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벤투스에게 모래 늪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연락이라도 한 모양입니다.”
의아한 듯 서 있는 로엔을 보며, 라이칸이 대신 상황을 설명했다.
“그래, 이유가 있을 테지. 그런데 라이칸, 안색이 별론데. 어디 아파?”
“기온차로 아침에 컨디션이 좋지 않을 뿐,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겁니다.”
라이칸은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얼굴이 평소와 달리 파리했다.
“그나저나, 이 안개는 대체 뭐야? 자고 일어났더니 갑자기 안개라니. 괜히 불길하게.”
어느새 세이지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기색이 걷히며 그가 심각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같은 생각인지 경계의 눈빛으로 자욱하게 깔린 안개를 바라보았다.
“일교차 때문에 나타는 현상일 뿐이다. 다른 이유가 있을 게 뭐 있다고.”
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곤 로엔을 모닥불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그 소문 있잖아. 목소리로 선원을 유혹해 죽이는 세이렌. 아마 세이렌도 나타나기 전에 안개를 낀다고 하지 않았어?”
“세이지, 그 입 다물어. 혀를 잘라 버리기 전에.”
불안감을 야기시키는 세이지의 말에 진이 느른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알았다고. 이제부터 입 꼭 다물면 되지?”
입에 자물쇠를 다는 시늉을 해 보인 다음 세이지가 끓고 있는 스튜를 그릇에 담아 일행에게 건넸다.
“고마워요, 세이지 님.”
스튜 그릇을 받아 든 로엔은 아침을 먹기 시작했다. 밤새 진과 시간을 보내느라 허기가 졌던 참이었다.
“뭐야? 밥도 안 먹이고 괴롭힌 건 아니지?”
“너 정말…….”
“미안, 미안.”
세이지가 재빨리 사과를 하며 입을 다물었다.
진은 살벌한 눈빛으로 세이지를 쏘아본 뒤 옆에 놓여 있는 빵과 치즈를 로엔에게 건넸다. 식사는 침묵 속에서 이뤄졌다.
로엔은 빵을 씹으며 조금 전 세이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정말 이 안개가 사막의 세이렌이 나타날 징조라면…….
‘잠깐, 세이렌?’
뭔가 생각나는 게 있어, 먹고 있던 빵을 내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라이칸, 아드리안을 떠나기 전에 내가 따로 챙겼던 물건들이 어디에 있지?”
“제가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라이칸이 서둘러 천막 안에서 가죽으로 꽁꽁 싸맨 꾸러미를 소중하게 안고 돌아왔다.
꾸러미엔 록스버그 공작가의 문장과 함께 러셀 백작가의 문장이 동시에 찍혀 있었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기록해 놓은 노트예요. 이번에 가져온 건 사본인데, 러셀 백작가는 록스버그 공작의 호위는 물론 이 비서를 지켜야 할 의무도 갖고 있어요.”
라이칸에게 가죽으로 된 꾸러미를 받아 든 로엔이 진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지금부터 제가 찾으려는 대목은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정리해 놓으신 것들 중에서 안개와 관련된 부분이고요. 어렸을 때 딱 한 번 본 기억이라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살펴보려고요.”
로엔은 서둘러 모닥불 앞에 앉아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에 대해 적힌 노트를 살피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주위는 타닥타닥, 나뭇가지가 타는 소리만 들렸다. 로엔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세 남자가 숨을 죽인 채 앉아 있었다.
그 모습에 로엔은 픽 하고 미소를 지은 뒤, 다시 내용에 집중했다.
노트를 살펴보는 내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모래 늪에 들어오자마자 벌어진 일로 인해 초조함이 밀려드는 건 당연했다.
한 장 한 장 꼼꼼하게 노트를 살피던 로엔이 마침내 고갤 들었다.
“발견한 모양이군.”
“네. 사막의 세이렌에 대한 기록을 찾았어요.”
순간 네 사람 사이에 서늘한 정적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로엔은 천천히 숨을 내쉰 후, 아버지가 기록해 놓은 내용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전략) ……얼음 알갱이로 만들어진 거대한 장막을 지나 숨겨진 운명을 찾아야 한다. 그 길목마다 배신과 탐욕이 검은 새의 잔혹한 눈동자처럼 쌓이고, 진실을 가린 세이렌의 혀가 짙은 연기 속에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손을 들어 귀를 유혹하는 사악한 소리를 막고, 눈이 아닌 감춰진 운명을 비추는 빛을 따라 걸어가라.
