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드디어 세탁소에서 찾아온 롱 패딩을 걸쳤다. 이제 가로수에 간신히 매달린 낙엽은 대충 훑어봐도 수를 헤아릴 정도가 되었다. 성급한 어떤 가게는 벌써 트리를 꺼내 놓고 전구를 켜 놓았다. 출근하는 사람들의 묵직한 발걸음에 맞춰 빠르게 전구가 깜박였다. 잠깐 한눈을 판 사이 부딪힌 어떤 여자의 머리끝이 딱딱하게 언 게 보였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하고 다시 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대리님!”
저 멀리서 딱딱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힘찼다. 팔 사이로 불쑥 들어온 손을 먼저 보고 그다음에 손의 주인을 봤다. 지은 씨였다. 아홉 시가 되려면 삼십 분이 남은 시간이라 로비는 조금 한산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대리님, 근데 오늘 너무 춥지 않아요? 올해 겨울 역대급 한파래요.”
“그래요?”
“네. 저 수족 냉증 있어서 손발 차가운데 큰일 났어요.”
지은 씨가 그렇게 말하며 슬쩍 자기 손을 보였다. 지은 씨 손엔 따뜻하고 보드라워 보이는 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집에 핫 팩이 좀 있는데 나눠 줄까요, 하고 물으려다 관뒀다. 지은 씨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재빨리 나를 당겼다. 허리가 조금 욱신거렸지만 참을 만했다.
“박 대리님이 사 줬어요. 예쁘죠.”
지은 씨가 놀이공원 직원처럼 손을 반짝반짝 흔들었다. 이제 보니 자랑하고 싶어서 손발이 차갑단 이야기를 꺼낸 모양이었다. 빠르게 내려온 엘리베이터에 탔다. 로비에서 전화하는 사람이 있어 버튼을 잡고 조금 기다렸지만 탈 생각이 없어 보여 버튼을 놨다. 엘리베이터에 단둘만 남자 지은 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대리님은 크리스마스에 남자 친구랑 뭐 하세요?”
목도리를 미리 벗어 정리하다 돌아봤다. 이번에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 주제를 꺼낸 게 분명했다.
“이제 한 달도 안 남았잖아요.”
“아.”
그렇다면 출근길에 지나쳤던 가게는 성급했던 게 아닌 셈이다. 예상대로 지은 씨는 박 대리님이 1박 2일로 놀러 가자는 데 가도 될지 고민이다, 사귄 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여행 가면 암묵적으로 자자는 거에 동의하는 거 아니겠냐? 하는 말을 털어놓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곧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박 대리님한테 그렇게 말해 보지 그래요. 권유는 고마운데 그거 때문에 고민이라고.”
지은 씨가 대뜸 눈을 흘겼다. 작은 주먹이 내 팔을 콩 때렸다.
“에이! 그런 걸 왜 말해요. 제가 더 좋아하긴 하지만 저도 자존심이 있고 그쪽이 저 때문에 더 애탔으면 좋겠거든요. 원래 남의 속 모를 때가 제일 설레고 기대되고, 애틋하고 그런 법이잖아요.”
윤주 씨처럼 검지를 까닥인 지은 씨가 자기 연애 지론을 속사포로 털어놓았다. 잠시 활달하게 사무실로 들어가는 지은 씨의 뒷모습을 봤다. 과거를 잠시 생각하다 괜히 머리를 넘겼다. 쓸데없는 일이었다.
지은 씨와 커피를 나눠 마시고 있자니 속속들이 팀원들이 사무실에 도착했다. 윤주 씨는 목도리도 없이 코트만 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등이 굽은 노파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한성 씨는 웬 비닐봉지를 떨렁떨렁 손에 들고 등장했다. 그 안에선 큼지막한 한라봉이 등장했다. 인원수에 맞춰 가져왔다며 한성 씨가 한 명 한 명의 책상에 한라봉을 올려놓았다.
“어, 안녕하십니까. 팀장님.”
오윤하가 제일 마지막으로 등장했다.
“저 팀장님. 한라봉 드실래요?”
한성 씨가 오윤하를 불렀다. 여느 때처럼 간단히 고개만 까닥이고 지나가려던 오윤하가 그 말에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무지막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려 한성 씨…… 너머의 나를 노려보았다. 지은 씨가 자기도 모르게 놀란 탄성을 질렀다.
“헐, 팀장님 얼굴 왜 그러세요?”
사무실에 북풍같이 싸늘한 침묵이 흘렀다. 눈치가 보였는지 지은 씨가 입을 막았던 손을 내렸다. 그러곤 화장실에 간단 혼잣말을 남기고 도망쳤다. 한성 씨가 한라봉을 쥐고 있던 손을 뒤로 슬그머니 감췄다.
“하하하. 아, 안 드시면 제가 먹죠. 뭐. 하하.”
엄밀히 말해 패션 잡지 앞면에 걸려도 손색없을 것 같은 오윤하의 턱에 남겨진 저 세 줄의 흉터는 내 작품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오윤하가 날 저렇게 쳐다볼 이유도 없다. 고개를 홱 돌렸다. 어디서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한성 씨의 손에서 한라봉이 굴러떨어졌다.
오윤하가 걸음을 다시 옮겼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싸늘한 침묵이 깨졌다. 눈들이 굴러가는 소리가 바쁘게 퍼졌다. 한라봉을 들어 올린 한성 씨가 셔츠에 껍질을 문지르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한라봉 싫어하시는 줄 몰랐네…….”
