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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95화 (196/201)

195화

욱신.

순간, 심장이 또다시 바늘에 찔린 듯 아팠다. 잠잠해졌던 두통 역시 깨어질 듯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그 순간 손목에 매달린 타라의 연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분명 누군가가 이걸 내게 준 것 같은데…….

“로엔, 이제 괜찮을 거야. 우리와 함께 있으면 모든 걸 잊게 되거든. 더는 외롭지도 않을 테고, 혈독화로 인해 소중한 이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느낄 필요가 없단다. 모든 것에서 자유로워지는 거지.”

“힘든 건 모두 잊고 싶어요. 모두 다…….”

로엔이 어머니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는 느낌이 너무도 다정해 졸음이 밀려들었다. 자고 싶었다.

‘그래, 부모님과 있고 싶어. 더는 힘들고 살고 싶지 않아. 지쳤어.’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제 잠이 들면 모든 것에서 해방이었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널 지키겠다는 맹세도 잊지 말고.」

“윽!”

순간, 머릿속을 울리는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왈칵 안타까움이 덮쳐 왔다.

로엔은 눈살을 찌푸리며 심장을 부여잡고는 몸을 일으켰다. 로엔의 손목에 매달린 공작새가 불빛에 반짝였다.

“누구……?”

「로엔, 내 심장을 너에게 줄게. 널 위해서라면 내 모든 걸 너에게 줄 수 있다.」

감겼던 눈이 번쩍 떠졌다. 초점 없이 흔들리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서서히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로엔은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와 함께 은매화의 꽃잎이 꽃비처럼 날리던 모습이 한영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망각했던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진 로이슈덴.

나를 제 목숨보다 아끼는 사람.

분명 그와 함께 만년설의 동굴에…….

“진?”

로엔의 입술을 통해 진의 이름이 새어 나오자, 평온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독한 두통과 함께 몸을 옥죄는 느낌이 순식간에 밀려들었다.

“윽, 아파.”

로엔이 눈을 질끈 감고는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 순간 몸을 옭아매고 있는 글레이프니르의 서늘한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로엔, 로엔 눈을 떠. 네가 지금 보는 건 환영이다. 그러니 눈을 뜨고 날 봐. 날 보고 너를 옥죄는 환영에서 벗어나. 제발, 눈을 뜨고 내게 와. 날 떠나지 마.”

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로엔은 이를 악물었다.

‘환영이라고? 지금껏 내가 본 부모님이 가짜였다는 건가?’

로엔이 흐릿한 머리로 생각하려 애썼다. 그리고 진을 따라 만년설의 동굴을 들어온 순간 시작된 글레이프니르의 감각을 떠올렸다.

아―. 그제야 깨달았다.

동굴 안에 발을 들인 순간, 로엔은 라딘이 걸어 놓았던 주술에 걸려든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몸을 속박하는 사슬인 글레이프니르였던 것이고.

로엔이 진의 목소리를 쫓아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 은청색의 눈동자가 있었다.

「결계를 부수는 열쇠는 어둠 속에서 청명하게 빛나는 파수꾼의 눈동자.」

“이건 가짜야. 사막의 세이렌이 보여 주는 환영.”

로엔은 슬픈 얼굴로 고갤 들어 주위를 살폈다. 더는 부모님의 모습은 없었다. 안타까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진 로이슈덴과 높은 천장에서 자라난 빙설로 가득한 동굴이 있을 뿐이었다.

쨍, 소리와 함께 몸을 옭아매던 글레이프니르가 산산이 부서졌다.

속박된 힘이 사라지자 로엔은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눈물이 흘러넘쳤다. 라딘이 걸어 놓은 주술로 인해 무너져 내린 감정의 둑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로엔, 다행이다. 내게 돌아와서.”

진이 넘어지기 직전 손을 뻗어 로엔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숨결이 목덜미에 닿자, 로엔은 현실로 돌아왔음을 실감하며 천천히 안도했다.

“부모님을 뵀어요. 10년 전 사고가 일어나기 전, 저를 바라보며 웃던 그 모습 그대로셨어요.”

울컥,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와 아릿했다. 더는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얘길 더 했다간 참지 못하고 오열할 것 같았다.

아이처럼 통제할 수 없는 절망과 슬픔을 그에게 내보일 것만 같았다. 마음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던 나약하고 어린 제 모습을 드러낼 것 같아 겁이 났다.

“괜찮아, 로엔. 내가 곁에 있겠다. 그러니 안심해.”

진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또다시 위로하듯 뺨에 입을 맞추는 진의 다정함에 로엔은 울컥 목이 메었다. 로엔은 진의 품 안에 얼굴을 묻었다.

‘주술이 풀린 이유가 진이었어. 모든 것을 망각하고 싶은 순간에도 놓고 싶지 않은 게 바로…….’

진 로이슈덴이었다.

로엔은 눈을 감고는 그가 주는 안온함에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러자 지독히도 그녀를 뒤흔들었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한참이나 그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던 로엔의 머릿속에 그들이 이곳에 온 이유가 생각에 미쳤다.

“맞다. 열쇠는 찾았나요?”

“빨리도 묻는군.”

진이 웃으며 로엔 앞에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 위에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크립텍스가 놓여 있었다.

“찾았군요. 크립텍스를 열 암호는요?”

