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라라는 치즈색 고양이다. 주둥이와 배만 빼고는 전부 흔히 치즈색이라 하는 노란빛 주황색 털로 뒤덮여 있다. 다른 곳엔 무늬가 없지만 꼬리 중간부터 끝까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보이는 줄무늬가 있다. 털을 쓰다듬어 주면 좋아하지만, 장난친다고 털이 난 반대 방향으로 훅 쓸면 따끔하게 손등을 내려치며 짜증을 낸다.
라라를 새끼 때부터 키운 건 아니었다. 어느 날 재원이가 고양이 이동장을 우리 집 거실에 내려놓았다. 재원이의 고양이를 키운다는 대학 친구가 다친 녀석을 구조해 임시로 보호하고 있었지만 원래 키우던 고양이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바람에 잠시만 부탁 좀 한다는 것이었다. 전화로 이야기를 들었을 땐 막연히 새끼 고양이를 생각하고 있던 터라 라라와 눈이 마주친 순간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머리가 되게 크네.”
“그치? 잘생겼지?”
“잘생겼다고는 안 했어.”
“아아, 누나아. 누나밖에 부탁할 사람이 없단 말이야. 응, 응?”
재원이의 우격다짐 같은 대책 없는 애교엔 언제나 질 수밖에 없었다. 구조했을 때 상태가 너무 심각해 한쪽 눈을 적출할 수밖에 없었다던 라라는 윙크하듯 사람을 쳐다봤다. 원래는 한 쌍이어야 할 불완전한 우주는 사람의 마음을 훅 빨아들였다.
처음부터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다. 나도 소파에 앉아 볼까 하고 다가가면 라라는 하악, 소리를 내며 등을 둥글게 휘었다. 경계 신호였다. 얼떨결에 그렇게 소파를 빼앗겼다.
밥을 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방에 들어가고 나서야 밥을 먹었다. 퇴근 후 돌아오면 항상 나는 밥 따위 먹지 않았어, 하는 듯 도도하게 굴었지만, 사료 그릇은 설거지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언제나 깨끗했다. 그렇게 주객전도의 상황처럼 변해 버린 집에서 심기에 거스를까 살금살금 걸어야 했다.
중간에 한번 소파를 되찾기 위해 큰마음 먹고 비싼 방석을 주문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라라는 언제나 소파 왼쪽에 앉아 한쪽 눈으로 나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이름 모를 고양이들이 무척 좋아한다는 방석은 내가 바닥에 앉을 때나 쓰게 되었다.
그렇게 기묘한 동거 생활이 두 달 반쯤 되었을 무렵이다. 여느 때와 같이 라라야 밥 먹자, 하며 사료 그릇을 내려놓는데. 라라가 야옹. 했다. 놀라 쳐다보자 다시 라라가 아옹했다. 가만히 라라를 보다 물었다.
“지금 대답한 거야?”
“야옹.”
라라가 내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밥그릇에 정수리를 비볐다. 라라는 그렇게 내 다리 틈에 낀 채 밥을 다 먹었다. 라라가 소파를 내주기 시작한 건 석 달쯤 됐을 때 일이었다. 넉 달쯤 되자 소파에 길게 누우면 내 배 위로 올라왔다. ‘라라야.’ 부르면 어디에 있던 라라는 야옹, 하며 한쪽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언제나 그렇듯, 뭔갈 좋아하는 일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면 상대를 알게 된다. 라라는 내가 새로 산 열 개의 장난감 중 단 두 개만 가지고 놀았고 간식도 항상 멸치만 골라 먹었다. 신경 써서 사 둔 비싼 연어엔 눈길도 안 줬다.
나는 이제 라라를 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라라를 위해 주문했던 옷이 막 도착했다. 라라가 어떤 옷을 좋아할지 몰라 종류별로 산다는 것이 그만 일곱 개나 주문해 버렸다. 하나같이 후기도 좋고 소재도 좋은 것들이었다. 그 외에도 새 장난감과 간식 몇 개를 같이 주문해 상자가 제법 묵직했다. 오늘은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갈까. 고민하며 사무실로 들어서다 흠칫했다.
들고 있던 택배 상자가 미끄러질 뻔했다. 분명 내가 택배를 받아 오기 전까지는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을 비비며 쳐다봤지만, 꽃바구니는 사라지지 않았다. 통화를 열심히 하던 윤주 씨가 전화를 내려놓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건 뭐예요? 택배?”
“고양이 옷이랑 간식 조금이요.”
“아아.”
고개를 끄덕이던 윤주 씨의 시선이 내 책상을 떡하니 차지한 커다란 꽃바구니에서 멎었다. 그리고 잠시 뒤엔 고개를 돌려 창가에 나란히 줄 서 있는 꽃바구니 세 개를 쳐다봤다. 전부 내게 온 것이었다. 밀려오는 당황스러움을 무시하며 택배 상자를 내려놓고 꽃바구니를 쳐다봤다. 첫날 온 것을 제외해도 벌써 다섯 개째였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지은 씨와 한성 씨가 키득거리며 날 쳐다봤다.
“이번 거는 올포러브네요?”
한성 씨가 말했다. 꽃에 대해는 잘 몰랐지만, 이것도 비싸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분홍색에 가까운 겉잎과 달리 속으로 갈수록 빨간빛이 도는 장미였다. 꽃바구니를 들어 창가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왔다. 차라리 저 꽃바구니들끼리 번식을 해 새끼 친 거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지은 씨와 한성 씨를 눈빛으로 혼내던 윤주 씨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저기, 윤 대리님 있잖아요.”
