.”

어깨에 슬그머니 날아와 붙은 눈송이를 털었다. 계속 투덜거리던 오윤하가 곁눈으로 나를 흘겼다. 오리들이 내 쪽으로 기울었다.

“별건 아니고.”

“별거 아니면 말하지 마세요.”

오윤하가 아예 입을 꾹 다물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뺨이 따가울 정도였다. 괜히 오리들도 나를 노려보는 기분에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러고 보니 입술을 삐죽이는 오윤하의 얼굴이 얘들이랑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손가락으로 오리 하나를 콕 눌렀다.

“별거예요.”

“그럼 말해 보던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조그마한 오리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러다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시선을 돌렸다.

“참나.”

오윤하가 웃었다. 꼭 내가 나긋하게 사근대기라도 했다는 듯. 오윤하가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 오윤하의 코트가 축축하게 젖은 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걸 빤히 보다 뺨에 닿은 차가운 손가락에 화들짝 놀랐다.

“뭐…….”

오윤하의 눈이 나를 응시했다. 가을의 오후 같은 눈동자였다. 아름답고 부드럽지만, 싸늘한 쓸쓸함도 품고 있는. 다시 픽픽 웃던 오윤하가 손가락을 놀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가끔 짜증은 나는데, 싫증은 잘 안 난단 말이지.”

꼭 장난감을 두고 말하는 투라, 화를 내도 무방할 것 같은데 어쩐지 화가 나지 않았다.

“싫은 게 많아서 그런가. 윤 대리는 뭐 그렇게 싫은 게 많아?”

오윤하가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까닥였다. 다시 오윤하의 어깨에 시선을 줬다. 밝은 베이지색이었던 코트가 한 부분만 오래된 나무를 짊어진 듯 거무죽죽했다. 대답이 없는 게 이상했는지 오윤하가 몇 번 더 고개를 갸웃거리다 어깨를 들썩였다.

“다음 주 월요일 쉬니까 주말에 놀러나 가자고. 맛있는 거 사 주고 구슬려 보려고 했더니 정수 형이 거기 있을 게 뭐야. 아무튼, 싫으면 거절해요. 그것까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팀장님, 어깨…….”

자그맣게 중얼거리자 오윤하가 응? 하듯 자기 어깨를 내려다봤다. 그러곤 대수롭지 않게 쌓인 눈들을 밀어 버렸다. 우산이 좀 더 기울었다. 내 머리 위로 오리들이 바글거렸다. 이상하게 말문이 막혀서 입술을 어물거리다 관뒀다.

“……생각해 볼게요.”

내가 입을 뗀 건 빌라 입구에서였다. 우산을 접어 털고 있던 오윤하가 돌아봤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팀장님이 과장님 의심 잠재웠을 때 얘기예요.”

“진짜지.”

오윤하가 눈을 반짝거렸다. 고개를 저었다. 잠깐 말없이 걸을 때 솟았던 어떤 의문도 고개를 흔드는 것에 다시 잠들었다.

“생각해 본다고 했지 간다고 안 했어요.”

“생각해 볼 게 뭐 있어. 가면 가는 거고, 안 가면 안 가는 거지.”

“그러니까 가고 말고를 생각해 본다잖아요.”

“그러니까 가고 싶으면 가는 거고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는 거지 생각할 게 뭐 있냐고.”

잠깐 계단을 오르다 말고 쳐다봤다.

“팀장님.”

바로 뒤에서 코트를 붙잡고 있던 오윤하가 벌써 결심이 섰냐는 얼굴로 히죽거렸다. 그 미소엔 자기 제안이 거절당할 거라는 의심은 전혀 없었다. 코트를 힘주어 잡아 뺀 뒤, 미간을 찡그렸다.

“근데 왜 계속 따라오세요?”

정신이 없어서 눈치를 못 챘는데, 오윤하와 소리죽여 옥신각신하는 동안 어느새 3층이었다. 그 말에 오윤하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별안간 우산을 쥐여 주는 행동에 눈만 깜박였다.

