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이십 대까지만 해도 친구들과의 술자리 주제는 다채로웠다. 좋아하는 사람, 밀린 과제, 망친 시험, 학교에 도는 소문, 누가 누구랑 사귀다 헤어졌단다, 따위의 것들. 시간이 흘러 우리도 나이를 먹었고 각자 먹고살기 위해 회사에 취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일 많이 나오는 건 회사에서 실수한 이야기, 학교로 돌아가고 싶다, 사내연애는 정말 별로일까, 등등.
그리고 서른둘의 지금, 우리는 더 이상 회사에서 사소한 실수를 했던 일 따위를 털어놓지 않는다. 제일 많이 화두에 오르는 건 이제야 실비 보험을 들었다는 친구 중 하나에 걱정 섞인 잔소리 늘어놓기, 주식 얘기, 적금 얘기, 누가 또 결혼한다더라, 같은 것이었다.
이젠 긴장해 어깨가 잔뜩 굳은 채 전화를 받지도 않고 거래처 회사 이름을 헷갈렸단 이유 하나로 상사에게 깨진 뒤에 화장실에서 울며 통화하지도 않는다. 그럴 수도 있지, 김 부장 개새끼! 누군가가 술에 취해 그렇게 울분을 토하면 하나, 둘. 무슨 대회라도 열린 것처럼 앞을 다퉈 상사 욕을 쏟는다.
“우리 부장은 멍부야 멍부.”
멍청한데 부지런하기까지 해! 그럼 옆에선 쏟을 뻔한 술잔을 바로 세우는 대신 바로 입으로 직행시키며 말한다. 차라리 그게 낫지. 우리 팀장은 술 꼰대야. 회식하는데, 회식이 안 끝나. 내일 출근해야 하는데! 그래 놓고 자기는 다음 날 업무 시간에 사우나 다녀온다고!
한바탕 설움을 풀어 낸 친구들은 오징어를 씹으며 서로를 위로한다. 그리고 하나둘, 나를 쳐다본다. ‘너는 왜 말이 없어?’ 누군가 묻는다. ‘그래, 너도 말해 봐.’ 다른 누군가가 덧붙인다. 꾸벅꾸벅 졸며 대화를 한 귀로 흘리던 것을 들킬까 얼른 대답한다. 우리 팀장? 어…….
“나쁘지 않아.”
친구 하나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꽝 내리쳤다. 그 바람에 잠이 조금 달아났다. 조금 전보단 눈을 부릅뜨고 있기가 수월했다.
“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꼰대도 아니고, 멍부도 아니야? 그래? 윤다정 어느 회사 다닌다고 했지? 나 거기로 이직할래!”
다른 친구가 혀를 차며 2차 분개를 시작하려는 친구를 달랬다. 맥주가 잔에 꼴꼴 차올랐다.
“야, 몇 년을 봐 놓고 윤다정을 모르냐. 쟤가 남 얘기하는 거 봤어? 그리고 쟤도 이직한 지 얼마 안 돼서 잘 모르는 모양이지.”
“하긴 그렇지? 좋은 상사는 죽은 상사뿐이잖아.”
“죽이는 건 너무했다.”
“죽이는 게 왜. 난 아침마다 청부 살인 시세 검색하는데.”
별로 특별한 대답을 한 것도 아닌데 뜨겁던 분위기가 미지근해졌다. 내 탓일까. 눈을 깜박이다 손을 뻗어 마지막 남은 오징어 다리를 가져왔다. 오그라든 발판을 손톱으로 하나씩 튕겨 내며 입을 열었다.
“꼰대는 확실히 아니야.”
“왜?”
발판을 다 뜯어낸 오징어를 씹었다. 딱딱했다.
“우리보다 어리거든. 음, 세 살? 네 살?”
그 말에 친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보다 어린데 팀장이라고? 어떻게? 그사이 또 깜박 조느라 대화를 잠깐 놓쳤다. 씹고 있던 오징어가 입 밖으로 흘러내릴 뻔할 때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얼른 고개를 들고 눈에 힘을 줬다.
“글쎄…… 회장님 외아들이거든.”
“헐, 미친.”
그 말에 또 난리가 났다. 역시 성공에 가장 중요한 건 탯줄이라느니, 요즘은 그런 사람들 금수저라고 한다던데 그럼 우리는 무슨 수저겠니, 나는 놋수저 하련다. 놋으로 만든 식기나 그릇은 관리를 잘해 줘야 빛이 나는데 내가 어릴 때부터 관리를 안 해서 썩은 수저 된 거 아니겠니, 등등. 그걸 지켜보다 길게 하품했다. 보다 못했는지 세희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저기 뒤에 소파 가서 눈 좀 붙여. 집 갈 때 깨워 줄게. 애들 보니까 한참은 더 마셔야겠다.”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바로 엎어졌다. 미리 내일 오전 반차를 쓰길 잘했다는 생각을 끝으로 까무룩 잠에 빠져들었다.
친구가 농담으로 좋은 상사는 죽은 상사뿐이란 말을 하긴 했지만, 한 라디오에서 들었던 좋은 상사의 요건은 그게 아니었다. 유연하고, 너무 부지런하지 않고, 독단적이지 않아야 하며 돈을 잘 쓰고 일도 잘해야 했고 다른 부서와 부딪칠 만한 일이 생겨도 지지 않을 정도로 성격이 있어야 했다. 더불어 팀워크와 사기를 증진하기 위한 유머 감각과 재치를 겸비했으면 만점이란다.
라디오 디제이가 덧붙였다. 그 모든 항목을 충족시켰을 때 백 점이라고 하면 과연 본인은 몇 점일까요? 한번 채점해 보고 반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하!