“네.”
“뭔지 몰라도 남자 친구가 뭐 잘못한 거면 이만 용서해 주지 그래요?”
첫날 장미가 왔을 때 윤주 씨는 자기 일처럼 즐거워했고 두 번째 장미가 왔을 땐 드라마라도 보는 사람처럼 숨넘어가게 웃으며 나를 놀렸었다. 하지만 세 번째, 네 번째 장미가 올수록 윤주 씨는 시큰둥해졌다. 사랑놀이는 너희끼리 해! 난 솔로란 말이야! 윤주 씨의 소리 없는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윤주 씨도 모르는 사실이 있다. 한숨을 푹 쉬었다.
“저도 제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어요.”
“네?”
윤주 씨가 제가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 반문했지만 대답할 정신이 없었다. 힐끔 팀장실 문을 쳐다봤다. 오윤하는 이번 주 월요일부터 과장님과 함께 해외 출장 중이었다. 공식적으론 경영지원팀에 소속된 오윤하지만 비공식적으론 회사를 물려받을 후계자니 뭐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드는 생각은.
‘일을 안 하니 가서 봐도 뭐가 뭔지 모를 텐데.’ 나도 모르게 불퉁한 생각을 하며 키보드에 손을 올리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지은 씨가 뒤에서 ‘대리님 괜찮으세요?’ 했다. 입에서 신음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아뇨. 안 괜찮아요…….”
오윤하가 정말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혼자서는 절대로 풀지 못할 의문이었다.
퇴근 후 라라를 목욕시킨 뒤 바닥에 벌렁 누워 있을 때였다. 라라는 목욕 후엔 절대 소파를 내주지 않았다. 들려오는 전화 진동 소리에 기진맥진한 채 손만 뻗어 화면을 터치했다.
―야!
전화를 받자마자 커다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직도 마음이 안 풀려 날 쳐다보지도 않고 있던 라라가 허공으로 짧게 뛰어올랐다. 미안, 미안해. 놀란 라라를 달래 주고 몸을 일으켰다. 스피커폰을 끄고 귀에 대니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횡설수설이 쏟아졌다. 수신자를 확인하니 세희였다.
“응, 세희야. 천천히 말해 봐.”
욕설이 잔뜩 뒤섞인 데다 세희가 있는 곳이 시끄러워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뭐라고?’를 세 번 반복했을 무렵 세희가 고함을 질렀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다고 해도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이번엔 내가 라라처럼 펄쩍 뛰었다. 라라가 힐끔 날 보고 슬금슬금 소파 밑으로 내려갔다. 세희는 말이 없는 내가 이번에도 못 알아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다시 한번 또박또박, 정확하게 그리고 아주 크게 같은 문장을 말했다.
―나 너희 동네니까 나오라고 윤다정!
세희가 날 불러 낸 곳은 버스 정류장 근처에 있는 호프집이었다. 동네에 아는 사람이 없어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한 것만 보고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직접 들어와 보니 겉에서 보는 것만큼 손님이 많진 않았다. 하지만 아주 시끄러웠다. 야구 중계가 한창인 스크린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세희가 손을 흔들었다. 전작이 있었는지 얼굴이 시뻘겠다.
“무슨 일이야?”
“왜. 윤다정은 우리 가게 불쑥불쑥 나타나는데 나는 윤다정 동네에 나타나면 안 돼?”
“그게 아니라.”
세희가 젓가락에 소시지를 길게 꿰며 투덜거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너도 나랑 놀아 주기 싫다 이거 아니야!”
나를 흘겨보는 세희의 눈초리가 몹시 앙칼졌다.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닫고, 그러다 다시 입을 벌리다 닫았다. 맥주잔에 소주를 가득 채우는 세희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일 있어?”
“몰라!”
이렇게 하면 보통은 가만히 있다 털어놓곤 하는데 오늘은 정말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거나 술에 많이 취했거나. 그것도 아니면 둘 다이겠거니 했다. 내 손을 떨쳐 내고 글라스에 가득 채운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은 세희가 세상이 핑핑 돈다. 하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한참 뒤 세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거였다.
“나 좆됐어.”
“뭐?”
“나 좆됐다구. 난 왜 이러고 사는 거지?”
포효하며 ‘소주 한 병 더’를 외치는 세희를 간신히 달래 자리에 앉혔다. 라라에게 간식으로 목욕을 권유할 때처럼 살살. 그렇게 구슬리자 세희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술에 취해 있는 탓에 길고 장황했으며 언제나 그렇듯 문장의 절반이 욕설이었지만 인내심 있게 들은 끝에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세희를 빤히 쳐다봤다.
“그 건물주인 할아버지가 아침에 또 오줌 싸서 참다 참다 창피나 당해 보라고 쫓아 올라갔는데 거기에 건물주인들 조카가 있었다고?”
“응.”
“그리고 그날 그 사람이랑 잤다고……?”
세희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세희는 마음에 드는 남자가 있으면 훌떡 옷부터 벗겨 보는 타입이긴 했다. 세희가 그쪽한테 차인 적도 있고 구구절절 매달리는 남자들을 세희가 걷어찰 때도 있었다. 섹스도 못하는 게 무슨! 그간 이것저것 세희 입으로 들은 게 있어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이해가 잘 가진 않았다.
“어떻게?”
처음 만난 사이에 어떻게 바로 잘 수가 있냐는 의미였다. 비난이 아니라 정말 궁금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누구입니다. 저는 누구예요. 네, 그러면 옷 벗고 하실까요? 그래요. 어떻게 빈약한 상상력을 동반해도 처음 만난 사람과 섹스하기까지의 공백은 그저 까맣기만 했다. 세희가 푸스스 한숨을 쉬었다.
