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오윤하와 하는 키스는 잡아먹히는 듯한 오싹함을 선사했다. 육욕으로 인한 갈증과 해소를 바라는 갈망이 혀를 뿌리째 뽑아 버릴 듯 거칠게 밀려오다가도 어느새 돌연 태도를 바꿔 연인처럼 부드럽게 입술을 빨았다. 따라 혀를 움직이는 건 고사하고 숨을 제때 내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잠시 입술이 떨어진 사이에 오윤하의 가슴을 밀었다.
“잠시만. 할 얘기가…….”
오윤하가 내 턱을 움켜쥐었다. 덕분에 말이 뚝 끊겼다.
“나중에 해요.”
신경질적으로 흘러내린 앞머리를 밀어 올린 오윤하가 내게 다시 돌진했다. 아플 정도로 고개가 뒤로 꺾였다. 동시에 뜨겁고 두꺼운 뭔가가 내 허벅지를 쿡 찔렀다. 슬쩍 눈을 뜨고 확인했다. 트레이닝 바지가 민망할 정도로 팽창한 게 보였다. 마치 바지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옷의 본분을 다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지금 해야 해요.”
입을 굳게 다물고 다시 오윤하의 가슴을 밀었다. 그러곤 오윤하가 또 말을 끊고 달려들까 얼른 엉덩이 걸음으로 물러났다. 그러곤 두 손을 펼쳤다. 못된 짐승을 달래듯 천천히. 오윤하가 못마땅한 얼굴로 입맛을 다셨다.
“뭔데요.”
옷 입고 있을 때도 알 수 없지만, 옷을 벗고 있을 땐 더 알 수 없는 오윤하 되겠다. 남의 거기에 털이 있다고 시무룩할 땐 언제고 이렇게 흥분할 건 뭐람. 오윤하의 아래쪽을 한 번 힐끔 쳐다봤다.
“나 잘 안 젖어요.”
“하?”
황당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오윤하가 다시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러곤 피식 웃었다.
“가슴 좀 빨아 줬다고 좋아 죽으려던 거, 어디의 누구더라.”
마치 내가 튕기기라도 한단 말투였다. 슬그머니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을 살짝 때렸다. 즉시 오윤하의 눈썹이 찡그려졌다. 얻어맞은 손등을 야릇하게 핥는 걸 지켜보며 말했다.
“가슴은 성감대니까요. 그리고…….”
“그리고?”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섹스가 오랜만이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젤 쓰면 돼요. 그거 말하려고요.”
오윤하가 달려드나 달려들지 않나 분명히 확인한 뒤 허리를 비틀었다. 기억이 확실하다면 서랍장 맨 아래에 있을 것이다. 보지 않고 더듬거리다 아예 엎드려 누웠다. 이건 전세 계약서고, 이건 라라가 싫어해 봉인한 옛날 장난감. 한참 더듬거리다 깜짝 놀랐다. 고개만 돌려 오윤하를 노려봤다.
“조금만 기다리라니까요.”
맘대로 허벅지 깊은 쪽에 손을 밀어 넣고 있던 오윤하가 뻔뻔하게 응수했다.
“얌전히 기다리는 중인데.”
얼마간 더 노려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전 남자 친구와 사용할 때 항상 여기에 뒀고, 그 뒤로 누구와 썼던 기억이 없으니 여기 있을 거란 생각이었다. 막 구석에 있는 작은 상자를 꺼내 열어 보려다 눈을 크게 떴다.
“엄마!”
배로 쑥 들어온 오윤하의 손이 엉덩이를 높게 세웠다. 엎드린 상태로 엉덩이만 곧추세우고 있는 자세란…… 별로 기분이 좋지 못했다. 서둘러 자세를 바꾸려는 내 허리를 오윤하가 붙들었다.
“찾으려던 거 계속 찾아요.”
너는 너 할 거 해. 나는 나 할 거 할 테니까. 건성으로 오윤하가 내 허리를 토닥였다. 시선은 기가 막히게도 아래를 살피는 중이었다. 그러다 불쑥 손가락 하나가 질 입구에 들어왔다. 이런 자세를 시킨 것도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는데 대뜸 손가락 하나까지 등장하자 절로 엄마 소리가 한 번 더 나왔다. 허리를 세우고 오윤하를 노려봤다. 오윤하는 잠깐 밀어 넣었다 뺀 제 손가락을 유심히 살피는 중이었다. 엄지로 검지를 비비던 오윤하가 뚱하게 말했다.
“정말이네.”
어이가 없어서 기운이 쏙 빠졌다. 오윤하가 꼼꼼히 애무하며 애를 태운 게 있으니 아예 마른 건 아니었지만 손가락보다 큰 뭔갈 넣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 밑에 들어갔다 나온 손가락을 입에 문 오윤하가 서랍을 턱짓했다. 그래도 움직이지 않자 두 손을 번쩍 들고 얼굴 옆에서 흔든다. 비죽 웃는 게 얄밉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해서 좀 더 노려보다 한숨을 쉬었다.
“젤 찾을 때까지 거긴 만지지 마세요.”
“그러죠.”
오윤하가 순순히 대답했다. 뭔가 더 말하고 싶은 걸 꾹 참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거기에도 뭐가 많았다. 이젠 핸드폰이 있어 쓰지 않는 구형 전자사전이나 언제 여기에 넣어 놨는지 기억도 안 나는 사진 한 묶음. 그냥 지나치려던 손이 멈칫했다. 고무줄로 대충 묶어 놓은 사진을 뒤집어 봤다. 주원 씨 얼굴이 등장했다. 사진 하단에 찍힌 날짜와 배경을 보고 처음으로 같이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이라는 걸 알았다.
