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상훈 선밴 내가 처음 사귄 남자 친구였다. 그전엔 짝사랑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니 잘해 줬고, 나를 좋아하는 만큼 더 잘해 줬다. 그저 꿈을 꾸는 듯이 좋았다. 하다못해 만나러 가기 전 옷을 고를 때도 거울을 보며 혼자 웃었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다.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소개하고 싶다며 나를 갑자기 술자리에 불러냈던 것. 처음 키스했던 골목, 헤어지기 싫어서 계속 손잡고 돌던 작은 공원.
어느 날은 작별 인사를 건네는 내 손을 선배가 붙들었다. 선배의 손은 몹시 축축했다. 놀라 몸이 안 좋은 거냐, 묻자 선배가 말했다.
‘오늘, 같이 있고 싶어.’
선배랑 섹스도 정상위로만 했냐며 놀리던 세희의 말에 아무 말도 못 하고 놀란 것엔 세희가 정답을 맞췄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그날의 떨림을, 아프다며 울먹이는 내게 어찌할 줄 몰라 쩔쩔매던 얼굴을 보며 느꼈던 그 설렘을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 년, 이 년, 삼 년.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좋아지기만 했다. 점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들고 만나도 피곤하다며 자취방에서 나가지 않으려 하는 선배를 보면서도 그냥 정말 피곤하겠지, 취업 준비 중이니까 나보다 더 힘들겠지. 이해했다. 힘들어하는 만큼 더 잘해 주려 애썼다. 뭔갈 해 주지 않냐고 보채지도 않았고 이전과 달라졌다며 따지지도 않았다. 그런 생각은 애초에 들지도 않았다.
그러다 선배가 돌연 연락을 끊었다. 전화해도, 메시지를 남겨도 답이 없었다. 전전긍긍 앓다 자취방에 찾아갔다. 벨을 눌러도 나오지 않아 앞에서 기다렸다. 새벽이 깊은 시간에서야 술에 잔뜩 취한 선배를 마주쳤다. 선배는 나를 보고 귀신을 보듯 놀랐다. 선배는 막연하게 바빠서,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헤어지자.’
선배가 앞서 했던 말은 전부 이유가 아니었다. 변명이었을 뿐.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헤어졌다는 말에 세희가 나를 불러냈다. 대신 욕을 해 주는 것에 그러지 말라고 손을 붙들었다. 그렇게 한 잔 두 잔,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억지로 욱여넣을 때 그렇게 좁은 대학로도 아닌데 하필 그 술집으로 상훈 선배가 들어왔다. 그것도 우리 뒷자리였다. 구멍이 송송 뚫린 칸막이 사이로 말이 적나라하게 흘러들어 왔다.
왜 헤어졌어, 질려서.
내가 항상 잘해 주기만 해서 지겹다고, 그랬다.
“윤 대리.”
“…….”
“윤 대리?”
정신이 퍼뜩 들었다. 고개를 들고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오늘 토요일인데 왜 오윤하가 여기 있지, 에서 생각이 머문 탓이었다. 그리고 오윤하 뒤엔 웬 병풍이 펼쳐져 있었다.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영화에서나 볼 법하게 잘 꾸며진 한옥이었다. 단단한 나무로 짜인 고급 자개장이 창문 밑에 길게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꽃핀 매화나무 가지가 멋스럽게 꽂힌 작은 도자기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이번에도 입에 안 맞아요?”
“아, 뭐…….”
물음을 한 귀로 흘리며 손을 뻗었다. 오윤하는 밥을 먹다 말고 갑자기 나뭇가지를 뽑아 만지작거리는 게 수상하단 눈치였다. 괜히 손가락으로 가지 끝을 매만졌다. 막상 만지고 나니 진짜인 줄 알았는데 조화다. 갑자기 흥미가 확 죽었다.
“팀장님이 왜 여기 계세요?”
꽃병에 다시 매화를 돌려놓고 멍하니 물었다. 차근차근 현실이 머릿속에서 조립되고 있었다. 딱, 딱, 딱.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딱딱거리는 소리가 내 머릿속에서 나는 게 아니고 옻칠을 해 반드르르한 빛이 도는 식탁을 오윤하가 두드리는 소리란 걸 눈치챘다. 오윤하가 어처구니없단 얼굴로 물었다.
“낮술 했습니까?”
“아.”
그제야 어제 오윤하의 약속을 걷어찬 대신 황금 같은 토요일 저녁을 오윤하에게 쓰기로 한 걸 기억해 냈다. 어젯밤 이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평소에 별로 생각하지 않는 전 애인들과 일까지 기억해 내는 걸 보면 말 다 한 셈이다. 볼을 소리 나게 때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오윤하가 제대로 보였다. 오윤하는 가벼운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이렇게 보니 영락없이 재원이 또래로 보이기도 했다. 세상에 복잡할 거 하나도 없다는 듯이 철없이 구는 걸 알아 더 그래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내 대답에 오윤하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슨 말을 하는 대신 오윤하는 상에 놓인 반찬을 하나 더 집어 먹었다.