“아니 내가 막 따지니까 그 사람이 너무 흥분하신 것 같으니까 진정하시라고 하면서 물을 주는 거야. 그래서 나는 지금 술이 당기지 물 같은 거 넘어가지도 않을 것 같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이 집에 술은 없다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자기는 이 집 조카라 잠깐 들른 거라서 뭐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대. 그러면서 나를 쳐다보는 거야. 근데.”
“근데?”
“자세히 보니까 좀 괜찮게 생겼더라고?”
“그래서?”
세희가 새 소주를 따며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내 가게엔 술 있다고 했지.”
거기까지 들어도 공백이 채워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세희를 위로해 줘야 한다는 본분을 망각하고 어깨를 쿡쿡 찔렀다. 세희가 입을 앙다물고 나를 노려봤다.
“그래서는 뭐가 또 그래서야! 술 한 잔 먹고 두 잔 먹고 그러다 보면 사는 얘기도 하고 근데 말이 좀 통하는 거 같고 술에 취해 가니까 기분은 좋고. 자꾸 눈 마주치고! 그러면 이제 아랫도리 까고 쿵떡쿵떡도 하는 거지! 너 몰라?”
뒤늦게 미안해져서 목덜미만 열심히 쓰다듬었다. 씩씩거리던 세희가 널브러지듯 의자에 기대며 마른세수했다.
“그래, 윤다정이 뭐 알겠니. 왜, 또 뭐 더 말해 줘. 어떤 자세로 했는지 말해 줘? 일단 바에 있는 거 싹 쓸어 버리고 내가 올라간 다음에.”
“그만, 그만!”
아무리 여자끼리 모이면 야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법이라지만 친한 친구가 섹스하는 장면은 그다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얼른 손사래를 치자 나를 놀리며 기분이 좋아졌는지 세희가 낄낄 웃었다.
“왜 그건 시작일 뿐인데. 하이라이트는 그 남자가 나를 뒤집어서.”
“안주 먹어 세희야. 안주.”
잡히는 대로 과자를 먹여 주자 세희의 볼이 울룩불룩해졌다. 세희가 뭘 더 말하려고 했지만, 과자 파편만 우스스 떨어질 뿐이었다. 불만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으적으적 과자를 다 씹어 넘긴 세희가 불쑥 내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러고 보니 다른 애들 섹스 라이프는 아는데 윤다정 섹스 라이프는 모르네. 여태 사귀었던 남자들이랑 하긴 했지?”
능글맞음이 배 나온 아저씨들 뺨쳤다. 질겁하며 세희의 손을 떼어 내려 몸부림쳤으나 세희는 힘도 세고 끈질겼다. 내 어깨와 허리에 손을 칭칭 감으며 연신 묻는 것이다. 아 대답하라고, 재촉이 이어졌다.
“내가 왜 너한테 그런 걸 말해.”
“그럼 누구한테 말할래? 미래 네 남편한테 말할래? 여보, 나는 전 남친이랑 정상위로만 했었어요. 그러니까 여보도 정상위로만 나한테 싸 줬으면 좋겠어요.”
“야!”
어깨를 찰싹 때리자 깔깔 웃은 세희가 음흉하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이실직고해. 상훈 선배랑 정상위로만 했지?”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내 반응에 기분이 이상해졌는지 세희도 입을 벌리고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귀를 벅벅 긁고 뺨을 긁고 다시 팔꿈치도 긁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다 더듬거렸다.
“상훈 선배 그럴 타입으로 보여서. 사람이 좀 뭐랄까. 형식적이었다고 해야 하나. 하하, 하…….”
입으로만 웃던 세희가 살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미안.”
내가 침묵을 지켰던 건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잠깐 세희가 지금 가게를 관두고 타로점집을 차리는 상상 중이었다. 세희는 말도 잘하고 감도 좋으니 지금보다 훨씬 돈을 잘 벌 것 같다. 상상력이 풍부했다면 떼돈을 벌어 고급 외제 차에 올라타 휴지 대신 돈으로 코를 푸는 것도 상상할 수 있었겠지만 내 상상은 보자기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타로점을 봐주는 세희의 모습에서 끝났다. 세희가 얼른 새 맥주를 가져와 내게 따랐다.
“어, 마셔 마셔.”
얼떨결에 마셨다. 맥주 한 잔까지는 괜찮기도 했다. 작은 소시지들을 모두 젓가락에 꿰어 입에 털었던 기억은 잊었는지 세희가 과장되게 안주가 어디 갔지. 하고 새 안주를 주문 넣었다. 그리고 서로 마주 보며 얼마 남지 않은 과자만 아작아작. 강냉이가 다 떨어졌을 즈음 아쉽다는 듯 그릇에 남은 부스러기를 찍어 먹던 세희가 불쑥 물었다.
“그럼 그 전 회사에서 만났던 개새끼도 정상위로만 했냐?”
“그만해, 정말. 징그럽게.”
테이블을 둘러보다 세희가 쓰고 아무렇게나 구겨 놓은 티슈가 눈에 띄었다. 그걸 던지자 재빨리 쳐 낸 세희가 낄낄 웃었다.
“어이구, 윤다정 씨 정곡 찔리셨어요?”
“나 그냥 간다?”
“너 가기만 해 봐. 내 가게 출입 금지야. 아니, 잠깐. 그러면 내가 손해인가?”
