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안톤, 잘 들어.”
그때까지 대화를 듣고 있던 진이 안톤을 향해 한 발짝 다가섰다.
“네 말처럼 씨어라는 자의 예언이 다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안톤, 네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제가 간과한 사실이 있다니, 그런 건 없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게르피온의 기사단에 의해 죽게 될 겁니다. 라딘의 혈족인 씨어의 예언이 맞는 거지요. 절대 잘못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겠지. 네 탐욕의 이유를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찾은 것처럼.”
진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탐욕과 배신은 그 누구의 탓도 아닌 제 선택이었다. 그러니 잘못한 건 록스버그의 저주가 아니라 안톤 그였다.
“뭡니까? 제가 간과했다는 사실이.”
“그건 내가 로엔을 살리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게 무슨…….”
“록스버그의 저주는 끝이 난다는 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널 죽일 거거든.”
안톤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진과 로엔을 번갈아 보았다.
록스버그의 저주는 진 로이슈덴의 희생이 필요한 일이었다. 과연 누가 제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타인을 구할 수 있을까?
“네 목숨을 내놔야 하는 일인데, 그게 가능하다고?”
안톤이 겁을 상실한 얼굴로 진을 보며 비웃음을 삼켰다.
“그러니 잘 봐 라, 안톤. 나도 아직은 널 죽이진 않을 거야. 내가 아드리안 제국을 손에 쥐고, 타란 대륙까지 내 발아래 조아리게 하는 모습을 너에게 보여 줄 생각이거든. 그리고 록스버그 공작가가 타란 대륙에서 영원히 존재하게 될 것이란 것도.”
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은청색의 눈동자가 날카로운 빛을 품고 안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주위를 감싸고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 사실을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진에게서 나오는 강력한 힘에 의해 주변을 감싸고 있던 공기가 변했다.
“어?”
그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차린 건 안톤이었다. 멀쩡한 한쪽 눈이 크게 떠지더니 처음으로 경악과 공포가 혼재된 표정으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그의 변화에 곁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진에게 향했다.
진의 몸속에 봉인된 드래건의 힘에 복종하듯 안개가 뒤로 빠르게 밀려나더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안개 속에서 오아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습게도 그곳은 익히 잘 아는 장소였다. 순간 허탈함이 밀려들었다. 안개 속에서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계속달린 결과가 바로 제자리였다.
“어떻게? 말도 안 돼.”
안톤의 시선은 진에게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와 싸우는 눈치였다.
“위대한 예언가 라딘을 신봉한다니 잘 알겠군. 존더부르크 황실에 내려진 두 번째 예언. 황실에 검은 드래건의 피를 가진 자가 태어난다.”
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안톤이 고갤 가로저었다. 진 로이슈덴이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도 살아남았다고 했을 때도, 한 번도 그가 라딘의 두 번째 예언의 주인공이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낯설고 강력한 힘이 그의 몸속에 흐르는 검은 드래건의 혈족만이 갖는 능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진흙탕이 된 느낌이었다.
“대체 내가 뭘…….”
안톤은 그가 믿었던 것들이 한 순간 제 발아래 있는 모래알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진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곤 입고 있던 검은 셔츠도 마저 벗었다.
순식간에 그의 심장에 돋아난 드래건의 검은 비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 당신 등에?”
로엔의 시선이 진의 가슴이 아니라, 등으로 향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의 등에 검은 드래건의 형상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었다.
“봉인되어 있던 드래건의 힘이 깨어났다.”
그리고 봉인된 힘 안에 숨겨져 있던 노아스의 주인이었던 자의 기억까지도 함께 깨어났다.
「1,000년 전, 모습을 감췄던 노아스의 땅에 파수꾼이 태어났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검은 드래건의 후예지. 그가 태어난 이상 더는 전쟁과 혼란은 없을 것이다. 곧 새로운 제국이 세워질 테니까.」
라딘이 그의 제자인 타에라에게 말했던 장면 역시 꿈이 아니라 노아스의 주인인 파수꾼이란 자의 기억이었다.
‘제길, 타란 대륙의 주인이 노아스 땅의 파수꾼이었군.’
그리고 그것을 모두 어그러뜨린 자가 바로, 타에라였다.
“괜찮……나요? 드래건의 힘이 깨어나도…….”
로엔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걱정으로 흔들렸다. 전쟁터에서 있는 동안 그 힘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지만 완벽한 각성은 아니었다.
만약 이번 각성으로 인해 드래건의 힘에 그가 삼켜지기라도 한다면…….
“로엔.”
진이 손을 뻗어 로엔의 팔을 붙잡곤 그를 보게 했다. 진의 온기에 흔들리던 로엔의 눈동자가 천천히 안정을 찾아갔다.
“그때완 다르니까, 걱정하지…… 로엔!”
진의 얼굴이 경악으로 하얗게 질렸다. 이내 로엔의 뒤에 앉아 있던 안톤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살기를 띠고 번뜩였다.
“진, 나는 괜찮……. 곧 나으니까, 그러니까…….”
로엔의 속삭임에도 진의 시선은 여전히 안톤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그의 손이 검게 변해 있었다. 맹독에 중독이라도 된 듯.