“먹어요.”
상을 보니 화려한 반찬이 다발로 깔린 게 보였다. 한정식집의 한상차림을 안 먹어 본 건 아니지만 보통 뷔페처럼 가짓수는 많아도 손이 잘 안 가는 구색 맞추기용 찬이 많았던 걸 생각하면 지금 보고 있는 상은 황홀할 지경이었다. 관리를 잘해 윤이 번쩍번쩍 나는 놋그릇에 정갈하게 담긴 홍어삼합, 오징어 초무침, 빨간 고추를 채 썰어 예쁘게 장식한 전복찜, 노릇하게 구워진 굴비와 그 옆엔 아삭아삭한 배가 장식처럼 놓인 육회도 있었다. 입맛이 없다고 해도 이 정도면 손을 안 대는 게 주방에 대한 실례일 것 같았다.
젓가락을 들어 육회만 살짝 맛봤다. 그리고 서둘러 숟가락으로 밥을 한술 크게 떴다. 쟁쟁한 요리들 사이사이에도 푹 익힌 무청이나 연근조림, 울외장아찌 같은 것들이 있었는데 하나같이 전부 맛이 좋아 목구멍에서 꿀떡꿀떡 넘어갔다. 덕분에 근심처럼 도사리던 생각들이 모두 날아갔다.
밥을 반 공기 정도 비웠을 때 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색이 예쁜 생활 한복을 차려입은 종업원이 등장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비찜과 빨갛게 양념 된 낙지볶음, 그리고 윤이 자르르 흐르는 갯벌 장어였다. 틈 사이사이를 요령 좋게 비집고 음식을 내려놓은 종업원이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질 쳐 나갔다. 여기 밥값은 또 얼마일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어 덜컥 겁부터 났다. 그걸 오윤하가 눈치챘다.
“내라고 안 할 테니 마저 먹어요.”
이제 보니 오윤하는 별로 먹지도 않았다. 아까부터 그러고 있었는지 날 지켜보는 중이었다. 계속 정신을 쏙 빼놓고 있던 게 미안하긴 했지만, 저번부터 이런 비싼 음식을 날름날름 얻어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젓가락을 내려놓자 오윤하가 몸을 뒤로 빼며 양손을 들었다.
“정 그러면 내가 미안해서 사는 밥이라고 생각하던가.”
“뭐가…….”
“윤 대리에 대해서 내가 오해한 거요.”
오윤하가 바로 말을 이었다.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잘 알겠으니까 회식 날 데려다줄 때 그런 말했던 거, 사과하는 거로 생각하고 먹어요.”
꽃바구니를 보낸 건 끝까지 사과할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내 표정을 보고 눈썹을 씰룩인 오윤하가 찰밥을 젓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내가 원래 그래요. 마음대로 안 되는 거 있으면 일단 될 때까지 해 봐야 해.”
오윤하가 날 쳐다봤다.
“윤 대리가 진짜 나하고 그럴 마음 없다는 거 아니까 그냥 먹고 끝내요.”
기분이 묘했다. 무표정한 오윤하는 마치 내게 자자고 하기 전의 오윤하로밖에 안 보였다. 나뿐만이 아니라 회사의 그 누구에게도 관심 없던 오윤하. 소문으로만 듣고 하루에 한 번 얼굴을 마주치면 용했던 그 오윤하 말이다.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오윤하가 뚱하게 투덜거렸다.
“나도 생각이란 걸 하거든.”
덧붙인다.
“먹어요. 얼른 먹고 일어나게.”
얼떨결에 숟가락을 들었다. 밥을 한입 떠먹고 낙지볶음에 손을 댔다. 양념이 특별하게 맛있는 건 아니었는데 어떻게 삶았는지 야들야들하니 입에서 살살 녹았다. 처음 밥을 먹었던 휘황찬란한 식당도 맛은 있었지만, 분위기가 부담스러워 음식이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몰랐는데 오윤하의 말에 마음이 편해진 것인지, 아니면 마찬가지로 고급스럽긴 하지만 듣지도 보지도 못한 공간이 아니라 그런지 음식이 술술 넘어갔다.
갈비찜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고 나서야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배가 빵빵해서 슬쩍 배를 쓰다듬었다. 자기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나를 지켜보던 오윤하가 그때야 물김치를 한 번 떠먹고 일어났다. 배가 불러 걸음도 느렸다. 슬그머니 따라가자 그새 계산을 마친 오윤하가 바깥을 고갯짓했다. 거기엔 몇 번 본 오윤하의 세단이 아닌 다른 차가 있었다.
“팀장님 차 안 가지고 오셨어요?”
주차장에 차가 꽤 많기에 내가 못 발견한 건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렸다. 오윤하가 다시 어이없단 얼굴을 했다.
“이것도 내 차예요. 이거 타고 왔잖아요.”
