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금환일식이 가까워질수록 타란 대륙은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헤르파 사막을 시작으로 며칠 동안 해가 지지 않는 백야 현상이 계속되더니, 대륙 전체에 밤도 낮도 아닌 시간이 이어졌다.
기이한 현상에 타란 대륙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외출을 자제했고, 각 대륙의 주인들은 각 나라의 대신전에 모여 갑작스러운 변화의 원인을 찾기 위해 골몰했다.
하지만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인 에드윈과 헤르파 사막에서 록센으로 이동한 로엔 일행 외에는 이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 뭔지 알아내는 자는 없었다.
로엔은 록센에 있는 말레 상단에 도착한 직후 랑케의 정보원을 통해 황제인 에드윈에게 원하던 물건을 찾았으며, 은둔자의 숲에서 만나자는 전갈을 황궁으로 보냈다.
그리고 라이칸에게 당분간 안톤의 자릴 대신하라는 명을 내렸다.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라이칸은 믿을 만한 사람이 라이칸뿐이란 로엔의 말에 당분간 말레 상단을 맡는 것을 수락했다.
그 후 로엔은 진과 함께 록센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 두 사람은 라이칸과 세이지에게 아드리안 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내용의 편지만 남긴 채 자취를 감췄다.
말레 상단에 발이 묶인 라이칸과는 달리, 세이지는 바로 말을 달려 아드리안으로 향했다.
하지만 세이지는 칼라일의 로이슈덴 공작저와 록스버그 공작저가 텅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곤 맥이 풀린 듯 허망한 미소를 지어야 했다.
라우렐을 통해 그들이 게르피온으로 떠난 직후 공작저의 사람들을 은밀히 피신시켰다는 말을 듣고서야, 의뢰가 끝나고 난 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 폐하 쪽에서도 움직이지 않았으니 안심해.”
무엇보다 이상한 건 에드윈이 의외로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타란 대륙은 기이한 현상으로 들썩이고 있었지만, 아드리안 제국의 황실은 이번 일을 아주 은밀하게 진행하려 하고 있었다.
황제가 마음만 먹으면 진 로이슈덴의 비밀을 공표하며 반역자로 낙인찍히는 건 식은 죽 먹기인데도, 에드윈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공식적인 행사는 물론 약혼녀인 캠벨 후작가의 영애를 만나 여유롭게 티타임까지 가졌던 것이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그러던 중 백야 현상이 아드리안 제국의 밤을 집어삼켰다. 그것을 신호로 타란 대륙은 그들을 집어삼킨 불안으로 인해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사이 록센을 떠났던 로엔과 진은 황제의 눈을 따돌린 채 은밀히 은둔자의 숲으로 숨어들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두 사람이 숲으로 들어서자, 결계가 쳐져 있던 숲이 주인을 보호하듯 그들을 감쌌다.
서늘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안온하게 바뀌었다. 진이 로엔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벗겨 내자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진을 바라보았다.
헤르파 사막을 나온 이후, 로엔은 깊은 상념에 젖은 얼굴이었다.
진은 그 원인이 노아스의 만년설 동굴에서 보았던 주술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 짐작은 사실이었다. 로엔은 무겁게 내려앉는 마음을 다독이려 애썼다.
믿었던 가신의 배신과 노아스의 만년설 동굴에서 주술에 걸려 보았던 부모님을 통해 제 마음의 밑바닥에 웅크리고 있던 진심을 보게 된 게 컸던 것이다.
“로엔, 이리 와.”
진이 안타까운 듯 손을 뻗어 로엔을 끌어당겼다. 그리곤 익숙하게 품에 안고는 공작새의 둥지가 있는 폭포로 향했다.
두 사람이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둥지에 있던 공작새가 날개를 펼쳤다. 그리곤 적으로부터 두 사람을 보호하듯 잠시 풀어 놓았던 숲의 결계가 다시 쳐졌다.
순식간에 은둔자의 숲은 노아스에 감돌던 따사롭고 포근하던 공기로 가득 찼다.
활짝 펼쳐진 공작새의 날개에 새겨진 101개의 눈이 예리한 빛을 띠며 적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먼저 씻고 싶어요.”
“그래, 그게 좋겠어.”
진의 품에서 벗어난 로엔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씻고 있어. 나는 가서 짐을 가져올 테니까.”
진이 동굴을 나가자 로엔은 옷을 벗어 반듯하게 개어 놓고는 폭포수로 향했다. 휘적휘적 폭포수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온기가 몸을 감쌌다.
긴장으로 굳어졌던 근육이 이완되며 비로소 로엔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첨벙, 첨벙. 물소리에 로엔이 고갤 들자 공작새의 둥지에서 은빛으로 반짝이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게 보였다.
손을 뻗어 물방울을 받자, 순식간에 은빛 물방울이 투명한 빛을 내며 보석으로 바뀌었다. 공작새의 눈물이 결정체로 바뀐 것이다.
“뭐 해?”
짐을 가지러 갔던 진이 돌아왔는지 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엔이 진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반짝이는 공작새의 눈물의 결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에 받았어요. 예쁘죠?”
