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안개를 뚫고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을 보곤 사울을 비롯한 게르피온의 기사단은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췄다.
“대장?”
“로엔 님?”
다행히 먼저 정신을 차린 라이칸과 세이지가 서둘러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뛰어왔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주위를 살피는 그들의 얼굴엔 안도가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검술 능력을 지닌 기사였지만 두 명이서 기백 명을 상대하기엔 무리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검과 옷은 온통 붉은 피로 얼룩이 져 있었다.
“버티느라 고생 많았다, 세이지. 그리고 라이칸.”
“다행이야. 늦지 않게 와서.”
세이지의 말에 진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서둘러 로엔과 함께 말에서 내렸다.
“라이칸, 내 검을 줘.”
로엔의 요구에 라이칸이 지금껏 등에 매고 있던 검을 로엔에게 건넸다.
“뭐야? 그 검이 로엔 님 것이었어? 난 등에 매고 검을 빼지 않아서 왜 저러나 했거든.”
세이지는 검을 받아 쥔 로엔을 보며 이제야 납득한 듯했다.
“그런데 괜찮겠어? 이건 검술 대련이 아니라 살인인데?”
현실을 일깨우듯 직설적인 표현에 로엔이 세이지 쪽으로 고갤 돌렸다.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세이지 님. 암살자에게 오랫동안 당하다 보니 제 안에 잔혹한 맹수가 살게 됐거든요.”
검을 든 로엔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햇살 아래 빛나는 그 미소는 싸움 직전이란 사실을 잊게 할 만큼 황홀했다.
“뭐야, 다시 보니까 신화 속에 등장한다는 전쟁의 여신 같잖아.”
로엔을 바라보는 세이지의 눈동자엔 어느새 진을 볼 때와 비슷한 경외감이 떠올라 있었다.
“세이지 님의 경험과 실력엔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발목을 잡진 않을 테니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그 말과 함께 로엔의 표정이 바뀌었다. 입가에 어렸던 미소는 사리지고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검을 든 로엔의 모습은 더는 아름답고 약한 레이디가 아니었다. 강한 자신감과 실력에서 나오는 강한 아우라가 그녀를 감쌌다.
이내 정신을 차린 게르피온의 기사들이 검을 다시 쥐는 게 보였다. 특히 진을 바라보는 사울의 표정이 살기로 가득했다.
“진 로이슈덴, 여기서 다시 보는군.”
진은 대답 대신 사울에게 시선을 준 뒤, 다시 로엔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의 안중엔 사울 따윈 없는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무시당했다는 걸 깨들은 사울이 분노로 떠는 게 보였다.
“사울, 네가 상대할 사람은 우리 대장이 아니라 나라고. 아직도 주제 파악을 못한 모양이네. 멍청하게.”
세이지가 사울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곤 싸울 상대가 저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진을 쏘아보던 사울의 시선이 세이지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의 목에 난 상처에도.
“이번에야말로 죽고 싶은 모양이군.”
“그거야 싸워 봐야 알지. 사실 내가 그때 죽고 싶어서 네 검을 안 피한 거거든.”
히죽, 세이지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떠올랐다. 명백히 도발하는 웃음이었다. 사울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는 게 보였다.
챙, 소리와 함께 사울이 먼저 세이지를 공격했다. 그것이 신호탄이 되어 잠시 멈췄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로엔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 진과 눈이 마주쳤다. 걱정 말라는 의미로 진에게 고갤 끄덕여 보이곤, 눈앞의 적을 향해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섞인 죽음의 냄새가 바로 발아래 있었다. 자칫 한 발짝만 발을 헛디뎌도 사신이 든 칼날에 목이 날아갈 터였다.
챙, 소리와 함께 로엔은 검날을 사이에 두고 맞닿은 적국의 기사를 무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적의 목을 베었다.
붉은 피가 사막의 모래 위에 흩뿌려졌다. 싸움은 지금부터 시작이었다.
* * *
모래 늪을 빠져나오는 로엔 일행에게선 짙은 피 냄새가 났다. 게르피온의 기사단장인 사울을 끝으로 치열했던 싸움은 끝이 났다.
세이지가 사울과 대치하는 사이 진을 비롯해 로엔과 라이칸이 남은 기사단을 상대했다.
그나마 게르피온의 기사들은 5년간의 정복 전쟁을 통해 진이 누군지 이미 알고 있는 듯 잔뜩 겁을 먹은 표정이었다.
로엔을 중심으로 진과 라이칸이 양쪽에 서서 적국의 기사들을 상대했다. 특히 진은 싸우는 동안에도 로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였다.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처음엔 불안과 걱정으로 가득했던 은청색의 눈동자가 시간이 갈수록 놀라움과 찬탄으로 바뀌는 모습이 볼만 했던 것이다.
싸움이 거의 끝나 갈 때가 되자, 진은 더 이상 로엔을 걱정하지 않았다. 로엔의 검술 실력이 세이지나 라우렐 못지않게 출중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터였다.
쨍,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사막에 뿌려졌다.
“헉!”
거친 숨소리와 함께 사울의 무릎이 모래 위로 처박힌 순간, 팽팽하게 날 선 살기 역시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끝이군.”