가리키는 것이 처음 봤던 SUV라,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오윤하가 투덜거리며 먼저 운전석에 올라탔다. 이 정도로 정신을 놓고 있었으면 설마 현관도 안 닫고 나온 게 아닌가 의심이 갔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신음을 흘리며 입을 틀어막았다. 막 출발하려던 오윤하가 물었다.
“왜 그래요?”
“현관문 제대로 닫고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나서.”
나 혼자 사는 집이라면 훔쳐 갈 것도 없으니 상관없었으나 집엔 라라가 있었다. 혹시 라라가 문을 통해서 빠져나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가자 잘 먹은 밥이 체할 듯 울렁였다.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꼭 감았다. 제발 현관문 제대로 닫고 나왔길, 현관문 안 닫고 나왔어도 라라가 밖으로 나가지 않았길.
고사 지내는 사람처럼 계속 그러고 있자 헛웃음 소리와 함께 오윤하의 손이 불쑥 들어왔다.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내 반응 따윈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오윤하가 벨트를 쭉 꺼내 채웠다. 허리에 살짝 오윤하의 손이 스쳤다. 눈만 굴려 날 보던 오윤하가 천천히 입을 뗐다.
“윤 대리 참 특이한 사람이에요. 알아요?”
그런 말에 대꾸할 말이 뭐가 있을까. 네가 더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할까. 천지가 개벽 된다고 해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옛날부터 그랬다. 내 속을 남들에게 보이는 건 언제나 꺼려지고 싫었다. 참다 참다 겨우 한 조각 흘리는 게 제일 친한 친구인 세희와 가족들 앞에서뿐이었다.
세희는 내가 그럴 때마다 매번 등을 때리며 ‘넌 착하고 다 좋은데 등신이라는 게 문제야!’ 하고 대신 열을 냈다. 그때도 그랬다. 상훈 선배와 헤어지고 술을 마실 때, 너무 잘해 줘서 질린다는 그 말을 듣고 세희가 나섰다. 상훈 선배 얼굴에 우리가 시켜 놓고 손도 안 댔던 과일 화채가 뿌려졌었다.
주원 씨와 헤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뭐 그런 새끼가 있냐며 펄펄 뛰며 열을 내는 세희의 손만 꼭 잡았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세희는 말했다.
‘윤다정, 네가 착한 거 알겠어. 나도 그래서 네가 좋으니까. 하지만 넌 등신이야!’
재원이는 더했다. 재원이에게 뭘 제대로 털어놓은 것은 없었지만 마음이 애끓으면 항상 몸부터 표가 나는 날 빠르게 눈치채고 닦달했다. 상훈 선배와 헤어졌던 건 재원이가 어릴 때라 잘 모르지만, 주원 씨와 헤어졌을 땐 이미 대학생이 된 이후라. 그 새끼 죽여 버리겠다고 아빠가 폼으로 세워 둔 현관의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고 뛰쳐나가는 걸 말리느라 애를 먹었었다.
“제가 재미없는 사람인가요?”
말없이 운전에만 집중하던 오윤하가 날 쳐다봤다.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냔 표정이라 얼굴이 빨개졌다. 쓸데없는 말이었다. 괜히.
“저번에 저보고 재미없다고 하신 거 같아서. 신경 쓰지 마세요.”
소리 없이 자책할 때 눈을 가장자리에 놓고 뭔갈 생각하던 오윤하가 입을 뗐다.
“윤 대리는 뭘 할 때 상대방 반응, 그리고 후에 일어날 일까지 전부 생각하고 움직이는 타입이죠?”
잠깐이지만 놀랐다. 그리고 세희와 오윤하가 손을 잡고 같이 강남 한복판에서 타로점을 쳐 주는 상상을 했다. 못해도 저 얼굴이면 여고생들에게 한 번 웃어 주기만 해도 이런 외제 차 두 대를 유지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엉뚱한 상상을 할 때 신호에 걸린 차를 세우며 오윤하가 마저 말을 이었다.
“난 아니에요.”
눈이 마주쳤다. 오윤하가 먼저 시선을 거뒀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신경 안 써도 돼요.”
시큰둥하게 말하는 오윤하를 보며 생각한 건 딱 한 가지였다. 그래도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파악하는구나……. 이걸 주제 파악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자기 객관화가 잘 됐다고 생각해야 하나. 뺨을 긁적이며 눈을 창밖으로 던졌다. 왜 아직도 차가 달리나 했더니 고속도로 한복판이었다. 곧 있으면 판교라는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경기도 외곽까지 끌려와 놓고 기억을 못 하는 나도 참 나다. 한숨을 쉬었다.
“그럴게요.”
주말이라 차가 좀 막히긴 했지만, 서울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밥을 먹은 건 아니라 예상했던 시간보다 삼십 분 일찍 집 앞에 도착했다. 그새 하늘이 깜깜했다. 계속 이마를 매만지고 있던 손을 뗐다. 손을 뻗어 당장 문을 제대로 닫았나 확인해야 하는데,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아예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상훈 선배와 헤어진 뒤 만났던 주원 씨는 내 사수였다. 처음부터 어떤 미묘한 기류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좋은 선배. 그렇게 생각하기만 했다. 실제로 주원 씨는 성격이 살갑고 쾌활해 인기가 많았다. 얼굴이 딱히 잘난 것은 아니었지만 주원 씨가 누구 씨 오늘따라 근사하게 입었네요. 잘 어울려요. 하고 말을 건네면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그중에서 나만 예외여서였을까.
