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200화 (201/201)

200화

“뭘 도우면 되지?”

씨어가 폭포수를 가리켰다. 잔잔한 수면 위에 하늘에 떠 있는 붉은 반지가 쌍둥이처럼 고스란히 떠 있었다.

하늘과 수면 위에 똑같은 붉은 반지가 비쳐 마치 금환일식이 하늘과 땅에서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 같았다.

“호리우스의 오른쪽 눈은 태양, 그리고 왼쪽은 달을 상징합니다. 지금 하늘에 나타난 금환일식은 부활을 상징하니, 수면 위에 비친 금환일식은 그 반대 속성인 죽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곧 저주의 소멸과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위해 공작님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지요.”

씨어의 설명에 진이 망설임 없이 붉은 반지가 비친 수면 위에 섰다. 드래건의 힘 때문인지 진의 몸은 수면 위에 떠 있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씨어가 반대쪽 손을 단검으로 그었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분명 고통스러울 텐데도 씨어의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마치 고통은 느껴지지 않는 듯 보였다.

씨어가 고갤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금환일식이 정점에 다다른 듯 하늘에 떠 있는 붉은 반지는 그 어느 때보다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죽음과 부활을 손에 쥔 자여, 200년 전 체결했던 주술의 서약을 깨려 한다. 헤르파 사막에 떠올랐던 파수꾼의 별이 운명을 찾아가듯 시간을 거슬러 제자리를 찾게 되리라. 장막을 막아서는 안개가 걷히고 마침내 운명에 끝에 붉은 반지가 피처럼 걸렸으니, 그대와의 계약을 깬다. 그 대가는 나의 피.』

씨어가 또다시 검을 들어 단검을 제 손바닥에 깊게 찔렀다. 뚝뚝 흘러내리던 붉은 피가 마치 살아 있는 듯 로엔의 몸을 감싸더니 그녀의 심장에 새겨진 혈독화 속으로 흘러들었다.

“으윽!”

로엔이 고통스러운 듯 손으로 제 심장을 감싸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씨어의 입가가 만족스러운 듯 호를 그리며 올라갔다.

음산하고 의뭉스러운 미소였다.

“잠깐. 거기까지다, 씨어.”

“헉―!”

경고처럼 날아든 진의 목소리와 함께 씨어가 숨이 막힌 듯 목을 그러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지 못한 씨어의 눈이 경악으로 부릅떠지더니, 어느새 진에게 향했다.

폭포수의 수면 위에 서 있던 진이 물 위를 걸어 씨어에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분명 죽음의 속박이…….”

“두 번은 속지 않는다, 씨어. 타에라, 다음 주술은 뭐지?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 말이다.”

진의 목소리에 그제야 커다란 나무의 그림자 속에서 지금껏 몸을 숨기고 있던 타에라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로브 사이로 타에라의 불투명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리고 호리우스의 눈으로 된 구슬을 든 손은 죽은 나무처럼 버석했다.

“네가 어떻게 여기에…….”

씨어의 표정이 처음으로 무너져 내렸다. 타에라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눈치였다.

“씨어, 오랜만이군.”

“너, 설마…….”

씨어는 타에라의 의도를 눈치챈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타에라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씨어, 시간이 너무 길었다. 나는 지쳤고, 시간 속에서 헤매는 일은 더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되돌려야지. 처음으로.”

“미친. 당장 멈춰.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다 네가…….”

“알고 있다, 씨어. 그러니 내 죄는 내가 질 생각이다. 너는 네 선택에 대한 죗값만 치르면 된다.”

씨어가 타에라에게 손을 뻗었다. 멈추게 해야 했다.

다 된 일이었는데……. 조금만 더 하면 200년 전처럼…….

“헉!”

씨어가 또다시 제 목을 움켜쥐곤 바닥에 주저앉았다. 타에라에게 뻗었던 손이 제 심장을 뜯으며 고통스러운 듯 버둥거렸다.

진이 씨어를 향해 한 발짝 다가서자 그의 손톱이 살갗을 찢고 제 심장을 꺼낼 듯 긁어 댔다. 진을 감싸고 있는 푸른빛이 씨어를 족쇄처럼 붙잡고 있었다.

“타에라, 이제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

진의 목소리에 타에라가 천천히 고갤 들어 로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 씨어가 했던 것처럼 공작님의 피를 로엔 님의 심장에 새겨 넣으면 됩니다. 검은 드래건의 피로 저주를 만들어 냈으니, 그 피로 정화하는 것이 저주를 끊어 내는 것입니다.”

제 피로 로엔의 저주를 정화한다, 라. 그러고 보니 로엔이 제 피를 먹었을 때 거짓말처럼 로엔의 몸속의 독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그땐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저주를 풀 수 있는 마지막 열쇠였던 모양이다.

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 손을 검으로 그었다. 비릿한 혈 향과 함께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노아스의 주인이자, 파수꾼의 운명을 지닌 자가 명한다. 내 반려의 몸속에 흐르는 독을 정화하고 저주의 사슬을 끊어라.』

바닥으로 떨어지던 붉은 피가 로엔의 심장에 새겨진 혈독화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순간 로엔의 몸에서 폭발하듯 짙은 꽃 향이 뿜어져 나왔다. 짙게 퍼졌던 향이 언제 그랬냐는 듯 소멸하자 로엔의 몸이 힘을 잃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로엔!”