며칠 만에 로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미소를 본 진은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폭포수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로엔의 손 위에 놓여 있는 공작새의 눈물을 집어 바위 위에 올려놓은 뒤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내 눈엔 네가 더 예뻐.”
로엔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이젠 입에 발린 말도 잘하고. 완전 바람둥이라니까.”
“네가 잘못 안 거야. 난 진실밖엔 말하지 않는 데다, 바람둥이는커녕 너밖엔 보이지 않는 사람이거든. 그러니 다시 생각해.”
진이 로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폭포수에 젖은 귓불을 혀로 핥으며 잘근잘근 씹었다.
“뭘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데요?”
로엔이 고갤 살짝 젖히자 붉어진 귓불과 여린 목덜미가 드러났다. 진이 그녀의 행동에 웃더니 귓불을 지나 목덜미에 입술을 비비며 진득하게 들러붙었다.
“지고지순한 순정남이라든가, 아니면 너밖에 모르는 바보도 좋아.”
로엔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낮게 속삭였다.
“순정남에 바보라니. 당신하곤 너무 안 어울리는 단어네요.”
“네가 잘못 안 거라니까. 정말 내 눈엔 너밖에 안 보여. 말했잖아. 널 위해서라면 내 심장도 기꺼이 주겠다고.”
로엔은 그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손에 힘을 주며 그를 살짝 밀어냈다. 그러자 목덜미에 입을 맞추던 진이 고갤 들었다.
“진, 이제 당신 심장은 필요 없어요.”
“왜?”
“생각이 바뀌었거든요. 이젠 록스버그의 저주에 얽매이며 살지 않을 생각이에요.”
“안톤 때문인가?”
진의 물음에 로엔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부정하진 못할 것 같다.
“네 잘못이 아니다, 로엔. 그자는 제 탐욕에 눈이 먼 것뿐이야. 그것까지 네가 짊어질 필요 없어. 알잖아. 인간의 탐욕은 스스로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독버섯 같은 거란 걸.”
“알아요. 록스버그의 저주를 푸는 것 역시 내 욕심이었다는 걸 알았거든요.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충성심과 희생을 당연하게 생각하면서, 나는 저주를 푸는 것만이 중요한 일이라 생각해 왔던 거예요.”
강요해선 안 됐었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쌓아 올린 록스버그 공작가의 존속은 더는 필요 없었다. 중요하지도 않았고.
“로엔, 나는 아니야. 너를 위한 모든 건 희생 따위로 표현할 수 없…….”
로엔이 손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그리곤 더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천천히 고갤 가로저었다.
진을 바라보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빛을 띠고 반짝였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 말하지 않아도 돼요. 그리고 내가 싫어요. 이젠 내가 당신의 희생을 바라지 않거든요. 모든 게 끝났을 때, 나만 혼자 남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내가, 당신과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서 당신의 희생을 원치 않는 거예요.”
“로엔.”
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잔뜩 억눌린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로엔이 고갤 들자 진의 은청색 눈동자가 그녀를 삼킬 듯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도 그래.”
진이 로엔의 손목을 붙잡아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이 닿는 곳엔 타라의 연이 매달려 있었다. 로엔은 목을 꽉 조이는 감정에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요.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내가 당신을…….”
“말하지 않아도 돼. 그게 뭐든 지금은 전혀 상관없으니까.”
진의 손끝이 로엔의 입술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마치 손으로 입술을 범하듯 야릇했다. 살짝 입을 열어 침범해 들어오는 그의 손가락을 물었다.
“로엔, 내 영역 안에 들어온 사람은 너뿐이다.”
진이 로엔의 입에서 손을 빼내고는 고갤 기울여 깊숙이 입술을 겹쳤다.
뜨겁고 습윤한 혀가 입속을 헤집으며 말랑한 점막과 단단한 입천장을 훑어 내렸다. 로엔은 몸을 떨며 팔을 그의 목에 감고는 힘껏 매달렸다.
농밀하게 얽혔던 혀가 떨어지자, 로엔이 거친 숨을 뱉어 내며 속삭였다.
“나도 그래요. 이젠 당신밖엔…….”
그밖에 안 보였다. 만년설의 동굴에서 망각 주술에 걸려 모든 걸 잊은 그 순간에도 진 로이슈덴만은 잊을 수 없었다. 결국 의식의 밑바닥에서 진 로이슈덴을 등대 삼아 현실로 돌아왔다.
두 사람의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서로를 향한 절박한 감정이 읽혔다.
진이 로엔을 바위 위에 눕히곤 입고 있던 옷을 벗겨 냈다. 희게 탈색된 달빛에 로엔의 창백한 몸이 드러났다.
가느다란 목덜미와 그 아래로 이어지는 유려한 굴곡이 눈을 사로잡았다. 진이 고갤 숙여 아이처럼 뽀얀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진한 꽃 향이 머릿속을 하얗게 표백시켰다. 진은 성급한 몸짓으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졌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살갗이 맨살에 들러붙자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