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그게 언젠데요. 빨리 말해 봐요.”
“전쟁터에서. 이건 본능 같은 거야. 위험이 목전에 다다랐을 때, 봉인되어 있던 드래건의 힘이 깨어나려 하거든.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내 곁에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경고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로엔의 말에 진이 안개 속에서 주위를 경계하며 서 있는 세이지와 라이칸 그리고 안톤에게 차례차례 시선을 줬다.
“이미 저들도 알고 있어. 특히, 안톤은…….”
로엔의 시선이 안톤에게 향했다.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안톤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더 창백한 것 같았다.
‘체온이 떨어지는 걸까?’
로엔은 진이 한 말에 의미를 되새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나 안톤에게 향했다.
“안톤, 괜찮아? 추우면 옷을 더 껴입는 게 좋겠어. 가져다줄까?”
“네. 갑자기 감기에 거린 것처럼 오한이 드는 게……. 콜록, 콜록,”
안톤이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했다. 라이칸이 양털로 된 모포를 안톤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이칸 님. 한결 따듯하네요. 콜록, 콜록. 우욱―!”
기침을 하던 안톤이 갑자기 바닥에 엎드려 조금 전 먹을 걸 토해 내기 시작했다. 놀란 로엔이 서둘러 안톤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렸다.
“정말 괜찮은 거야?”
“콜록, 콜록. 괘…… 콜록, 콜록.”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기침을 계속했다. 그러다 그의 손에 붉은 피가 울컥 넘어오는 것을 보곤 일행이 시선을 교환했다.
감기가 아니었다. 이건 분명 독에…….
로엔이 공작새의 눈물을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릴 뜬 순간, 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공기를 가르며 뭔가 날아들었다.
모두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갤 돌렸고…….
“아악!”
비명 소리와 함께 안톤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안톤!”
당황한 로엔이 안톤에게 달려가려는 순간, 진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여기에 있어. 내가 갈 테니까.”
어느새 부러지지 않는 검을 쥔 진이 안톤에게 다가섰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톤을 공격하는 검은 매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날이 잔혹하게 매의 살과 뼈를 찢으며, 비릿한 피를 공기 중에 흩뿌렸다.
로엔은 본능적으로 숨을 참으며 코와 입 주변을 가렸다.
“괜찮습니까, 안톤 님?”
라이칸은 넘어져 있는 안톤을 일으켜 상처를 살폈다. 날카로운 부리가 안톤의 눈을 공격했는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에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야, 대장?”
세이지는 검날에 찢겨 죽어 있는 커다란 매를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다 매의 새까만 눈동자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걸 보곤 발로 툭 하고 새의 머릴 건드렸다.
“기다려.”
진이 세이지를 밀어내곤 들고 있던 검으로 매의 눈동자를 도려냈다. 매의 눈에 박혀 있던 눈동자가 도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렀다.
“대체 새 눈에다 뭘 박아 넣은 거야?”
세이지가 소름이 돋은 듯 몸을 떨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의 눈동자를 집어 들었다.
놀랍게도 새의 눈동자는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작은 원형구였다.
「전에 고서에서 호리우스의 눈에 관해 본 적이 있어요. 호리우스의 눈이 진실을 보는 힘이 있다고 알려지긴 했지만, 그 순간 어떻게 발현되는지는 알려져 있진 않거든요. 그러다 아버지께서 남기신 비서에 주술사 노파가 들고 있던 것과 같은 형태의 구슬 그림을 보았어요. ‘진실의 눈은 모두를 담을 수 있는 원이다.’ 옆에 써 있던 글귀였고요.」
로엔은 세이지의 손에 놓인 호리우스의 눈을 보며 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진실의 눈은 모두를 담을 수 있는 원이다.”
로엔은 홀린 듯 비서에 쓰여 있던 글귀를 읊조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진의 시선이 세이지의 손으로 향했다.
“진실을 보는 눈이란 게, 이런 것이었나? 주술을 통해서 누군가를 지켜보는 힘이었다니.”
“그자군요. 폐하의 곁에 있는 그림자, 씨어요.”
로엔은 입술 새로 씨어라는 이름이 나오자, 바닥에 넘어져 고통스럽게 몸을 뒤틀던 안톤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불행히도 그의 변화를 주시하는 자는 없었다.
“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대장 말은 이 매를 시켜서 우릴 감시했다는 거지? 이 구슬로?”
세이지가 소름이 돋는다는 듯 재빨리 손바닥에서 구슬을 털어 냈다. 또로록 굴러 떨어진 구슬이 순식간에 로엔 앞에 놓였다.
로엔은 제 발 아래까지 굴러 온 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발로 툭 하고 찬 다음, 씨어가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속삭였다.
“당신의 존재를 알고 있어요. 200년 동안 살아남은 라딘의 혈족. 곧 만나게 될 테니, 더는 감시하지 않아도 돼요. 도망칠 생각 없으니까.”
로엔의 서늘한 목소리에 공명하듯 모래 위에서 호리우스의 눈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파사삭 소릴 내며 가루가 되어 버렸다.
“이 상황, 나만 이상해? 이건 뭐에 홀린 것 같잖아. 정말 미치겠네.”
세이지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로엔은 혼란스러워 보이는 세이지를 뒤로하곤 안톤에게 향했다.
“안톤, 딱 한 번만 묻겠다.”
로엔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차가웠다. 감정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조한 목소리에 라이칸이 의아한 표정으로 로엔과 안톤을 번갈아 보았다.
“……”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상관없다. 너에게 기회를 주고 싶은 것뿐이니까.”
