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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94화 (195/201)

194화

“너도 봤지? 우리 대장 등에 검은 드래건이 있는 것. 사실 말은 들었지만 나도 본 건 처음이라, 오줌을 지릴 뻔했거든. 그리고 대장이 뿜어내는 힘에 안톤이 타 죽었을 땐, 내가 알던 대장이 아닌 것 같아 무서웠었어. 처음으로 두렵단 생각이 들었고.”

세이지가 그때를 회상하듯 몸을 떨었다. 라이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몸속에 봉인되어 있던 드래건의 힘이 각성한 순간을 보게 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도 떨림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 벅차. 여기가 미친 듯이 뛰고 있거든.”

세이지가 제 심장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벅찬 감정이 그의 갈색 눈동자에 일렁이는 게 보였다. 경외감과 존귀한 존재에 대한 선망이 눈동자에 떠올라 있었다.

세이지의 시선이 다시 라이칸에게 향했다.

“네 주인은 걱정 마. 너도 알잖아. 우리 대장이 네 주인에게 홀딱 빠져 있는 것. 아마 네 주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살려 낼 거야. 그러니 우린 여기서 기다리면 돼. 라딘의 서라는 걸 찾을 그 열쇠를 갖고 돌아올 때까지.”

휘릭―.

그때 건조한 공기를 뚫고 날카로운 뭔가가 날아와 나무에 박혔다. 화살이었다.

순간, 두 사람이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빌어먹을, 게르피온의 기사들이었다.

첩자 노릇을 하던 안톤이 게르피온과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에게 전서구를 보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협곡에서 진을 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어야 할 사울이 기사단을 이끌고 모래 늪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한순간 두 사람의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했다. 멀리서 모래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기사단의 숫자를 보며 싸움의 승패를 가늠했다.

“제길, 가야겠는데.”

세이지가 기백은 넘을 것 같은 기사단을 보며 욕설을 짓씹었다. 진과 로엔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불가능할 것 같았다. 시간을 벌어야 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 말에 올랐다. 그리곤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진과 로엔이 갔던 방향을 향해 빠르게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맹수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린 독액의 강을 향해.

* * *

만년설의 동굴에 도착한 로엔은 동굴을 가득 채운 서늘한 기운에 숨을 삼켰다. 라딘이 이곳에 강력한 주술을 걸어 놓았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가 널 지키겠다는 맹세도 잊지 말고.”

로엔이 고갤 끄덕이자, 진이 그녀를 제 뒤에 보호하듯 숨겼다. 그리곤 동굴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 동굴의 입구에 설치되어 있던 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걱정 마. 내 땅에서 내 앞을 가로막는 건 아무도 없으니까.”

진이 검을 들어 입구를 향해 휘둘렀다. 순간 쨍 소리와 함께 결계가 끊어지며 투명한 얼음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너무도 손쉬워, 이게 결계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제 들어갈까?”

진이 검을 다시 검집에 밀어 넣고는 로엔을 향해 돌아섰다.

로엔은 새삼 이곳이 검은 드래건의 땅인 노아스란 사실을 상기했다. 그의 뒤를 따라 만년설의 동굴 안으로 발을 디뎠다.

“윽.”

그 순간 찌를 듯한 두통에 휘청거리며, 로엔은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고통을 밀어내며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라딘이 걸어 놓은 진짜 주술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이건, 시험이었다. 무엇을 위한 시험인지는 모르지만, 무조건 통과해야 할 관문이기도 했다.

“대체 왜?”

로엔은 고갤 가로저으며 눈을 부릅뜨려 애썼다. 당장 손을 뻗어 앞에 있는 진의 등을 붙잡으려 했지만 제 의지와는 다르게 몸이 사슬에 얽힌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사슬이라고?’

순간 로엔이 고갤 숙여 제 몸을 살폈다.

“이건 글레이프니르야.”

뿌옇게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로엔은 아버지가 남긴 비밀 노트에서 보았던 대목을 떠올렸다.

『고양이의 발소리와 여자의 수염, 산의 뿌리, 곰의 힘줄, 물고기의 숨 그리고 새의 침을 모아 만든 글레이프니르(펜리스를 속박한 끈)를 끊고 진실을 가린 거대한 결계를 깨라.』

제 몸을 속박하는 사슬을 끊고 어딘가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진에게 가야 했다.

“하아, 진?”

꽉 다물린 입술 새로 진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게다가 몸을 뒤틀어 글레이프니르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불가능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몸을 옥죄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하아, 어쩌지? 벗어나야 하는데…….’

그때, 또다시 지끈거리며 머리가 아파 왔다. 심장이 무섭게 뛰며 온몸의 피가 뜨겁게 날뛰었다.

진을 만나고 난 뒤 잠잠해진 혈독화의 독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진동을 했다.

“윽, 아파…….”

