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그는 두껍게 깔린 양탄자를 지나 침실로 들어갔다.
“여긴 하나도 변한 게 없군.”
누구의 기억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기 직전 뒤돌아보았을 때와 똑같은 광경에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그대로인 게 있었다. 변하지 않고 그를 기다리는 것들이.
진은 조심스럽게 침대에 로엔을 내려놓았다. 부드럽고 푹신한 깃털 이불에 몸을 묻으며 로엔은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이 침실을 나오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노파가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
“노아스의 주인께 인사드립니다.”
노파의 목소리가 마른 고목나무를 비틀 듯 거칠었다. 바닥에 놓인 손도 생명이라곤 느껴지지 않을 만큼 버석했고, 입고 있는 검은 로브 역시 다 헤져 있었다.
마치 오랜 시간을 홀로 건조한 사막을 헤매다 이제야 제 길로 들어선 방랑자의 모습과 흡사했다.
“타에라. 위대한 예언자 라딘의 제자이자, 모든 운명을 비튼 자.”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진의 목소리에 노파가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러자 쓰고 있던 후드 사이로 불투명한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죄의 대가로 저주를 내렸을 때 잃어버린 눈이었다.
“봉인되어 있던 검은 드래건의 기억을 갖게 되신 모양이군요.”
“맞아. 그리고 쓸데없는 사실들까지 모두 알게 됐지. 그래서 지금, 내 기분이 아주 더럽거든.”
진이 허릴 숙여 노파의 가느다란 목을 손으로 쥐었다. 목을 옥죄는 힘에 타에라의 입술 새로 나직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명백히 살기를 띤 움직임이었다.
“노아스의 주인이시여, 제발 자비를. 으헉!”
“눈이 아니라 혀를 대가로 요구할 걸 그랬어. 타에라, 200년 동안 잘 지낸 모양이군.”
“약속 때문에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습니다. 후회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면서요.”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게 내 탓처럼 들리는군.”
감히 네까짓 게, 자격도 없는 자가 원망을 마음에 품었냐는 뜻이었다.
“절대 아닙니다. 감히 제가 어떻게……. 그저 흐르는 시간만큼이나 제 욕망이 얼마나 하찮고 모래 먼지처럼 가벼웠던가를 깨달았을 뿐입니다.”
타에라의 회환으로 점철된 목소리에 진이 그녀를 거칠게 뿌리치듯 놓아주었다. 힘없이 바닥에 쓰러진 타에라가 조였던 목을 손으로 감싸며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콜록, 콜록.”
굽어서 뼈가 툭툭 불거진 등이 초라해 보였지만, 진의 눈동자엔 일말의 동정심 따윈 없었다. 건조하고 무감한 눈동자가 타에라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래서 모리에게 그런 것들을 남겼었나? 내가 이곳을 찾을 수 있게 말이다.”
같잖은 잔재주를 부린 타에라를 보며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기억이, 봉인되었던 파수꾼의 기억이 돌아오는 걸 돕고 싶어서, 콜록, 콜록.”
타에라는 또다시 마른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이미 너와 라딘에 대한 기억은 꿈을 통해 보았다. 헤르파 사막에서 라딘이 파수꾼에 대한 새로운 예언을 하던 순간이더군. 그리고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똑똑히 보았지.”
타에라가 주름진 손을 들어 입가를 닦아 냈다. 그리곤 몸을 추스르더니 다시 무릎을 꿇었다.
“이제 200년 동안 유예되었던 죗값을 치를 생각입니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다. 이젠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안식에 들고 싶었다. 그것이 영원한 영혼의 소멸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말하는군. 진심으로 그 혀를 잘라 버렸어야 했어.”
짓씹듯 뱉어 내는 진의 목소리에 타에라의 어깨가 떨렸다. 초연하던 표정 역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한 달 전 칼라일의 축제에서 진 로이슈덴을 보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위압감이었다.
“씨어란 자에 대해 알고 있겠지?”
“네. 라딘 님의 후손입니다.”
“그자가 라딘의 서를 찾고 있다. 너는 그 이유를 알고 있나?”
타에라가 고갤 들었다. 그러자 불투명한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흔들렸다.
“라딘 님께서 하신 세 번째 예언 때문입니다.”
“세 번째 예언?”
“네. 그 내용을 찾아 영원히 없애려는 걸 겁니다. 제가 알고 있는 라딘 님의 세 번째 예언은 존더부르크가의 몰락에 관한 내용입니다.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노아스의 주인과 그 반려로 인해 존더부르크가는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엔 예언을 뒤집고 황좌에 오른 자의 탐욕과 끝없는 집착이 먹잇감이 될 터였다.
“존더부르크가의 몰락이라. 왜 에드윈이 라딘의 서를 찾고 싶어 안달이 났는지 이제야 알겠군.”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어디에 있지? 라딘의 서란 것 말이야. 라딘이 헤르파 사막에 그것을 숨기는 걸 봤다. 하지만 없더군. 혹시 네가 다른 곳에 숨겨 둔 건가?”
“아닙니다. 아마 라딘 님이 처음에 숨기고자 했던 그곳에 잠들어 있을 겁니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을 뿐.”
“그럼 그걸 찾기 위해선 열쇠라는 걸 먼저 찾아야 한다는 뜻이군.”
“그렇습니다.”