고양이의 보은이란 말이 있다. 고양이에게 맛있는 것도 주고 잘해 주면 고양이가 보답한다는 것이다. 보통은 쥐를 잡지만, 라라는 위풍당당한 골목대장 출신답게 오윤하를 잡았다. 한 번 더 하느니 마느니 실랑이를 벌이는 걸 나를 괴롭힌다, 오인한 라라가 냅다 달려들어 야옹!
“윤 대리님. 아무래도 팀장님한테 우리가 모르는 여자가 있는 게 분명해요.”
오해한 것도 아니었다. 만일 그대로 붙들려서 한 번이고 자시고 또 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병풍 뒤에서 향을 맡고 있었을 테니까.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윤주 씨의 은밀한 속삭임에 그저 어깨만 들썩였다.
“글쎄요.”
“확실하다니까! 저게 여자 손톱이 아니면 뭐겠어요. 고양이가 그랬겠어요?”
윤주 씨가 내 어깨를 살짝 쳤다. 모른 척 커피만 홀짝였다. 혼자 재잘재잘, 이내 한성 씨까지 합류해 대체 어떤 여자일지 아침부터 심도 높은 토론을 벌이던 윤주 씨가 뒤늦게 내 얼굴을 살피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다 마신 종이컵을 구기며 물었다. 윤주 씨가 바로 대답했다.
“근데 윤 대리님 오늘 무슨 좋은 일 있어요?”
“아뇨.”
좋은 일이 뭐 있겠는가. 당장 앓아누울 정도는 아니지만, 허리의 통증이나 관절의 비명이 신경에 거슬릴 정도는 됐다. 윤주 씨가 더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곤 제 양손을 입꼬리 옆에 붙였다.
“그럼 왜 웃고 있어요?”
“아…….”
뺨을 만졌다.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오늘 고양이한테 고등어 사다 주려고요. 그렇게 말을 하려 할 때 갑자기 입술을 비집고 뭔가가 삐져나왔다.
“고양이한테.”
“응?”
“고양이한테, 고등어 사다 주려. 풉.”
갑자기 라라에게 쫓기던 오윤하가 생각났다. 킥킥, 웃음을 흘리다 왠지 모를 어색함에 헛기침을 했다.
“신년 행사 케이터링 업체 말인데요…….”
한성 씨와 눈을 마주한 윤주 씨가 동시에 어깨를 으쓱했다.
치즈케이크를 파는 S백화점은 우리 회사와 십 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아침에 지은 씨의 말을 듣긴 했지만, 한 달도 안 남았다는 크리스마스는 여전히 나와 상관없는 날이었다. 굳이 신경 쓸 이유를 찾자면 일 년에 몇 안 되는 공휴일이라는 딱 그 정도. 그러나 백화점 중앙에 장식된 거대한 트리엔 아무리 나라도 입이 떡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3M가 훌쩍 넘어 보이는 트리엔 갖가지 반짝이는 장식품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고 심지어 트리 주변엔 열댓 명 정도 되는 아기 천사들이 매달린 채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지나가던 어린아이들이 저마다 제 부모 손을 붙잡고 트리를 가리켰다. 들뜬 건 어린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백화점과 백화점을 메운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신나고 행복해! 하고 외치는 듯했다. 좀 더 트리를 구경하다 지하층으로 내려갔다.
치즈케이크를 파는 가게는 그리 공들여 찾지 않아도 됐다. 사람들이 줄서 있는 가게는 딱 한 곳이었으니까.
“하나, 둘, 셋…….”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헤아려 보다 한숨을 쉬었다. 어림잡아도 스물이 넘는데 과연 치즈케이크를 살 수 있을까? 일단 줄을 서긴 했다. 그리고 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지만 첫 번째 전화는 불발이었다. 일이 바쁜가? 고개를 갸웃하고 메시지를 남기려 할 때, 줄을 서 있던 여자 몇몇이 수군거리다 갑자기 우르르 이탈했다.
“야, 3층에서 서승연 드라마 촬영한대!”
“대박. 빨리 보러 가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켜봤다.
“저기요. 서승연 어디에 있대요?”
“3층이요.”
여자들이 남긴 말에 주변이 웅성거리다 줄에서 셋 정도가 더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줄이 확 줄었다. 바로 앞에선 아저씨가 싱글벙글 웃으며 줄을 당겼다. 나도 앞으로 갔다. 그리고 목을 빼고 다시 수를 세 봤다. 그래도 열 명이 넘었다. 검지로 입술을 꾹꾹 누르며 메시지를 완성했다.
[세희야. 치즈케이크 못 사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따로 먹고 싶은 거 없어?]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나온 탓에 뱃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배를 쓱쓱 문질렀다. 건너편에서 철판볶음밥을 파는 게 보였다. 입에 침이 고였다. 케이크를 사고 남은 시간에 저걸 먹어야겠다, 홀로 다짐했다.
줄은 느릿느릿하게 줄었다. 초조함과 비례해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막 다섯 번째로 시간을 확인했을 때 드디어 다음이 내가 살 차례였다. 아저씨가 치즈케이크를 주문하자마자 기계적인 미소를 짓고 있던 직원이 냉큼 계산대 앞에 치즈케이크 품절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오래, 자주 썼는지 끄트머리가 닳아 있었다.
“음…….”
끙, 앓으며 이마를 매만졌다. 세희가 뭘 좋아하더라. 단 건 다 좋아했던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치즈케이크를 기대하고 있을 텐데. 어차피 사가도 나는 먹지 않을 테지만 세희가 실망할 걸 생각하니 마음이 괜스레 무거워졌다. 다행인 건 치즈케이크 외에도 진열장에 전시된 케이크들이 전부 예쁘고 먹음직스럽다는 거였다.