세희를 노려보자 세희도 나를 노려봤다. 그리고 얼마 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웃고 만 나와 달리 세희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테이블에 이마를 박으며 깔깔 웃기도 했다. 웃음을 그친 뒤엔 정적이 흘렀다.
그사이 옆 테이블의 말이 흘러들어 왔다. 무슨 말인지는 신경을 기울이지 않아 모르겠는 나와 달리 세희는 그 대화를 다 들었던 모양이다. 별안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옆 테이블 의자를 빼서 앉았다. 심각한 이야기 중이다가 봉변을 당한 여자 둘이 뭐야, 하고 당황했다. 나도 당황했다.
“아니 얘기가 들려서 들어 보니까. 지금 데이트하는 남자가 있는데 간만 본다 이거 아니에요.”
세희만 당황하지 않고 열변을 토했다. 여자 둘이 마주 보다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세희가 하, 하며 팔을 허공에 털었다.
“잘 들어 봐요. 지금 그쪽 몇 살?”
“스, 스물두 살이요.”
“상대 남자는?”
“스물여섯이요.”
옆 테이블 여자는 세희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자기가 왜 꼬박꼬박 대답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사이 우리가 시킨 안주가 나왔다. 어어, 하고 직원을 부른 세희가 이쪽으로 달라고 했다. 이쯤 되니 옆 테이블 여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모둠감자튀김과 그에 딸려 나온 새콤한 양배추샐러드를 바라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퇴근하자마자 라라를 목욕시켰던 탓에 저녁을 못 먹었다. 감자튀김을 맨손으로 집어 먹던 세희가 아차 싶었는지 나를 돌아보고 손짓했다. ‘친구도 와도 되죠?’ 여자들이 어색하게 ‘네.’ 했다. 그렇게 이상한 합석이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말이야. 남자는 병신이란 말이에요. 알겠어요?”
“네? 아, 네.”
“그리고 잘생겼다고 했죠. 그 남자.”
“네.”
“그럼 남부러울 거 없겠네. 집도 잘 살고, 잘생겼고.”
옆 테이블, 아니 이젠 합석한 테이블의 여자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희가 눈을 반짝였다.
“그런 남자일수록 뭘 해야 하느냐? 그런 놈들은 자기가 손 까닥만 하면 넘어질 여자들한테 신경을 안 써요. 여자도 똑같아. 잘난 여자야? 그럼 내가 손 까닥만 하면 엎어져서 세울 남자들한테는 관심이 안 가거든.”
진상. 살짝 중얼거리자 세희가 나를 째려봤다. 나와 달리 옆 테이블 여자들은 세희의 말에 점점 빨려 들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세희가 ‘궁금해요?’ 하면서 쪼르르 세운 네 개의 잔에 소맥을 말았다. 그러고는 하나씩 나눠 주면서 짠! 을 외쳤다. 분위기에 휩쓸려 나도 몇 모금 마시고 말았다. 조금 뒤,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일단 기본 전제는 흥미예요. 흥미가 가야 저 여자한테 말도 시켜 보고 나랑 뭐 하지 않겠냐고 말을 걸어 보는 거거든.”
모르는 사람들 앞이니 더더욱 졸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따라 허벅지를 꼬집었다.
“일단 흥미가 간다? 그러면 말을 걸어. 뭐 하자고 해. 근데 그게 나랑 감정적으로 뭘 발전시키자고 하는 거 아니거든. 그런 잘난 사람들은.”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런 잘난 사람들은 거절당하는 경험에 약해. 그러니까 애매하게 거절하는 거 말고 딱 잘라서 나는 그쪽한테 관심이 없어요. 하면. 아 잠깐. 이거는 받아들이는 성격에 따라 달라. 타고나길 초식 동물 같은 사람이 있고 육식 동물 같은 사람이 있단 말이야. 그쪽이 좋아하는 남자는 어떤 타입 같아요. 몰라? 그럼 육식 동물 설명하고 초식 동물 설명할게.”
“네, 네!”
“육식 동물 같은 애들은. 섹스가 스포츠예요.”
“헐, 그럴 수가.”
“정말이라니까. 내 나이가 서른둘이에요. 물론 내 나이에 남자 별로 안 좋아하거나 안 만나 본 여자도 있겠지만 나는 남자란 남자는 타입별로 다 만나 봤어.”
기어코 고개가 꾸벅 떨어졌다. 이미 세희의 이야기는 딴 세상 얘기였다.
“육식 동물 같은 애들은 있잖아. 관심 없다고 거절당하면 오히려 자기 거절한 상대한테 더 관심이 가. 그럼 집요해진다니까. 혹시 맹수들 다큐멘터리 본 적 있어요?”
“아니요?”
“에이 그러면 딱 이해 갈 텐데.”
맹수들은 더 손쉬운 상대가 눈에 띄어도 처음 찍은 사냥감만 노려요. 그게 본능이야. 나한테 관심 없어? 그럼 넘어올 때까지 찍는 거지. 하지만 거기서 방심하지 말아요. 그게 좋아한단 뜻은 아니니까…….
“다정아. 자냐?”
“어, 응.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정신을 차리니 합석했던 여자들은 온데간데없었다. 가게도 마감 시간이 가까워졌는지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눈을 비비자 세희가 나를 일으켰다. 세희는 실컷 말을 해서 그런지 처음 만났을 때 표정과 달리 개운해 보였다.
“가자. 너희 집으로.”
