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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93화 (194/201)

193화

“왜. 내 말이 틀렸나? 아버지나 선대 황제들은 어떨지 몰라도, 난 너를 완벽하게 신뢰하지 않는다. 네 능력을 증명하지 않는 한 넌 라딘의 껍데기일 뿐이지. 대체품, 아니 그것도 과분한 것인지도 모르겠군. 따지고 보면 위대한 예언자라고 했던 라딘 역시도 잘못된 예언을 한 자이니까.”

에드윈의 가차 없는 비난에 씨어는 깨어진 유리창을 내려다보았다.

산산조각 난 유리처럼 진 로이슈덴의 각성으로 인해 에드윈과 제 사이에 존재하던 신뢰가 부서져 내린 것이다.

“윽!”

에드윈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씨어의 멱살을 붙잡았다. 황제의 푸른 눈동자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자존심을 뭉그러뜨렸다.

“기억해라, 씨어. 라딘의 서를 찾아 없애지 않는다면 네 가문의 명예는 없다. 또한 네 목숨 또한 없을 테고.”

에드윈의 경고에 씨어가 억눌린 신음을 삼켰다. 조여드는 아귀힘에 숨이 막혀 왔다.

“곧 노아스가 1,000년의 주술을 풀고 모습을 드러내겠군.”

씹어 삼키듯 뱉어 내는 목소리가 음산했다. 씨어가 천천히 눈을 들어 에드윈을 올려다보았다.

“죽여야겠다. 라딘의 서를 없애는 건 물론, 진 로이슈덴도 죽여야겠어. 그러니 방법을 생각해 내. 네가 가진 힘을 모두 이용해서라도, 아니 그의 약점을 찾아내서라도 죽여야 할 것이다.”

에드윈의 눈빛이 광기를 번뜩였다. 그리고 씨어는 에드윈이 말하는 약점이란 게 뭔지 깨달았다.

200년 전에는 파수꾼의 반려였으며, 지금은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 된 로엔 록스버그.

또다시 록스버그 공작가의 여아를 덫 삼아 진 로이슈덴을 함정으로 몰아넣어야 했다. 이번엔 모든 운명의 끈을 끊어 놓아야 했다.

“금기된 주술. 그걸 사용해야겠다.”

에드윈의 한마디에 씨어의 고민은 끝이 났다.

“대가가 필요한 일입니다. 하찮은 저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고요. 고귀한 혈통을 지닌 자의 희생이 필요한 일인데도, 가능하시겠습니까?”

에드윈이 입가를 비틀며 씨어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아주었다.

그의 힘에 두 다리로 버티고 서 있던 씨어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다행히 벽이 그의 몸을 지탱해 줘 넘어지는 추태는 피할 수 있었다.

“그 희생이 뭐든 상관없다. 내 눈앞에서 진 로이슈덴이 모든 걸 잃고 죽어 가는 걸 볼 수 있다면.”

지독한 열등감은 이성을 마비시키는 모양이다. 음산한 눈빛과 질투와 탐욕으로 점철된 얼굴은 고귀한 혈족이라 추앙받는 황제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역죄를 짓고 황좌를 탈취하려는 자의 탐욕에 절은 얼굴과 흡사했다.

씨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가 반역자의 눈빛을 하고 있다니.

어쩌면 200년 전 타에라와 그가 비틀어 버린 운명이 만들어 낸 결과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후회는 하지 않는다. 라딘의 예언이 잘못되었다는 치욕을 인정할 수는 없었다. 라딘의 제자인 타에라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위대한 예언가 라딘의 유일한 혈족인 씨어의 마지막 남은 긍지였으므로.

* * *

사박, 사박.

눈으로 뒤덮인 설원을 밟자 두 사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새하얀 눈이 무너져 내리며 깊은 발자국을 만들어 냈다.

봄 햇살로 가득하던 노아스에 만년설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로엔은 설원의 언덕에 서서 끝없이 펼쳐진 노아스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에 로엔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게르피온은 겨울이 존재하는 곳이었고, 북쪽 마을에서도 첫눈이 내리는 걸 보았었다.

그리고 그들이 축원하는 불의 신의 존재는 따지고 보면 노아스 땅의 주인인 검은 드래건이었다. 그러니 북쪽에 위치한 이곳에 만년설이 존재한다는 게 그리 이상한 건 아닐 터였다.

“진, 동굴까진 아직 멀었나요?”

앞서 걷던 진이 걸음을 멈추더니 되돌아 로엔에게 왔다. 그리곤 두 팔로 그녀를 안아 들었다.

“힘든 게 아니라, 그냥 얼마나 남았는지 궁금해서 물은 것뿐인데.”

로엔이 작게 속삭이자 진이 로엔을 고쳐 안았다. 그리곤 차가운 바람에 붉게 변한 그녀의 코끝에 입을 맞췄다.

“나도 내가 하고 싶어서 그래. 이젠 널 안고 다니는 게 더 익숙할 정도니까.”

진의 다정한 눈빛에 로엔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이젠 그의 품에 안겨 이동하는 게 습관이 될 것 같았다.

“너무 어리광을 받아 주는 것 아닌가요? 이러다 평생 안아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렇다면 오히려 나야 좋지. 사실 네가 남의 눈을 신경 써서 참고 있는 거지, 나는 항상 너를 내 품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거든. 그게 내 진심이다.”

