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진?”
로엔의 목소리에 진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자, 불안으로 날뛰던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진이 로엔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다독였다.
“괜찮아. 그냥 과거에 어떤 날이 생각이 나서.”
그제야 로엔 역시도 마음을 놓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나침반이 가리키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는 거지?”
“네, 우선은 그래야 할 것 같아요.”
“그럼, 뭐 해? 서둘러 떠나야지.”
세이지가 자리로 돌아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라이칸은 안톤의 천막으로 가서 그를 깨웠다.
순식간에 떠날 준비를 마친 일행은 모래를 집어 아직 타고 있는 모닥불에 뿌렸다. 그러자 검은 연기와 함께 불이 꺼졌다. 일행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라이칸에게 대충 얘길 들은 안톤이 로엔이 들고 있는 나침반을 신기한 듯 바라보는 게 보였다.
로엔은 안톤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다음,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정말 위험에 한 발짝 다가선 느낌이었다. 그리고 더는 되돌아갈 수도 없었고.
“출발하기 전에 남고 싶은 분이 있다면 남아도 돼요. 이제부터 어떤 일이 일어날지 확신할 수 없으니 선택은 자유에 맡길 생각입니다.”
로엔의 말에 일행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안톤, 원치 않으면 남아도 좋아. 말레 상단은 네가 없으면 힘들 테고, 또…….”
“아닙니다. 함께 가야죠.”
안톤의 대답에 로엔이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세이지 님은…….”
“뭐래? 당연히 가야지. 그런데 정말 이 나침반의 끝에 독액의 강이 있다는 거지?”
세이지의 얼굴엔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단 낯선 경험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로엔은 정말 세이지답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가 보자고. 정복 전쟁 다음으로, 내 무용담이 될 것 같으니까.”
세이지의 말 한마디로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조금 가벼워졌다.
서둘러 말에 오른 일행을 돌아보며, 나침반을 가진 로엔과 진이 선두에 나섰다.
“독액의 강이 나타나면 그곳을 건너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까요?”
“지금껏 운명론자는 아니었는데, 어쩌면 처음으로 그것도 가능할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 여기까지 우리가 온 것이 빌어먹을 운명이라면 말이야. 당연히 방법이 있겠지. 넌 어때?”
로엔 역시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증거가 바로 제 손에 놓여 있는 나침반이었다.
그리고 혈독화를 품고도 살아 있는 자신과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 살아남은 진 로이슈덴이었다.
“그럼 가야겠네요. 나도 그 끝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거든요.”
* * *
로엔 일행은 나침반의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짙게 깔린 안개로 인해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을 달리는 건 매 순간 팽팽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로엔은 고갤 돌려 흘끗 진을 보았다.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그는 안개 속에서 사신처럼 보였다.
언뜻언뜻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마음에 걸렸지만, 로엔은 안개가 만들어 낸 착시라 생각하며 넘겼다.
그런데, 그때…….
“하아, 후우―.”
검은색 천 사이로 진의 뜨거운 숨결이 뿌연 연기처럼 새어져 나오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말을 달리는 내내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평소와 달리 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독액의 강을 찾아가는 것에 골몰해 사소한 것엔 의미를 두지 않았을 뿐, 평소라면 진의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했을 로엔이었다.
그때 로엔의 시선을 느낀 진이 고갤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당연하다는 듯 맞닿았고, 로엔은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뭐지? 분명 동공이…….’라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날카로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윽.”
고통을 참는 듯 입술 새로 흘러나온 신음의 주인은 다름 아닌 안톤이었다.
“괜찮습니까?”
안톤이 일행의 가장 뒤에서 말을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라이칸이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았다. 일행 역시도 안톤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차례차례 말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검은 두건이 벗겨진 안톤의 뺨엔 어디서 생긴 것인지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 보이는 생채기가 여기저기 나 있었다.
“어, 괜찮습니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안톤이 제게 집중된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극구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난히 창백한 뺨에 상처까지 달고 있는 얼굴로 신경 쓰지 말라고 하는 안톤의 말을 신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잠깐 멈췄다 가는 게 좋겠어요. 상처도 치료하고 간단히 요기도 하죠.”
로엔의 말에 일행이 말에서 내렸다. 말에서 먼저 내린 진이 로엔에게 다가와 말에서 내리는 걸 도왔다.
“너는 괜찮나?”
“괜찮으니 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진, 당신은요?”
로엔은 그의 상태를 살피듯 예리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에 그의 눈동자가 맹수의 그것처럼 바뀌었었다. 깊고 깊은 은청색의 눈동자가 용의 동공처럼…….
“나는 멀쩡해.”