체리가 잔뜩 올라간 초코케이크를 눈여겨보다 눈을 깜박였다. 앞에서 막 계산을 하려던 아저씨가 당황한 음성을 냈다.
“어! 아니, 지갑이 어디 갔지.”
아저씨는 주머니를 뒤지다 못해 점퍼를 벗어 탈탈 털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오는 건 먼지와 뭔지 모를 영수증뿐. 연신 ‘아이고!’를 외치던 아저씨가 시무룩한 얼굴로 계산대에서 물러났다. 터덜터덜 걷는 뒷모습을 보다 계산대에 다가섰다.
“치즈케이크 살 수 있나요?”
“하나 남았어요. 포장해 드릴까요?”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시무룩한 아저씨의 뒷모습이 신경 쓰였다. 힐끔힐끔 멀어지는 아저씨를 보다 직원의 재촉에 카드를 내밀었다. 휙휙, 레이스가 잔뜩 들어간 예쁜 상자에 치즈케이크가 담기고 그 위를 공단 리본이 휘감았다. 전화가 울리는 것에 이름만 확인하고 바로 받았다.
“응, 세희야.”
―아. 윤다정…….
치즈케이크는 제법 묵직했다. 세희가 이걸 혼자 다 먹을 수 있을까,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나 치즈케이크 샀어. 내가 마지막이었대.”
세희는 말없이 앓기만 했다. 어디가 아픈가, 케이크 쥔 손을 옮기며 핸드폰을 귀에 바짝 붙였다. 어디가 안 좋냐는 말을 하기도 전에 세희가 대뜸 미안하단 소리를 했다.
“뭐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나와 부딪힐 뻔한 어떤 남자가 날 흘기며 지나갔다. 죄송하단 눈짓을 하고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다정아 진짜 미안. 내가 아침에 전화한다는 게 갑자기 아침부터 막 이상한 진상이 들이닥쳐서 그 양반이랑 말싸움 좀 하다가. 아무튼, 진짜 미안. 다음에 내가 근사하게 한턱낼게.
“다른 약속 있던 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
세희가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수화기 너머에 내가 쓸려가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어진 세희의 말에 철판볶음밥 가판에 딸린 의자에 케이크를 내려놓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건물주 조카가 또 왔다고?”
―그래, 그렇다니까! 그 자식 알고 봤더니 아주 또라이에 엉큼한 변태야! 내가 오늘은 그 자식하고 아주 담판을 지어야겠어.
또라이, 엉큼한 변태. 그런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람은 딱 한 사람밖에 모른다. 자연스럽게 오윤하가 떠올랐다. 오윤하 같은 사람일까? 그렇다면 세희도 적잖게 골치 아프겠다. 막 주문을 넣고 카드를 주머니에 넣었다.
“왜?”
세희가 이를 갈며 속삭였다.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아, 윤다정 그때 내 얘기 하나도 안 들었지. 자세한 건 나중에 말해 줄 테니까 지금은 그냥 내가 몹시 열받았단 것만 알아 둬.
세희가 짧게 축약한 이야기는 이랬다. 두어 번 정도 잤던 상대 남자가 세희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남자는 제 동정을 세희가 앗아갔으니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세희는 처음 본 여자랑 술 마시다가 바에 엎어 놓니 벽에 세워 놓니 별별 자세를 다 했던 놈이 무슨 동정은 동정이냐. 그냥 내가 자기랑 자고 만다니까 이상한 수작 부리는 거지. 하고 펄펄 뛰었다. 잘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세희와 감정적으로 가까운 사이다 보니 세희 편으로 기울였다. 그사이 볶음밥이 나왔다. 쟁반을 내려놓다…… 그만 놓칠 뻔했다.
“……뭐라고?”
세희가 허, 하는 소리와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 새끼가 글쎄 방금 전화해서 나한테 나, 세희 씨 보지가 보고 싶어요. 이랬다니까!
뜨악함에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오윤하만큼 이상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더한 사람이 있다니.
―아무튼, 또라이 새끼들은 얼굴에 나 또라이라고 써 붙이고 다니면 좋겠어. 그 새끼도 생긴 건 뭐 순결 서약한 신부님처럼 생겼다니까.
숟가락으로 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다 그냥 다시 내려놨다. 세희도 씩씩거리던 것을 멈췄다.
―아무튼, 미안. 어쩌냐 너. 내가 돈 보낼까? 돈 보낼게. 계좌 보내라.
“아냐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래야 내 마음이 편해서 그래. 문자로 계좌 넣어. 그리고 다음 주나 다다음 주에 내가 다시 연락할게. 이 언니가 그 변태 자식 척추를 확 접어 버리고 깔끔하게 정리한 썰 풀어 줄 테니까.
“아냐 정말 괜찮아. 내가 먹지 뭐.”
―단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애가 뭘 먹는데.
“사무실 사람들이랑 먹으면 돼. 그리고 너는 그 사람…… 어휴, 그 사람 경찰에 신고는 못 하니?”
세희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뭐로 신고해. 내 거기를 보ㅈ…….
억지로 한 숟갈 떠 넣으려는 찰나에 아예 입맛이 뚝 떨어졌다. 갑자기 밥알까지 징그러워 보였다. 침음을 흘리며 세희의 말을 끊었다.
“그런 단어 쓰지 마.”
세희는 내 질색이 재밌던 모양이다.
―왜애. 신문을 보지, 잠을 자지. 이런 말도 하지 말까?