무심코 다른 사진도 있나 살폈다. 하지만 이곳에 상훈 선배 사진은 없을 것이다. 상훈 선배와 헤어졌을 땐 아직 본가살이 중이었고, 상훈 선배와 관련된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버렸었다. 이것도 버린 줄 알았는데 깜박한 모양이었다. 우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기다리다 지쳤는지 오윤하가 내 발목을 만지기 시작했지만 한번 멈춘 손은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상훈 선배와 헤어진 뒤 내가 깨달은 건 단 하나였다. 나 같은 사람은 같은 범주 내에서 활동하는 사람을 만나면 안 되겠다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상훈 선배의 소식이 들렸다. 때론 미친 척하고 달려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 내가 뭔가 잘못했다면 고치겠다고, 그러겠다고. 엉엉 매달려 우는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그만큼 괴로웠다. 견디다 못해 동기들과의 연락을 전부 끊은 적도 있었다. 세희의 권유에 따라 다시 동기들과 만나기 시작한 건 주원 씨와 만나며 마음이 안정되기 시작했던…….
“아……!”
입술을 비집고 숨이 삐져나왔다. 이제 와서 통한의 울음이라도 터트리고 싶다는 몸의 반응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훨씬 1차원적이고 원초적이었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오윤하를 불렀다.
“팀장님.”
“왜요.”
오윤하의 발음이 불분명했다. 동시에 한 번 깨물렸던 발목 위로 혀가 진득하게 지나갔다. 허벅지 아래에 닿는 애무는 들은 적도 없고 경험도 없었다. 발을 당기려 들자 오윤하가 힘을 줘 다리를 붙잡았다.
“나 윤 대리 말 굉장히 잘 지키고 있는데.”
다시 발목에 혀가 스쳤다. 어금니를 세워 깨무는 것에 허리가 펄쩍 움직였다. 간지러움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쾌감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 것이 언뜻언뜻 배 안쪽을 강타했다. 참을 만했다. 장난치지 말라는 말을 하려는 동시에 상자 뒤, 서랍 아주 깊숙한 구석에 구겨져 있는 젤을 발견했다. 얼른 움켜쥐고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발목을 애무하던 오윤하의 혀가 길게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몸이 다시 펄쩍 뛰었다. 억세게 붙들고 있는 오윤하의 손 때문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입을 벌렸다. 노성 대신 신음이 튀어나왔다.
“아, 아…….”
무릎 뒤 오금을 핥는 것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하다못해 깊은 곳에 닿지도 않은, 허벅지 안쪽을 주무르는 손마저 야릇하게 느껴졌다. 오금에 혀가 스칠 때마다 벌거벗은 엉덩이가 하늘을 향해 움찔움찔 올라갔다. 생경함에 도망가고 싶다는 마음이 머리를 지배했다. 젤을 터트릴 듯 쥐고 엉금엉금 기었다. 오윤하가 단단히 나를 붙잡았다. 그러곤 아예 허벅지를 들어 올리고 본격적으로 오금과 주변을 샅샅이 훑어 내리기 시작했다.
쩝쩝거리는 음란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허벅지 사이, 깊은 계곡이 있는 곳이라면 입으로 애무받은 경험이 있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지 않아 상대도 얼마 하지 않았지만. 꼭 그곳을 핥는 듯한 소리가 오금에서 퍼졌다. 살을 아예 파먹을 듯 이를 드러내고 빨아들이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시트를 움켜쥐었다.
제발, 이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직전 혀가 이번엔 허벅지를 타기 시작했다. 타액으로 잔뜩 젖은 오금에 숨이 스치자 다시 엉덩이가 흔들렸다. 허벅지를 갉듯이 이를 드러내고 깨물던 오윤하가 조금 전처럼 질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입구를 탐색하는 게 아니었다. 깊숙이, 더 깊게 들어가고 싶다는 듯 손등에 불거진 마디가 입구 부근에 퉁, 퉁. 부딪혔다.
“아, 잠시. 아…….”
“모르는 것 같아 말해 주는데.”
안이 축축하게 젖은 게 내게 느껴질 정도로 손가락이 느리게 드나들었다. 허벅지가 겹쳐진 채 비비 꼬였다. 침실에서의 오윤하는 자비가 없었다. 엉덩이만 바짝 곧추세운 채 오윤하의 손가락을 받았다. 눈앞이 번쩍거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오윤하의 목소리는 평탄하기 그지없었다.
“성감대는.”
허벅지를 단단히 움켜쥔 손이 다리를 넓게 벌렸다. 부끄러운 자세였다.
“이런 걸 말하는 거야.”
오윤하가 내 한쪽 다리를 높게 쳐드는 동시에 손가락이 모습을 바꿔 빠르게 드나들기 시작했다. 척척거리는 소리가 음탕했다. 개와 같은 짐승이나 취할 법한 자세로 가파르게 숨만 내쉬었다. 붙들고 있는 시트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았다. 손가락이 하나에서 두 개로 늘어났을 무렵 오윤하가 거칠게 오금 주변을 깨물었다. 통각이 쾌감과 함께 찾아왔다. 질 안에서 손가락이 돌아갔다.
곧이어 엄지가 입구 위의 작은 알맹이를 문질렀다. 손가락이 쑤시던 속도는 줄었지만 안에서 들썩이는 손가락과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오금에 스치는 이와 혀. 그리고 클리토리스까지 부드럽게 문지르는 것에 오히려 조금 전보다 머리가 터져나갔다. 뜨끈하게 몰린 열기로 인해 질끈 감고 있는 눈까지 녹아 버릴 것 같았다.
“곧 있으면 싸겠는데.”
갑작스레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다리도 놓였다. 절정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었는데 몰아친 흥분으로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대로 엉덩이가 내려앉았다. 한동안 숨을 몰아쉬자니 목구멍까지 가득 채웠던 열기의 자리를 음탕한 말을 지껄이는 오윤하에 대한 분기가 채웠다. 씩씩거리며 고갤 돌렸다. 그리고 할 말을 잃었다.