계산을 마친 세희가 찰싹 팔짱을 꼈다. 네가 강의해 주던 여자애들은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세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당당하고 반짝이는 얼굴이었다. 피식 웃으며 따라 걷다 또 깜박 졸았다. 깜짝 놀란 세희가 잠시 나를 살피다 제 이마를 쳤다. 내가 왜 윤다정한테 술을 먹였지, 하고 한탄이 이어졌다.
꽃바구니를 처음 받았을 땐 오윤하가 내게 이러는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오윤하가 출장에서 돌아오면 바로 나한테 왜 이러냐, 물어보려고 했다. 사람의 행동엔 언제나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꽃바구니가 다섯 개로 늘어난 사무실을 지켜보는 이 시점에선 그런 궁금증이 쓸데없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필요한 건 빠른 결론과 다짐뿐. 잠시 외근을 나갔다 돌아온 내게 윤주 씨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왔어요? 해외 영업팀 쪽에서 연락 왔는데, 이 자료 좀 보내 달라고 하더라고요.”
“고마워요.”
쪽지를 받으려는데 쉬이 내 손으로 넘어오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짓궂은 표정의 윤주 씨가 보였다. 윤주 씨가 어깨너머로 창가에 줄 선 꽃바구니를 가리켰다.
“주말 동안 남자 친구랑 화해했나 봐요. 오늘은 꽃바구니가 안 오네?”
“아, 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갤 끄덕이자 윤주 씨가 쪽지를 놓아 주며 은근슬쩍 옆으로 붙었다.
“근데 남자 친구 뭐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비싼 꽃을 매일매일 그것도 바구니씩이나 보내요?”
꽃바구니를 보낸 사람은 남자 친구가 아니라는 말을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어쨌든 남자 친구가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고 그 남자 친구의 정체가 동생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다. 물론 저 꽃바구니를 선물한 사람이 동생이 아니라는 사실도.
재원이의 남자 친구 행세를 묵인하고 동조하는 데는 나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다. 인수인계를 받으며 딱 한 번 봤던 현장직 사람이 내게 관심을 표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윤 대리님, 밥 한번 먹읍시다. 하는 정도였지만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사내 메신저로 갑자기 연락해 술을 마시자고 조르는 둥, 심지어 어떻게 알았는지 핸드폰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걸기도 했다. 정도가 극에 달했을 땐 술에 취해 전화하는 날도 있었다.
이제야 윤주 씨에게 들어 알게 되었지만, 본사에 새로 들어온 직원만 있으면 누구든 간에 그렇게 집적거린단다. 아무튼, 어떻게 거절해도 요지부동으로 이미 내가 상상 속에선 자기와 데이트하는 여자라도 되는 양 굴던 그 남자는 재원이의 말 한마디에 떨어져 나갔다. ‘내 여자 친구한테 한 번만 더 그래 봐요.’ 경찰 운운한 것도 아닌데 내 거절을 줄기차게 무시하던 남자가 떨어져 나갔다.
“응? 말 좀 해 봐요.”
윤주 씨가 내 팔을 흔들며 재촉했다. 대충 꾸며 내야지, 하며 입을 벌리다 다시 닫았다. 윤주 씨가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나 내 뒤를 보고 인사했다. 나도 돌아봤다. 거기엔 대체 출장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더 야윈 과장님이 서 있었다. 하하. 웃으며 윤주 씨 인사를 받던 과장님이 사무실을 둘러보다 일주일 전과 달라진 점을 알아챘다.
“근데 저 꽃들은 다 뭐예요?”
윤주 씨가 그 말에 인중을 길게 늘이며 킥킥 웃었다.
“과장님 출장 가신 날부터 계속 이렇게 하루에 한 번씩 왔어요.”
“누구한테요?”
“누구긴 누구예요. 우리 윤…….”
윤주 씨의 말을 가로막고 벌떡 일어났다.
“과장님, 팀장님도 출근하셨나요?”
‘팀장님’이란 단어가 독화살이라도 되는 것처럼 과장님이 배를 붙잡았다. 배를 몇 번 문지른 과장님이 힘없이 대답했다.
“밑에서 커피 사 드시고 올라오신대요. 급하게 처리할 거 있으면 나한테.”
그대로 과장님을 쌩 지나쳤다.
“제가 오늘 사무실에 커피 돌리겠습니다!”
“아니, 지갑도 안 챙기고……?”
그 말에 다시 책상으로 돌아와 지갑만 확 낚아챘다. 뛰듯이 빠르게 걷는 나를 보며 윤주 씨와 과장님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왜 저러지. 그런 표정이었다.
막 닫히려는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었다. 근무에 지친 얼굴로 서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거칠게 1층 커피숍에 들어섰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문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인사팀 박 과장이 눈을 흘기기까지 했다. 죄송하단 의미로 고개를 꾸벅이고 커피숍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오윤하의 ‘오’만큼이라도 비슷한 사람은 없었다.
“윤 대리 누구 찾아요?”
박 과장이 뒤에서 불렀다.
“혹시 오윤하 팀장님 보셨어요? 여기 있다고 하셔서.”
“오윤하? 좀 전에 올라갔는데. 근데 무슨 일이에요? 왜 그렇게 급하게 찾아?”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업무 보고할 일이 있어서요. 그럼 저도 먼저 올라가 보겠습니다.”
우리 사무실에도 없고, 들른다고 했던 커피숍에도 없다. 오윤하가 다른 사무실에 드나들 명분과 이유도 없으니…….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 위로 올라갈수록 타고 내리는 사람이 적어졌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나 혼자 남았다.