주고받는 메시지에 사사로운 이야기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얼마 뒤, 내가 좋다고 했다. 나는 바보같이도 고백에 상훈 선배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직 누굴 새로 만날 준비가 안 됐어요. 주원 씨는 기다릴 수 있다고 했다. 진지하게 만나 보지 않겠냐는 물음에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 년, 이 년. 불안함을 놓고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결혼 이야기도 슬슬 나오기 시작했다. 서로의 부모님과도 가볍게 식사를 하기도 했다. 재원이가 주원 씨를 아는 이유다.
어느 날 회사로 어떤 여자가 찾아왔다. 화려한 옷차림에 모두가 그녀를 힐끔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나를 붙든 건 그녀였다.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김주원 씨 자리가 어디죠.’ 당황하며 어떻게 찾아오셨냐고 물은 말에 그녀가 말했다. 여자 친구예요. 연락이 안 돼서 찾아왔어요.
마침 거래처와 미팅을 마치고 돌아온 주원 씨가 얼른 여자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 괴로운 얼굴로 주원 씨가 말했다.
‘임신했대. 미안해.’
바람이었다. 화도 내지 못했다. 왜 그랬냐고 물었다. 잠은 나랑도 자잖아요. 돌리고 돌린 말에 주원 씨가 무릎을 꿇고 빌었다.
‘다신 안 그럴게. 그냥 실수였어. 애는 지우라고 할게.’
이미 회사엔 소문이 퍼진 뒤였다. 모두가 수군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사표를 냈을 때, 부장님이 다시 생각해 보라며 입에 발린 말을 했지만, 그냥 하는 말이란 건 나도 부장님도 알았다. 나와 그가 같은 사무실에 있을 때 느껴지는 분위기를 부장님도 느꼈으리라. 그렇게 퇴사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전화를 건 주원 씨가 소리쳤다.
‘너 솔직히 재미없어. 알아? 다 좋고, 다 받아 주고. 결혼하긴 좋지만 남자라면 한 번쯤 스릴을 찾는 법이야…….’
“팀장님.”
회상은 거기서 끝났다. 얼굴을 두 손에 묻은 채라 웅얼웅얼 말이 나왔다.
“왜 나랑 섹스하고 싶어요?”
침이 꿀꺽 넘어갔다. 긴장은 한순간이었다. 막상 결심하자 아무 생각도 없어졌다. 방금까지 하던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 좋아하는 건 아니죠?”
고개를 들자 뚱한 표정의 오윤하가 보였다. 딱 그랬다. 뭔 헛소리야. 그런 표정. 거기선 그냥 생각이 가벼워졌다. 오윤하가 막 입을 떼기 전, 빠르게 속삭였다. 반대로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럼, 자고 가실래요?”
오윤하가 입을 다물었다. 나도 말없이 오윤하를 쳐다보기만 했다. 조금 뒤 오윤하가 헛웃음을 지으며 핸들에 올린 팔에 턱을 괬다.
“남자 친구 있어서 안 된다며.”
안 그런 척하지만, 입이 찢어지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을까.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멋대로 시작한 승부에서 이겼다고 생각하는 걸까. 혹은, 오윤하가 말하는 주고받는 것 없는 섹스가 그렇게 재밌는 걸까? 오윤하를 지켜보다 입을 뗐다.
“사실은 헤어졌어요.”
너희들이 그렇게 재밌다는 거. 나도 한번 해 보자, 그래. 재원이가 알면 뒤로 넘어갈 일이었지만 재원이가 어떻게 알겠는가. 고개를 저었다. 대신 세희의 말을 떠올리려 열심히 노력했다. 특별한 감정 없이, 외로울 때, 딱 하룻밤만. 오윤하가 아무 말 없이 눈을 가늘게 찡그렸다.
“설마, 나 때문에…….”
자아도취가 너무 심한 게 아닐까. 오윤하는 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모양이다. 안전벨트를 풀었다.
“싫으면 마세요.”
차 문을 열고 내렸다. 빌라 현관에 도착했을 즈음 긴 다리가 내는 짧은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오윤하의 얼굴이 보였다. 저벅저벅 걸어온 오윤하가 내 어깨에 팔을 턱 내려놨다.
“누가 싫다고 했나.”
어이가 없어 순간 짧은 한숨이 나왔다. 오윤하는 거리낌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는? 하는 얼굴로 두리번거리기에 계단을 가리켰다. 오윤하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먼저 앞서 걸으니 따라 올라오긴 했다. 말없이 계단을 오르다 불쑥 돌아봤다.
“혹시 알레르기 있으세요?”