“자세 바꿀 필요 없어.”
막 콘돔을 입으로 뜯고 있던 오윤하가 오만하게 지껄였다. 입을 달싹였다. 엉덩이를 붙잡는 것에 얼른 손사래를 치며 물러났다.
“잠시만!”
손을 내밀다 보니 쥐고 있던 젤이 오윤하의 가슴을 찔렀다. 오윤하가 으르렁거렸다.
“이번엔 또, 뭐.”
그래도 말을 들어주니 다행이긴 했지만 그런 걸 기특하다고 생각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오윤하의 얼굴과 아래를 번갈아 봤다. 그리고 고개를 힘차게 저었다.
“안돼요.”
“뭐가.”
오윤하가 내 손을 붙들었다. 허둥지둥 물러났다.
“안 들어가.”
다급해지니 나도 모르게 반말이 나왔다. 오윤하가 이해를 못 하겠단 표정으로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얼른 팔을 엑스자로 교차했다. 젤이 침대 위로 굴러떨어졌다.
“그런 거 안 들어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오윤하가 내 팔을 붙잡았다. 다시 엎드린 상태가 되었다. 버둥거리는 게 귀찮다는 듯 오윤하가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한 손으로 내 밑을 문지르며 떨어트린 젤을 들어 올린 오윤하가 피식 웃었다.
“윤 대리 말이에요.”
저렇게 흉악한 걸 가지고 있는 줄 알았으면 자자고 안 했다. 결사적으로 버둥거리는 내 발목을 붙잡은 오윤하가 무릎으로 허벅지를 넓게 벌렸다. 그리고, 그리고…… 입을 달싹였다.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숨이 턱 하니 막힐 정도였다.
“정말 형편없는 놈들이랑만 해 봤나 봐. 이런 거 쓸 정도면.”
말을 마친 오윤하가 젤을 놓았다. 젤 뚜껑이 바닥에 부딪혀 깨진 듯한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필사적으로 저었다. 너무 버거웠다.
“제발…….”
나도 모르게 제발이란 말이 나왔다. 오금을 애무하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오금을 백 번 천 번 애무하는 게 나았다. 눈물이 글썽하니 고였다. 내 등에 가슴을 붙인 오윤하를 향해 반쯤 고개를 비틀었다. 오윤하의 미끈한 턱만 간신히 보였다가 말길 반복했다.
“빼, 빼 주.”
이제야 내가 뭘 말하는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오윤하가 가슴을 붙인 채로 웃는 탓에 배까지 진동이 울렸다. 한참 웃던 오윤하가 내 날개뼈에 입을 맞췄다. 싱긋, 올라간 입꼬리가 그대로 등에 화끈하게 찍혔다.
“힘들어?”
고개를 재빨리 끄덕였다.
“그렇구나.”
어린애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인 오윤하가 무릎으로 내 다리를 더 넓게 벌렸다. 불길한 예감에 설마, 하며 입을 벌렸다. 무슨 말이 나오기도 전에 오윤하가 다시 속삭였다.
“근데 아직 다 안 들어갔어.”
눈을 크게 떴다. 설마, 거짓말! 도망치려는 내 등을 오윤하가 억세게 눌렀다. 폐에 고인 숨이 헉, 하고 빠져나왔다. 버둥거리지도 못하고 숨만 간신히 이어 갔다.
“자위 중이잖아.”
사람을 자위 도구 취급한 게 나쁘다는 거 안다. 그 말에 기분 나쁠 거란 생각도 잠깐이지만 했다. 하지만 오윤하는 그동안 얼마나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던가? 그걸 생각하면 내가 했던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입구를 버겁도록 밀고 들어왔던 것이 빠져나갔다가 끝까지 밀어닥쳤다.
“버텨.”
오윤하가 내 귀를 아프게 깨물었다. 그리고 허리를 세웠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시트만 붙들었다. 오윤하가 몰아붙일 때마다 입에서 헉, 헉. 하는 가쁜 숨이 쏟아졌다. 내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게 맞는지, 맞다면 숨을 그저 쉬고만 있는지 아니면 들었다가 내쉬는 길 반복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그저 배 안쪽 장기까지 찌르는 듯한 버거움이 놀라웠고, 그 뒤에 미미하게 느껴지는 쾌감이 이상했다. 팔을 뒤로 뻗었다. 그만하라는 의미였으나 오윤하는 기다렸다는 듯 내 팔을 고쳐 잡고 더욱더 깊이 밀어 넣었다. 뻗지 않은 다른 팔까지 오윤하의 손에 붙잡혔다. 내게 남은 일은 오윤하의 움직임에 맞춰 몸을 들썩이는 것뿐이었다.
제대로 숨도 못 쉬도록 거칠게 들쑤시던 것이 드디어 빠져나갔다. 쾌감보단 버거움이 컸기에 다행이란 안도가 찾아왔다. 생각보다 일찍 끝났네, 하는 생각은 아주 조금. 그런데 안도의 숨을 쉬기도 전에 날 옆으로 돌아 눕힌 오윤하가 다시 쳐들어왔다. 눈을 부릅떴다.
“잠시.”
“…….”
“이, 이 자세.”
옆으로 돌아누운 채 오윤하가 내 다리를 번쩍 들어 올렸다.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지만 어쨌든 처음 섹스하는 사이인데 내외 없이 이런 자세까지 갈 일인가. 앞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꽃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오윤하의 물건이 들락거리는 게 훤히 보일 자세였다.
물론 앞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없다. 대신 팔꿈치로 몸을 지탱한 오윤하가 그 부위를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찌걱, 찌걱. 소리가 났다. 불이 붙은 것처럼 목덜미가 빳빳해졌다.