글레이프니르에 속박되지 않은 손을 뻗어 혈독화가 새겨진 심장 부근을 꾹 눌렀다. 살갗이 타는 것처럼 지독히도 아팠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혼미해졌다.

대체 뭐지? 이건…….

“로엔, 마침내 왔구나. 내 아이. 내 사랑스러운 딸.”

로엔은 고통스런 신음을 삼키며 소리가 들리는 쪽을 고갤 돌렸다. 그러자 흐려진 시야 사이로 너무도 그리운 얼굴이 보였다.

온화한 미소를 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부모님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10년 전 사고의 순간, 죽음의 사신 앞에 서 있던 모습이 제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제 핏속에 흐르는 맹독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던 끔찍했던 모습과는 달리, 로엔 앞에 서 있는 부모님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피도 상처도 없었다. 다행이었다.

“로엔 이리 오렴. 그동안 힘들었다는 걸 안다, 내 딸아.”

“그래, 로엔. 이제 우리한테 왔으니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 거야. 이제 이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으면 된단다.”

로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홀로 남겨진 10년이란 시간 동안 억눌러 온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어머니,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너무도 그리웠어요.”

그리고 가슴에 사무치듯 힘들었다. 남들 앞에서 내색할 수 없었지만 홀로 남겨진 그 무수한 밤 동안 심장이 찢기는 아픔에 숨도 쉴 수가 없었다.

“알아, 로엔. 그러니 이리 오렴. 여기서는 더는 고통스럽지 않을 거야.”

어머니의 말에 로엔이 발을 떼어 놓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그녀를 속박하고 있던 글레이프니르가 사라지며 움직이는 게 수월해졌다.

한달음에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그녀의 품에 안겼다.

따뜻한 온기에 얼굴을 묻자, 처음으로 안식이 밀려들었다.

“어머니.”

울음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려 했다. 뜨겁게 솟구치는 감정에 입술을 악물었지만 감정의 동요는 흘러넘치는 물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저주를,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지 못했어요. 죄송해요.”

결국 흘러나온 첫 마디는 사과였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이었다.

“로엔, 내 사랑스러운 아이. 걱정할 것 없다. 이제 저주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단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

“말 그대로다. 이곳에선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도, 가문에 대한 의무도 질 필요가 없거든. 그러니 더는 배신을 당할 일도 없을 테고, 귀족들에게 멸시의 시선을 받지도 않을 거란다. 더욱이 암살 위협에 시달리며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지.”

“정말 그래도 되나요?”

로엔이 부모님을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더는 록스버그 저주 따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 처음으로 홀가분해진 느낌이었다.

“당연하지. 우리가 널 지켜 줄 테니, 넌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다행이에요. 그럼 진에게도 말해야겠어요.”

“진? 그게 누군데?”

“제가 결혼을 했거든요. 소개해 드릴게요. 굉장히 좋은 사람이에요.”

로엔의 목소리가 기쁨으로 떨렸다. 하지만 부모님의 표정은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 환하게 웃던 그들의 얼굴에 그늘이 져 있었다.

“결혼을 했다고? 로엔, 다시 잘 생각해 보렴. 넌 결혼하지 않았단다. 너에게 중요한 사람은 더더욱 없고. 우린 항상 함께였잖니.”

로엔은 멍한 얼굴로 부모님을 올려다보았다. 부모님의 얼굴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부모님의 말처럼 제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결혼한 적이 없다고?’

로엔이 고갤 갸웃거리며 뭔가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결혼 같은 건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다시 잘 생각해 보렴, 로엔? 너는 결혼한 적이 없어. 넌 언제나 우리의 사랑스러운 딸일 뿐이란다.”

“네,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어머니, 아버지의 딸이에요.”

로엔이 아이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갤 끄덕였다.

“그래, 로엔. 너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단다. 이제 더는 기억하지 않아도 되고.”

“맞아요. 저는 그를 만난 적이 없어요.”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빛을 잃은 눈동자는 인형의 그것처럼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뭐지, 이 기분은? 뭔가 중요한 걸 잊은 것 같은데……. 그게 뭐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부모님의 따뜻한 품에서 편히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어머니, 이상해요. 자꾸만 누가 날 기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로엔의 말에 어머니가 다정하게 웃으며 로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어렸을 적부터 로엔을 달래기 위해 하던 습관이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손길에 로엔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로엔, 잊도록 해. 여기엔 그가 없거든. 올 수도 없고.”

“네, 그럴게요. 그가 없어도 괜찮아요.”

“그래, 잘 생각했어. 우린 예전처럼 함께 사는 거야. 공작가의 저주나 의무 따위 신경 쓰지 말고 우리와 함께 지내면 돼. 편해지는 거지.”

로엔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졌다. 감정이라곤 없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머니 품에 안겨 얌전히 몸을 기댔다.

“예전처럼 부모님이랑 사는 거니까. 그가 없어도, 상관없어요. 이제 편히 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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