그 모두를 따져 본다면 확실히 오윤하는 좋은 상사가 아니다.
“윤 대리님 왔어요?”
“네. 안녕하세요.”
사무실에 들어서자 막 텀블러에 커피를 타고 있던 과장님이 핼쑥한 얼굴로 무기력하게 인사했다. 원래 피곤한 인상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그 정도가 심했다. 물고기처럼 흐느적거리며 자리로 돌아가는 과장님의 뒷모습을 보다 나도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 웬 서류가 놓여 있었다. 궁금증을 가지기도 전에 과장님이 자기 칸막이 위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아 맞다. 윤 대리님. 죄송한데 그거부터 처리해서 나한테 줄래요? 퇴근 전까지 팀장님 결재받아야 하거든요. 곧 들어오실 거예요. 아마도.”
오윤하가 오늘은 회사 나오나 보네. 고개를 끄덕이자 고맙다는 말이 비슬비슬 날아왔다. 전화가 울리고 받고, 키보드를 치고 문서를 복사하고 스테이플러로 찍고, 다시 건네받은 서류를 들여다보길 얼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그제야 눈치챘다. 분명 오후에 잠이 쏟아질 법한 시간만 되면 슬슬 눈치 좀 보다 짠 듯이 하나둘 의자를 굴려 내 근처로 모이곤 했다. 그러니까.
“윤 대리님.”
바로 이렇게.
“네, 왜요?”
“윤 대리님 오늘 아침에 진짜 대박 사건 있었어요.”
호랑이도 자기 말하면 온다는 말이 이 상황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한다. 바로 옆 책상을 쓰는 김윤주 대리가 첫 타자였고 그 뒤를 이어 저번 달에 입사한 신입 사원 정지은 씨, 그리고 키도 크고 배도 많이 나온 최한성 주임이 마지막이었다.
할 말이 대체 뭐길래 윤주 씨가 의자를 당겨 앉자마자 ‘대박 사건’을 외치는지 궁금했다. 잠자코 확인하고 있던 문서에 스테이플러를 찍었다. 내가 ‘뭔데요?’ 묻지도 전에 지은 씨가 윤주 씨 뒷말을 이었다.
“팀장님이요.”
그다음 말은 한성 씨가 이었다.
“아침에 회장님한테 불려 갔대요.”
조금 놀라 반문했다.
“오늘 팀장님 아침부터 출근하셨어요?”
“웬일로 정시 출근했는데 바로 회장실로 불려 갔다니까요.”
“한성 씨, 쉿!”
마지막은 윤주 씨. 한성 씨 목소리가 너무 크다는 듯 눈치를 주고는 벌떡 일어나 파티션 너머로 고개를 쭉 뺐다. 서 과장님의 책상이 있는 쪽이었다. 한성 씨는 얼른 자기 입을 틀어막고는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지은 씨가 무슨 말을 더하려고 했다. 윤주 씨가 자기 할 말을 전부 가로채지 말라는 듯 팔을 넓게 벌리고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할아버지처럼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목소리를 낮췄다. 나도 덩달아 몸을 기울였다.
“왜, 저번 주에 신희주가 팀장님 보겠다고 회사에 쳐들어 왔었잖아요. 그게 드디어 회장님 귀에 들어간 모양이에요.”
“……신희주요?”
신희주가 누군지 열심히 기억을 더듬었다. 지은 씨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당장 소리 지를 것 같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대리님 신희주 모르세요? 잘나가는 인터넷 쇼핑몰 사장이잖아요. 쇼핑몰 모델도 다 자기가 하고. 인기 엄청 많은데. 저기, 어디지? 명동에 있는 백화점 지하에 매장도 들어왔어요.”
“아. 내가 인터넷으로 옷을 안 사서요.”
“그래도. 저번 주 화요일에 우리 사무실까지 왔었는데.”
눈을 깜박이다 말했다.
“그때면 출장 갔을 때네요.”
한성 씨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재밌는 구경을 놓치다니!’ 그런 것 같았다. 지은 씨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엔 긴 원피스를 입은 늘씬한 여자가 있었다. 지은 씨가 왜 신희주 사진 가지고 있어? 윤주 씨가 묻자 지은 씨가 입을 쭉 내밀며 어깨를 들썩였다.
“예뻐서 저장했죠. 저 말고 제 친구들도 다 좋아해요. 성격 화끈하고 섹시하다고. 근데 우리 팀장님이랑 엮일 게 뭐람?”
옆에서 한성 씨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은 자세히 못 봤지만 근사한 분위기를 가진 것 같긴 했다. 윤주 씨만 고개를 저었다.
“난 저번에 스캔들 났던 차민영이 더 예쁜 것 같아.”
“헐, 대리님. 그건 아니죠.”
윤주 씨 말에 한성 씨가 얼른 반박을 내놓았다. 일단 차민영은 성격이 안 좋기로 방송가에도 소문이 빼곡하단다. 눈을 깜박이며 차민영이 누군지 기억하려 애썼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차민영을 떠올렸다. 막 개봉했다고 TV에 선전이 나오는 영화의 조연 배우였다. 내가 막 이 회사로 이직했을 때 우리 팀장님 ‘또’ 연예인이랑 스캔들이 터졌다고 윤주 씨가 말해 준 첫 번째 타자이기도 했다.