“이 자세, 싫어.”
간신히 말했다. 그 말에 오윤하가 움직임을 멈췄다. 목을 길게 빼고 얼굴을 살피는 것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가만히 있던 오윤하가 억지로 내 손을 잡아뗐다.
“많이 힘들어요?”
다정한 목소리였다. 마음이 녹아내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일이 다 끝난 뒤엔 뺨을 내려치고 싶단 생각은 가셨다.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오윤하가 상냥하게 내 뺨을 쓸었다. 피부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하나하나 떼 준 오윤하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뭐 별거 했다고 벌써 힘들어. 자위하는 거 돕는 중인데.”
울컥해서 눈을 번쩍 떴다. 속이 좁은 좀팽이라고 따지려고 들 때, 뺨을 만져 주던 오윤하의 손이 밑으로 내려갔다.
“당신 싸는 거 보고 싶거든.”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야. 난 이 정도면 충분해. 오윤하를 설득하기 위해 뻗었던 손이 다시 힘없이 늘어졌다. 벌어진 입으로 혀가 깊게 들어왔다. 클리토리스를 비비는 손에 맞춰 오윤하의 것이 다시 자비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명 비슷한 신음이 억, 억, 엇박자로 나왔다.
“아, 아!”
클리토리스가 여자의 최대 성감대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게 내벽을 압박하는 삽입과 함께 자극될 시에 이렇게까지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건 몰랐다. 이전과는 다른 속도로 나를 몰아붙이기 시작한 오윤하가 다시 자세를 바꿨다. 나를 제 위에 올린 것이었다. 오르가즘의 문턱에서 허덕인다.
오윤하가 말을 재촉하듯 내 엉덩이를 때렸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울상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잘못됐다. 뭔가 잘못됐어. 생각을 마저 이어가기도 전에 오윤하가 허리를 튕겼다. 숨을 삼키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동시에 질 안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를 과시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은 없었다. 사귀던 남자 친구와 잘 때조차. 사랑, 기쁨, 설렘. 그 무엇도 없는데 오윤하가 경험해 본 적 없는 쾌락을 멋대로 자극하기 시작했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열기가 욱, 하며 치고 올라왔다. 열기에 드디어 눈이 녹는 건가 싶었다. 눈 안쪽에서 맑은 눈물이 스며 나왔다. 얼른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오윤하가 다시 자세를 바꿨다. 나를 눕히고 제가 위에 올라오는 정상위였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고개를 저었다.
“싫어.”
오윤하의 얼굴을 붙잡았다. 숨이 가빠 말이 끊어져 나왔다. 열기가 곧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힘을 쥐어짜 오윤하의 어깨를 붙잡았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뒤로, 해요.”
다시 입을 막았다. 이젠 오윤하가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에도 발이 제멋대로 버둥거렸다. 얼마간 나를 내려다보던 오윤하가 다시 내 뺨을 쓸었다. 눈물이 묻어나왔다.
“바라시는 대로.”
몸이 뒤집혔다. 깊게 치고 들어오는 것에 억, 신음이 손안에 가로막혔다. 입이 벌어지며 떨어지는 타액이 손바닥을 적시는 것도 모자라 오윤하가 받쳐 준 베개를 적셨다. 이 쾌락의 끝이 어디일까. 거기까지 가면 나는 어떻게 될까.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입에선 억, 하는 신음도 나오지 않았다. 다리가 조여들었다. 오윤하의 작은 신음이 떨어지고 움직임이 잦아들 때까지도 타액이 뚝뚝 떨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시선은 뭔갈 보고 있는데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정신없이 머릿속에 제대로 정의할 수 없는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차라리 아픔이라고 하는 게 맞는 수준이었다. 윽, 윽. 숨만 계속 들이켰다. 오윤하가 나를 놓자마자 실험실의 개구리처럼 축 늘어졌다.
오윤하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폐가 공기가 부족하다는 듯 얼른 숨을 쉬길 강요했다. 허겁지겁 숨을 들이쉬고 내뱉었다. 불쑥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저…….”
세희가 이래서 모르는 남자들이랑도 자는구나. 이런 쾌감을 경험해 봐서. 처음 맛본 오르가즘은 좋다고 단적으로 표현하기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콘돔을 잡아 빼고 있던 오윤하가 시선을 맞춰 왔다.
“왜.”
한번 자니까 그냥 반말은 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 같나 보지……. 속의 말을 꿀꺽 삼켰다.
“……시트.”
오윤하가 일어나며 내 말을 갈랐다.
“냉장고에 물 있어요?”
이번엔 또 존댓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윤하가 그대로 벌떡 일어났다.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나가는 오윤하의 엉덩이를 쳐다봤다. 난 손 하나 까닥할 힘도 없는데 어떤 의미론 대단했다.
늘어져 있다가 간신히 무릎을 세워 창문을 조금 열었다. 침실을 가득 채운 후덥지근한 열기를 밀어내고 얼음 같은 공기가 밀어닥쳤다. 손을 배 위에 얹고 생각했다. 언제 이렇게 추워졌지. 이러다가 곧 눈도 오겠네.
“물?”
오윤하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컵에 따라 마시는 법도 모르는지 냉장고에 들어 있던 1L 생수통을 그대로 들고 있는 오윤하가 보였다. 얼마 안 남기도 했고 오늘 자고 말 남자한테 뭐라 할 것도 아니어서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오윤하가 저벅저벅 다가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손을 힘없이 뻗을 때, 오윤하가 남아 있던 물을 모조리 제 입에 털어 넣었다.
“아니.”
끓여 놓은 물은 저것뿐인데. 그렇다고 수돗물을 마실 수도 없고. 어처구니가 없어 눈을 크게 떴다.