진이 붉은 피로 얼룩진 검을 흔들어 툭툭 털어 내곤 로엔에게 다가왔다.
“괜찮나?”
“멀쩡해요. 당신은요?”
“난 너 때문에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어.”
진의 말에 로엔이 미간을 접었다. 분명 조금 전 싸움으로 그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제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는 걸 알았을 텐데도, 심장이 터질 뻔했다는 말에 기분이 상했다.
“내 실력이 그렇게 형편없었나요? 나는 쓸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의도와는 달리 말과 눈빛이 삐딱하게 나갔다. 그 모습에 진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고슴도치가 한껏 가시를 세우는 것 같아 너무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형편없다니. 내가 본 기사들 중에서 가장 섹시해서 심장이 터지는 줄 알았는데. 미치는 줄 알았다고. 너한테 키스하고 싶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로엔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뾰족하게 날이 서 있던 분위기 대신 나른한 열기가 어렸다.
“누구는 아파 죽겠는데, 또 연애질이네. 진짜 이젠 놀랍지도 않다니까.”
세이지가 얼굴을 감싸고 있던 천을 찢어 다리와 팔에 휘적휘적 감았다. 사울과의 싸움으로 다친 듯 보였다.
“세이지 님, 잠깐 기다려요. 치료해 줄게요.”
“괜찮아. 이 정도야 며칠 지나면 나을 텐데 뭘.”
세이지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휘저었지만, 로엔은 그럼 진통제라도 먹으라며 약병을 건넸다. 그리곤 라이칸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돌아섰다.
로엔의 의도를 알아차린 라이칸이 입을 열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로엔 님.”
“수고했어.”
“그럼 이제 우린 뭘 해야 해?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는 찾았을 것 아냐.”
세이지가 당연하다는 듯 말하며 로엔과 진을 번갈아 보았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의뢰했던 물건을 찾았으니, 의뢰자를 찾아 그것을 전하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칼라일로 가야지. 약속했던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에드윈을 언급하진 않았지만 세 사람 모두 곧 황제와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네 사람은 말에 올랐다. 몸에서 온통 피 냄새가 났지만 당장 씻을 만한 곳도 없었다. 최대한 빨리 록센으로 가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다.
협곡을 지나 헤르파 사막을 나오자, 마차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윌마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곤 어딘가로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근처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용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검과 창으로 무장한 자들에게선 날 선 긴장감이 느껴졌다.
“하아, 끝난 줄 알았는데 아직 남아 있었나?”
로엔은 작게 한숨을 내쉰 다음, 지친 몸을 바로 세웠다. 모래 늪에서의 전투는 피로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용병들을 상대로 싸움을 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로엔이 검을 손에 쥐며 진 쪽으로 고갤 돌렸다.
“뭐야, 왜 여기에 있어? 우린 모래 늪에서 죽다 살아났는데.”
불퉁한 세이지의 목소리에 용병들이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약속이라도 한 듯 무기를 내려놓으며 그들 앞에 부복했다.
‘어, 뭐지?’라고 생각한 순간, 진을 태운 켈피가 앞으로 나왔다.
“저희가 너무 늦었습니다. 최대한 서두르긴 했는데…….”
“괜찮다, 바실리. 라우렐에게선 연락이 왔나?”
“라우렐 님이 보내신 전갈에 의하면 황제가 대신관을 서쪽 탑으로 끌고 갔다고 합니다.”
“서쪽 탑?”
“최근에 알게 된 정보에 의하면 서쪽 탑에 황제만 드나드는 장소가 있는 모양입니다. 철저히 비밀에 붙여져 있던 내용이라, 라우렐 님도 어렵게 알아내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실리의 보고에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씨어라는 자가 서쪽 탑에 있었던 모양이군.”
“아주 가까이에 있었네요.”
로엔은 200년 동안 황제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을 씨어의 존재를 떠올리며 서늘하게 웃었다.
“대장, 바로 칼라일로 갈 거지?”
세이지의 물음에 진이 대답하는 대신 로엔을 응시했다. 어떻게 할지 로엔의 의견에 따르겠다는 의미 같았다.
“약속한 한 달의 기한이 되려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하지만 당장은 칼라일로 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래, 똥줄 좀 타게 내버려 두자고. 우린 황제 때문에 죽을 뻔했으니, 그 정도 심술은 부려도 되지 않겠어?”
세이지가 쌤통이라는 듯 말했다.
“그래도 되겠어?”
진의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대신관까지 잡아들여 놓았다면 덫을 놓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뜻일 테죠. 그리고 조금 늦는다고 더 최악의 상황이 되는 것도 아니니, 최대한 느긋하게 돌아갈 생각이에요.”
로엔은 에드윈을 초조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첩자인 안톤을 잃었다고 해도 에드윈과 씨어라면 독액의 강 너머가 노아스란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그곳에 들어간 두 사람이 그들이 원하는 열쇠 역시 손에 넣었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고.
그러니 세이지 말처럼 조금은 심술을 부려도 좋을 것 같았다. 누구나 초조하고 불안하다 보면 실수하기 마련일 테니까.
로엔이 원하는 실수는 에드윈과 씨어 사이의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