“암튼, 그간 회장님이 팀장님 벼르고 있던 모양이에요. 윤 대리님은 잘 모르겠지만 삼 년 전에 정체 숨기고 인턴 할 때도 가관이었거든요. 그래도 별수 있어? 외아들인데. 올해 우리 팀 팀장으로 앉혀 놓고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우리 과장님도 붙여 놨더니 맨날 늦게 출근하거나 먼저 들어가 버리고. 여자들 갈아치우면서 노닥거리는 것도 탐탁지 않아 한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신희주 와서 깽판 친 거로 기회 잡았죠. 뭐.”
무심코 과자를 뜯어 깨물었다. 단맛에 몸서리치자 윤주 씨가 아차, 싶었다는 듯 ‘단 거 싫어하시죠, 안 단 과자 있는데 그거 줄까요?’ 했다. 고개를 저었다.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해도 슬쩍 과자를 내려놓았다. 나와 달리 한입에 과자를 해치운 한성 씨가 말을 보탰다.
“그럼 잘하면 우리 팀장님 바뀌는 거 아니에요?”
“에이 설마.”
“그렇잖아요. 우리 회장님 그 나이에도 일선에서 열정 넘치시는데. 팀장님 같은 아들 가만두실 분이 아니죠.”
인턴부터 사원을 거쳐 주임, 그리고 대리까지 이 회사에서 모두 달성한 윤주 씨가 고개를 저었다.
“한성 씨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은근 회장님이 자기 아들 예뻐한다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인턴 때부터 놀이터 다니듯 굴던 아들을 떡하니 팀장으로 앉혀 놨겠어? 그냥 잔소리 좀 하고 말았겠지.”
“에이 아니라니까요.”
“맞다니까. 분위기가 딱 그래. 해 봤자 여자 좀 작작 갈아치워? 그 정도겠지!”
또다시 한성 씨와 윤주 씨가 옥신각신을 시작했다. 그사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쓴 커피가 먹고 싶었다. 최대한 조용히 의자를 밀고 일어나는데 별안간 지은 씨가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대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셋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그리고 다시 벌렸다가, 또 닫았다. 내가 오윤하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내가 이직한 건 석 달 전이었다. 그리고 그 석 달 동안 오윤하와 대화한 건 열 손가락에 꼽을 만큼 적었다.
“나는.”
셋이 동시에 목을 꿀렁였다. 뺨을 긁적였다.
“잘 모르겠어요.”
윤주 씨가 김샜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지은 씨나 한성 씨는 고개를 돌리는 건 아니었지만 둘 다 만만찮게 재미없단 얼굴이었다. 순간 한줄기 당황스러움이 마음을 스쳐 갔다. 얼른 덧붙였다.
“팀장님, 그렇게 나쁜 상사는 아닌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는데 순간 윤주 씨가 헉, 하는 표정을 짓고 의자를 뒤로 뺐다. 지은 씨와 한성 씨도 마찬가지였다. 뭐 때문에 그렇게 놀라나 싶어 돌아봤다. 거기엔 늘씬하게 키 큰 남자가 하나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윤하였다.
“아, 네.”
오윤하는 표정이 좋지 못했다.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오윤하가 나를 잠깐 쳐다보고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였다. 그러곤 팀장실로 들어가며 손짓으로 과장님을 호출했다. 과장님이 입가를 문지르며 허겁지겁 일어났다. 윤주 씨가 작게 주먹을 말아 치켜세웠다. ‘힘내세요!’ 아마도 이런 뜻. 한쪽 구석에 밀어 뒀던 서류를 들었다.
“과장님, 제가 먼저 팀장님 봬도 괜찮을까요? 아까 부탁하신 문서 제가 결재받으려고요.”
과장님 얼굴에 잠깐 화색이 돌았다.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팀장실을 팔로 가리키기까지 한다. 과장님을 지나쳐 노크했다. 들어오라는 까칠한 목소리가 넘어왔다. 문을 열자 의자에 앉아 오윤하가 팔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 보였다. 오윤하는 들어온 사람이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말부터 뱉었다.
“형, 말이 돼? 시간 지켜서 꼬박꼬박 나오라는 건 그렇다고 쳐. 근데 내가 누굴 만나고 안 만나고까지 간섭받을 나이는 아니잖…….”
팔을 치우며 고개를 돌리던 오윤하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나도 할 말이 없어서 오윤하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짓던 오윤하가 헛기침하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뭡니까? 난 서 과장님 불렀는데요.”
걸어가 오윤하 앞에 서류를 내려놓았다. 오윤하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서류로 떨어졌다.
“오늘까지 결재받을 서류가 있어서요.”
“그런 거 있으면 과장님한테.”
“팀장님께 받으라고 하셨어요.”
잠깐 오윤하와 눈이 마주쳤다. 잔뜩 찡그려진 눈썹과 그 위에 붉은 자국, 붉은 자국? 나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러고 보니 한 번 입은 옷은 다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는 소문이 있는 오윤하의 셔츠 칼라에 갈색 액체가 물들어 있다. 커피 같았다. 한 번 더 살피기도 전에 오윤하가 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곤 읽지도 않은 서류에 사인을 쓱쓱 갈겼다.
“됐습니까?”
“네.”
“나가서 과장님 좀 들어오라고 해요.”
만년필을 굴려 아무렇게나 놓은 오윤하가 다시 의자에 기대며 팔로 얼굴을 가렸다. 최대한 조용히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바로 앞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과장님이 바로 말을 걸었다.
“어때요?”
“네?”
“팀장님 기분 어때 보여요?”
그런 과장님을 보며 의외라는 생각만 했다. 팀장 잘못 걸려 고생하는 줄만 알았는데 오윤하랑 형, 동생 하는 사이였구나. 무슨 사이일까. 오윤하 이마며 셔츠는 뭘까. 내 일이 아니니 호기심은 금방 날아간다.