“다 마시면 어떻…….”
오윤하가 내 뺨을 붙들었다. 맞닿은 입에서 차가운 물이 꿀떡꿀떡 넘어왔다. 슬쩍 밀고 들어온 오윤하의 혀도 시원했다. 내가 물을 다 마신 후에도 오윤하의 혀가 계속 내 입을 헤집었다. 얼마간 받아 주다 얼굴을 밀어냈다. 그대로 뒤로 퍼지며 몸을 웅크렸다.
“……시트 좀 빨아 주세요.”
오윤하는 이대로 가면 그만이지만 나는 여기서 자야 한다. 세탁기에서 시트를 꺼내고 건조기에 넣고…… 건조기까지 넣어 뽀송뽀송하게 마른 시트를 매트리스에 다시 끼워 주는 것까진 바라지 않지만 그래도 세탁기까진 돌려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물끄러미 오윤하를 봤다.
“베란다에 세제 있거든요. 뒤에 읽어 보면 얼마 넣어야 하는지 나와 있으니까 딱 그만큼만 넣어 주시면 돼요.”
올라오는 열기를 필사적으로 눌렀더니 목이 쉬었다. 힘겹게 일러 줬는데도 오윤하는 눈만 깜박깜박했다. 흐린 눈으로 오윤하를 보다 아, 했다. 침대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이불을 끌어당겼다. 이불도 빨아야 하나 했는데 이불은 오윤하가 본격적으로 굴기 전에 밀어 버린 모양인지 바닥만 포근하게 덮고 있었다. 이불을 둘둘 감고 졸린 눈으로 말했다.
“세탁기도 베란다에 있어요. 아래 있는 게 세탁기…….”
오윤하가 손을 뻗어 나를 침대 위로 끌어 올렸다.
“아래 있는 게 세탁기라니까요.”
투덜거리자 오윤하가 대뜸 목을 감쌌다. 손이 하도 커서 턱을 쥔 것인지 목을 감싼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 행동에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설마.
“시트를 왜 벌써 빨아.”
아닐 거야.
“팀장님?”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오윤하와 관련된 불길한 예감은 왜 한 번도 빗겨나가는 일이 없을까.
“내일 쉬는 날이잖아.”
허벅지를 비집고 가슴을 맞붙인 오윤하가 고개를 숙였다. 오윤하는 진심이었다. 진심이란 뜻이 뭐냐면, 저 패션모델처럼 잘 나빠진 얼굴에 내 말을 하나도 이해 못 한다는 뜻이 가득했단 소리다.
“팀장님, 잠시.”
항변이 맞붙은 오윤하의 입속으로 꿀꺽 넘어갔다.
“나 아직 당신 싸는 거 못 봤어.”
입을 뗀 오윤하가 다시 진입했다. 언제 또 저렇게 세웠는지에 대한 의문은 나중이었다. 도망치려 버둥거리는 팔이 붙잡혔다. 열어 놓은 창문이 무색하도록 또다시 뜨거운 공기가 차올랐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그림이 하나 있다. 우연한 기회에 갔던 회화 전시에서 본 것이었다. 솔직히 예술에 어떤 조예가 있는 건 아니다. 클래식 음악도, 유명한 그림도 남들이 상식이라 일컫는 그 정도만 알았다. 월광은 베토벤, 귀를 자른 고흐. 깜깜한 로마의 배경을 걷는 흐린 여인의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유명한 그림인지 그 앞엔 세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상하고 있었다.
여인은 작고 흐리게 그려져 생김새조차 제대로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걸친 우아한 레이스 숄과 한 손에 쥔 우산, 그리고 치마 아래로 살짝 나온 성급한 걸음걸이만큼은 분명했다.
그 옆에도 같은 화가가 그린 그림이 연달아 걸려 있었다. 다 비슷했다. 어두컴컴하거나 노을이 지는 유럽의 어떤 도시. 이목구비가 불분명한 사람들이 녹아내리는 듯 칠해진 거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유독 그 그림에만, 바람이 없었다.
화가의 이름은 그새 까먹었다. 익숙하지 않은 발음의 폴란드식 이름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그 화가가 그렸던 그림들이 생생하게 머릿속에서 되살아난다.
고개를 들었다. 빠른 속도로 계단을 내려온 여자가 우산을 손에 꼭 쥔 채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청바지와 짧은 패딩 차림이었지만 그림자에서 언뜻 레이스를 본 것 같아 잠시 걸음을 멈췄다. 붐비는 출근길 지하철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춘 나를 피해 사람들이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간혹 툭, 툭. 가방끼리 부딪칠 때도 있었다. 쏟아지듯 플랫폼 안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의 얼굴은 전부 무심하고 흐릿하다.
무심코 뺨에 손을 올렸다. 두툼하게 마른 유화 물감이 만져지는 것 같아 얼른 손을 떼고 살핀다. 손은 깨끗하다. 돌아보았다. 우산을 쥔 여자는 이미 사람들 틈에 섞여 흔적도 없었다. 손을 의미 없이 코트에 문지르고 나도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다 올라서자 차가운 겨울바람이 매섭게 몰아쳤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처럼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입을 쩍 벌리자 하품이 흰 숨으로 뭉게뭉게 쏟아졌다.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이 간절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네, 좋은 아침입니다.”
커피숍에서 커피를 사 온 탓에 평소보다 조금 늦었다. 시계를 보며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아홉 시 삼 분 전이었다. 나도 모르게 굳게 닫힌 팀장실을 한 번 쳐다보고 코트를 의자에 걸쳤다. 코트 자락이 바닥에 끌린다며 윤주 씨가 코트를 고쳐 놓았다.
“윤 대리님 주말에 잠 못 잤어요?”
“네?”