로엔을 올려다보는 안톤의 멀쩡한 쪽 눈동자가 흔들렸다.
“폐하야, 아니면 게르피온이야?”
안톤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고통으로 떨려던 몸이 이젠 두려움으로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눈동자에 죄책감이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도 똑똑히 보였다.
“……”
“내 생각엔 둘 다인 것 같은데. 네 몸이 독이 퍼졌다는 건, 그들에게 버려졌다는 뜻이겠지?”
“로엔 님, 그게…….”
안톤이 몸을 일으켜 로엔에게 손을 뻗었다. 피가 엉겨 붙은 손이 로엔의 다리를 비굴하게 휘감았다.
“이유가 무엇이든, 날 배신한 건 맞는 모양이네. 왜? 조만간 폐하께서 내게 암살자를 보낸다고 했나?”
로엔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아니면, 록스버그 공작가는 로이슈덴 공작가와 함께 반역죄로 아드리안 제국의 역사에서 완벽하게 사라질 것이라고 했나 보군.”
로엔의 마지막 말에, 그제야 라이칸은 무슨 상황인지 인지한 듯했다.
“지금 안톤 님이 배신을 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이칸이 분노로 목소리를 떨며 로엔 옆에 섰다. 그리곤 죄인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고 머릴 조아리고 있는 안톤을 죽일 듯 내려다보았다.
“그런 모양이야. 의심은 하고 있었지만 확신을 한 건 지금이고.”
“어떻게 아셨습니까?”
고갤 숙이고 있던 안톤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이 순간에도 그것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말레 상단에 배신자가 있다는 말은 벤투스가 먼저 꺼냈다. 너를 의심한 건 랑케의 밀실에서부터였고.”
화가 난 라이칸이 무릎을 굽히고는 안톤의 멱살을 붙잡았다.
라이칸과 눈을 마주하게 된 안톤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리곤 벌벌 떨며 라이칸의 손을 밀어내려 했다.
“정말 폐하와 한패였던 겁니까?”
라이칸이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안톤의 멱살을 붙잡곤 을러 댔다. 하지만 안톤은 입을 꾹 다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에 라이칸은 더한 분노를 느꼈다. 지금껏 믿어 온 자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라이칸, 흥분하지 마. 아마 오늘 새벽에 칼라일과 게르피온에 전서구를 보냈을 거야. 곧 모래 늪에 게르피온의 기사들이 올 테고. 내 말이 맞겠지?”
로엔의 설명에 라이칸의 시선이 다시 안톤에게 향했다.
“왜냐, 안톤. 왜 로엔 님을 배신한 거지?”
라이칸은 지금껏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이를 악물며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하지만 안톤의 시선은 라이칸이 아니라, 로엔에게 닿아 있었다.
“말해. 당장 널 쳐 죽이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고 있으니까.”
안톤의 목에 겨눴던 검 끝이 살을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을 보면서도 라이칸은 손에 힘을 주었다.
“윽!”
“라이칸, 그만둬.”
“하지만 이자는 로엔 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런 자를 살려 줄 수는 없습니다.”
“알아. 네 검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그런 거야. 이유는 들어야 하잖아.”
라이칸이 어쩔 수 없이 검을 거둬들였다.
“안톤, 이제 말해 봐. 왜 날 배신했는지.”
로엔의 눈빛이 짙게 깔린 안개를 뚫고 안톤의 얼굴에 가 닿았다. 그러자 안톤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록스버그 공작가는 곧 사라지게 될 것이란 게 이유입니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몰락이라.
“록스버그 공작가가 사라진 뒤에도 넌 살아남고 싶었나 보군. 네가 쥔 말레 상단의 부와 함께 말이야.”
“그렇습니다. 어느 날 씨어라는 자가 절 찾아왔습니다. 라딘의 혈족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말하더군요. 씨어는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공작님이 혈독화를 품고 있다는 것도, 그리고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로이슈덴 공작과 결혼할 것이란 것도.”
“씨어라는 자가 널 찾아와 그런 말을 했다는 건가?”
“네. 그리고 전 랑케의 밀실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그자가 했던 예언이 사실이란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위대한 예언가 라딘의 혈족이란 것도 믿게 되었고요.”
“그래서?”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로엔은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그래서 배신한 겁니다. 라딘이 혈족인 씨어가 그러더군요. 제가 주군으로 모시는 로엔 록스버그는 서른 살 이전에 죽게 될 운명이라고. 로이슈덴 공작과 결혼해 반역죄가 아니더라도, 몸속의 독이 공작님을 죽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록스버그의 저주에 의해서.”
안톤이 뱉어 낸 말에 짙은 안개만큼이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라딘의 혈족인 씨어의 예언이라.
로이슈덴 공작가의 반역죄가 아니라도 로엔 록스버그는 죽는다. 공작가의 저주에 의해서.
그것이 안톤이 믿는 진실이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200년 동안 섬겨 온 가신으로서의 의무를 벗어던진 것이다.
배신의 이유는 그것이었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몰락.
그래서 안톤은 그가 쥔 말레 상단의 돈을 지키려 한 것뿐일 테고.
“얼음 알갱이로 만들어진 거대한 장막을 지나 숨겨진 운명을 찾아야 한다. 그 길목마다 배신과 탐욕이 검은 새의 잔혹한 눈동자처럼 쌓이고, 진실을 가린 세이렌의 혀가 짙은 연기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로엔은 아버지의 노트에 적혀 있던 내용을 천천히 읊조렸다. 그 내용이 이루어졌다.
마치 위대한 예언가 라딘의 예언서라도 된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