“글쎄, 이 집이 커피를 잘하더라고.”

우리 집에서 커피는 마셔 본 적도 없는 오윤하가 딴청을 부리며 나를 밀었다. 그러곤 집으로 쏙 들어갔다.

무단 점거가 무엇이냐, 사전에 허락받지 않고 어떤 영역을 차지하는 행위를 일컫는다. 매우 흉악하고 심성 못된 행위지만 애석하게도 형사 처벌 대상은 아니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뻔뻔하게 남의 집 소파, 그것도 자기 키보다 작아 발이 튀어나오는 2인용 소파에서 뒹구는 오윤하의 모습을 대법원에 제출하면 당장이라도 형을 100년 정도 때려 주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잠깐 했다. 아주 잠깐.

이미 코트며 셔츠며 훌훌 벗어 놓고 눈만 감으면 바로 곯아떨어질 태세인 오윤하를 노려보다 전부 관뒀다. 말로는 자기도 오늘은 섹스 생각이 없다, 그냥 눈이 많이 오니 운전하기에 위험할 것 같다, 그렇게 가지가지 변명을 덧붙이지만 글쎄. 어쨌든 오늘은 과장님을 보고 놀란 데다 오윤하와 실랑이도 잔뜩 벌였으니 나도 피곤했다. 그 말인즉슨 오윤하를 쫓아낼 힘이 없단 뜻이다.

내가 좀 봐주는 듯 보이자 얼른 씻고 나오기부터 한 오윤하가 수건으로 머리를 부비적거리다 말고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무시하고 테이프로 소파에 붙은 라라의 털을 떼어 내다……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뭘 그렇게 봐요.”

“아니. 아무것도.”

뺨에 구멍 나는 줄 알았는데 뭐가 아무것도 아니란 말인가. 오윤하를 집에서 재우기론 했지만, 기꺼이 마음이 내켜서 그런 게 아니라 하나하나 전부 곱게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발목이 깡충 드러난 트레이닝 바지도 마찬가지였다. 어째 재원이가 놓고 다니는 트레이닝 바지를 오윤하가 더 자주 입는단 생각을 하며 테이프로 오윤하의 다리를 눌렀다 뗐다. 오윤하가 펄쩍 뛰었다.

“라라 털 붙었어요.”

새침하게 대답하고 테이프를 돌돌 말았다. 쓰레기통에 다녀오는 걸 지켜보던 오윤하가 억울한 표정으로 제 발목을 쓱쓱 문질렀다.

“수건 다 썼으면 세탁기에 바로 넣고 오세요.”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말했다. 그러곤 걸레를 쥐었다. 라라의 화장실 앞에 쭈그려 앉아 작은 청소기로 모래를 빨아들인 뒤 그 주변을 꼼꼼히 닦았다. 화장실 위에 쌓인 먼지도 훔쳐내고 일어나니 방금까지 소파에 앉아 있던 오윤하가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에 갔나 고개를 갸웃하다 이불을 꺼내기 위해 침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여기서 뭐 해요.”

침대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던 오윤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잘 준비.”

당장 손에 든 걸레로 후려치고 싶단 생각이 굴뚝같았다. 눈을 내리깔고 소파를 가리켰다.

“소파에서 주무세요.”

“난 침대 아니면 못 자요.”

간단한 말로 내 요구를 물리친 오윤하가 베개를 끌어안고 시위하듯 뒹굴 몸을 굴렸다. 울적하게 오윤하를 노려봤다. 시선이 길어지니 오윤하가 모른 척을 관두고 슬그머니 베개를 내려놨다.

“좋잖아요. 추운 날 서로 따뜻하게 끌어안고 자고.”

“무슨 조난이라도 당했어요? 여기서 더 불편하게 만들면 정말 쫓아낼 거예요.”

그냥 옷가지랑 같이 바깥으로 쫓아내 동태가 되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소리치는 상상을 하며 붙박이장에서 이불을 꺼냈다. 단호하게 등을 보이자 툴툴거리며 따라 나온 오윤하가 볼멘소리를 냈다.