열심히 숨을 골랐다. 흥분할 건 아무것도 없다. 오윤하도 사람인 이상 잘 알아듣게 이야기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재원이가 비상시에 쓰라며 보내 준 셀카 몇 개를 배경 화면으로 지정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옥상 정원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드러났다. 두 계단씩 올라 문을 열어젖혔다. 시원한 바람이 바로 내 뺨을 스쳐 지나갔다.
“팀장님?”
오윤하를 부르며 걸음을 한 발 뗄 때였다. 한쪽 구석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잡동사니를 쌓아 두어 잘 보이지 않는 쪽이었다. 저쪽에 있나? 걸음을 옮기며 다시 팀장님, 하고 입을 뗄 무렵 잡동사니 너머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나도 놀랐지만, 상대는 더 놀란 표정이었다. 아니.
“지은 씨?”
“대, 대, 대리님이 왜 여기.”
“지은 씨 치과 간다고 반차 낸 거 아니었어요? 치료는 다 받았어요?”
놀라다 못해 당황한 얼굴이었다. 지은 씨가 손을 내저었다.
“며, 몇 번 더 받아야 하긴 하는데요 제가 땡땡이치고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치과 치료가 일찍 끝나서 시간 좀 보낼까 하고 올라왔는데. 그런데 제가 왜 여기 있을까요?”
알아듣기 힘든 횡설수설이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가만히 듣고 있다가 지은 씨 어깨에 손을 올렸다. 방금 지은 씨가 가로막고 있는 쪽에서 짧은 기침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지은 씨가 내 팔에 매달렸다.
“거기 아무도 없어요. 대리님!”
지은 씨를 한쪽 팔에 매단 채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너무 놀라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눈을 깜박깜박.
“……박 대리님?”
눈이 마주친 재무팀 박 대리가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뱉었다. 지은 씨의 얼굴이 천천히 분홍색, 아니 빨간색으로 변해 갔다. 다시 박 대리를 쳐다봤다. 박 대리도 여전히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눈을 평소보다 빠르게 깜박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지은 씨가 펄쩍 뛰었다.
“저희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냥 여기서 마주쳤을 뿐이다. 며칠 전에 밥 사 주신 거 고맙다고 인사 좀 드렸는데, 아 그러니까 밥을 사 주신 것도 따로 약속 잡아서 만난 게 아니고 어쩌다가 같은 밥집에서 마주쳤는데 박 대리님이 계산을 해 주셔서. 그래서 그거 감사하다고 제가 오늘 저녁을 사겠다고…….
지은 씨가 계속 자폭성 발언을 이어가자 박 대리가 짧은 헛기침으로 말을 막았다. 그러곤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그렇게 당황하는 박 대리는 처음 봤다. 항상 무표정으로 업무 얘기만, 조용하고 농담도 할 줄 모르는 양반이라고 윤주 씨가 귀에 딱지가 앉게 이야기했었는데.
“하. 하. 대리님 저도 그럼 이만.”
지은 씨가 슬그머니 뒷걸음질을 쳤다. 바로 손목을 붙잡았다.
“잠깐만, 지은 씨.”
아직도 얼굴이 빨간 지은 씨가 펄쩍 뛰었다.
“아니라니까요 사귀는 거! 아직 고백도 못 받았는……. 헙!”
정적이 흘렀다. 지은 씨가 놀라 입을 틀어막았던 손을 슬슬 내리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손가락을 꼬물꼬물. 발로 바닥을 차기도 했다. 잠깐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혹시 팀장님 봤어요?”
“……팀장님이요?”
지은 씨는 의외의 질문을 들은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곤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못 뵀는데.”
고개를 끄덕였다. 지은 씨 손목을 놔주었다.
“알겠어요. 그럼 사무실에서 봐요.”
“……어, 바로 안 내려가시게요?”
“잠깐 뭐 생각할 거 있어서요. 금방 내려갈게요.”
지은 씨가 눈치를 보다 쪼르르 뛰어갔다. 높게 묶은 말총 같은 머리가 허공에 통통 튀었다. 그 위로는 선선한 바람과 햇볕이 예쁘게 부서지고 있었다. 붉어진 뺨, 어설프게 깜박이는 눈. 어쩔 줄 몰라 하는 순진함. 내가 저런 얼굴을 했던 때가 있기는 있었을까.
지은 씨가 사라진 방향을 계속 쳐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별로 속상할 것도 슬플 것도 외롭지도 않은 데 이렇게 가끔 한숨이 나왔다. 이유가 없진 않을 거다. 내가 모르는 것뿐이겠지.
텅 빈 옥상 정원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걸음을 뗐다. 오윤하가 여기에 없다면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사무실에서 신는 슬리퍼가 직직 끌렸다. 그러다 발밑에 뭐가 채였다. 누가 마시고 아무 데나 버린 것인지 음료수 깡통이었다. 쓰레기통이 그다지 멀지도 않은데. 속으로 혀를 한 번 차고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깡통을 집어 들다 멈칫했다.
“어…….”
내 그림자가 원래 이렇게 뚱뚱했나? 아무리 봐도 두 사람분이 겹치진 것 같은 그림자를 노려보다 천천히 일어났다. 동시에 차가운 손이 내 허리를 뒤에서 당겼다.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래서.”
색이 있다면 붉은색일 것 같은 숨이 귓가를 느긋하게 간질였다.
“이제 나한테 관심 좀 생겼어요?”
아무 말도 못 했다. 등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가슴과 그에 절대 뒤지지 않는 허리를 감싸 안은 팔. 잊을 만하면 불어오던 선선한 바람도 그때만큼은 자취를 감췄다. 팔이 느슨해지는 듯하다 곧바로 힘 있게 조여 왔다. 숨이 턱 막혔다.