뜻밖의 질문에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윤주 씨가 커피 믹스를 홀짝거리며 내 어깨를 가볍게 만졌다.
“뭘 그렇게 놀라요. 안색이 영 아닌데.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어깨를 만지는 게 윤주 씨라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는데도 손길이 닿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의자에서 반쯤 떴다. 놓칠 뻔한 종이컵을 간신히 부여잡은 윤주 씨가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윤 대리님?”
“아, 아니요. 죄송해요.”
티슈를 뽑아 내밀자 윤주 씨가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쓸모없어진 티슈를 멍하니 들고 있다가 엄지로 꾹꾹 눌렀다. 휴지가 주먹 안으로 말려 들어왔다. 자그마한 공처럼 뭉쳐진 티슈를 책상 아래 쓰레기통에 버리며 한숨을 작게 흘렸다.
“일요일에 종일 잤거든요. 너무 많이 자서 그런가 봐요.”
오윤하와의 하룻밤이 남긴 후유증이란 대단했다. 음란하게 뻗어 오던 손길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는 것도 기분이 이상한데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까지 내내 붙들려있다, 아침에 겨우 잠들고 일어나니 월요일 아침이었다. 중간 중간 날 깨우는 라라의 손길에 정신없이 밥과 간식만 겨우 챙겨 주고 다시 잠들었던 걸 참작해도 생전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물론, 월요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오윤하는 없었다.
오윤하가 왔다 갔다는 흔적은 세탁기 안에서 발견되었다. 세탁기를 어떻게 돌리는 줄도 모르는지 물에 푹 젖은 시트가 꿉꿉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오윤하가 입었던 재원이의 트레이닝 바지와 함께. 시트 군데군데 뭉친 세제 덩어리를 쳐다보다 한숨을 쉰 게 아침에 처음 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제일 기가 막힌 건, 내가 일요일 내내 누가 가는지도 모르게 잠들었었다는 것도 아니고 실컷 내 몸으로 종이접기를 해 댄 오윤하도 아니었다.
“피곤해…….”
그렇게 내내 잤는데도 피곤하단 사실이었다. 밤새 이리 접히고 저리 접혔던 허리나 어깨도 욱신거리는 게 일주일을 요양해도 몸이 과연 제 상태로 돌아올까, 의심이 갔다. 뜨거운 커피를 훌훌 불며 중얼거리자 날쌘돌이처럼 지은 씨가 참견했다.
“원래 너무 많이 자면 그렇대요. 저도 어제 지인짜 많이 잤는데 피곤해 죽겠어요. 퇴근하고 싶음.”
“흠, 흠!”
지은 씨의 푸념을 들었는지 과장님 책상 쪽에서 헛기침이 날아왔다. 지은 씨가 얼른 입을 합 다물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목까지 꼿꼿하게 세우는 걸 옆에서 한성 씨가 볼펜으로 찌르며 소리 없이 놀렸다. 다시 시계를 봤다. 아홉 시 십오 분. 팀장실로 들어가는 사람도 나오는 소리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다 입술을 말았다.
“치사하게…….”
처음으로 천둥벌거숭이처럼 제멋대로 구는 오윤하가 부러워졌다.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발뺌하며 뻐근한 허리를 주물렀다.
“과장님. 신년 행사할 대관처들 좀 봐 주세요.”
“아니, 이미 예약하지 않았던가요?”
과장님 책상에 프린트한 종이들을 내려놓았다. 앞으로 병원에 꾸준히 오라는 말을 들었다는 과장님의 얼굴은 아직도 파리하기만 했다. 윤주 씨가 병원 옮겨야 하는 게 아니냐, 농담조로 그렇게 말했을 때 과장님은 이렇게 웃었다.
“아, 팀장님 오셨습니까.”
하하하…… 지금처럼 잔뜩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어색하게. 보기 좋게 프린트를 나열하다 고개를 들었다. 오윤하의 뒤에 걸린 시계를 먼저 봤다. 열한 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과장님의 인사에 다들 합창하듯 인사를 건넸다. 빠른 걸음으로 들어오던 오윤하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오셨어요.”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다시 허리를 굽혔다.
“아, 뭐.”
오늘도 오윤하의 인사는 시건방지고 무례했다. 짧고 성의 없었단 뜻이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문을 쾅 닫는다. 손을 뒤로 뻗어 허리를 매만졌다. 대관 처에 대한 설명을 마저 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과장님이 프린트를 모아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마침 오셨으니까 팀장님하고 얘기해 보세요.”
“……팀장님 하고요?”
과장님이 잠시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힘에 부쳤는지 금방 원래 표정으로 돌아오긴 했다. 과장님이 내 손을 한번 힘 있게 쥐었다가 놨다.
“이 정돈 결정할 수 있을 거예요. 아마도…….”
앞 문장까지는 그럭저럭 들었으나 아마도, 라는 말에서 한숨 쉬는 과장님을 따라 나도 한숨을 쉴 뻔했다. 재빨리 고개를 젓고 프린트를 정리했다.
“알겠습니다.”
다섯 걸음도 안 되는 문으로 다가가는 걸음이 몹시 무겁고 느렸다. 정말 상태가 안 좋은지 갑작스레 극심한 피로가 내 어깨를 짓눌렀다. 허리를 곧게 펴자 미지근한 통증이 잠시 퍼지다 그치는 게 느껴졌다. 안에서 여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막 코트를 옷걸이에 걸던 오윤하가 돌아봤다. 시선은 짧게 다녀갔을 뿐인데 조금 전보다 훨씬 어깨가 무거워졌다. 목 뒤까지 뻐근할 지경이었다. 의자에 깊게 앉아 몸을 삐뚤게 기울인 오윤하가 손을 까닥였다. 앞으로 걸어가 서류를 내려놓았다.
