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90화 (191/201)

190화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보긴 봤는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라니.

“노아스의 주인이었던 파수꾼의 기억이다. 아마 내 몸에서 드래건의 힘이 완벽하게 각성되면서 함께 봉인되어 있던 파수꾼의 기억까지 되살아난 것 같아.”

그러니 제 기억처럼 느껴졌지만 그건 진짜 제 기억이 아니었다.

“그럼 당신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겠네요. 뭘 찾아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우린 곧 안개 너머에 있는 독액의 강을 건널 거야.”

“그게 가능한가요?”

로엔의 물음에 진이 고갤 숙여 눈을 마주쳐 왔다.

“우리라면 가능해. 어차피 그곳은 우리에게만 허락된 땅이니까.”

우리에게만 허락된 땅이라고?

록스버그 공작가와 로이슈덴 공작가에게만 허락된 땅이라.

두 가문이 연관된 것이라면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밖에 없었다.

그렇다는 건, 어쩌면 사막의 늪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가문의 저주가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액의 강을 넘어가면, 사라졌다고 알려진 신성한 땅 노아스가 있을 거야.”

로엔이 놀란 듯 진을 바라보았다. 믿기지 않은 얼굴이었다.

짙은 안개와 독액의 강으로 숨겨져 있었던 곳이 노아스의 땅, 그러니까 검은 드래건의 땅이었다니.

“나도 믿기지가 않아. 검은 드래건의 땅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진의 대답으로 로엔의 마음속에 도사리던 불안이 사라졌다.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이가 바로 노아스의 주인이었다. 그러니 독액의 강이라고 해서 건너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여기야. 노아스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문인 독액의 강이.”

진이 말고삐를 당기자 켈피가 강 앞에서 멈췄다. 말에서 내린 진은 ‘부러지지 않는 검’을 꺼내 들었다.

검을 든 그가 앞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나아가자, 짙게 껴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안개 속에 숨겨져 있던 독액의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엔은 긴장된 얼굴로 검은 강을 내려다보았다. 시커멓게 죽은 강은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독액의 강이란 이름처럼 그곳에 발을 디딘 순간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생명을 잃고 녹아내릴 것 같았다.

독액의 강을 응시하고 있던 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신성한 땅, 노아스의 주인이 명한다. 지금껏 노아스를 감싸고 있던 글레이프니르(고양이의 발소리와 여자의 수염, 산의 뿌리, 곰의 힘줄 그리고 새의 침을 모아 만든 사슬)를 끊고 길을 열라. 이 땅의 주인이 마침내 돌아왔으니, 발아래 복종하라. 잠들어 있던 파수꾼이 깨어났다.』

진이 노아스의 고대어로 명령한 뒤 들고 있던 검을 바닥 깊숙이 꽂아 넣었다.

모래 속으로 박혀 든 검에서 검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순식간에 푸른빛이 안개를 밀어내기 시작하더니 검게 죽어 있던 독액의 강이 투명한 맑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정화 의식.”

고서에서 주술사가 독으로 오염된 강을 정화했다는 내용을 본 적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그 광경을 직접 목도하자, 로엔의 온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제야 진 로이슈덴이 노아스의 주인인 검은 드래건의 혈족이란 사실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로엔, 이리 와.”

얼어붙은 듯 켈피의 위에 앉아 있는 로엔을 향해 진이 손을 뻗었다. 로엔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그의 커다란 손을 내려다보다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강을 건널 거야.”

로엔은 긴장감을 떨쳐 내며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내가 준 단검, 가지고 있지?”

로엔이 몸을 숙여 가죽 부츠 속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꺼냈다.

“여기.”

“잘 갖고 있어. 그 단검이 노아스로 들어가는 열쇠 같은 것이니까.”

그러고 보니 그가 준 이 단검은 검은 드래건이 제 반려에게 주는 증표라고 했었다.

“그럼 들어갈까?”

진이 모래 위에 박혀 있는 부러지지 않는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투명하게 빛나는 독액의 강을 지나, 노아스의 땅으로 발을 디뎠다.

* * *

노아스는 아름다웠다. 독액의 강을 결계 삼아 지금껏 모습을 감추고 있던 땅은 태고의 신비와 순수를 간직한 신성한 땅이었다.

로엔은 폐부까지 깊게 들어온 청량한 공기에 머릿속은 물론 온몸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진을 따라 걸어가는 동안 지천으로 핀 꽃과 들판을 흐르는 시냇물은 싱그러운 생명력을 담뿍 머금고 있었다.

특히 바람에 날리는 새하얀 은매화의 꽃잎은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북쪽 마을에서 본 첫눈 같아요.”

로엔은 손을 내밀자, 부드럽고 여린 꽃잎이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군.”

진이 로엔의 손을 잡고는 시냇물을 건너 울창한 숲으로 들어갔다.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 그의 발걸음엔 거침이 없었다.

살랑거리는 풀숲을 지나, 햇살이 투명하게 비춰 드는 호수가 나타났다.

시시각각 변하는 햇빛과 바람에 의해 호수의 수면이 금빛 가루를 뿌려 놓은 듯 반짝였다. 요정들의 땅이라 알려진 펨부르크 호수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홀린 듯 호수를 바라보던 로엔이 진의 옷자락을 잡아끌었다.

“지금 어디로 가는지 물어도 될까요?”

“발할라로 가는 중이야. 노아스를 떠나기 전까지 파수꾼이 머물렀던 곳이지.”