“과장님 들어오라고 하시던데요.”
조심스럽게 전한 말에 과장님이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 죽어 가는 얼굴로 팀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결재받은 서류는 과장님 책상에 내려놓고 내 자리로 돌아왔다. 의자에 앉자마자 윤주 씨가 말을 걸었다.
“윤 대리님 전화 오던데.”
“전화요?”
책상에 올려 둔 핸드폰을 살폈다. ‘너무너무 사랑하는 남자 친구♡’라는 저장 명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윤주 씨를 쳐다보자 윤주 씨가 금방이라도 전부 캐묻고 싶다는 듯 입술을 씰룩이는 게 보였다. 이거 봤구나. 어색하게 웃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덥석 윤주 씨가 내 팔을 쥐었다.
“바로 전화 안 해 줘요?”
“조금 이따 전화하죠. 뭐.”
“에이. 연인 사이에 그런 게 쌓여서 싸우고 헤어지고 그러는 거죠. 얼른 전화해 봐요. 두 번이나 왔었다니까?”
괜찮다고 말하려고 할 때 핸드폰에 짧게 진동이 울었다. 화면이 밝아졌다. 나도 윤주 씨도 동시에 화면을 쳐다봤다. 화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오늘 누나 집에서 자고 가도 돼?]
윤주 씨가 불에 덴 듯 내 팔을 놓고 떨어졌다. 그러곤 제 얼굴을 붉히며 어머 어머, 감탄사를 연발했다. 대단한 오해를 하는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려다 관뒀다.
“방금 본 거는 정말 실수예요. 얼른 답장해요. 이번엔 진짜 안 볼게요.”
빠르게 속삭인 윤주 씨가 제자리로 돌아가 컴퓨터에 들어갈 듯 얼굴을 모니터에 바짝 붙였다. 말은 그렇게 해도 힐끔거리는 시선은 여전했다. 따가운 뺨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답장.
[몇 시에 올 거야?]
내가 이직한 이후로 회사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오윤하에 대한 소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일단 오윤하는 주변에서 보기 드문 미남자였다. 키도 컸는데 묘하게도 단순히 잘생겼다고만 표현하기엔 부족한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거기에 회장님 아들. 화룡점정으로 오윤하는 회사 생활에 불성실했다. 사람들에게 수다거리를 제공해 주기엔 충분한 조건이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내가 오윤하를 그다지 나쁜 상사가 아닌 것 같다고 말한 것엔 이유가 있다.
첫째로 오윤하는 일을 안 했지만, 돈은 잘 썼다. 별일 없을 때도 ‘오늘 금요일인데 다 같이 소고기라도 먹어요.’ 하든가 아니면 과장님이 ‘저희 오늘 팀원들끼리 식사하는데…….’ 하면 별말 없이 자기 개인 카드를 내밀었다. 물론 자기가 참석하는 일은 없었다. 이 사실은 팀장이 된 이후로 한 번도 회식 자리에서 본 적이 없다며 윤주 씨가 여러 번 얘기해 기억한다.
둘째로 오윤하는 성격이 안 좋았다. 회사 사람들과 말을 섞는 일 자체가 드물긴 하지만 혹여나 조금이라도 섞게 되면 남의 말을 툭툭 잘라먹고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떴다. 그나마도 예의 있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상사의 장점이라고 할까 보냐만은 우리 팀에게는 조금 달랐다. 누가 새로 들어왔고 나갔는지도 제대로 기억은 못 했지만 어쩌다 다른 팀과 부딪히는 걸 보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일단 가로막고 봤다.
일례로 지지난 주 일을 들 수 있다. 아직 업무에 익숙하지 못한 지은 씨가 실수한 일이었는데도 오윤하는 ‘그래서, 뭐요.’로 일관했다. 당연히 회사에 회장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퍼진 오윤하에 맞설 만큼 간 큰 사람은 없었다. 그날 크게 감동한 지은 씨는 사흘 동안 팀장님 뒷말을 안 하겠다고 선언했고 다섯 시간 만에 철회했다.
그러니까, 오윤하가 적어도 자기 팀원이라는 의식 정도는 가지고 있단 소리다.
마지막으로 오윤하는 우리 팀이 끈끈해지는 것에 일조했다. 본인이 의도했든 안 했든 오윤하 가까이에 있는 우리 팀원들은 오윤하의 사생활을 가까이서 목격할 수 있었고 암묵적으로 회사에서 하기에 뭐하다 싶으면 퇴근 후 자리를 만들어 떠들었다.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된 지은 씨가 십 년 동안 알고 지낸 언니처럼 자연스레 윤주 씨를 대하는 게 그 이유였다.
다른 팀 사람들은 오윤하를 보는 앞이 아니면 그냥 오윤하, 그 새끼. 하고 불렀지만, 우리 팀원들은 욕할지언정 꼬박꼬박 팀장님이라는 호칭은 붙였다. 가끔 누가 휴게실에서 수위 넘는 험담을 하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것도 우리 팀원들이었다. 까도 내가 까! 그런 걸까?
“누나 왔어?”
“응. 밥은 먹었어?”
“먹었지. 시간이 몇 신데.”
집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보인 건 2인용 소파 밖으로 삐죽 튀어나온 다리 두 개였다. 거실 소파에 누워 있던 재원이가 고개도 안 돌리고 아는 척했다. 재원이 가슴팍엔 라라가 올라타 있었다. 원래 소파 왼쪽이 라라의 지정석인데 덩치가 큰 재원이에게 밀려 하는 수 없이 가슴팍에 자리 잡은 모양이었다. 핸드백을 내려놓으며 다가가자 게으른 라라가 나를 향해 한 번 야옹, 했다. 라라의 목덜미와 등을 쓰다듬어 주고 재원이에게 물었다.