빌어먹을 안톤이 제 주인이었던 로엔을 칼로 찌른 것이다.
“감히 네가!”
진이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들어 힘껏 안톤의 심장에 찔러 넣었다.
“헉!”
단말마와 함께 안톤의 입술 새로 붉은 피가 흘러났다.
“감히 네까짓 게…….”
서걱, 또다시 진의 손에 쥐어 있는 검이 안톤의 몸을 관통했다. 그것으로도 분이 풀리지 않은지 진이 주술을 외우기 시작하자 그의 등 뒤로 푸른빛 오라가 회오리처럼 일어났다.
순식간에 안톤을 삼킨 푸른빛이 붉은 용광로에서 보았던 불꽃을 일으키며 그의 몸을 태워 버렸다.
“진…….”
당황한 로엔이 그의 팔을 붙잡으며 고갤 가로저었다. 시퍼렇게 날이 서 있던 그의 은청색 눈동자가 로엔에게 향했다.
“제길!”
진이 힘을 풀자 파사삭, 소릴 내며 안톤의 몸이 가루가 되어 허망하게 공기 중으로 사라졌다. 진은 로엔을 재빨리 품에 안았다.
“라이칸, 세이지를 데리고 오아시스로 가서 기다려. 해독제는 구급상자에 들어 있으니 먹고.”
진이 재빨리 로엔의 상처를 살피곤 피가 흐르지 않게 단단히 묶었다. 다행스러운 건 입고 있던 외투가 두꺼워 그나마 상처가 깊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라이칸이 진의 품에 안겨 있는 로엔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로엔의 혈독화가 안톤이 찌른 상처를 치료해 줄 테지만, 그것에 앞서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얼굴 할 필요 없다, 라이칸. 기다리면 돌아올 테니까.”
진의 대답은 단호했다. 라이칸은 흔들림 없는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이제 제가 로엔을 위해 할 일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쉬움보단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오아시스로 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라이칸의 말에 진이 고갤 가로저었다.
“내 발밑을 봐. 우리가 가면 오아시스는 이렇게 될 거야.”
라이칸이 진과 로엔이 서 있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로엔이 흘린 피와 진이 뿜어냈던 드래건의 힘으로 인해 주위가 새까맣게 죽어 있었다.
“그럼 어디로……?”
진은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은 곳으로 고갤 돌렸다.
“독액의 강을 건널 생각이다. 그곳에 라딘의 서의 열쇠가 묻혀 있을 테니까. 너흰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 세이지를 부탁하지.”
진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이지에게 시선을 준 다음, 로엔을 팔에 안고는 켈피에 올라탔다.
두 사람을 태운 켈피는 가야 할 곳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오아시스의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아, 제길.”
라이칸은 욕설을 뱉어 내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세이지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그나마 모래 먼지를 막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이 혈독화에 중독되는 걸 막아 준 듯했다.
라이칸은 천천히 오아시스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차례 모래 폭풍이 지나간 듯했다.
탐욕에 눈이 먼 배신과 그들을 감시하던 황제의 그림자인 씨어. 그리고 드래건의 힘을 각성한 진 로이슈덴까지.
그들이 서 있던 자리엔 붉은 핏자국과 함께 검게 죽은 모래가 바람에 부스스 날릴 뿐이었다.
* * *
진의 품에 안긴 로엔은 그의 단단한 몸에 몸을 기댔다. 그러자 그녀의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가해지더니, 바짝 끌어 안겨졌다.
안톤에게 찔린 상처는 지독한 배신의 고통만 남긴 채 언제나 그랬냐는 듯 회복될 터였다.
하지만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던 순간에 느꼈던 자괴감과 안톤의 배신을 부추겼을 저에 대한 얄팍한 믿음이 죄책감이 되어 그녀를 집어삼켰다.
로엔이 힘없는 눈빛으로 앞을 주시했다. 한참 달려온 사막인데도 여전히 눈앞은 모래언덕이었다.
“진, 우리 지금 어딜 가는 거예요?”
“기억이 났어. 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누군가의 기억이었더군.”
그의 품에 안겨 앞을 바라보던 로엔이 고갤 돌려 진을 보았다. 하지만 진은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대신, 여전히 앞을 바라보며 말을 달릴 뿐이었다.
“누구의 기억인데요?”
진은 대답 대신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무엇보다 꽉 다문 입매며 날카로운 분위기가 섣불리 말을 걸 수 없게 했다.
몸속에 봉인되어 있다던 검은 드래건이 완벽하게 힘을 각성했기 때문인 걸까?
로엔은 그에게서 느껴지는 강한 힘과 낯선 거리감에 불안감을 느꼈다.
“조금만 더 가면 네가 말했던 독액의 강이 나타날 거야.”
“독액의 강이요?”
“응. 그 노트에 적힌 것처럼 안개는 독액의 강으로 가는 통로가 맞아.”
진의 대답은 단호했다. 헤르파 사막에서처럼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어떻게?’
머릿속에 생겨난 의문에 로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리고 그 순간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꼭 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요.”
“봤어. 내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지만. 나는 이곳에 대해 알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