“그 열쇠를 찾는 방법은 네가 알고 있겠군. 이유도 없이 네가 이곳 노아스에 발을 들일 이유는 없을 테니까.”
진의 말에 타에라가 입을 다물었다.
200년 전, 제가 어그러뜨린 운명의 대가는 죽음이 아닌 속박이었다.
제 존재를 숨긴 채 제가 어그러뜨린 운명이 제 궤도를 찾아 움직일 때까지 끝나지 않는 굴레 속을 헤매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속박에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보름 후, 200년 전과 똑같은 금환일식이 있을 겁니다.”
“금환일식이라면 혹시 로엔과 연관이 있나? 내가 알기론 금환일식이 있던 날, 로엔이 태어났다고 하더군.”
진의 물음에 타에라가 고갤 끄덕였다.
“그것이 바로 운명의 단초입니다. 금환일식과 함께 태어난 록스버그 공작가의 여아. 타란 대륙의 주인이 될 자의 반려의 운명을 지닌 존재이니까요.”
모리의 대장간에 있던 붉은 용광로가 록스버그 공작가에 태어난 여아와 연관이 있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한 일이었다.
막상 타에라를 통해 로엔이 과거에서부터 연결되어 온 제 반려라는 말을 듣자,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그럼 앞으로 뭘 해야 하지? 내가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선 말이다.”
진의 목소리에 담긴 단호함에 타에라가 양피지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모리에게 주었다던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크립텍스의 설계도였다.
“라딘의 서를 찾으십시오. 그 곁에 현자의 돌이 있을 겁니다.”
“현자의 돌?”
“네. 그리고 라딘의 서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 열쇠는 만년설의 동굴에 잠들어 있습니다.”
만년설의 동굴은 노아스의 북쪽 설원에 있었다. 타에라가 제 일은 끝이 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는 거지?”
『파수꾼의 둥지에 있을 겁니다. 기억하세요. 때는 금환일식입니다. 하늘에 붉은 반지가 떠오르는 그때, 그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겁니다.』
타에라가 노아스의 언어로 담담하게 말한 뒤 진이 붙잡기도 전에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타에라가 발할라의 문을 나서자 진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곤 로엔이 잠들어 있는 침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와장창, 소리와 함께 서쪽 탑의 유리창이 깨졌다. 분을 참지 못한 에드윈이 책상에 놓여 있던 물건을 집어 던진 것이다.
창문 옆에 서 있던 씨어는 유리창이 깨지며 튄 파편이 제 얼굴을 스치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픔 따윈 없었다. 다만 비릿한 혈 향이 거슬릴 뿐이었다. 순간 씨어는 록스버그 공작에게서 나던 혈 향을 떠올렸다.
200년 전 주술을 통해 록스버그 공작가의 여아의 심장에 혈독화를 심어 넣었다. 파수꾼의 운명을 지닌 자가 제 반려를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하지만 처음부터 정해진 타고난 인연은 바꿀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노아스의 땅에서 태어난 파수꾼은 단번에 제 반려를 알아보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파수꾼의 몸속에 봉인되어 있는 힘이 제 반려의 몸속에 흐르는 독으로 인해 깨어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만약 그 당시 타에라가 그의 몸속에서 힘이 각성하기 전에 주술을 걸지 않았다면 모든 계획이 어긋났을 터였다.
「금환일식입니다. 혈독화의 맹독이 극악에 다다를 시기가. 그리고 파수꾼의 몸속에 봉인된 힘이 가장 약해질 때도.」
씨어는 200년 전 타에라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입가를 비릿하게 비틀었다.
‘이젠 소용없게 된 건가?’
이번 생엔 이미 파수꾼의 몸속에서 드래건의 힘이 각성해 버렸으니까. 제길!
씨어는 욕설을 삼키며 무감한 얼굴로 에드윈을 응시했다.
“씨어, 네가 대답해. 아니, 되돌려 놔. 네가 확신하지 않았나? 진의 몸속에서 드래건의 힘이 각성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아니, 각성한다고 하더라도 그 힘에 먹힌 로이슈덴이 자멸할 것이라고 네가 분명…….”
에드윈이 분노로 떨며 입을 다물었다. 감정을 통제하는 게 힘든지 주먹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지금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금 전 안톤이 진 로이슈덴이 뿜어내는 드래건의 힘에 소멸하는 모습을 본 순간, 그는 폭주했다.
안톤이 그들이 심어 놓았던 첩자였다는 사실을 들켰고, 또 그 과정에서 진 로이슈덴의 몸속에 봉인되어 있던 드래건의 힘이 각성해 버린 것이다.
드래건의 힘을 각성한 진에 의해 안톤이 푸른 불꽃에 휩싸여 가루가 되는 모습은 충격 그 자체였다.
씨어 역시 200년 가까이 살아왔지만 그런 광경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놀라움을 감추며 서 있던 씨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이를 짓씹는 에드윈을 보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구슬을 들어 창문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이제 능력이 다한 건가, 씨어? 라딘의 유일한 혈족이라고 하더니, 이젠 그 힘도 끝난 모양이군. 사실 따지고 보면 넌 라딘이 아니니까. 그런 힘을 기대한 내가 잘못인지도 모르겠군.”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씨어의 눈동자가 일순 또렷해졌다. 그리곤 경멸의 눈초리로 쏘아보는 에드윈을 응시했다.
처음으로 초연하던 씨어의 표정이 미세하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