“라라 밥 먹었어?”
“자동 급여기가 알아서 주던데 뭐. 누나 근데 얘 굶겨? 밥 왜 이렇게 허겁지겁 먹어? 심지어 더 달라고 막 울던데.”
그 말에 라라를 쳐다봤다. 라라는 동그란 한쪽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다시 야옹, 할 뿐이었다. 라라의 정수리에 살짝 입을 맞췄다. 비릿하기도 하고 고소하기도 한 냄새가 훅 풍겼다.
“항상 그래. 많이 주면 토할 때까지 먹어. 더 달라고 해도 주지 마.”
“길거리 출신이라 그런가. 내 친구네 고양이는 손으로 한 알 한 알 떠 줘야 겨우 먹던데.”
라라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라라의 귀를 막았다. 그리고 재원이에게 핀잔을 줬다.
“얘 들어.”
“무슨 고양이가 사람 말을 알아들어.”
“얘들도 느낌으로 다 알아들어.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고개를 흔들며 내 손에서 얼굴을 뺀 라라가 우아하게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그러곤 TV 서랍장 위로 올라가 뒷다리를 쭉 펴고 핥기 시작했다. 털이 잔뜩 묻은 티셔츠를 툭툭 털던 재원이가 일어나 앉았다.
“이번 중간고사 좀 빡빡해서. 집에서 왔다 갔다 하기 힘들 것 같아. 다음 주 토요일까지만 누나 소파 신세 좀 질게.”
시험 기간이라고 했던 것 치곤 라라와 소파에서 오래 누워 있었는지 뒷머리가 눌렸다. 라라에게 그랬던 것처럼 재원이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우리 집에 먹을 거 없는데. 내일 장이라도 봐 놓을까?”
“됐어. 오늘만 책이랑 옷 두려고 일찍 온 거고 내일부턴 새벽까지 학교 도서관에 있을 거야.”
“그래 그럼. 라라도 너 좋아하는데 잘됐다.”
“사람 오고 가는 거 신경도 안 쓰는 저 뚱땡이가 뭘 나를 좋아해.”
뚱땡이라는 말에 라라가 털을 고르던 것을 멈추고 눈을 깜박였다. 라라의 하나뿐인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얼른 라라 편을 들었다.
“라라가 뭐가 뚱뚱해. 하나도 안 뚱뚱해.”
“누나. 쟤가 내 가슴으로 뛰어내렸을 때 육성으로 헉, 소리 나왔거든.”
“아직 괜찮아. 병원에서도 수의사 선생님이 이만하면 정상 체중이라고 했어.”
더 말하려는 재원이를 밉지 않게 흘겼다. 눌린 머리를 쓱쓱 문지르던 재원이가 내 등에 대고 소리쳤다. ‘누나, 식탁에 아빠 반찬 뒀어!’ 그 말에 침실로 향하던 발을 부엌으로 돌렸다. 그래 봤자 넓지 않은 집이라 열 걸음 내외였다. 식탁엔 아빠의 취향대로 분홍색 보자기로 싸인 반찬통이 세로로 높이 싸여 있었다. 보자기를 풀다 와, 했다. 내가 좋아하는 양념게장이 있었다. 슬그머니 다가온 재원이가 ‘누나 저녁 안 먹었으면 지금 같이 먹을까.’ 했다.
“너 밥 먹었다며.”
“나 아직 성장기야.”
키가 180을 넘고도 더 크고 싶은지 재원이가 침을 줄줄 흘리며 나를 졸랐다. 마음대로 하라고 한 뒤 양념게장을 뺀 나머지 반찬은 냉장고로 넣었다. 침실로 들어가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그새 냉동실에서 얼린 밥을 돌렸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덜고 있던 재원이가 의자를 빼냈다.
이런 부분은 아빠를 닮았는지 내가 쓰지도 않는 그릇을 꺼내 예쁘게 세팅해 놓았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며 앉자 숟가락을 든 재원이가 서둘러 외쳤다.
“잘 먹겠습니다!”
그런 재원이를 보다 말했다.
“너 내 핸드폰 저장 명 언제 바꿨어.”
재원이는 그저 뻔뻔했다.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저번 주에 같이 밥 먹었잖아. 그때. 근데 그걸 이제 봤어?”
“왜?”
“왜긴 왜야. 기왕 할 거면 치밀하게 하란 거지.”
“네가 그렇게 해 놔서 내가 오늘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아.”
재원이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양념이 묻은 손가락을 쪽 빨았다. 그리고 별안간 홱,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봤다.
“뭐가 곤란해. 누나 혹시 또 회사에.”
얼른 말을 가로막았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뭐가 곤란해. 어? 뭐야, 뭔데!”
아빠도 이러지 않는데 얘는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애가 왜 이럴까. 잠시 생각했다.
“회사 사람이 너한테 온 문자 봤단 말이야. 뭐라고 생각하겠어. 민망하게.”
“무슨 문자? 내가 뭐라고 보냈지?”
“우리 집에서 자고 간다고.”
재원이가 밥을 떠먹다 말고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저를 빼놓고 우리끼리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것인지 라라가 식탁 위로 뛰어 올라와 냄새를 킁킁 맡았다. 재원이가 밀어내려 하는 것을 말렸다. 내 예상대로 라라는 그냥 냄새만 맡고 말았다. 식탁 위에 벌러덩 누운 라라를 바닥으로 내리며 재원이가 말을 이었다.