막 201호에 붙은 현란한 전단을 구경하던 오윤하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알레르기?”
“집에 고양이 있거든요.”
오윤하가 어깨를 으쓱했다.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다행히 현관문은 잘 닫혀 있었다. 안도의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고 비밀번호를 쳤다. 내 옆, 벽에 기대 있던 오윤하가 불쑥 물었다.
“뭐 하나 물어도 될까요.”
“하세요.”
문을 열며 라라야, 하고 불렀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먼저 신발을 벗고 들어가 거실과 베란다를 살폈다. 창문도 닫혀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온 걸 눈치채고 숨은 걸까. 자동 급여기와 연결된 밥그릇도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왜 나랑 갑자기 자려고 해요? 어제까지는 대답이 변하지 않을 거라고 했잖아.”
현관에 서서 집을 둘러보던 오윤하가 물었다. 그래 봤자 좁은 거실과 부엌, 그리고 작은 침실만 딸린 빌라라 볼 게 별로 없는지 다시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오윤하의 얼굴은 흥미롭다는 기색 반, 얼떨떨하단 기색 반이었다. 대답을 바로 하지 않자 오윤하가 신발을 대충 구겨 벗었다. 내 걸음으로도 다섯 걸음도 안 되는 거실을 두 걸음 만에 주파한 오윤하가 베란다에 서 있는 내 허리를 끌어당겼다. 오윤하의 입술이 목에 닿았다.
“응?”
오윤하의 손이 천천히 내 옷을 들치고 안으로 진입했다. 어떤 감정이 없는 상대이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에 짜릿함이 스쳤다. 허리 안쪽의 맨살을 지분거리는 오윤하의 손을 밀어냈다.
“자위하는 셈 치려고요.”
잠시의 정적. 그리고 캑, 오윤하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물러났다. 멀뚱히 지켜보다 욕실 불을 켜고 문을 열었다. 환한 불빛이 쏟아졌다.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빛을 피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오윤하에게 다가갔다.
“일단 씻고 오세요.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떨궜다.
“고양이 화장실 밟으셨어요.”
오윤하가 떨떠름한 얼굴로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
가끔은 마음을 꺼내 직접 눈으로 보고 만져 볼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을 한다. 동화책 내용이었다. 어릴 때 읽은 동화책은 많고 많았으나 아직도 내용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건 그뿐이다. 내용은 이랬다.
옛날 어느 나라의 도시에 요정이 나타났다. 새에게 잡아먹힐 뻔한 요정을 그 도시에 사는 소년이 구해 줬다. 요정이 소년에게 감사를 표하며 원하는 소원을 말하라 일렀다. 그러자 소년이 말하길, 부모님이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한다.
도시의 사람들은 굶주림과 희망 없는 내일과의 싸움에서 매일같이 패배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소년의 부모님도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 먹고사는 걱정에 소년을 안아 준 일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요정은 소년이 사람들의 마음을 꺼내 만지고 볼 수 있게 해 줬다. 그리고 요정이 떠나기 전에 귀띔했다. 슬프거나 우울한 마음은 꺼냈을 때 회색빛이라, 매일매일 공들여 부드럽게 만져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밤마다 부모님의 마음을 꺼내 문질렀다. 한 달, 두 달. 그러던 어느 날. 일터에 다녀온 소년의 부모님이 소년을 힘껏 끌어안아 줬다.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소년은 너무너무 기뻐 그날 자신의 마음을 꺼내 봤다. 소년의 마음은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삽화에 그려진 소년의 마음은 무척이나 예뻤다. 무지갯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소년이 문질러 준 부모님의 마음도 그렇게 변했다. 그렇다고 가끔 내가 마음을 꺼내 눈으로 확인하고 만져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소년의 부모님처럼 힘들고 괴롭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냥, 내 마음을 나도 모를 때가 종종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마실 거 좀 있어요?”
재원이가 두고 간 트레이닝 바지를 입은 오윤하가 나왔다. 키는 재원이랑 엇비슷하거나 재원이가 좀 더 큰 것 같은데 다리는 오윤하가 훨씬 긴지 복숭아뼈가 깡충 드러나 있었다.
“마실 거 어떤 거요?”
“뭐, 맥주 같은 거.”
술에 취약하니 그런 걸 집에 모셔 놓고 살 리가 없다. 다만 냉장고를 뒤적이니 반병 정도 남은 소주가 나왔다. 식탁에 올려놓자 오윤하가 소주병을 만지작거리며 날 물끄러미 응시했다.
“술을 못하는 거로 아는데, 소주 좋아해요?”
식탁에 컵을 꺼내며 대꾸했다.
“싱크대 청소하다 남은 거예요.”
오윤하가 더러운 걸 만진 것처럼 손을 확 뗐다. 그러곤 날 노려봤다. 입맛을 쩝 다시고 컵과 소주를 제자리에 돌려놨다. 정적이 흘렀다. 손가락이 어색해 자꾸만 티셔츠 밑단을 잡아 뜯었다. 내가 싱크대 청소하던 구정물을 자기한테 먹이려 했다는 듯 오윤하의 시선은 몹시 시무룩했다. 손바닥을 옷에 쓱 문질렀다.