“대체 왜 같이 자는 게 싫어.”

“싫으니까요.”

“왜 싫냐니까.”

“싫으니까 싫어요.”

자기가 하는 말투 고대로 당한 오윤하가 내가 놓아 준 베개를 끌어안으며 끙, 앓았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정말 과장님의 의심을 없애는 걸 오윤하에게만 맡기고 손 놓고 있어도 되나 싶어 심란해졌다.

물론 이직한 이후로 과장님이 오윤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내거나 소문을 쑥덕거리는 사이에 낀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윤주 씨와 친해 보일 때가 종종 있으니 혹시 모를 일이었다. 팀원들이 눈을 크게 뜨고 윤 대리가 어떻게 그럴 수가! 하는, 시트콤 같은 상황을 떠올리다 관뒀다.

“팀장님.”

이불만 정리해 주고 바로 방으로 들어가려다 오윤하 앞에 쭈그려 앉았다. 마음이 바뀌었어? 하듯 오윤하가 단번에 고개를 돌렸다.

“혹시 몰라서 그러는데, 손 좀 묶어도 될까요?”

잠깐 침묵이 흘렀다. 오윤하를 하도 경계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동장에 넣어 둔 라라가 갑갑한지 애타게 소리를 냈다.

“……손을?”

“네.”

잠깐 오윤하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히죽거리는 입매를 겨우 무표정으로 돌린 오윤하가 팔베개하며 물었다.

“넥타이 빌려줘요?”

내가 하자고 해도 안 하겠다던 시정잡배는 어느 동네 시정잡배인지.

“아뇨. 다른 거로 묶을 거예요.”

어쨌든 손을 묶는 데는 동의를 받았으니 됐다. 서랍을 뒤적거리는 내내 오윤하가 뒤에서 떠들었다.

“윤 대리가 집에 그런 도구를 가지고 있는지는 전혀 몰랐네. 그걸 왜 이제 꺼내요? 내가 하는 건 다 싫다고 하길래 튕기는 게 버릇인가 했더니 그냥 본인 성에 안 차서 싫다고 한 거였네. 어? 내 말 맞지. 참, 내가 그런 거 좋아한다는 건 아닌데. 정 윤 대리가 그런 플레이하고 싶다고 하면 내가 또 못 해 줄 것도…….”

돌아서자 오윤하가 입을 닫았다. 청테이프를 들고 가까이 가자 오윤하가 기겁하며 물러났다.

“그걸로 묶겠다고?”

“정 그러면 빨랫줄 있는데 그걸로 묶을까요? 근데 그거 자국 날 텐데.”

오윤하가 나를 위아래로 훑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웃음을 뚝 그치고 날 노려봤다. 입을 크게 벙긋거린다. 절. 대. 싫. 어.

“싫으면 지금이라도 집에 가시던가요.”

오윤하가 입을 다문 사이 얼른 청테이프를 뜯어 손목에 감았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데. 혹시 본업이 강도야? 아니면 장래 희망이 강도야.”

“둘 다 아니에요.”

손목을 세 번 정도 감고 이로 끊었다. 감상하듯 오윤하를 쭉 훑었다.

“아침에 풀어 줄게요. 잘 때 몰래 들어오지 말라는 뜻이니까 그런 줄 알고 주무세요.”

오윤하가 무슨 말을 더하려고 했다. 시끄러워서 청테이프를 좀 더 뜯어 입에 찰싹 붙여 버렸다. 영락없이 마님에게 보쌈당한 돌쇠의 모습이라,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입을 틀어막힌 오윤하가 테이프 아래서 읍읍, 소리를 냈다. 입까지 막은 건 좀 심했나 싶어서 테이프를 슬쩍 떼 줬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벌건 입술이 등장했다.

“겁탈당하는 기분이야.”

잠깐 허공을 봤다. 오윤하를 봤다간 한 대 때릴 것 같아서…….