“누나. 난 누나가 상처받는 거 싫어.”
흠칫했다. 물티슈로 손을 닦고 있던 재원이는 다행히 보지 못했다.
“그러니까 핸드폰에 저장한 거 그거 그냥 둬. 누난 항상 뭐 싫다, 좋다 분명한 게 없어서 내가 다 불안하다니까. 누나가 항상 그런 식이니까 별 거지 같은 새끼한테 휘둘리고.”
거기까지 말하던 재원이가 입을 합, 다물었다. 재원이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내 말은 그러니까 누나 탓이라는 게 아니고. 그냥 불안하다고. 누나 이직한 지 얼마나 됐지? 그냥 내가 누나 데리러 한번 갈까? 어차피 거기 사람들은 내가 누나 동생인 거 모를 거 아니야. 우리 안 닮기도 했고.”
게살과 비빈 질척한 밥을 떠먹었다. 맛있다. 아빠도 원래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심심하다고 요리 학원을 부지런히 다니더니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게장에 손이 많이 간다는 걸 알아 미안해서 해 달라고 조르지 못했었는데, 재원이가 애교를 부려 받아 온 모양이다. 남은 게장은 전부 재원이 앞으로 밀어 주고 일어났다. 싱크대에 밥그릇을 내려놓고 종아리에 몸을 비비는 라라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지 마. 남자 친구 있다고 다 말해 놨으니까. 오버하면 더 이상해.”
그 말에 재원이가 순간 나를 쭉 훑었다. 잠자코 기다렸다. 재원이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누나 내가 저장해 둔 거는 바꾸지 마.”
“너무 사랑하는 이랑 하트는 좀 뗄게. 오늘도 회사 사람이 봐서 엄청 민망했어.”
“안 된다니까?”
재원이는 꿋꿋했지만 내가 더 완고했다. 끝내 하트를 지켜 내지 못한 재원이가 라라를 끌어안고 툴툴거렸다.
“너는 여자 친구 없니? 여자 친구가 알면 아무리 친누나라도 다른 사람 남자 친구 행세해 주는 거 싫어할 텐데.”
느릿하게 덧붙이는 말에 재원이가 갑자기 의자를 팍 밀치며 일어났다. 하, 허, 흥! 다채로운 소리로 재원이는 자기가 삐졌음을 알렸다.
“누나나 잘해!”
라라가 장단 맞추듯 야옹, 운다.
오윤하가 그날 회장님에게 불려 가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좋은 소리는 아니었을 거다. 오윤하가 불려 간 이유와 그 안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오윤하의 출퇴근 시간이 일정해진 것을 근거 삼아 ‘한 번만 더 내 귀에 이런 일 들어오면 호적에서 파낼 줄 알아!’ 같은 이야기를 했겠지 않겠냐는 소문이 빠르게 돌았다. 듣자 하니 영업팀과 재무팀은 오윤하의 정신 차린 듯한 태도가 얼마나 갈지에 대해 돈내기를 걸었다고 했다. 그 소문은 우리 사무실에선 조금 더 구체적으로 돌았다.
“여자 금지령이 떨어진 게 분명해요.”
윤주 씨가 확신하며 말했다. 귀를 기울이던 막내 지은 씨가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제 생각도 그래요.”
나와 한성 씨만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교환했다. 한성 씨가 총대를 멨다.
“네? 그걸 어떻게 아세요. 다들.”
한성 씨 말에 윤주 씨가 검지를 세워 까닥까닥 흔들었다. 논리도 근거도 없었지만 감 하나로 사건을 파헤치는 형사의 얼굴이었다.
“벌써 이 주째잖아요. 팀장님이 이렇게 꼬박꼬박 출퇴근 시간 맞춰 다닌 게.”
“그렇죠?”
“그리고 신희주랑 헤어진 건 넉넉잡아 한 달 전쯤일 거란 말이에요. 삼 주 전에 신희주가 찾아와서 깽판 쳤으니까.”
“그래서요?”
자꾸 되묻는 한성 씨가 답답하다는 듯 지은 씨가 핀잔을 툭 줬다.
“아유 주임님. 그간 팀장님이 여자 만나고 갈아 치우던 간격을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길어도 한 달을 넘긴 적이 없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잠잠하잖아요. 인터넷에도 뭐 목격담 뜬 게 없다니까요.”
“지은 씨는 입사한 지 이제 한 달인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김 대리님이 말하셨어요?”
그 말에 윤주 씨가 얼른 발뺌했다.
“어머 무슨 소리예요. 누가 들으면 내가 맨날 여기저기 팀장님 얘기만 하고 다니는 줄 알겠어요.”
한성 씨는 할 말이 많은 얼굴이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한성 씨도 업무 시간 중간 중간 모여 수다 떠는 일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으니까. 지은 씨가 윤주 씨를 흉내 내듯 검지를 까닥였다.
“입사하고 좀 알아봤어요.”
“아니, 그걸 왜?”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지은 씨가 콧등을 찡그렸다.
“궁금하잖아요. 저 껍데기는 황홀한 양아치가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지.”
콧등을 찡그린 모습이 귀여워서 살짝 웃었다. 눈이 마주친 지은 씨가 살짝 혀를 내밀며 헤헤, 웃었다. 윤주 씨도 그런 지은 씨가 귀여운지 웃었지만, 이내 지은 씨 머리를 쥐어박는 시늉 했다.
“씁. 양아치가 뭐예요. 아무리 그래도 우리 팀장인데.”
“팀장님이라도 양아치는 양아치죠 뭐. 서승연이랑은 그래도 꽤 길게 사귀었던데.”