“뭡니까?”
“신년 행사 때문에 대관해 놨던 곳이 갑자기 공사에 들어간다고 해서요. 미리 몇 개 후보지를 추려 봤는데 결정 내려 주셨으면 합니다.”
과장님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오윤하가 보기 좋도록 프린트한 종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힐끔 오윤하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느꼈다.
“…….”
“…….”
피곤해서 늦게 출근한 얼굴이 아니네.
“…….”
“…….”
아무리 봐도 오윤하의 얼굴에서 내 것과 같은 그림자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다크서클은커녕 뺨에서 반지르르한 윤이 흐르는 걸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기가 막혀 혀를 찼다. 같이 했는데 나만 이게 뭐람. 혹시 오윤하는 충전식으로 움직이는 최신형 로봇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가 툭 치면 허물어질 것 같이 힘이 없는 나와 달리 오윤하는 쌩쌩하기만 했다. 말없이 쳐다보는 시간이 길었는지 건성으로 프린트를 뒤적이던 오윤하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아니에요.”
그리고 오윤하와 제일 가까운 곳에 놓은 프린트를 짚었다.
“가격 면에선 이쪽이 제일 합당한데 아무래도 여태 대관해 왔던 곳보다는 조금 좁아서 테이블과 의자를 세팅했을 때 사람들이 지나다니기가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그리고 이쪽은 재작년에 새로 인테리어를 한 H호텔 세미나 홀인데 다른 곳보다 훨씬 크고 테이블과 의자도 저희 요구만큼 넉넉히 준비되어 있다고…….”
“여기로 해요.”
오윤하가 프린트 하나를 짚었다. 여러모로 다른 곳보다는 떨어지는 곳이었다. 너무 대충인 거 아닌가, 싶어 말없이 쳐다보자 오윤하가 의자에 등을 젖혔다. 그리고 만년필로 손가락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영감, 말로는 검소해야 하니 뭐니 하지만 화려한 거 좋아해요. 뭘 했다는 게 눈에 확 보이는 거.”
영감? 눈을 깜박이자 오윤하가 시큰둥하게 검지를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회장.”
자기 아버지를 거리낌 없이 영감이니 회장이니 부르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언제나 날 놀라게 하는구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오윤하가 프린트를 뒤적이며 마저 말을 이었다.
“여긴 장소가 좁다고 하니 탈락이고, 새로 인테리어 했다고 해도 H호텔은 이름값이 좀 떨어지지. 자기가 10대 대기업 회장들하고 어깨 나란히 하는 줄 안다니까. 아무튼, 여기로 해요.”
국내 10대 대기업 수준은 아니더라도 오윤하는 광화문 한복판에 떡하니 놓인 이 건물만 해도 값어치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알아도 감흥이 없거나. 저 표정을 보면 지금은 그냥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심지어 집요할 정도로 관심을 보이던 내게도. 거기까지 생각하다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조금 전까지 어지러울 정도로 어깨를 짓누르던 피로가 가벼워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대관 진행하겠습니다.”
오윤하가 뒤적거리느라 어지럽게 널린 프린트를 정리했다. 들리지 않게 안도의 숨을 쉬었다. 피로가 아니라 긴장이었다. 자기 전에도 제멋대로 굴던 오윤하가 이젠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긴장. 과장하면 미지에 대한 공포에 가까웠다. 가볍게 목례를 하고 돌아섰다. 그간 자자고 난리를 피웠던 오윤하니 흥미가 식었을 법도 했다.
“그럼.”
오늘은 빨래를 마무리하고 라라와 신나게 놀아 줘야겠다. 원래 주말에는 땀이 날 정도로 놀아 주는 게 일상이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라라가 많이 섭섭했을 것이다. 어쩐지 잠든 나를 깨우는 손길이 심상치가 않은 것 같더라니. 돌아가는 길에 마트에 들려 멸치를 사 갈까.
“잠시만.”
멸치에 대해 생각을 하느라 조금 늦게 반응했다. 돌아보자마자 바로 무심한 눈으로 날 보는 오윤하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까지 손가락 사이에 끼우고 있던 만년필은 보이지 않았다. 감정 없는 파충류 같은 눈동자로 날 지켜보던 오윤하가 손가락을 까닥였다. 시선을 내렸다. 동시에 또르르, 만년필이 굴러왔다.
“그것 좀 주워 줄래요.”
기분이 가벼워져서 그런지 고개가 선뜻 끄덕여졌다. 프린트를 옆구리에 끼우며 무릎을 굽혔다. 히터가 빵빵하게 돌아가고 있어도 스타킹 너머로 느껴지는 바닥은 차가웠다. 머리카락 몇 올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만년필을 막 쥘 때였다.
“털 밀었을 거란 오해에 흥미 가진 건 맞지만, 직격타는 그 모습이었어.”
고개를 들었다. 언제 무관심한 얼굴을 했냐는 듯 입술을 삐딱하게 비튼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눈만 깜박이자 오윤하가 턱을 괸 손을 떼며 천천히 속삭였다.
“허리 숙이고 머리 넘기는 게 꼭, 오랄 하는 거 같잖아.”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거나 놀라면 어떤 소리도 못 낸다는 말을 실감한다.
“섹스할 때도 그렇게 무심한 얼굴일까 싶고.”
입만 뻐끔거리는 날 두고 오윤하가 어깨를 들썩였다.
“펜 안 줘요?”
“아……. 네.”
한숨이 터져 나오기 직전에 오윤하가 손을 뻗었다. 옆구리에 끼워 둔 프린트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으나 오윤하가 까닥이는 대로 그 앞으로 다가갔다. 내 앞에 펼쳐진 커다란 손 위에 만년필을 내려놓을 때, 오윤하가 돌연 손을 뒤집어 내 손목을 쥐었다. 훅 잡아당기는 것에 그대로…… 오윤하 무릎에 걸터앉았다.