진이 어깰 으쓱해 보이자, 로엔은 의심을 거둬들였다. 다시 마주친 그의 눈은 평소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로엔은 진을 향해 고갤 끄덕이고는 서둘러 안톤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라이칸이 건넨 구급상자에서 깨끗한 천을 꺼내 엉긴 피를 깨끗하게 닦아 냈다.
“감각이 없는 것 같은데, 정말 괜찮아?”
로엔은 동상이라도 걸린 것 같은 안톤의 얼굴을 보며 미간을 접었다.
“안개에 오랫동안 노출돼 뺨이 언 모양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 모래바람이 불었을 때 제가 생각 없이 소매로 뺨을 닦다가 상처가 난 것 같고요.”
안톤이 제 얼굴에 긁힌 상처의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자꾸만 로엔의 시선을 피했다.
로엔은 별말 없이 상처에 약을 바른 뒤 깨끗한 천으로 상처를 덮어 고정시켰다.
“한나절을 꼬박 달린 것 같은데, 목적지는 아직인 거지?”
세이지가 짐 가방 안에서 말린 육포와 과일을 꺼내 일행에게 건넸다. 간단히 요기할 거리를 받아 든 일행은 자리에 앉아 묵묵히 음식을 먹었다.
“나침반은 아직 움직여요.”
로엔은 안톤에게 육포를 건넨 뒤,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릴 잡고 앉았다.
오아시스를 떠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계속 말을 달렸다. 버석한 모래에 서리가 내려, 말을 달릴 때마다 새하얀 얼음가루가 부스스 날렸다.
로엔은 장갑을 낀 손으로 모래를 집어 올렸다. 그러자 장갑 사이로 얼어붙은 얼음 알갱이가 스르륵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지금이야 괜찮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밤이 찾아온다면 큰일이었다. 모닥불도 피우지 못하는 상황에서 얼어붙은 모래 위에서 잠을 청해야 할 판이었다.
“그만 보고 얼른 먹어.”
진이 육포를 먹기 좋게 찢어 로엔의 입에 넣어 주었다.
“내가 먹을게요. 당신도 어서 먹어요.”
로엔이 나침반을 주머니에 넣은 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체력을 축적하기 위해서 의무적으로 씹었다.
일행은 말없이 배를 채웠다. 갈수록 침묵은 무거워졌고 표정 역시도 어두워졌다.
“걱정할 것 없다. 머지않아 그 끝에 도착할 테니까.”
진의 말에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진은 손을 뻗어 로엔의 외투를 단단히 여며 주었다. 그리곤 차갑게 언 손을 제 로브 안으로 넣고는 녹여 주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로엔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빼려 했지만, 진이 그의 심장 위에 손을 고정시킨 채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어, 심장에 열이……. 왜 이렇게 뜨겁지?’
당혹스러움이 가시자, 진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거칠어진 호흡과 눈동자에 일렁이는 뜨거운 열기까지.
‘설마 아픈 건가?’
진이 로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고갤 가로저었다.
“아픈 건 아니니 걱정할 것 없어.”
“그럼 왜…….”
“그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했지만 진은 입을 다물었다. 대신 로엔의 손을 제 옷 속으로 집어넣더니, 맨살 위에 댔다. 손바닥 아래서 그의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어?”
순간 로엔의 눈이 커졌다. 손끝에 닿는 드래건의 비늘이 뜨거웠다.
“이게 왜…….”
평소에는 뜨거운 그의 몸과는 달리 그의 심장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은 차가웠다. 그런데 지금, 드래건의 비늘이 용광로 속에서 달아오른 쇠처럼 뜨거웠다.
“진?”
애써 숨기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혼란스러움을 눈치챈 듯 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이런 적이 몇 번 있었어.”
“언제요?”
성인식이 있었던 날, 제 몸속에 봉인되어 있던 힘이 처음으로 날뛰었었다. 그리고 전쟁터에서 시시때때로 지독한 열과 함께 등골이 오싹할 만큼 강한 힘이 그를 집어삼키려 했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제 몸속에 봉인되어 있는 드래건의 힘이 각성하려 한다.
사실 새벽녘에 눈을 떴을 때부터 몸의 모든 감각이 예민하게 날이 서 있었다. 제 품에 안겨 잠들어 있는 로엔을 깨우지 않기 위해 애써 힘을 눌러 삼켰다.
목덜미에 날카로운 소름이 돋아났다. 뭔가 있음을 알았다.
오아시스 너머, 알 수 없는 강한 존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새벽에 느꼈던 것과는 조금 다르지만 음산하고 진득하게 달라붙은 어둠과 닮은 존재가 바로 곁에 안개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이고 덫에 걸리길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