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파수꾼의 둥지에 있을 겁니다. 기억하세요. 때는 금환일식입니다. 하늘에 붉은 반지가 떠오르는 그때,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로엔은 타에라가 노아스에서 진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칼라일의 건국기념일 축제에서도 같은 말을 했었다. 하늘에 붉은 반지가 떠오를 때에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런데 안톤 님은 같이 오시지 않으셨나요?”
그때까지 옆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윌마가 로엔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로엔은 잠시 망설였다. 안톤을 이어 말레 상단의 책임자가 되겠다던 윌마에게 배신이란 쓰디쓴 감정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아서다.
“안톤은 모래 늪에서 죽었다.”
안톤의 죽음을 알린 순간, 윌마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이내 수긍하듯 담담하게 고갤 끄덕였다.
“모래 늪에 가셨다면, 사막의 사이렌에게 당하신 모양이네요.”
게르피온 사람에게 모래 늪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퍼져 있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안톤의 죽음을 윌마가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걸 보며 그 소문의 깊이가 얼마나 뿌리 깊은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사막의 사이렌이 데려갔다.”
로엔 역시도 안톤의 배신을 그렇게 정의 내렸다. 탐욕에 눈이 먼 자에게 가장 적당한 죽음이라고.
로엔은 안톤의 죽음을 떨쳐 냈다. 어쩌면 안톤의 배신은 제가 안고 있는 불안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년설의 동굴에서 주술에 걸려 환영을 본 뒤 로엔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무겁게 내리는 감정들이 아직도 글레이프니르가 되어 저를 속박하는 것 같았다.
금환일식이 뜨는 그날, 로엔은 황제인 에드윈과 씨어를 만나 제 불안과 가문에 대한 속박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든, 이젠 되돌릴 수도 없었다. 마지막 결전만이 남아 있었다.
『장막을 막아서던 뿌연 안개가 사라지고, 마침내 다다른 운명의 끝엔 검은 하늘을 밝히는 붉은 반지가 피처럼 걸린다.
-사막의 세이렌 중-』
록스버그의 노트에 쓰여 있던 말처럼 200년 전 타에라의 탐욕에 의해 비틀린 운명은 가려져 있던 진실을 품고, 마지막을 향해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었으므로.
* * *
서쪽 탑 지하에 갇혀 있던 대신관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던 방 안에 등 하나가 들어와 어둠을 몰아냈다. 대신관은 차분한 얼굴로 등을 든 자를 응시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빛 하나 없는 지하에 갇혀 있을 때보다, 등잔을 손에 쥐고 있는 자와 눈이 마주치자 더 지독한 어둠에 갇히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 대신관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썼다.
감정의 정체는 두려움이긴 했지만 진 로이슈덴과 마주했을 때와는 다른, 음산하고 질척하게 엉기는 기분 나쁜 것이었다.
‘누구지? 황제는 아닌 것 같은데…….’
등불에 익숙해진 눈으로 대신관이 사내의 얼굴을 좇았다. 그러다 사내의 뒤에 서 있는 에드윈을 발견하곤 본능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놀란 모양이군, 대신관.”
“폐하.”
대신관이 서둘러 허릴 숙였다. 당혹스러움을 감추려 애썼지만,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저를 끌고 와 낯선 탑의 지하 감옥에 가둔 자가 황제였다니.
사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직접 눈으로 목도하자 씁쓸함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머리 굴릴 필요 없다, 대신관. 나도 너와 기 싸움 할 시간이 없거든. 그러니 내 질문에 바로 대답하는 게 좋을 것이다.”
뒷골목의 무뢰배가 할 만한 협박이 이어졌다. 대신관은 놀라지 않았다. 어렴풋이 황제의 인성이 어떤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 저는 대신전에 묶인 사제입니다. 신께서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만 입을 열 수 있음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알량한 금언 맹세에 대해 말하는 모양이군. 하지만 대신관, 아무리 신이라도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군. 씨어!”
에드윈의 입가에 냉소라 어리더니 등을 들고 있는 자에게 고갤 돌렸다. 지금껏 말없이 서 있던 자의 이름이 씨어인 듯했다.
그리고 짐작하건대, 존더부르크가가 황좌에 오른 이후 황가의 그림자로 살아온 조력자인 듯했다.
“말씀하십시오, 폐하.”
“뭐가 좋을까? 금언의 맹세를 해 쓸모가 없어진 혀를 자를까. 아니면 널 본 저자의 눈을 파 버릴까?”
에드윈이 단검을 꺼내 날카로운 검의 끝을 손끝으로 살살 어루만지며 웃었다. 즐거운 일이라도 하려는 듯 에드윈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뜩였다.
“혀를 자르면 금언의 맹세를 깨고 싶어도 깨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눈이 낫지 않겠습니까?”
씨어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지하실을 울렸다.
“그래, 그렇겠군. 맹세를 깨고 싶어지면 당연히 깨야지. 대신관, 잘 듣고 신중하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
대신관의 침묵을 두려움이라고 판단한 에드윈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감옥 안으로 들어온 에드윈이 움직일 때마다 방 안을 밝히던 등불이 일렁이며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대신관은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채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불빛을 등진 에드윈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음산하게 보였다.
“씨어가 그러는데, 은둔자의 숲에 결계가 쳐졌다고 하더군. 신탁이 내려진 건가?”
“아닙니다.”