진이 손을 뻗어 쓰러지는 로엔을 제 품에 안았다. 진은 서둘러 로엔의 드레스의 앞섶을 열어 가슴에 새겨진 혈독화를 확인했다.

“다행이야. 사라졌다. 드디어 저주가 풀렸다, 로엔.”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로엔의 심장을 보며 진은 안도했다.

로엔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곤 진에게 뭔가를 말하려는 그때, 지금껏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에드윈이 두 사람을 향해 은밀하게 움직였다.

“어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로엔이 입을 열기도 전에 진의 등 뒤에 서 있던 에드윈이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동시에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커졌다.

만년설을 제련해서 만든 단검이었다. 만약 저 검이 진의 심장을 꿰뚫는다면…….

생각은 길지 않았다. 에드윈이 단검을 들어 진의 등으로 깊숙이 찌르려는 그 순간, 로엔은 온몸으로 진을 힘껏 끌어당겼다. 그리곤 몸을 움직여 제 몸으로 그를 감쌌다.

다행히 에드윈의 검이 진을 비켜나갔다. 안도하는 것도 잠시, 다시 검을 든 에드윈이 로엔의 등에 만년설로 제련된 단검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살을 찢기고 심장이 짓이겨지는 날카로운 고통이 로엔을 덮쳤다.

“헉―!”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인식하기도 전에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이내 손을 뻗어 로이슈덴 공작가의 보검인 부러지지 않는 검으로 에드윈을 베었다.

“아악!”

에드윈이 거친 신음을 뱉어 내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로엔의 심장을 찔렀던 손이 잘려 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으아아악! 이 미친. 감히 내 손을…….”

에드윈이 바닥을 뒹구는 제 손을 바라보며 악다구니를 썼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붙잡고는 고통과 분노로 점철된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뱉어 내는 숨결이 거칠었다.

“아아악! 빌어먹을 진 로이슈덴. 감히, 하아―.”

창백해진 얼굴에선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게 보였다. 고통에 떨며 소리치는 모습이 추해 보일 지경이었다.

진은 제 손에 들고 있던 크립텍스를 쓰레기라도 버리듯 바닥으로 던졌다.

그 순간 에드윈의 눈빛이 바뀌었다. 손이 잘린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듯 멀쩡한 손으로 크립텍스를 재빨리 움켜쥐었다.

“드디어 찾았다. 라딘의 서를 없앨 물건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왔어.”

손이 잘린 고통도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쥐게 된 기쁨에 가려진 듯 에드윈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씨어, 정신 차려. 내가 발견했다. 내가 드디어 라딘의 서를 찾아 없앨 기회를 갖게 됐어.”

에드윈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씨어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를 일으켜 세웠다.

진은 그런 에드윈을 죽일 듯 노려보다 로엔에게 시선을 줬다.

“제길, 왜 하필 지금이지? 이제야 록스버그의 저주에서 벗어났는데.”

진은 무릎을 꿇고 로엔의 심장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지혈하려 애썼다.

혈독화를 정화하지만 않았더라면 만년설로 제련한 검에 찔렸다고 해도 생명엔 지장이 없었을 터였다.

무엇보다 이 상처는 제가 가진 드래건의 힘으로도 치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로엔, 로엔.”

진이 제 옷을 찢어 피가 흐르지 않도록 단단히 묶었다. 그리곤 타에라를 향해 고갤 돌렸다. 그는 음산할 정도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릴 방법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 목소리였지만 타에라는 온몸을 떨며 안타까운 얼굴로 고갤 가로저었다.

“없습니다. 만년설로 제련된 검에 당했으니, 이젠 혈독화가 없는 록스버그 공작님은 살아날 방법이 없을 겁니다.”

진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타에라가 벌인 일은 아니었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자를 죽여 버리고 싶었다.

진은 로엔을 품에 안은 채 에드윈과 씨어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크립텍스의 암호를 푸는 데 정신이 팔려 있는 듯했다.

“암호를 알려 줄까?”

진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은둔자의 숲을 울렸다. 진의 목소리에 에드윈과 씨어의 고개가 획 돌아왔다.

“네가 암호를 알고 있다고?”

“당연히 알고 있다.”

“거짓말. 네가 알았다면 순순히 크립텍스를 나에게 넘겼을 리 없지.”

에드윈이 의심을 품고 진을 노려보았다. 진은 벌레를 보듯 서늘한 눈빛으로 에드윈을 보았다.

“난 탐욕으로 썩은 너와는 다르거든. 그리고 라딘의 서 따위 나에겐 필요도 없고.”

짓씹듯 흘러나온 진의 말에 에드윈은 불만 어린 눈빛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거짓은 아니라 부정하진 못했다.

“협상을 하자는 것이군요.”

눈치 빠른 씨어가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잔뜩 쉰 목소리가 힘에 부친 듯 갈라져 있었다.

“맞아.”

“원하는 조건을 말씀해 보십시오.”

씨어의 말에 진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저주를 되돌려야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