“그건 에드윈과 씨어라는 자가 알지 않겠어?”

“그렇겠군요. 그럼 이제 갈까요? 라이칸과 세이지 님이 기다릴 거예요.”

“이제 가야지. 이걸 받은 에드윈이 어떤 얼굴을 할지 꼭 보고 싶어졌거든.”

* * *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운 라이칸과 세이지는 독액의 강을 보곤 망연자실했다.

게르피온의 기사단을 피해 로엔과 진이 있을 곳까지 오긴 했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었다.

독액의 강은 이름처럼 죽음이 흐르는 듯 음산했다. 비단 강을 채우고 흐르는 물이 검고 탁한 빛깔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독액의 강 뒤로 뿌연 안개가 켜켜이 쌓여 있어 뭔가 두려움을 부가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로엔과 진이 있을 것이다.

“대장이랑 로엔 님, 살아 있겠지?”

세이지가 불안을 이기지 못하고 라이칸을 돌아보았다.

“무사할 거야. 독액은 로엔 님에겐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으니까.”

그리고 진 로이슈덴은 검은 드래건의 혈족이었다. 그 힘이 각성한 걸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그 역시 독액의 강을 맨몸으로 지났다고 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렇긴 한데. 우리가 건너면 죽겠지?”

당연한 소리였다. 라이칸은 독액의 강에서 고갤 돌려 앞을 주시했다. 멀리서 게르피온의 기사단이 말을 달려오는 게 보였다.

이젠 물러날 곳도 없으니, 싸워야 할 때였다.

“쳇, 전쟁이 끝나면 다신 사람 죽일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세이지가 마땅찮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특히 사울을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다행인지도 몰랐다. 전쟁터에서 당한 굴욕을 갚을 기회가 온 것인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는 전쟁터에서 구르던 몸이라 상관없는데, 그쪽은 괜찮겠어? 들어 보니 귀족이라며?”

“귀족이면, 뭐? 내 걱정은 말고 네 앞가림이나 잘해. 걸리적거리지나 말고.”

라이칸의 반응에 세이지가 처음으로 흥미롭다는 얼굴을 했다. 여행 내내 냉소와 침묵으로 일관하던 라이칸이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뭐야. 여행하는 동안 말이 없길래 누가 혀를 잘라 말도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잘하잖아.”

세이지의 놀림에 라이칸의 눈썹이 가파르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워, 워. 진정하라고. 이제 등을 맞대고 싸울 동료데, 우리끼리 으르렁거리면 안 되지.”

라이칸이 다시 냉정을 되찾은 얼굴로 게르피온의 기사단 쪽으로 고갤 돌렸다. 세이지 역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우곤 기사단 맨 앞줄에 서서 말을 달려오는 사울을 바라보았다.

성큼성큼 다가서는 기사단의 기세에도 두 사람의 표정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사울은 내 거니까, 건들지 마.”

라이칸의 시선이 세이지의 목에 있는 상처에 가 닿았다. 이내 떨어졌지만 세이지 역시 라이칸의 시선을 느낀 듯했다.

“마음대로 해. 대신, 이번엔 이겨.”

라이칸의 차가운 한마디에 세이지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너 마음에 들어. 나중에 칼라일에 가면 라우렐과 한잔하자고. 그 친구도 귀족치고는 괜찮은 놈이거든.”

그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허리에서 차고 있던 검을 빼 들었다. 지금부터는 싸움을 시작할 때였다.

* * *

켈피에 오른 두 사람은 노아스의 입구인 독액의 강으로 향했다.

그들이 노아스에 발을 들여놓은 직후, 노아스는 다시 결계가 발동해 안개에 휩싸였다.

이 땅의 주인인 드래건의 혈족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독액의 강 뒤편에 신성한 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를 터였다.

두 사람을 태운 켈피가 독액의 강에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소음이 들려왔다. 5년 동안 전쟁터에서 무수히 맡았던 피와 죽음의 냄새는 덤이었다.

빌어먹게도 게르피온의 기사단이 모래 늪으로 밀고 들어온 모양이었다.

“안톤의 말이 맞았네요.”

로엔 역시도 전쟁의 냄새를 맡은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안개가 겹겹이 껴 독액의 강 저편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 듯했다.

“서둘러야겠어. 두 명이서 게르피온의 기사단을 상대하는 건 힘에 부칠 테니까.”

진의 말에 로엔의 표정이 변했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엔 긴장감이 흘렀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는 것도…….”

“나보고 겁쟁이처럼 숨으라고요?”

“그런 게 아니라…….”

“걱정 말아요. 검술이라면 누구 못지않으니까. 꽉 잡기나 해요.”

망설이는 진 대신 로엔이 말에 박차를 가했다. 그 순간 켈피가 로엔의 의도를 읽은 듯 달리는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말을 탄 채 독액의 강을 지날 생각인 것이다.

진 역시도 로엔과 함께 상체를 숙였다. 그리곤 한 팔로 로엔의 허릴 단단히 감고는 다른 한 손으로 고삐를 세게 당겼다.

순식간에 켈피가 짙은 안개를 뚫고 날아올랐다.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가 싶더니 몸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잠시 후 뿌옇던 시야가 환해졌고, 모래사막 위에서 싸움을 하는 기사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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