“그럼, 이제.”
자위하는 셈 치겠단 말을 했지만, 사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위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엉거주춤 자세를 바꾸다 한숨을 쉬었다. 지켜보던 오윤하가 손을 뻗어 부드럽게 내 팔을 잡았다. 그냥 팔을 쓸어내리는 것뿐인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오윤하도 그걸 느꼈는지 좀 더 부드러운 태도로 내 팔을 고쳐 잡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긴장돼요?”
“조금…….”
오윤하가 한 걸음 다가왔다. 거리가 바짝 좁혀졌다. 오윤하의 허벅지가 들어와 다리 사이를 벌렸다. 팔을 놓은 손이 허리로 내려왔다. 덥석 움켜쥔다. 도망칠 생각은 없었지만, 퇴로가 전부 차단당한 채 포위당한 느낌이 마냥 좋은 것도 아니었다. 엉거주춤 따라가는 게 성가실 만도 한데 오윤하는 별로 그런 기색이 없었다. 어설픈 왈츠를 추듯 정신없는 내 걸음과 달리 오윤하의 걸음은 곧고, 목적이 뚜렷했다. 주춤거리지도 멈추지도 않았다.
작은 침실엔 침대 옆에 바짝 붙은 서랍 겸 화장대와 붙박이장, 그리고 혼자 쓰기엔 넓지만 둘이 쓰기엔 좀 좁은 침대뿐이었다. 나를 놓고 침대에 먼저 앉은 오윤하가 다리를 꼬며 이불을 쓸었다. 이불을 쓰는 것뿐인데 관능이 뚝뚝 묻어났다.
“좀 좁네, 지금이라도 호텔 갈까.”
오윤하는 얼굴을 대번에 갈아 낄 수 있는 마술을 부리는 사람 같다. 어쩔 땐 신경질적이고 무관심하고 어쩔 땐 바닥에 놓인 장난감을 아프게 밟은 어린애 같은 얼굴을 한다. 그리고 지금은 눈을 마주하는 게 어색할 정도로 색기 어리고 거침없었다.
“아니요. 그냥 해요.”
덤덤히 대꾸하고 티셔츠를 벗었다. 찬 공기가 닿자 피부 구석구석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히고 날 구경하던 오윤하가 혀를 내어 입술을 노골적으로 핥았다. 바지도 내렸다. 옷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 느껴졌다. 팬티부터 벗을까, 아니면 브래지어부터. 고민하다 팬티를 붙잡았을 때 오윤하가 손을 뻗었다. 번쩍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눈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내 얼굴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핀 오윤하가 다시 입술을 핥았다. 립스틱을 바른 것처럼 입술이 붉어진 게 어스름히 보였다.
“이건, 내가.”
티셔츠를 벗어 내던진 오윤하가 날 잡아끌었다. 넓게 벌어진 다리 사이에 오윤하의 허리가 스쳤다. 단단한 허벅지가 엉덩이를 받쳤다. 오윤하의 몸은 근사했다. 헬스로 규칙적으로 가꿔야 볼 수 있는, 조금 슬림하다 싶은 몸에 근육이 보기 좋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색하게 배회하던 손이 오윤하의 맨 어깨에 안착했다.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다.
허리부터 뱀처럼 기어 올라온 손이 이내 머리끈을 훅 풀어 머리카락 사이로 침범했다. 머리카락을 헤집는 손길마저 애무처럼 노골적이었다. 머리를 당겨 뺨과 귀 사이에 입술을 묻은 오윤하가 속삭였다. 뜨거운 입술이 귓불을 스쳤다.
“떠먹여 주는 것보다 직접 먹는 게 맛있거든.”
말을 끝냄과 동시에 혀가 귀를 감쌌다. 물렁물렁한 귀가 오윤하의 뜻대로 혀끝에서 뭉개지다 제 모양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젖은 피부에 오윤하의 숨이 닿으면 그때마다 오윤하의 어깨를 쥔 손이 움찔거렸다. 내 머리를 움켜쥔 오윤하가 귓바퀴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숨이 흐리게 나왔다. 뒤로 물러나려는 엉덩이를 오윤하의 손이 힘 있게 움켜쥐고 바짝 당겼다. 천 하나에 가로막힌 곳에 낯선 이의 체온이 노골적으로 닿았다.
눈을 반쯤 떴다. 보이는 풍경은 그저 익숙한 내 방일 뿐이었다. 매일같이 씻고 자고, 눕는. 그곳에서 오윤하와 반쯤 벗고 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손이 뺨으로 내려왔다. 턱을 당기는 것에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마주 섞이기 직전, 멈춘 오윤하가 눈을 치켜떴다. 쳐다보기만 하는데도 사나운 기색이 느껴졌다.
“키스.”
엄지가 숨만 몰아쉬는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할까.”