갑작스레 나를 놀리는 것으로 노선을 바꾼다. 낄낄 웃는 소리가 함께 넘어왔다. 미간에 골이 깊게 팼다.
“이만 끊자. 나 이제 들어가 봐야 해.”
―윤다정 삐졌어?
“너는 무슨 그런 말을…… 아냐 그런 거.”
전화를 끊고 다시 어깨를 떨었다. 시무룩하게 그릇을 내려다봤다. 절반도 비워지지 않은 음식에선 윤기가 자르르 흘렀다. 버리고 그냥 들어갈까 심각하게 고민하다 옆 의자에 내려놓은 케이크 상자를 봤다.
“이게 웬 케이크예요?”
“친구가 먹고 싶다고 해서 샀는데 약속이 갑자기 취소돼서요.”
케이크를 꺼내자마자 제일 먼저 한성 씨가 눈을 반짝였다. 한성 씨를 시작으로 지은 씨와 윤주 씨도 의자를 질질 끌고 다가왔다.
“이거 요 앞에 백화점 것 아니에요? 나도 석 달 전인가 줄 섰다가 허탕만 쳤는데. 이거 사러 다녀오신 거예요? 점심은 드셨어요?”
결국, 점심은 반도 못 먹고 다 버렸다.
“네. 먹었어요.”
“와 윤 대리님 친구분 덕에 우리가 호강하네요.”
한성 씨가 껄껄 웃으며 제일 큰 케이크 접시를 가져갔다. 지은 씨가 구내식당 밥도 두 공기 드셔놓고 또 그게 들어가냐며 놀랐다. 윤주 씨와 지은 씨에게도 나눠 주고 사무실을 둘러봤다. 과장님 책상이 비어 있었다.
“과장님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윤주 씨가 크게 케이크를 떠먹으며 대꾸했다.
“위의 분들이랑 점심 드신다는 거 같았는데 또 체하고 돌아오는 거 아닌지 몰라요. 원래는 그거 전부 팀장님이 해야 하는 건데. 아우! 살살 녹는다, 녹아.”
한 문장 안에 걱정과 감탄을 골고루 섞은 윤주 씨가 치즈케이크를 음미하며 몸을 떨었다.
“팀장님한테 제가 가져다드릴까요?”
지은 씨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잠깐 팀장실 문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지은 씨는 먹어요.”
노크를 똑똑. 하지만 역시 노크를 할 필요는 없었다. 소파에 누워 있는 건 아니었지만 긴 의자에 길게 기대 책상에 발을 떡하니 걸쳐 놓고 자는 모습도 어쨌든 참 마음 편해 보였다. 책상엔 각종 서류가 즐비해 있었는데 몇 개는 중요한 서류임에도 커피 받침으로 썼는지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물기 자국이 찍혔다. 깨울까 하다 관뒀다. 잠시 물러나서 오윤하의 얼굴을 봤다.
햇빛이 성가신지 미간이 미약하게 찌푸려져 있는데 꼭 자는 게 아니라 심각한 고민 중인 사람 같다. 살짝 벌어진 입에서 속 편한 숨소리가 도롱도롱 들리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시선을 내렸다. 연고도 안 발랐는지 라라가 할퀸 자리가 벌겋게 부은 게 보였다. 속으로 혀를 찼다.
두리번거리다 포스트잇과 펜을 찾았다. 혹시 모르니 병원에 가보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그 옆에 주머니에서 꺼낸 연고를 내려놓았다. 얼마간 오윤하의 얼굴을 더 들여다보다 돌아 나왔다.
“흠.”
그래도 오윤하가 그 정도 변태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오윤하가 그 정도 변태가 아닌 건 다행이지만 그래도 변태는 맞아.”
라라의 발톱을 깎아 주며 혼자 중얼거렸다. 품에 늘어져 있는 라라는 얌전했지만, 기회만 생기면 언제든 도망치고 싶다는 듯 계속 꼬리로 내 팔을 툭툭 건드리는 중이었다.
“그치?”
라라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웃했다.
“야옹.”
“우리 라라 착하다. 이번엔 이쪽 발.”
노래 부르듯 말하며 얼른 라라를 고쳐 안았다. 라라의 목구멍 안쪽에서 그르렁 소리가 났다.
“아이 착해. 아이 다했다.”
라라의 발톱, 특히 뒷발 발톱은 오랜 길 생활로 기형으로 변해 있어 발톱을 다듬을 때면 항상 대규모의 전쟁이 벌어졌다. 안쪽으로 파고들며 자라는 탓에 그냥 방치하면 고름이 차올랐다. 처음엔 발톱을 주기적으로 깎아 줘야 한다는 걸 몰랐던 터라 갑자기 뒷발을 들고 깽깽이걸음으로 다니는 걸 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앞발을 깎을 땐 얌전했던 라라가 뒷발을 잡자마자 돌변했다. 어떻게든 빨리 다듬어보려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나름 날렵하게 공략했지만 그게 더 심기에 거슬렸는지 라라가 내 손등을 콱 물었다. 그래도 살짝 물어서 피 한 방울 봉긋 솟고 말았다.
“아야!”
짧게 비명을 지르자 라라가 덩달아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입맛을 다셨다. 그 틈을 노려 재빨리 라라를 꼭 붙잡았다. 그리고 딸깍. 라라의 발톱이 허벅지 위로 떨어졌다. 딸깍, 딸깍. 딸깍. 그러는 사이 한 번 더 물렸다. 반팔만 입고 있던 팔뚝도 하도 차여 빨갛게 부어올랐다.