서승연이랑은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일까요. 글쎄요. 진짜 그런 건가? 그러면 팀장님은 사실 서승연 잊지 못해서 저러시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암만 생각해 봐도 우리 팀장님은 그런 순애보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어쨌든 서승연은 지금 다른 남자랑 사귀잖아요. 어머, 누구? 왜, 같은 드라마에 나오는…….
그래 봤자 이어지는 이야기는 누가 누구랑 사귀고 헤어지고의 반복이었다. 한 귀로 대충 흘리며 멍하니 시선을 컴퓨터에 뒀다. 그러다 팔꿈치를 톡 건드려 오는 손길에 놀랐다. 돌아보니 윤주 씨가 자기가 더 놀랐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눈을 깜박이다 눈썹을 축 늘어트렸다.
“우리 고양이가 어제 설사를 했거든요.”
“네?”
“사료 바꾸고 나선 그런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어제 설사하더라고요. 다니는 병원에 연락은 해 놨는데 불안해서요.”
윤주 씨와 지은 씨, 그리고 한성 씨가 지금 우리가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데 겨우 고양이 얘기냐, 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쳐다보다 고개를 떨궜다. 핸드폰을 시무룩하게 만지작거리자 윤주 씨가 서둘러 표정을 바꾸고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을 거예요. 별일이야 있겠어요?”
“그러길 바라야죠.”
분위기가 조금 침울해졌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한성 씨가 슬쩍 주제를 바꿨다. 윤주 씨와 지은 씨의 시선도 한성 씨에게로 쏠렸다.
“그, 여자 금지령은 좀 그렇고. 그냥 팀장님이 이번 여자는 조심히 만나시는 게 아닐까요? 대놓고만 안 만나면 누가 어떻게 알겠어요.”
지은 씨가 그 말에 솔깃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끄덕이려고 했다. 그때였다. 팀장실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오윤하가 등장했다. 오윤하는 놀란 얼굴의 우리는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사무실을 성큼성큼 나섰다.
창문은 열려 있지 않았지만 어쩐지 찬바람이 쌩 부는 기분이 들었다. 모두 조용히 오윤하가 나선 문 쪽을 보다 팀장실로 다시 시선을 줬다. 거기엔 시체라고 해도 믿을 법한 얼굴의 과장님이 비틀거리며 나오고 있었다.
“저…….”
한성 씨가 나섰다. 한성 씨를 힐끔 쳐다본 과장님이 어설프게 잠깐 웃고 말았다.
“신경 쓰지 말고 일들 해요. 별일 아니니까.”
과장님은 그대로 자기 책상으로 걸어가 배를 움켜쥐며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또 신경성 위통이 도진 모양이었다. ‘내가 사표를 쓰든가 해야지, 오윤하 이 나쁜 놈…….’ 흐느끼는 듯한 푸념이 내 자리까지 들렸다. 과장님의 혼잣말 푸념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눈을 깜박이던 윤주 씨가 소리를 낮추며 팀장실을 가리켰다.
“저 성질머리에 잘도 여자를 조용히 만나겠네.”
다들 빠르게 자기 책상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지은 씨가 우는 소리를 내며 의자에 축 늘어졌다.
“불안해서 일이 손에 안 잡혀요.”
“팀장님이 여자 만나고 안 만나고가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핑계 대지 말고 일해요. 일!”
그렇게 말했지만, 윤주 씨도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정신 사납게 엄지를 깨무는 모습이 옆눈에 걸렸다. 키보드를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조용한 사무실에 울렸다. 하던 문서를 마저 작성하고 막 뽑으려고 할 때, 핸드폰 진동이 울었다. 번개처럼 달려갔다. 재원이었다.
[설사는 별거 아니래. 근데 다른 게 있는데 지금 잠깐 통화 가능해?]
그대로 핸드폰을 낚아챘다. 저 잠시 통화하고 올게요. 윤주 씨에게만 살짝 속삭였다. ‘무슨 전화길래 저렇게 급하게 나가세요.’ 하고 묻는 지은 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윤주 씨의 대답도 들리다가 문이 닫히는 것에 꼬리가 잘렸다.
“지은 씨 몰라? 윤 대리님 남자 친구랑 엄청 뜨겁잖아요…….”
“응, 나야.”
나름 회사 복지 차원에서 꾸며 놓았다는 옥상 정원은 쓰지 않는 잡동사니 같은 것을 구석에 모아둔 덕에 하늘이 뚫린 창고처럼 보였다. 원칙상 금연이었지만 가끔 흡연자들이 몰래 올라오거나 사내 커플들이 몰래 만날 때만 사람이 들락거리는 곳이었다.
“다른 문제 뭐? 어떤데?”
재원이가 진정하고 자기 말 좀 들으라 핀잔을 줬다. 가슴에 손을 올리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내 버릇을 아는 재원이는 조금 더 기다린 뒤 말을 이었다.
―별건 아니고. 다리 쪽에 딱지 같은 게 있대서 보니까 피부병이라고 하더라고. 약이랑 샴푸 타 왔으니까 집에 오면 설명해 줄게. 의사가 새로 침구 같은 거 샀으면 그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하던데.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새 러그 깐 것 때문에 그런가 봐.”
―그런가 보네. 아무튼, 별 이상은 없고. 이 주간 꼬박꼬박 샴푸 시켜 주고 약 먹이면 낫는다니까 걱정할 거 없어. 아침에 누나 때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재원이가 툴툴거리는 목소리를 듣자 안도감이 들었다. 집에 가자마자 러그를 내다 버려야겠단 생각을 하며 난간 쪽으로 다가갔다.