내가 만약 동화책 속 소년처럼 마음을 꺼내 볼 수 있다면 지금 내 마음은 어떤 색일까. 그러나 그보다는 충동에 대한 설명을 찾고 싶었다. 내가 왜 오윤하에게 자자고 했을까. 나도 모르겠는 그 이유가 마음의 어딘가엔 새겨져 있을 것 같았다. 오윤하의 손가락이 다시 아랫입술을 눌렀다.
“……재밌으면 해요.”
눈에 명확히 보이지 않는 것들은 언제나 날 혼란스럽게 한다. 사랑, 슬픔, 외로움. 그리고 충동. 충동만큼은 내가 손에 쥐고 다스릴 수 있다고 믿었지만 지금 와선 그것도 확신을 못 하겠다.
“재미?”
오윤하가 잠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말없이 오윤하의 살갗을 만지작거렸다. 맨살에 닿는 누군가의 체온이 좋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했다. 내 속을 가늠하고 싶어 하는 눈길이 꼼꼼히도 닿았다. 잠시 뒤 오윤하가 입술을 삐딱하게 틀어 올렸다.
“그러지.”
몸이 번쩍 들린다 싶더니 순식간에 자세가 뒤바뀌었다. 내 위를 차지한 오윤하가 목에 입술을 묻었다. 귀를 농락하던 입술이 이번엔 목을 농락했다. 맛있는 사탕을 빨 듯 쇄골을 야금야금 깨물던 오윤하가 등 뒤로 손을 넣었다. 무늬 없는 브래지어가 바닥에 내던져졌다. 입으로 깨무는 것처럼 커다란 손이 가슴을 둥글게 부여잡았다.
가슴을 애무하는 중에도 오윤하의 손가락은 곧고 예뻤다. 오윤하는 바로 유두를 건드리지 않았다. 별 감각 없는 살덩이나 유두 부근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수록 유두가 기대를 품고 딱딱해졌다. 슬금슬금 몸 안쪽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그게 목구멍을 가득 채웠을 때, 오윤하의 엄지가 오른쪽 유두를 스쳤다. 단지 스쳤을 뿐이었는데 뜨거운 숨이 한 조각 흘러나왔다.
“……아.”
어쩐지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민망함 때문인지 아니면 잠시 스쳤던 짜릿함 때문인지 볼이 뜨거웠다. 살며시 손으로 입을 덮었다. 그때 오윤하의 입이 건들지도 않고 있던 왼쪽 유두를 삼켰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겁고 축축한 곳에 빨려 들어간 유두가 긴장으로 더욱 단단해졌다. 동시에 오윤하의 혀가 유두를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숨이 손바닥에 막혀 물기처럼 번졌다.
한 번, 두 번. 약 올리듯 혀끝으로 유두를 툭툭 건드리던 혀가 물러가는가 싶더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애무로 갑작스레 습격해 왔다. 쭙, 쭙. 노골적인 소리와 함께 다리가 급하게 조여들었다. 어깨도 함께 움츠러들었다. 마음껏 가슴을 농락하던 오윤하가 눈을 치켜떠 내 얼굴을 응시했다. 짧았다. 시선이 거둬짐과 동시에 오윤하의 반들거리는 입술이 한쪽으로 비틀렸다. 이 상황과는 별개로 정말 성격 나빠 보이는 얼굴이란 생각.
“좋아요?”
저 주둥이도.
“벌써 이렇게 조이면 어떻게 해요. 허리 부러지겠어.”
오윤하가 엄살을 피우며 손을 내렸다. 허벅지를 쓰다듬는 손길이 끈적끈적했다. 유두를 장난스레 튕긴 오윤하가 보란 듯이 손가락을 살짝 핥았다. 장난감처럼 허벅지를 쥐었다가 놓길 반복하던 오윤하가 허리를 세웠다. 가슴과 허리를 따라 그림 그리듯 내려온 손이 다리를 넓게 벌렸다. 시선이 노골적으로 한 부분을 탐냈다. 얇고 작은 천 하나로만 가려진 곳이었다. 속옷 라인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트린 오윤하가 다시 날 응시했다.
“내가 말했지. 거절하면 후회할 거라고.”
자신만만하고 오만하게 지껄이며 오므리려는 내 허벅지를 내리누른다. 그제야 눈치챘다. 아까부터 뭔가 이상하다 했더니 말 대부분이 반말이었다. 뭐 하자고 벗고 있는 상황에서 왜 반말하냐고 묻기도 좀 뭐해서 그냥 내버려 뒀다. 팬티가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저 작은 천 조각 하나가 뭐라고 최후의 보루를 빼앗기는 기분이 들었다.
기묘한 부끄러움이 찾아왔다. 설렘이 없는 부끄러움은 기묘하다고밖에 설명이 안 됐다. 꽤 오랫동안 타인의 손길이 닿은 적 없는 곳이라 애무 당하는 동안 잠시 물러갔던 긴장이 찾아왔다.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긴장한 가운데엔 나를 점령할 오만한 손길에 대한 작은 기대감도 있었다.