“정신없이 자는 거로 봐선 오늘 회사 나올 수는 있을까 했는데, 어떻게 나왔네.”
어린애 다루듯 허벅지를 들썩이며 날 고쳐 앉힌 오윤하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신경 써서 골라 입은 폴라 티의 목 부분을 슬쩍 늘렸다. 그러곤 히죽 웃었다. 기특하다는 듯 엉덩이도 팡팡. 흠칫거리자 마치 귀엽다는 듯 콧등을 찡그린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오윤하의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등골이 섬찟했다.
“별건 아니고, 오늘 저녁 먹자고. 튀긴 뱀장어 같은 거 좋아…….”
말을 마치기도 전에 오윤하의 뺨이 살짝 옆으로 돌아갔다. 눈을 부릅뜨고 날 보는 오윤하의 왼쪽 뺨도…… 한 대 때려 줬다. 이번엔 어머, 소리도 안 나왔다. 아까부터 너무 놀랐기 때문이다.
“무슨 말만 하면 뺨을 때리고, 아주 상습범이야!”
오윤하가 제 뺨을 붙잡고 소리 낮춰 따졌다. 나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사실 머릿속이 너무 뒤죽박죽이라 말이 제멋대로 나왔다. 얼른 오윤하의 가슴을 떠밀며 무릎을 벗어났다. 그리고 말했다.
“치, 친한 척하지 마세요.”
오윤하가 뺨 한 대 더 얻어맞은 표정을 지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다가 얼른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흐트러진 곳은 없었지만, 그거라도 해야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윤하가 바보 같은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친한 척?”
두 손 다 가슴에 올렸다. 세상에, 회사에서. 그것도 합판 벽 하나만 벗어나면 사람들 다 있는 곳에서. 입으로 후, 후. 심호흡을 뱉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다는 판단에 따라 입술을 말아 물며 오윤하를 쳐다봤다.
“전, 팀장님 쿨한 분인 줄 알고 잔 거였어요.”
이제 오윤하는 키가 2M는 넘는 거인에게 내다 꽂힌 표정이었다.
“자위하는 셈 치겠다는 말, 기분 나쁘셨을 거 알지만 사실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고요.”
“난 그냥 밥 먹자고.”
고개를 저으며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프린트를 주워 들었다.
“거짓말하지 마세요.”
밥 먹자고 하는 사람이 그건 왜 세우는 건데? 따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이번엔 공포가 맞았다. 미지가 아니라 경험해 본 공포. 문고리를 붙잡는 나를 오윤하가 붙들었다. 때려 준 게 효과가 있었는지 오윤하의 아래는 잠잠했다. 몸서리쳤다. 날 가지고 몇 번이나 종이접기하듯 주물렀으면서 이틀도 안 지났는데 어떻게 다시 세울 수가 있냐는 의문이 공포와 함께 밀어닥쳤다.
“아니, 그냥 밥 먹자니까?”
날 당장 벽에 밀칠 기세로 으르렁거리는 오윤하를 밀어냈다.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본능적이었다.
“저 팀장님이랑은 두 번 다시 안 잘 거예요.”
말을 마치고 재빨리 문을 열었다. 할 말, 끝! 이란 표정으로 입을 말아 물었다. 뭐라 말하려던 오윤하가 입을 다물었다. 어느덧 점심시간인지 사무실이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책상 앞에 앉아 무료하게 카드 게임을 하던 지은 씨가 있었다. 지은 씨는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놀랐는지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배시시 웃으며 내게 달려왔다.
“윤 대리니임.”
강아지처럼 내 앞으로 졸졸 온 지은 씨를 보며 이마에 어린 식은땀을 훔쳐 냈다.
“밥 먹으러 안 갔어요?”
“다른 분들은 구내식당 가셨는데 전 다른 거 먹고 싶어서요. 윤 대리님도 아까 몸 안 좋다고 하셨죠. 제가 죽 시켰는데!”
지은 씨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는 것처럼 손에 들고 있던 카드를 팔랑였다.
“제가 쏩니다!”
하는 짓이 하도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지은 씨가 ‘같이 드실 거죠?’ 하며 내 팔에 매달렸다. 덕분에 회사에서 오윤하 무릎에 앉았던 낯부끄러운 기억을 쉬이 잊을 수 있었다.
“내가 계산할게요.”
“아 안돼요. 제가 살래요. 대신 윤 대리님은 다음번에 맛있는 거 사 주세요!”
휴게실에서 기다리자며 지은 씨가 날 이끌었다. 미소 지으며 따라가다 나도 모르게 섬찟한 기운에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대리님?”
거기엔…… 문에 기댄 채 흉흉하게 날 노려보는 오윤하가 있었다.
“아, 아뇨. 가요.”
환각일 거야. 그럴 리가 없어. 지은 씨와 나란히 걷다 다시 돌아봤을 때, 팀장실 문은 언제 열려 있었냐는 듯 닫혀 있었다. 역시 착각이었구나. 가슴을 쓸어내렸다.
퇴근길이었다. 날이 저문 탓인지 아침보다 좀 더 쌀쌀한 온도에 바람이 칼날처럼 느껴졌다. 이제 코트도 잠시 접어 두고 세탁소에 맡긴 롱 패딩을 찾을 때가 된 것 같았다. 내일 오라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 멸치를 사면서 세탁소도 함께 들려볼까. 계획을 짜며 느릿느릿한 거북이처럼 걸음을 옮길 때였다. 빵!
“…….”
걸음을 멈췄다. 이상했다.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불길한 기운이 몰려오고 있었다. 고개를 저었다. 다시 세탁소로 생각을 기울였다. 그나저나 시트를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