“아침엔 미안해.”
―누나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아무튼, 누나 집에 이발기 없지?
“그건 갑자기 왜?”
―왜긴 왜야. 털 밀어 줘야지.
난간에 손을 짚으려다 말고 허공을 짚었다. 몸이 삐끗했다. 한 발로 콩콩, 뛰다 겨우 중심을 되찾았다.
“……털을 밀어? 싹다?”
―왜?
“아니, 그건 좀 그래서.”
라라는 목욕하는 것도 너무 싫어해서 고무장갑 아래 목장갑까지 끼고 장장 두 시간은 사투해야 했다. 그런 애니 털을 미는 것도 좋아할 리 없을 거란 판단이었다. 빗질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해서 빗질 전후로 간식을 물려 줘야 하기도 했다. 오늘은 피를 보겠구나. 얼마 전 발톱을 깎아 주다 생긴 팔뚝 안쪽의 상처가 괜히 쑤셔 오는 기분에 한숨을 쉬었다. 재원이가 그걸 눈치챘는지 빠르게 덧붙였다.
―피 볼까 봐 그래? 내가 밀어 줄게.
“응?”
―이래 봬도 나 친구네 고양이도 대신 밀어 준 적 몇 번 있거든. 이게 또 요령이 있어야 하더라고. 걱정하지 말고 누나는 일이나 잘해. 내가 깨끗하게 밀어 놓을 테니까 올 때 치킨이나 좀 사다 주라.
그래 주면 고맙긴 했다. 치킨에 맥주까지 약속받은 재원이가 신나서 낄낄 웃는 소리가 넘어왔다. 그래도 전화를 바로 끊지 않았다. 이내 웃음을 그친 재원이가 할 말이 더 있냐 물어봤다. 냉큼 대답했다.
“저, 있잖아. 털 말이야. 사타구니 쪽은 남겨 놔도 되겠지?”
―대체 무슨 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홀딱 다 밀고 보면 걔도 민망할 텐데.”
―고양이가 사람이야? 걔들은 털 밀 때 얼굴이랑 발 근처만 양말 신은 것처럼 놔두면 돼. 참 누난 가끔 보면 엄청 엉뚱하다니까.
그렇게 말한 재원이는 내가 어릴 때 뭘 해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하는 이야기까지 꺼냈다. 재원이가 직접 보거나 기억할 일은 아니니 술 취한 아빠한테 들은 이야기일 것이다. 듣기 좋은 주제는 아니라 주제를 바꿨다.
“알겠어. 그럼 털 다 밀고……. 나 참, 걔 반응이 어떨지 모르겠다.”
‘누난 치킨이랑 맥주만 사 와. 내가 알아서 다 해 놓을 테니까.’ 자꾸만 오빠 행세하려고 드는 재원이는 그렇게 마구 생색을 냈다. 결국엔 웃음이 터졌다. ‘그래, 알겠어. 너만 믿을게.’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 길게 통화한 것도 아닌데 핸드폰이 따끈따끈했다. 오래된 기종이라 그런가. 잠시 요즘 새로 나온 핸드폰으로 바꿀까 생각하다 관뒀다. 그래도 문자랑 전화는 잘만 됐다. 라라의 일이 해결된 것에 걸음이 조금 전과 달리 가벼워졌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옥상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리다, 엄마야! 너무 놀란 나머지 핸드폰도 떨어트렸다.
“팀장님?”
가슴에 손을 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금 전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며 사무실을 나섰던 오윤하가 어느새 벤치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었다. 내가 있던 곳과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이었다. 라라 일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인기척을 못 느꼈던 모양이다. 놀란 심장이 아직도 퍼덕이고 있었다.
커피 빨대를 입에 물고 까닥이던 오윤하가 가슴을 쓸어내리는 나를 유심히 쳐다봤다. 시선이 따가울 정도였다. 할 말이 있나? 싶어 입술을 말아 물고 말을 기다렸지만, 오윤하는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먼저 말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잠깐 통화하려고…….”
오윤하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은 여전히 내게 박혀 있었다. 그래도 석 달이나 같은 팀에 있었는데 마치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살피는 듯한 눈빛이라 나도 기분이 묘해졌다. 힐끔 쳐다보자 그새 넥타이는 어디에 팔아 치웠는지 셔츠 윗단추를 두 개나 풀어 미끈하게 드러난 목선이 보였다.
제대로 대화 한번 안 해 본 사람에게 어떤 편견을 갖는 것은 너무 성급하고 치사한 짓이라고 생각해 왔던 나지만, 지금만큼은 지은 씨의 껍데기만큼은 훌륭하다는 말에 동감했다. 이렇게 밝은 햇살 아래서 보니 이따금 마주칠 때도 가끔 깜짝 놀랄 만큼 잘생기긴 했다.
“그럼.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예의를 차려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길 때였다.
“저기.”
오윤하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자 입에 물고 까닥이던 빨대를 커피 잔에 다시 꽂은 오윤하가 내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싱긋, 웃었다. 입술만 살짝 비틀었는데 까칠하고 예민해 보이던 분위기가 조금 물러나고 꽃향기라도 풍길 것처럼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눈을 깜박이며 쳐다보자 오윤하가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이름이 뭐였죠?”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티는 내지 않았다. 오윤하 쪽으로 완전히 돌아서며 정장 치마를 털었다. 그리고 차분하게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윤다정입니다. 팀장님.”
“아아.”
오윤하의 눈이 가늘어졌다. 고의로 느껴질 만큼 시선이 천천히 내 얼굴 밑으로 내려왔다.
“윤, 다정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