팔뚝을 매만지며 티슈를 뽑았다. 손등을 꾹 누르며 라라를 불렀다. 그렇게 싫다고 할 땐 언제고 계속 무릎을 차지한 채 꼬리만 아주 흉포하게 휘두른다. 휙, 휙! 라라가 사자만큼 컸다면 분명 그런 소리가 났을 거다.
“라라 화 많이 났어? 누나가 미안해.”
라라의 뺨과 배에 입을 맞추자 라라가 가만히 내 뺨에 손을 댔다. 살짝 라라의 배에 턱을 기댔다. 복슬복슬한 털이 느껴졌다. 그리고 따뜻했다. 발톱이 아니라도 라라가 고생하며 살아온 흔적은 이곳저곳에 많았다. 구내염 때문에 어금니만 빼고 발치한 이빨, 윙크하듯 감긴 한쪽 눈, 끄트머리가 찢어진 오른쪽 귀까지 보고 있자면…….
“라라 너어는, 평생, 귀엽게 태어난 거를!”
장난스럽게 배를 무는 시늉을 하자 라라가 벌떡 몸을 뒤집고 일어났다. 킥킥 웃고 나도 일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발톱을 쓸어 모아 쓰레기통에 털어 넣고 청소기도 한 바퀴 돌렸다. 내가 청소기를 돌리는 동안 라라는 청소기 몸통 위에 앉아 나를 지켜봤다. 눈이 마주치자, 야옹.
“라라 배고프지. 우리 고등어 먹을까?”
라라의 머리를 쓰다듬고 부엌으로 향하자 라라가 졸졸 쫓아왔다. 집게를 이용해 생선 토막을 꺼냈다. 시장을 한 바퀴나 돌며 사 온 간이 안 된 고등어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며 냄새가 퍼지자 라라가 안절부절못하다 펄쩍 싱크대 위로 뛰어올랐다. 장갑을 끼다 말고 얼른 라라를 밀어냈다.
“가시 바르고 줄게.”
라라가 입을 길게 찢으며 입맛을 다셨다. 뜨거워서 잠시 놓칠 뻔한 고등어 토막을 힘주어 부시고 젓가락으로 가시를 발라냈다. 라라가 좋아하니 나도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가시를 다 바른 고등어 접시를 베란다에 내놓고 문을 닫았다. 겨울이니 십분 이내로 식을 터였다.
그사이 물티슈를 가져와 테이블과 TV 위를 닦았다. 저번 주에 큰맘 먹고 산 캣 휠 위도 닦았다. 라라가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뭔가 다녀간 흔적도 없는 스크래치 부분을 보자니 조금 섭섭해졌다. 베란다 문 앞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라라를 데리고 왔다. 손바닥으로 휠을 굴리며 이렇게 타는 거야, 해 봤지만 라라는 유연하게 내 손에서 벗어났다. 다시 베란다 문 앞을 차지하고 앉는 것에 그냥 웃음만 나왔다.
“알겠어.”
고등어 살을 만져 보고 내려놓았다. 라라가 허겁지겁 접시에 달려들었다. 쩝쩝 소리 중간 중간 귀여운 냥냥 소리가 섞였다. 무릎을 끌어안고 라라를 보다 나도 뭔가 먹어 볼까 싶어 냉장고로 갔다. 냉동고에선 언제 사 뒀는지 기억도 안 나는 꽝꽝 언 냉동 만두와 아무것도 안 들어 있는 비닐봉지만 나왔다.
“라라야, 나 이 앞에 슈퍼 좀 다녀올게.”
라라가 고개를 돌리고 길게 울었다. 하나뿐인 눈이 사진이라도 찍는 것처럼 천천히 내려갔다 떠졌다. 언제 봐도 근사한 광경이라 다가가 정수리에 입을 맞추고 패딩을 찾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 마주 보는 이웃집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게 보였다. 문을 붙잡고 있던 젊은 여자가 어색하게 눈을 굴리다 인사했다. 나도 얼떨결에 인사했다. 택배가 잘못 온 걸 돌려줬을 때 빼고는 처음 하는 인사였다. 계단을 내려가려다 멈칫했다.
“죄송해요. 금방 옮길게요.”
여자가 민망하게 웃었다. 계단에선 여자의 남편이 커다란 화분을 옆에 두고 계단에서 쉬는 중이었다. 얼굴이 터질 듯 시뻘겠다. 이웃과 동고동락하는 시대는 지났지만, 여전히 2M도 안 되는 거리에서 현관문이 마주 보는 처지라 대충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는 잘 알고 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신혼부부였다. 종종 싸우는 소리가 현관을 넘어 들리기도 했다.
“아뇨. 천천히 하세요.”
가만히 기다렸다. 정말 십 분 정도는 더 기다려도 괜찮았지만, 여자가 남자를 마구 재촉했다. 열대 나무인지 뿌리 부분만 두툼하고 위로 갈수록 가지가 가냘팠다. 그런데도 크게 자라 남자가 화분을 품에 안고 옮길 땐 천장에 넓적한 나뭇잎이 쓸리기도 했다. 남자가 화분을 내동댕이치듯 현관 근처에 내려놓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자기야 미안해. 내가 괜히 이거 키우고 싶다고 욕심부려서.”
여자가 남자의 이마를 훔쳐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남자가 헉헉거리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자기야. 난 자기를 위해서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어.”