“그런 거 안 해요.”

한숨 섞인 말에 오윤하가 시무룩해졌다.

“진짜?”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어났다. 일어나려고 했다. 오윤하가 묶인 손으로 팔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오윤하를 깔아뭉갰다. 진짜 정신 못 차리나.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려 할 때, 기가 막힌 솜씨로 내 머리를 통과해 허리를 끌어안은 오윤하가 확 당겼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손도 묶었는데 같이 자면 안 되나.”

“싫…….”

“있잖아.”

오윤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언뜻 다정하게 들리기도 했다.

“정말 궁금해서 그래. 왜 같이 자는 게 싫어요.”

빛이라곤 침실에서 새어 나오는 것뿐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어둠 속에서 오윤하의 눈이 반짝거렸다. 언제 봐도 예쁜 눈이었다.

“사랑하는 사이 같잖아요.”

내 숨이 오윤하에게 다가가다 다시 돌아왔다.

“사랑하는 사이도 아닌데.”

“…….”

“그래서 불편해요.”

허리께에 있던 오윤하의 손이 올라왔다. 손을 마음대로 못 쓰는 게 불편한지 잠깐 인상을 쓴 오윤하가 내 정수리에 손을 턱, 올렸다. 그렇게 무거운 건 아니지만 기분은 영 별로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럴 때 없어?”

“뭐가요.”

“가끔…… 정말 나 혼자라는 기분. 꼭 이름 모를 행성에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길거리에서 갑자기 뺨을 맞은 기분이 들었다. 차라리 다 보는 앞에서 옷이 벗겨진다거나 음란한 말을 듣는 게 지금보단 훨씬 나을 것이다. 원하지도 않는 상황에서,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상대가 나조차 잘 꺼내 보지 않는 저 밑에 깔린 마음을 읽어 내듯 말하는 건 오윤하가 그동안 해 왔던 행동 중 가장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난 그래서 사람 체온이 좋아. 근사하잖아. 내 마음을 읽는 사람이 나타나서 어떤 말을 한다고 해도 체온만큼 그런 기분 달래 주는 게 없거든. 따뜻하고, 부드럽고. 내 거 아닌 숨소리 들으면 나름 잠도 잘 오고.”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는 격이었대도 마찬가지다. 머리에 얹어진 손이 치워졌다.

“그리고, 솔직히 윤 대리 잠버릇 나 되게 마음에 들어.”

어깨를 들썩인 오윤하가 고개를 좀 더 기울여 나를 봤다. 내가 무슨 잠버릇이 있던가? 당황스러움은 물러갔다. 대신 그 자리를 다른 감정이 채웠다. 따뜻하다고 하기엔 미묘했고 그렇다고 불편함으로 치부하기엔 훨씬 무거웠다.

이 감정이 뭘까, 고민하다 알았다. 별나라에서 뚝 떨어진 듯, 나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르다고 생각했던 오윤하가 처음으로 나처럼 감정이 있는 사람이란 게 느껴진 것이다.

“외롭고 쓸쓸하면요…….”

그새 내려가 엉덩이를 주물럭거리고 있는 오윤하의 손등을 꼬집었다. 오윤하가 엄살 부리는 사이 얼른 팔을 밀어내고 벗어났다.

“라라 안겨 줄 테니까 안고 주무세요.”

따라 일어나려는 오윤하를 밀어 버렸다.

“저 난폭한 뚱땡이를 어디에 붙여?”

“라라가 왜 뚱땡이에요.”

“아니면 뭔데?”

“라라는 그냥…….”

라라는 그냥 무거울 뿐이다.

“어쨌든 팀장님보단 라라가 백배 나아요.”

입에 담지도 못할 욕설을 들은 사람처럼 오윤하가 펄쩍 뛰었다. 방금 어둠 속에서 쓸쓸함을 말하던 가을 오후 같은 눈동자의 남자는 사라졌다. 묶인 손이 불편한지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인 오윤하가 툴툴거렸다. 그리고 자기가 언제 외롭고 쓸쓸하다 그랬냐는 둥, 자긴 그냥 사람 안고 자는 게 그래서 좋다고 했다는 둥.