“…….”
“…….”
“…….”
그러나 팬티가 벗겨진 뒤에도 오윤하는 뭘 하지 않았다. 가슴을 애무할 때 그랬던 것처럼 애를 태운다기엔 허벅지에 얹어진 손도 꼼짝하지 않았다. 의아함에 눈을 떴다. 오윤하는 내 아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걸 봤다는 듯. 오윤하가 여자의 성기를 본 적 없을 리는 없었지만. 오히려 각양각색으로 많이 봤을 것이다. 말없이 아래쪽을 쳐다만 보는 게 민망해서 슬쩍 엉덩이를 뺐다.
“왜 그렇게…….”
“여기.”
내 말을 뚝 끊은 오윤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시선은 여전히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는 아래쪽을 보는 중이었다.
“왜 털이 있어요?”
어안이 벙벙했다. 눈썹을 찡그리고 오윤하를 쳐다보다 뺨을 긁적였다. 시선이 오윤하의 판판한 가슴을 따라 내려갔다. 목적지는 아직 옷에 가려진 곳이었다.
“팀장님은…… 거기에 털이 없어요?”
힐끔거리며 묻자 오윤하가 미간을 좁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잠시 본 오윤하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손가락이 꽃잎 위의 미세하게 굴곡진 둔덕을 쓸었다.
“그새 자랐나.”
하도 시무룩한 얼굴이라 나도 일단 몸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여전히 그곳을 쓰다듬던 오윤하가 너야말로 지금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대답했다.
“털, 민다고 했었잖아요?”
“네?”
서로 마주 보고 멀뚱멀뚱. 오윤하의 눈썹이 한쪽만 치켜 올라갔다.
“그때 옥상 정원에서, 여기 털 미니 마니 하면서 애인이랑 통화한 거 들었는데.”
“옥상 정원…….”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눈을 천천히 깜박이다 어느 순간 미간을 확 찡그렸다.
“그럼 여태 나한테 그랬던 게 내가 여기 민 줄 알아서였어요?”
대답은 바로 없었다. 대신 오윤하는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거기서 수수께끼가 풀렸다.
“아니, 그러니까. 팀장님이 그랬던 게.”
그래, 생각해 보면 별다른 대화도 나눠 본 적 없던 내게 오윤하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게 그때 이후였던 것 같다. 섹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청결이나 편하다는 이유로 털을 미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둘째 치자. 크게 뜬 눈으로 오윤하를 훑었다.
“팀장님 혹시 변태…….”
그때였다. 방구석에서 야옹, 소리가 들렸다. 오윤하와 동시에 구석을 돌아봤다. 오윤하에게 옷을 꺼내 주느라 열어 놨던 붙박이장 안쪽에서 나는 거였다. 일어나서 붙박이장 문을 활짝 열었다. 가지런히 쌓인 옷더미를 몇 개 들자, 잠이 덜 깼는지 부스스한 눈으로 윙크하는 라라가 등장했다. 입술을 말아 물었다.
“라라 너, 누나가 여기 들어가지 말랬잖아.”
라라가 내 손에 얼굴을 비볐다. 라라를 번쩍 들어 올렸다. 혀를 차며 라라가 누워 있던 곳을 보다 몸을 돌렸다. 라라를 안은 채였다. 뒤늦게 오윤하를 발견한 라라가 귀를 쫑긋 세웠다. 오윤하 옆으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라라를 들어 올렸다.
“얘예요.”
얼떨결에 라라를 받아 안은 오윤하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낯선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라라인지라 금방 오윤하의 품을 벗어나 바닥에 착지했다. 라라가 두리번거리다 내 팬티를 물었다. 얼른 빼앗았다.
“피부병 걸려서 털을 싹 밀었었거든요.”
팬티를 향해 라라가 야옹야옹 울었다. 라라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오윤하를 향해 라라의 앞발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해.”
“야옹.”
“그래. 이제 잠깐 나가 있어. 누나도 곧 나갈게.”
거실에 라라를 내려놓고 문을 닫았다. 야옹야옹 소리가 좀 더 들리다 이내 그쳤다. 그새 팬티에 라라의 털이 한 점 묻었다. 오윤하의 옆으로 다시 돌아갔다. 라라의 털을 떼어 내 화장대 위에 올려놓고 오윤하를 봤다. 이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그럼…….”
오윤하는 대답이 없다.
“옷 다시 입을까요?”
무슨 말을 더하려다 관뒀다. 허리를 굽혀 오윤하의 티셔츠를 먼저 들었다. 뭐가 묻은 건 없지만 그래도 툭툭 털어 오윤하에게 건네려 할 때였다. 오윤하가 덥석 내 팔을 잡았다.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오윤하는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아니.”
오윤하가 나를 당겼다.
“그냥 해요.”
“하지만…….”
티셔츠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눈이 크게 떠졌다.
“뭐, 서긴 섰으니까.”
시큰둥하게 지껄인 오윤하가 내 입술을 덥석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