더 듣기 민망해서 얼른 내려왔다. 퇴근하면서 우편함에 달린 광고지를 뗐는데 그새 또 다른 광고지가 청테이프에 고정된 채 대롱대롱 달려 있었다. 사장님이 미쳤다는, 과격하지만 상투적인 문구가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다. 감흥 없이 무슨 브랜드 오십 프로 할인, 같은 문구를 훑어보다 슈퍼 쓰레기통에 버렸다.
단 걸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은 단 게 당길 때도 있었다. 그렇다고 입에서 살살 녹는 단맛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아삭아삭 씹어 작아진 얼음이 혀를 얼얼하게 만드는 하드의 경우, 그저 시원한 맛에 꿀떡꿀떡 삼키는 게 좋았다.
기왕 사러 온 김에 냉장고를 채워 놓아야겠단 의지가 섰다. 하드를 잔뜩 골라 계산했다. 하품하며 계산을 마친 아주머니가 시큰둥하게 봉투를 내줬다. 알아서 담고 인사를 하고 나왔다. 입에서 김이 하얗게 나왔다. 걸음을 서둘렀다. 도로변을 꺾어 골목으로 들어섰고 다시 길목을 꺾어 골목에 들어섰다. 오면서 하드를 하나 뜯었다. 쓰레기는 누군가 분리수거장에 내놓은 널널한 봉투를 찾아 밀어 넣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단 생각을 하다 걸음을 멈췄다.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이 세상에 저 비싼 외제 차를 굴리는 게 오윤하뿐일 리는 없다. 하지만 이런 빌라에 못 보던 외제 차가 깜박이며 서 있을 확률은 오윤하일 가능성이 컸다. 슬금슬금 발소리를 죽였다. 보닛에 기대 핸드폰만 뚫어지게 쳐다보던 오윤하를 발견했다.
“팀장님 여기서 뭐 하세요?”
오윤하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졌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며 오윤하를 쳐다봤다. 오윤하는 이상한 각도로 팔을 움직이면서까지 놀란 게 민망했는지 냉큼 헛기침을 연달아 발사했다. 그러다 나를 한 번 훑고 뱉은 것이 갑작스러운 짜증이었다.
“뭡니까?”
이번엔 또 뭐 때문에 심기가 틀어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드를 한입 베어 물자 오윤하가 바로 말했다.
“왜 전화 안 받아요.”
나도 모르게 패딩 주머니를 툭툭 두드렸다. 만져지는 게 있을 리 없다. 손목에 달린 비닐봉지만 달랑거렸다.
“집에 두고 나왔어요.”
안 그래도 좁혀져 있던 오윤하의 미간이 더 좁혀졌다. 그러더니 다시 헛기침. 나로선 오윤하가 여기 왜 있는지가 정말 의문이었다.
“근데…… 저랑 더 안 자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밤중에 라라에게 쫓겨난 오윤하가 짜증 나 죽겠다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오윤하의 표정이 무척이나 시무룩해졌다. 땅을 발로 툭툭 차며 나를 힐끔, 그러다 헛기침. 다시 발로 땅을 툭툭. 가만히 쳐다보며 하드를 한 입 더 먹었다.
“누가 자자고 찾아온 줄 아나? 완전 도끼병이네.”
오윤하가 혼잣말치곤 아주 크게 중얼거렸다. 대꾸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침묵이 길어졌다. 제 옷깃을 만졌다가 땅을 쳐다봤다가 다시 하늘을 쳐다보는 둥 부산스러운 오윤하와 달리 하드만 야금야금 깨물며 오윤하만 빤히 쳐다보는 내게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오윤하가 버럭 화를 냈다.
“아, 그것 좀 그만 먹어요.”
눈을 흘기는 모양새가 딱 못된 소년이었다. 막대에 아슬아슬하게 달려 있던 하드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눈을 깔고 막대기를 울적하게 지켜보다 눈을 확 치켜떴다.
“……아이스크림 좀 드릴까요?”
빌라 단지 안에는 딱히 앉을 곳이 없어 근처에 있는 작은 공원으로 갔다. 공원이라고 하기도 뭐한 게 그냥 아이들을 위한 허접한 미끄럼틀과 시소, 그리고 나무 몇 개와 벤치 조금이 전부였다. 입구에서 입구까지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오 분이면 통과할 수 있었다. 미끄럼틀 아래에선 초등학교 저학년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추운 날도 잊은 것처럼 놀고 있었다.
한참 어린아이들을 보다 어깨를 움츠렸다. 이곳으로 오윤하를 이끈 건 나였지만 뒤늦게 오윤하의 차 안에서 이야기를 했어도 될 거란 생각이 찾아왔다. 몸을 부르르 떨며 오윤하를 힐끔 쳐다봤다. 오윤하는 계속 심기가 안 좋은지 미간을 좁힌 상태로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있었다. 비싼 맞춤 정장을 위아래로 차려입은 남자가 오렌지 맛 아이스크림을 물고 심각한 표정을 한 모습이란, 상상해 본 적 없지만 나름 잘 어울렸다. 이것도 오윤하가 잘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한 차례 더 어깨를 떨었다.
“빨리 나한테 미안하다 그래요.”
하필이면 하도 심심해서 입김을 불어 낼 때 오윤하의 말이 떨어졌다.
“캑, 네?”
숨을 잘못 들이켜 한동안 계속 콜록거렸다. 오윤하는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나를 흘겨봤다.
“빨리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라고.”
오윤하를 볼 때마다 심장이 쾅쾅 내려앉고 가슴이 아리고 뭐 그렇게 되길 바라는 건 아니다. 하지만 말을 섞을 때마다 매번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건 너무하지 않나 싶다. 오윤하가 입에 물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얼른 물어뜯고 대뜸 제 손을 내밀었다. 눈앞에 펼쳐진 손은, 그래. 길고 예쁘다. 그런데 뭐? 그런 얼굴로 쳐다봤다.