“왜 대답이 없을까. 나 찾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숨을 쉴 때마다 오윤하의 입술이 귓가에 스쳤다. 파스스, 거칠게 흩어지는 내 숨에 오윤하가 낮게 웃었다. 키득키득. 짧은소리만으로도 오윤하가 어떤 표정으로 웃고 있을지 훤히 그려졌다. 자신감 넘치고 여유로운 얼굴. 거기에 어린 짓궂음과 호승심. 그리고 자기가 이겼다는 자만심도 한 스푼. 그 누구도 내기를 시작하지 않고 응하지 않았음에도.
“…….”
“…….”
말없이 숨만 헐떡이자 뭔가 이상하다는 듯 오윤하가 슬쩍 떨어졌다. 삐걱삐걱, 로봇이었다면 고장 났음을 의미하는 소리가 목에서 났다. 그렇게 오윤하를 봤다. 오윤하는 여전히 잘생기고, 잘난 남자였다.
“왜 그렇게…….”
무슨 말을 하려던 오윤하가 입을 다물었다. 내 손이 먼저 움직인 탓이었다. 짝.
“아.”
오윤하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제야 숨이 한 번에 터져 나왔다. 헐떡이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쓸어내리다 한 번 더 오윤하의 뺨을 때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막혀 있던 감탄사는 그때 나왔다.
“엄마야…….”
오윤하가 황당한 표정으로 얻어맞은 뺨을 붙들었다.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시면.”
거기까지 말을 하다 가슴을 한 번 더 쓸어내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방금 오윤하 뺨 때렸나? 뒤늦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자 오윤하가 억울하게 칼에 찔린 사람이 지을 법한 표정을 짓고는 하. 헛웃음을 뱉었다. 그 표정에 내 손이 조금 움찔했다.
“놀랐다고 사람 뺨을 때립니까?”
따지는 오윤하를 쳐다보다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성희롱이에요. 방금 어디 만지신 줄 아세요?”
하지만 오윤하는 뻔뻔했다. 뺨을 문지르며 확 인상을 쓰는 것이다.
“허리 좀 만진 게 뭐가. 그리고 이젠 윤 대리도 나한테 관심 있잖아요? 그러면 성희롱이 아니지.”
투덜투덜. 뺨을 문지르며 짜증을 내던 오윤하가 순간 흠칫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내가 더 빨랐다. 오윤하의 앞으로 다가가 발꿈치를 세웠다. 그러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지켜보는 오윤하의 정수리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아! 이 여자가 미쳤나.”
아직도 정신 못 차린 머리통을 한 번 더 때렸다.
“저 진짜로 팀장님한테 관심 없어요.”
솔직히 거기서 손을 멈출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간 꽃바구니 행렬을 생각하자 갑자기 짜증이 확 밀려오는 것이다. 라라도 한두 번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할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오윤하는 사람이잖아? 라라는 동물이고. 관심 없다고 두 번이나 말했고 친동생을 팔아 남자 친구인 척도 하는데 대체! 마음 같아선 잘났다고 마음대로 떠드는 저 입술을 꼬집고 싶었다.
내게 뺨도 맞고 정수리도 얻어맞은 오윤하가 물러나다 벽에 부딪혔다. 더 갈 곳이 없는 게 분명한데도 굳이 제 뒤를 확인한 오윤하가 벽에 붙은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얼굴이 마치 빨래 바구니 안에서 놀지 말라고 해도 기어코 뚜껑까지 열어 가며 놀고 난 뒤 내게 들킨 라라 같아서 손에 힘이 풀렸다. 오윤하는 아직도 내가 때린 뺨을 매만지고 있었다.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장미 같은 거 다시는! 보내지 마세요.”
오윤하는 대답 없이 눈을 깜박였다.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땅에 떨어진 지갑과 깡통을 다시 주워 들었다. 지갑은 옆구리에 끼고 깡통은 문 옆에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문을 닫기 전 하, 이를 갈며 웃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만 바람 소리였을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이쯤 했으면 알아들었겠지,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오윤하는 내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 인물이었다. 내가 과소평가했든 과대평가했든 둘 다이건. 이쯤 해서 알아들었겠지라는 내 바람이 오산이었다는 건, 그날 퇴근하는 길에 알게 되었다.
퇴근 무렵 지은 씨가 넣은 발주에 문제가 생겼다. 수량에 0을 하나 더 쓴 것이었다. 어차피 사무용품이야 두고 쓰면 되는 일이니 그렇게 심각한 사안은 아니었으나 하필이면 그게 회사 로고를 찍어 낸 봉투라 문제가 되었다.
대대적으로 회사 로고를 바꾸기로 했다는 말에 내가 며칠 전 외주 업체와 미팅하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코를 푸는 대용으로 봉투를 쓴다고 해도 오만 장이면 그때까지 만 장도 못 쓸 것이다. 일단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를 마친 뒤 지은 씨를 돌아봤다.
“일곱 시까지 전화해 준다니까 지은 씨가 남아 있다가 전화 받고 퇴근해요.”
언제 여섯 시가 되나 기다리며 핸드백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있던 윤주 씨가 혀를 쯧쯧 차며 지은 씨를 놀렸다.
“어이구,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길래 그런 실수를 해요. 아예 오십만 장 찍지 그랬어요?”
지은 씨의 고개가 시무룩하게 축 처졌다. 윤주 씨가 당황했다. 윤주 씨의 눈총을 받고 한성 씨가 출동했다.