진의 입술이 풍성한 머리카락 속에 숨겨져 있는 귓불을 삼켰다. 뜨겁고 습윤한 숨결이 예민한 귓불을 스치자, 등줄기에 나른한 전율이 흘렀다.

노아스에 도착한 이후 정신을 잃은 그와 몸을 섞었다. 그리고 발할라의 침실에 옮겨져 잠을 잤고, 눈을 뜨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진은 다시 몸을 얽어 왔다.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던 내벽은 그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닫힌 문을 열고 그의 일부를 기껍게 물어 삼켰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농밀한 쾌락이었다.

욕망에 흐드러지며 허리가 야릇하게 비틀렸다. 깊숙한 곳까지 사정없이 밀고 들어오는 그의 일부를 조이며 느른한 탐욕에 흥건히 젖어 들었다.

허리를 추어올리는 몸짓에 로엔은 그의 허리에 다릴 감고 몸을 떨었다. 연신 달뜬 신음이 새어 나왔고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나락 같은 쾌감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으음, 진……. 안 돼요.”

로엔은 고갤 가로저으며 농밀하게 들러붙는 그의 입술을 떼어 내려 애썼다. 지금 여기서 제동을 걸지 않으면 설원에서 성급하게 몸을 겹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아, 로엔. 조금만, 응? 조금만 더…….”

귓불을 핥아 내리던 입술이 여린 목덜미를 훑고 쇄골에 닿았다. 그리곤 갈증이 나는 듯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움푹 들어간 곳에 혀를 담고 진득하게 빨아 당겼다.

“하읏, 안……. 으음, 안 돼요. 진…….”

발끝까지 저릿한 감각이 흘러넘치자, 로엔은 손을 들어 그를 밀어냈다.

어쩔 수 없이 고갤 든 진이 나른한 눈빛으로 로엔을 내려다보았다. 채 갈무리하지 못한 욕망이 은청색의 눈동자에 여실이 드러나 있었다.

“너만 보면 미칠 것 같아. 통제가 되지 않아. 시도 때도 없이 널 삼키고 싶어서.”

노골적인 속삭임에 로엔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분명 부끄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자꾸만 간질거리며 발이 오므라들었다.

“우린 지금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찾으러 가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요. 그리고 오아시스에서 라이칸과 세이지 님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무엇보다 안톤이 소멸되기 전에 게르피온에 그들이 모래 늪에 있다는 전갈을 보냈다고 했다. 게르피온의 기사단이 그들을 죽일 것이란 경고와 함께.

로엔이 진을 달래며 한껏 달아 오른 열기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니까 그만 밀어내. 네 허락 없인 네게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는 것 알잖아.”

진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로엔이 그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그녀를 보게 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나도 참지 못할 것 같아서 그래요. 설원에서 몸을 겹치면 동상에 걸릴 테고, 그렇게 되면…….”

차마 뒷말은 민망해서 말할 수 없었다. 육체적 쾌락에 빠져 동상을 입는다면 자괴감에 얼굴을 들지도 못할 것 같았다.

“너는 정말…….”

진이 로엔의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는 하체에 몰린 열을 흩트리려 애썼다.

정말 두 사람은 화약고 같았다. 눈만 마주치면 불꽃이 튀고, 자칫 방심했다간 한순간에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나면 각오해야 할 거야. 당분간은 침실에서 절대 내보내지 않을 생각이니까.”

진이 로엔을 다시 한 번 고쳐 안고는 설원을 따라 발을 재게 놀리기 시작했다. 로엔이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고는 그의 품 안으로 안겨 들었다.

그 순간 로엔의 손목이 외투 밖으로 드러나더니, 푸른빛을 띤 타라의 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설원에 반사된 빛이 로엔의 가느다란 손목에서 흔들리는 공작새를 비췄다.

그리고 어느새 희게 탈색된 빛이 공작새를 감싸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두 사람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채 만년설의 동굴로 걸음을 재촉했다.

* * *

라이칸은 말고삐를 쥔 채, 오아시스 너머를 응시했다.

진과 로엔이 독액의 강을 찾아 떠난 지 오늘로 이틀째였다. 다행히 혈독화에 중독 증세를 보이던 세이지는 라이칸이 갖고 있던 공작새의 눈물로 하루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안톤이 로엔을 공격할 당시 모래 바람을 막기 위해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던 두꺼운 천이 중독을 피하게 한 이유 같았다.

“어딜 가려는 거지?”

몸을 일으킨 세이지가 말고삐를 쥐고 서 있는 라이칸을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마냥 이곳에서 기다리는 게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으면 도와야 할 것도 같고.”

라이칸이 허술한 변명을 하며 말의 상태를 살폈다.

“가지 않는 게 좋아. 대장이 떠나기 전에 말했다며. 여기서 기다리라고.”

“그렇긴 한데,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공작님을 몰라도 로엔 님은…….”

“넌 네 주인 못 믿어?”

“뭐?”

세이지의 말에 라이칸이 서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당장에라도 그의 멱살을 쥐고 주먹을 날리고 싶은 눈치였다. 그 정도로 라이칸은 평소보다 예민해져 있었다.

“화내지 마. 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난 우리 대장을 믿어. 전쟁터에 있는 동안 대장한 한 번도 진 적이 없거든. 그리고 약속한 걸 어긴 적도 없고.”

평소 가볍게만 보이던 세이지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진 로이슈덴에게 보이는 신뢰는 생각 이상으로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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