“그럼 그대가 모르는 신탁이 내려질 수 있다는 건가?”
“제가 아는 한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럼 은둔자의 숲에 쳐진 결계는 대체 뭐지? 그대도 알다시피 은둔자의 숲은 신탁에 의해 주인이 정해지지 않는 한, 누구나 출입이 가능한 숲이다. 하지만 얼마 전 결계가 쳐져 더는 출입을 할 수 없게 되었지. 이게 뭘 뜻하는 건지 너도 알 테지? 난 왜 그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군.”
에드윈이 냉소적인 얼굴로 입가를 비틀며 손에 쥔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의 대답 여하에 따라 단검의 날카로운 검날이 대신관의 눈을 파 버릴 기세였다.
“죄송합니다, 폐하. 저는 신탁을 받지 않았으며 그것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니다.”
대신관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진실을 얘기했다. 에드윈의 푸른 눈동자가 진위 여부를 가늠하듯 날이 섰다.
“쳇, 좋아. 그럼 록스버그와 로이슈덴의 결혼식이 있던 날 새벽에 보인 푸른빛은 뭐지? 그것마저 부인하진 않겠지?”
에드윈의 물음에 대신관의 얼굴이 파리하게 굳어졌다.
황제가 알고 있다. 선대 대신관과 로이슈덴 공작가와 맺은 맹약을.
“…….”
대신관이 입을 꾹 다물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에드윈의 눈빛이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씨어, 혀도 잘라야겠어. 여기 계시는 고매하신 대신관께서는 금언 맹세를 깰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하니.”
히죽, 비릿하게 웃던 에드윈이 대신관의 머리채를 붙잡았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신관의 눈에 검을 꽂아 넣었다.
살덩이가 깊숙이 찔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피 냄새가 확 하고 풍겼다.
“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대신관의 무릎이 꺾이며 벌벌 떨리는 손으로 황제를 밀어냈다. 짙은 피 냄새와 함께 대신관이 넘어지지 않기 위해 침대를 꽉 붙잡았다.
“으윽.”
지독한 고통에 대신관의 입술 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바들바들 떨리는 대신관의 손이 에드윈이 찌른 눈을 더듬었다. 뜨겁고 질척한 피가 끈적끈적하게 손에 달라붙었다.
“하아, 하아…….”
대신관은 고통을 삼키려는 듯 연신 입술을 짓씹는 듯했지만 여의치 않아 보였다. 난생처음 겪는 고통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때, 툭 소리와 함께 단검이 빠져 나가더니 바닥에 피로 뒤엉킨 눈동자가 굴러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뭔가 발에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닥에 떨어진 눈동자를 에드윈이 발로 뭉개 버린 것이다.
순식간에 한쪽 눈을 잃은 대신관이 고통에 몸을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며 눈을 가린 손에서부터 턱까지 이어지는 붉은 피가 씨어가 들고 서 있는 등잔을 통해 고스란히 내비췄다.
“대신관,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내 편에 설지, 아니면 로이슈덴 공작 편에 설지.”
“저는 아드리안 제국을 위해…… 컥!”
에드윈이 대신관의 멱살을 잡고는 숨통을 조였다. 계속해서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몰골이 엉망이었다.
“이러니 나이 든 자들은 미련하다고 하는 게지. 조금 전에 이런 꼴을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는걸 보면.”
“어억―.”
에드윈이 포대자루를 던지듯 대신관을 거칠게 바닥으로 밀고는 몸을 바로 했다. 그리곤 지금까지 잔혹한 행위 따위는 한 적 없는 듯 자애로운 표정을 하곤 대신관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기회를 주지. 나는 관대한 황제니까. 내가 올 때까지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네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 뭔지.”
에드윈이 지하실을 나갔다. 방 안에 씨어와 대신관만 남게 되자, 씨어는 무릎을 굽혀 바닥에 넘어져 있는 대신관을 일으켜 침대에 눕혔다.
“다, 당신은…….”
“내가 누군지 알고 있을 텐데요? 당신은 아드리안 제국에 종속된 자지만, 저는 존더부르크 황실에 존속된 자라는 걸 말입니다.”
대신관은 입을 다물었다.
“현명하게 행동하세요, 대신관님. 목숨을 잃을 만큼 대단한 신념인지, 아닌지 말입니다.”
씨어의 비웃음에 대신관은 차분한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지독한 고통이 몸을 잠식했지만 대신관의 의식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씨어.”
“폐하께서 실망하시겠군요. 로이슈덴 공작을 선택한 것에 대해.”
“제 선택은 언제나 아드리안 제국입니다. 그리고 폐하께 실망한 사람은 저이고요.”
그 말을 끝으로 대신관은 눈을 감았다.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씨어는 그런 대신관을 지하 감옥에 남겨 두고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오르며 씨어는 쓰게 웃었다. 대신관의 협력을 얻을 수는 없게 되었으니 200년 전처럼 타에라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씨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 또다시 과거의 어느 날, 타에라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때는 금환일식입니다.」
“그래, 곧 금환일식이란 걸 잊고 있었군. 운명은 참으로 기이하단 말이야.”
씨어의 입가가 비릿하게 비틀렸다. 눈빛 역시 광기에 젖은 듯 번뜩였다. 이번에도 똑같은 덫에 그들을 밀어 넣을 생각을 하자, 불안하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운명은 항상 어그러진 채 돌고 돌아 시작점에 서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 운명을 비틀면 그만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