“그런 실수 할 수도 있지. 앞으로 안 그러면 돼요.”
“네…….”
위로를 받아도 신입 사원의 마음가짐이란 실수를 했다는 자책 하나만으로도 무거운 법. 지은 씨는 여전히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둥 마는 둥 하며 마우스만 딸칵였다. 여섯 시가 되자마자 칼같이 일어난 윤주 씨가 말없이 지은 씨 등을 토닥여 주고 빠르게 퇴근했다.
한성 씨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큰맘 먹고 질렀다는 비싼 가을 코트를 걸친 한성 씨는 잘나가는 샐러리맨처럼 보이기보단 거대한 곰 같았다. 그렇게 한성 씨도 빠져나가고 사무실에 둘만 남았다. 가방을 챙기다 돌아봤다.
“지은 씨. 가 봐요.”
“네? 하지만.”
지은 씨가 눈을 크게 깜박거렸다.
“오늘 약속 있잖아요. 전화만 받고 가면 되는 거니까 내가 전화 받을게요.”
과장님도 오윤하도 퇴근 시간 한 시간 전에 먼저 들어갔고 다른 팀원들도 퇴근해 사무실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지은 씨가 나는 듯 달려들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대리님! 박 대리님이랑 저랑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지은 씨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입을 다문 지은 씨와 입을 틀어막힌 나. 고요하게 정적이 불어 닥쳤다. 슬그머니 손을 내린 지은 씨가 물었다.
“……진짜 그래도 돼요?”
살짝 웃었다. 지은 씨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분홍색 혈기가 어느새 올라오고 있었다.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의자를 돌렸다.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가요.”
후다닥. 지은 씨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컴퓨터 종료하는 소리. 신발 바꿔 신는 소리. 화장품 달칵거리는 소리. 곧이어 조금 전에도 예뻤지만, 더 예뻐진 지은 씨가 내 앞에 섰다. 향수도 다시 뿌렸는지 꽃향기가 훅 풍겼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사랑해요!”
어떻게 거절할 새도 없이 안겼다 떨어진 지은 씨를 보다 다시 웃었다.
“앞으로는 진짜 두 번 세 번 꼼꼼하게 확인할게요. 진짜로. 같은 실수 절대 안 하겠습니다. 윤 대리님 사랑해요. 알러뷰!”
주절주절 떠들던 지은 씨가 벽에 쾅 부딪혔다. 거기서 아하하, 크게 웃음이 터졌다. 내가 웃는 모습을 보며 머쓱한지 머리를 긁던 지은 씨가 고개를 꾹 숙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네. 내일 봐요.”
지은 씨의 구둣발 소리가 복도에서 또각또각 울리다 이내 사라졌다. 흔들어 주던 손을 내리고 모니터를 봤다. 까만 화면에 아직도 웃음기가 남아 있는 내 얼굴이 비쳤다. 뺨과 눈가를 만져 봤던 것 같다. 이렇게 소리 내서 웃은 게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래서일까.
자꾸 매만지고 들여다보는데도 내 얼굴이 낯설었다. 한숨을 쉬고 어깨를 늘어트렸다. 마우스를 움직여 보호기 화면을 껐다. 마침 내일 라라 병원 때문에 오후 반차를 쓸 예정이라 내일까지 올려야 하는 서류를 다시 검토해 볼 생각이었다.
업체에선 다행히 수량을 조정할 수 있다는 말이 돌아왔다. 업체에서 전화를 받고도 한 시간 정도 더 회사에 머물렀다.
“아, 추워.”
부쩍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추워졌다. 셔츠 위로 맨 머플러와 얇은 가을 재킷도 싸늘한 바람을 막아 내진 못했다. 오들오들 떨며 거리를 걸었다. 다들 갑자기 날이 이렇게 추워질 줄 몰랐는지 비슷한 옷차림의 직장인들이 몇 눈에 띄었다. 나처럼 팔짱을 단단히 끼고 오들오들 걷는 중이었다.
회사에서 지하철역까지 십오 분이나 걸린다는 게 이렇게 안 좋은 일일 줄이야. 더위야 그럭저럭 참을 수 있었지만, 추위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빵! 도로를 지나가는 차 중 하나가 클랙슨을 울렸다. 코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나도 차나 한 대 뽑을까.”
잠깐 옛 기억이 떠올랐다. 세희가 개새끼라고 불렀던, 전 남자 친구가 장롱면허를 놀리며 운전을 가르쳐 주겠다던 어느 봄날. 단편적으로 스쳐 지나간 기억은 더는 내 마음을 시리게 만들지 않았다. 이제 전부 끝났다는 걸 받아들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몸이 추워서 그런 걸 수도 있다.
다시 코를 훌쩍일 때 이번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빵! 소리가 울렸다. 무의식적으로 돌아봤다. 비싼 외제 차였다. 미끈한 까만색 몸체를 보며 내가 저 차를 어디서 봤더라,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지하철까진 아직 오 분 정도 더 걸어야 했다. 그때였다.
“엄마, 깜짝이야.”
눈을 깜박였다. 어느새 외제 차가 인도를 걷는 내 옆에서 멈춰 섰다. 대체 뭐지, 하고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외제 차의 창문이 내려가는 즉시 미간이 찡그려졌다.
“왜 이렇게 늦게 퇴근해요?”
그렇게 말하는 오윤하의 얼굴도 별로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인상을 쓴 채 오윤하를 응시하다 마지못해 대꾸했다.
“할 일이 남아 있어서요. 퇴근 일찍 하셨는데 아직 안 들어가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