“발할라라면 음유시인의 노래를 통해 들은 적이 있어요. 발할라의 천장은 금빛 방패로 되어 있다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가서 직접 확인해 봐. 저 문만 지나면 발할라니까.”

호수의 끝에 다다르자 숲의 끝이 나왔다. 그리고 그 숲의 끝엔 거대한 문이 그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문을 통과하려면 내가 줬던 단검이 필요해.”

로엔이 고갤 끄덕이며 재빨리 주머니에서 단검을 꺼냈다.

“여기 있어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단검을 여기에 밀어 넣으면 돼. 이것이 문을 여는 파수꾼의 열쇠거든.”

진이 손을 뻗자, 거대한 문 위에 단검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글귀가 나타났다.

『타라의 연.』

로엔은 문에 새겨진 글을 읽고 난 뒤 단검의 모양과 똑같이 음각되어 있는 곳에 밀어 넣었다. 그러자 철컥, 소리가 나더니 단검에 새겨져 있던 문자가 푸른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찬란한 빛에 로엔이 눈을 감았고, 이내 육중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 무지개다리가 보였고, 그 다리 끝에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오로라에 감싸인 황금빛 궁전이 보였다.

“오로라에 감싸인 저 궁전이 발할라군요. 정말 아름다워요.”

로엔의 입술 새로 찬탄이 새어 나왔다.

“내 땅에 온 걸 환영한다.”

내 유일한 반려.

진이 고갤 숙여 로엔의 이마에 키스했다. 부드러운 깃털처럼 닿았다 떨어지는 그의 입맞춤에 로엔은 그를 올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발할라는 은둔자의 숲과 닮았지. 뒤쪽으로 돌아가면 공작새의 둥지와 닮은 절벽도 있어. 지금 그곳에 갈 거야. 네 상처를 치료하고 나 역시도 몸을 회복…… 윽!”

“진, 진?”

아무런 징후도 없이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진을 로엔이 두 팔로 받쳐 안았다. 로엔은 제 품 안에서 정신을 잃은 진을 흔들어 깨웠다.

이제 막 드래건의 힘을 각성한 진 로이슈덴은 인간의 몸으로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것이다.

로엔은 진이 정신을 잃기 전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공작새의 둥지와 닮았다는 곳. 그곳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첨벙, 첨벙.

로엔은 정신을 잃은 진을 품에 안고는 폭포수 안으로 들어갔다. 의식이 없는 진을 켈피의 등에 태우고 이곳에 온 건 천운이었다.

‘어, 이건 뭐지?’

폭포수 안으로 들어가 진을 눕힌 순간, 믿을 수 없게도 의식을 잃고 쓰러진 발할라의 주인을 보호하기라도 하듯 숲의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와 보호막을 만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있는 장소에 결계가 쳐지더니, 수천 년이 넘게 이곳을 지켜 온 신성한 나무들로 단단한 벽과 지붕을 세운 공간이 만들어졌다.

위험을 감지한 숲이 그 누구도 발할라의 주인과 그의 반려를 헤칠 수 없는 성을 만들어 낸 것이다.

로엔은 벽과 지붕이 주는 안온함에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진의 말처럼 발할라는 은둔자의 숲과 닮아 있었다. 마치 은둔자의 숲을 발할라를 본떠 만든 것처럼 숲을 감싸고 있는 분위기가 너무도 흡사했다.

다행히 물은 따뜻했다. 노아스는 모든 것이 안온했다.

1,000년 전 사라진 신성한 땅은 그동안 고요한 침묵 속에 잠들어 있었던 것처럼, 로엔에게 평온함을 선물해 주었다.

“진?”

폭포수에 몸을 담근 로엔은 진을 흔들어 깨었다. 하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노아스에 혼자 남겨진 느낌에 불안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고갤 숙여 그의 심장에 귀를 대고 기다렸다. 다행히 심장은 뛰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그를 깨울 방법을 모르겠어.”

로엔은 초조한 얼굴로 고갤 들어 공작새의 둥지와 닮아 있는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거대한 둥지는 남아 있었지만 정작 그 주인인 공작새는 없었다.

마치 주인의 부재를 알리듯 진이 정신을 잃은 순간, 아름답던 발할라는 생명력을 잃은 듯 스산하기만 했다.

로엔은 고갤 숙여 시퍼렇게 죽은 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공작새의 눈물이 없으니, 제 체액으로 그의 몸속에 날뛰는 드래건의 힘을 억눌러야 했다.

“진, 제발 눈 좀 떠요.”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아 내렸다. 그녀의 타액이 닿자 진이 밭은 숨을 내쉬며 입술을 움직여 로엔의 입술을 찾았다. 다행히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도 살고자 하는 본능이 먼저 반응하는 듯했다.

로엔은 제 입술을 열어 입안으로 파고드는 진의 혀를 휘감고는 진득하게 문질렀다. 제 타액을 그의 입 속으로 흘러 보내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역부족이었다.

드래건의 힘은 신성한 불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입술은 사막보다 더 건조했다.

아무리 입술을 얽고 제 혀로 그의 입안을 축여도 그의 입안은 생명력이라곤 없는 갈라진 땅 같았다.

“진?”

입술을 뗀 로엔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꽉 닫힌 눈은 열릴 줄 몰랐다. 얼굴 역시 점점 더 창백하게 변해 가고 있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뿐인 듯했다. 그와 몸을 섞는 것.

하지만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그와 몸을 얽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당신 땅에 온 걸 환영한다고 하더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