“처음에 나 같은 남자한텐 관심 없다고 했지.”
고개를 갸웃했다.
“자고 나니까 뭐 친한 척하지 말라는 둥, 그러다가 갑자기 집으로 부르더니 자기는 나 같은 남자한텐 볼 일 없다고 하지 않나.”
“정확히는 제가 팀장님을 좋아할 일 없을 거라고 했는데.”
“그게 그거잖아? 아무튼!”
오윤하가 성질을 부렸다. 발로 모래를 팍 차는 것에 잠깐 먼지가 일었다.
“그거 어떻게 살살 달래서 했더니 실컷 힘쓴 사람 턱을 할퀴지 않나!”
그것도 정확히 말하면 오윤하는 나를 살살 달랜 적이 없다. 그리고 턱에 난 상처는 내가 할퀸 게 아니라 라라가 할퀸 거다. 입을 벌리다 오윤하의 손에 텁 막혔다. 오윤하가 손을 내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어쨌든 나한테 빨리 사과해요.”
눈까지 크게 부라리며 말하는 태도가 아무래도…….
“진심이세요?”
“그럼 가짜로 사과받으려는 사람이 어딨어. 빨리 미안하다고 해요. 나도 듣고 가게.”
한숨이 푹 나왔다. 어느 고전 소설에서 한숨을 쉴 때마다 세월이 가는 거라 한숨을 자주 쉬는 사람은 남들보다 일찍 늙는다고 했다. 내가 당장 월요일부터 지팡이를 짚고 출근하면 그게 다 오윤하 때문이다.
“그러는 팀장님은 관심도 없는 나한테 마음대로 오해하고 자자고 하고.”
오윤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만 있는 줄 아나? 힘줘서 오윤하를 노려봤다.
“옥상 정원에선 허리 끌어안기까지 하고. 그뿐인가요? 그날 퇴근하는 길에 사람 창피하게 클랙슨을 누르고 억지로 사람 차에 태워 놓고.”
오윤하가 슬금슬금 눈을 피하더니 뻑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즉, 아이스크림을 다시 입에 물었다.
“자자고 해서 잤더니 변태처럼 밖에 사람들 다 있는 팀장실에서 무릎에 앉히고, 그날 또 이 동네 쳐들어와서 클랙슨 빵빵 누르고!”
여기선 또 할 말이 있는지 오윤하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 듣자 듣자 하니까 그게 왜 변태야?”
“벽만 넘으면 사람들 있는데, 거기서 이상한 짓 하는 게 변태가 아니면 뭔데요?”
서로 쳐다보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어쨌든 나한테 미안하다고 해.”
씩씩거리는 침묵이 흐르길 얼마, 오윤하가 먼저 말했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왜 미안하다고 해요. 관심 없다는 사람 옆구리 콕콕 찌른 건 누군데.”
“그건!”
오윤하가 헛기침했다.
“어쨌든 좋았잖아. 바로 어제 너무 좋다고 내 등 다 할퀸 사람은 누군데.”
이 인간이 미쳤나.
“저기 애들 있거든요?”
얼른 오윤하의 입을 막았다. 오윤하가 고개를 흔들어 내 손을 털었다.
“말 돌리지 말지?”
반말은 자기만 할 줄 아나 정말.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말 돌리는 게 아니라, 이런 말 이런 데서 할 게 아니란 거죠. 애들이 아니라도 사람들 있는 데서 이러는 거 창피하지 않아요?”
나름 논리정연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아, 그렇군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했겠지만 오윤하는 아니었다.
“애들도 알 거 다 알아.”
참 뻔뻔한 인간이었다. 미끄럼틀 아래의 아이들을 살폈다. 아이들은 우리가 뭐라 하든 상관없이 무슨 놀이에 한참 열중하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무슨 초성을 말하고 그에 맞는 단어를 외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나한테 사과하면 계속 윤 대리랑 잘 테니까. 빨리 사과해요.”
오윤하가 딴생각하지 말라는 듯 내 무릎을 제 무릎으로 쳤다. 어제부터 이어진 생각인데, 아무래도 오윤하 앞에 계약서니 뭐니를 내밀었던 건 정말 잘못된 것 같다. 이마부터 턱까지 벅벅 비볐다. 뺨에 닿는 손바닥이 차갑고, 건조했다.
“안녕히 가세요.”
“뭐?!”
오윤하가 다시 눈을 부라렸다. 뒤통수를 내려치면 눈이 빠질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자 손이 움찔움찔했다. 금방 포기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비닐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꺼냈다.
“웃겨. 누가 자기가 정말 좋아서 자는 줄 알아.”
짜증이 나니 절로 비아냥이 입에서 흘렀다. 확실히 내겐 드문 일이었다. 날 이 정도로 짜증 나게 한 인간은 처음이라 오윤하를 칭찬해 줘야 하나 헷갈리기까지 했다. 내친김에 오윤하가 했던 것처럼 손을 내밀었다.
“제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솔직히 팀장님 잘 때마다 변태 같은 말하는 것도 싫고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어제 날 위에 앉혀 놓고 이상한 자세…… 하, 어쨌든 별 희한한 자세를 하는 것도 싫어요.”
“…….”
“그뿐인가. 자기 성질대로 그냥 다 하려는 것도 싫어요. 날 좋아하진 않아도 적어도 무슨 배려는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오윤하가 중간에 말을 가로막았다.