툴툴거리는 오윤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오윤하가 길게 말한 그 기분을 단어로 정리한 게 외로움과 쓸쓸함이었다. 오윤하는 아직 거기까지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손을 들자 오윤하가 잠깐 움찔했다. 코로 한숨을 쉬며 이마를 쓸어 줬다.

“주무세요.”

그리고 아직 라라가 들어 있는 이동장을 들었다. 처음부터 오윤하에게 라라를 안겨 줄 생각은 없었다. 서로 싫어하는 사이에 거실에 같이 두면 이번에야말로 피를 볼 것 같았다. 침실 문을 닫고 이동장을 열어 주자 라라가 투정 부리듯 내게 마구 야옹거렸다. 미리 가져다 둔 멸치를 앞에 놓아 주고 침대 위로 올라갔다.

얼마 뒤 멸치를 다 먹고 기분이 풀린 라라가 펄쩍 올라왔다. 잠깐 이불을 청소할 생각에 머릿속이 아득해졌지만, 뺨에 얼굴을 비비는 고소한 냄새에 그냥 웃고 말았다. 이불을 들추고 툭툭 치자 라라가 거꾸로 자리를 잡았다. 라라의 똥꼬가 내 코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얼른 라라를 뒤집었다. 배 안쪽의 보드라운 털을 간질거리며 눈을 감았다.

다시 떴다. 잘 생각이 없는 듯 말똥거리는 눈으로 날 보는 라라와 눈이 마주쳤다. 눈을 깜박이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떴다. 라라를 배 위에 올렸다. 앞발로 세수하기 바쁜 라라를 끌어안고 심각하게 속삭였다.

“라라야, 있잖아.”

라라의 까슬한 혀가 손가락을 몇 번 스쳤다. 입을 벙긋거리다 닫았다.

“아니야. 아무것도.”

라라가 웡웡 소리를 냈다. 울음소리가 참 다양한 게 이러다 곧 사람 말도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니 라라가 이불을 박박 긁다가 훌쩍 아래로 내려갔다. 벌떡 일어나 라라를 잡아 왔다. 오늘따라 왜 귀찮게 구냐는 듯 라라가 원성을 냈다. 침대에 양반다리를 하고 라라를 앞에 앉혔다. 목에 걸린 가시 같은 말을 조용히 꺼냈다.

“……나 혹시 코 골아?”

라라가 야옹, 했다. 해석하긴 어려웠다.

새벽 늦게나 잠든 탓에 업무 전화를 받는 도중에 잠시 깜박 졸 뻔했다. 뭐라 뭐라 말을 하던 상대편에서 ‘여보세요’를 두 번 정도 말한 뒤에나 정신을 차렸다.

“죄송해요. 전화 상태가 갑자기 왜 이러지…….”

어설픈 변명을 했다. 여태 새벽에 뒤척일 땐 많았어도 회사 일에 지장을 준 적은 없었다. 상대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민망해서 볼이 조금 붉어졌다. 꼭 오윤하가 제 욕심껏 나를 붙들고 안 놔줬을 때의 다음 날 같다. 섹스도 안 했는데. 볼을 만지며 전화를 끊자 윤주 씨가 힐끔 나를 봤다.

“윤 대리님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요즘 영 안색이 안 좋네.”

“연말이라 싱숭생숭한가 봐요.”

“아하.”

윤주 씨는 더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곤 하루가 다르게 체력이 느껴진다는 둥, 이젠 소개팅에 나가도 마치 고지식한 선 자리에 나온 것처럼 결혼 얘기부터 꺼내는 남자가 많다는 둥. 옛날엔 통금도 여덟 시로 정해 놓고 엄하게 굴던 부모님이 이제는 퇴근하자마자 들어가면 너 남자 없니, 하고 묻는다는 둥. 연말 고민을 쉴 새 없이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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