“힘드냐고 물어봤잖아요?”
그게 배려냐? 그게 배려야?
“그건 사람 이겨 먹으려고 깐 초석이잖아요!”
버럭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끄럼틀 아래 어린이들이 날 쳐다봤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슬그머니 다시 벤치에 앉았다. 그렇다고 내 불만이 그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전 지금 팀장님 요구가 굉장히 황당해요. 그래도 내 기준에서, 후. 그나마 봐줄 만한 말이라서 그렇지 안 그래도 더 선을 넘으면 그때는 그만 자자고 하려고 할 거였어요. 잘됐네요. 저랑 이제 안자면 저한테 신경 꺼 주시는 거죠.”
그때였다. 어린이 중 하나가 외쳤다.
“비읍 지읒!”
비읍, 지읒……?
“…….”
“…….”
힐끔 오윤하를 봤다. 옆에 내려놓은 비닐봉지를 챙겨 일어나려고 할 때 오윤하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더 선 넘는 말이 뭔데요?”
갑자기 얼굴이 화르르 달아올랐다. 동시에 등골이 섬찟했다.
“이만 가세요.”
손목을 뿌리치고 얼른 발을 옮겼다. 그 뒤를 오윤하가 졸졸 따라왔다. 슬쩍 보니 어느새 다시 재밌어 죽겠단 얼굴이라, 소름이 끼쳤다. 뒤에서 비읍 지읒인 단어 모르겠다는 어떤 어린이의 말이 들렸다. 오윤하가 히죽거리며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보…….”
“어머 진짜 왜 이래.”
오윤하의 팔을 밀어냈다. 걸음이 더 빨라졌다.
“보정, 보정. 그거 말하려고. 왜?”
거의 달리기 수준이 되었다. 숨이 헉헉거렸지만 날 따라잡는 오윤하의 숨은 한 치 흐트러짐도 없었다. 얄미워서 입술을 깨물었다.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어디 가요.”
“가시라고요.”
“싫은데.”
오윤하가 턱을 치켜들며 다시 내 어깨에 팔을 얹었다.
“보…….”
“하지 말라니까?”
멈춰 서서 오윤하를 노려봤다. 오윤하가 콧노래를 부르듯 말을 흘렸다.
“보자기, 보자기. 쟤들한테 알려 주려고.”
어이가 없었다. 이미 아이들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온 탓이었다.
“그거 세 글자예요.”
“난 몰랐네.”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오윤하가 세희를 곤란하게 만드는 그 또라이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변태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오싹하게 들었다.
“내가 유학파라. 열아홉 때까진 계속 외국에서 살았거든.”
되지도 않는 능청이었다. 그리고 오윤하에 대해 들었던 소문 중 유학 다녀왔단 말은 없었다. 그리고, 간단한 글자 수도 헷갈리면 그게 무슨 유학파야, 검은 머리 외국인이지.
왜 안 가냐고 따지려 할 때, 오윤하의 손이 허리로 불쑥 들어왔다. 눈을 크게 떴다. 어어, 어…….
“어머!”
팔을 쥐고 돌려세운 오윤하가 날 들어 안았다. 엉덩이를 받친 팔이 단단했다. 너무 놀라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나왔어도 세상에 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오윤하가 모조리 삼켰으니까.
오윤하의 혀에선 오렌지 맛이 났고, 차가웠다. 엉덩이를 받치던 한 손이 빠져나와 내 뒤통수를 꾹 눌렀다. 오윤하의 입술이 차가웠던 탓일까. 더는 도망가려는 마음이 들진 않았다. 그래도 못마땅하긴 했다.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말했다.
“미안하다고 안 하면 나랑 더 안 잔다면서요.”
“내가 그랬나.”
그런 말을 한 지 오 분이 지났나 십 분이 지났나. 눈을 흘기자 오윤하가 웃으며 나를 고쳐 안았다.
“윤 대리 그거 알아요? 당신 놀리는 게 정말 재밌는 거.”
여덟 시, 가로등이 깜박거렸다. 주변은 이미 깜깜한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나한테 사과받으러 왔다면서 겨우 음어 정도로 날 놀리며 기분이 풀린 오윤하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오윤하는 정말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어디 가서 세상 경험 부족하단 말을 들을 나이도 아닌데, 오윤하와 있으면 나 스스로까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낯설고 생경하게 느껴진다. 움찔거리던 손이 슬쩍 움직였다. 손이 오윤하의 어깨에서 미끄러졌다. 단단한 가슴팍이 느껴졌다. 눈은 더 노골적으로 오윤하를 훑었다. 넓게 빠진 어깨와 기다란 목줄기, 그 위에 있는 날카롭고 단단한 턱선까지 전부. 눈을 내리깔았다.
“어제 했잖아요.”
“참.”
오윤하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었다.
“나, 충분히 윤 대리 배려하고 있는데.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울까 봐 참는 거예요.”
오윤하의 손이 엉덩이를 콱 쥐었다.
“그러니까 윤 대리도 나 좀 배려해 주지.”
오윤하가 다시 내 뒤통수를 눌렀다. 이번엔 부드럽고 따뜻했다. 짧게 떨어진 입술에 오히려 내게 아쉬움이 남았다. 오윤하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내려 줘요.”
“도망가려고?”
나는, 이런 걸 사랑하는 사이에서만 해 봤다.
“도망 안 가요.”
내가 아는 섹스는 부끄럽고 수줍고, 성적인 감각보다 감정이 우선이었다. 오윤하의 어깨를 가볍게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