고양이의 발소리와 여자의 수염, 산의 뿌리, 곰의 힘줄, 물고기의 숨 그리고 새의 침을 모아 만든 글레이프니르(펜리스를 속박한 끈)를 끊고 진실을 가린 거대한 결계를 깨라.
결계를 부수는 열쇠는 어둠 속에서도 청명하게 빛나는 파수꾼의 눈동자이다.
……(중략)……
장막을 막아서던 뿌연 안개가 사라지고, 마침내 다다른 운명의 끝엔 검은 하늘을 밝히는 붉은 반지가 피처럼 걸린다.
-록스버그의 저주, 사막의 세이렌 편 중-』
마지막까지 다 읽고 난 후에도 일행은 말없이 내용을 곱씹었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와 사막의 세이렌이 관련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노트 안에 등장하는 생경한 단어들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결국 세이지가 한숨을 내쉬며 감도 잡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체 그게 무슨 뜻이야? 다 아는데, 나만 몰라?”
“은유적인 표현이 많아 이해하는 게 힘들 거예요. 그리고 제 가문의 일과 연관되어 있어, 그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더더욱 이해하기 힘들 테고요.”
“그런 거지? 나만 무식해서 이해 못하는 줄 알았네.”
“내 생각엔 모래 늪을 지나는 지도가 아닐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때?”
로엔이 조심스럽게 노트를 덮었다. 그리곤 같은 생각을 한 진을 보며 고갤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라딘의 서의 열쇠로 가는 지도라고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이지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이유는 있고? 지도라면 양피지에 그림으로 표시되어 있어야 하잖아. 글이 아니라.”
“어렸을 때 자장가처럼 아버지께서 해 주신 이야기들이 있어요. 그때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동화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가 해 주신 이야기의 대부분은 저주와 관련된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특히 기억나는 내용 중에 얼음 알갱이로 만들어진 안개가 있는 사막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 안개는 독액으로 이루어진 강으로 연결된 통로라고 했고요. 아마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 안개가 그 강과 연결되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독액의 강 너머엔 어쩌면 라딘의 서의 열쇠가 잠들어 있을 테고.
“갈수록 태산이군. 이번엔 안개 너머에 존재하는 독액의 강이라니. 이러다 우리 물건을 찾기도 전에 다 죽는 것 아냐?”
세이지가 머리에 쥐가 난다는 듯 두 손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난 멍청해서 그런지 하나도 모르겠어. 길을 찾는 건 대장이랑 로엔 님이 해. 나는 그 독액의 강으로 가는 중에 나타나는 적들을 모두 헤치울 테니까.”
세이지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옆에 앉아 있던 라이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럼 독액의 강으로 가려면 이 안개를 따라가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야 할 것 같아. 하지만 이렇게 짙은 안개로 덮여 있어서 길을 찾을 수 있을지나 모르겠어. 안개 속에서 길을 알려 주는 나침반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로엔이 품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나침반을 꺼냈다. 지금껏 헤르파 사막을 횡단하던 내내 멀쩡하던 나침반의 바늘이 고장이라도 난 듯 멈춰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모르겠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멈춰 있었거든.”
“대체…… 어떻게. 그럼 이제 방법이 없는 거야?”
세이지의 말에 로엔은 고갤 끄덕였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들에게 모래 늪은 지도에 표시된 대로 위험했고, 또 아무것도 모르는 미지한 땅이었다.
안개를 따라 한 발짝, 한 발짝 걸어가는 수밖엔 방법이 없었다.
“이거 왠지 안개가 더 짙어지는데? 갈 거면 서둘려야 하는 것 아냐?”
세이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다들 그 말에 동의하듯 부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게 방법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담담하게 들리는 진의 목소리에 로엔이 그를 돌아보았다.
진은 품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더니, 일행이 모두 볼 수 있게 앞으로 내밀었다.
“뭐예요?”
“나침반이야. 모리의 말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길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하더군.”
순간 세 사람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이라도 본 듯 번뜩였다. 진은 다시 한 번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진이 고갤 끄덕이며 상자를 건넸다. 낡은 상자를 받아 든 로엔은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예상대로 나침반이 들어 있었다. 다만 최근엔 사용한 적이 없는지 나침반의 뚜껑이 먼지와 묵은 때로 덮여 있었다.
“닦아야 할 것 같은데.”
깨끗한 천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라이칸이 서둘러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고마워.”
손수건을 받아 든 로엔은 나침반의 뚜껑에 낀 뿌연 먼지를 닦아 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어느 순간 멈췄다.
“어, 이건…….”
로엔이 모두가 볼 수 있게 나침반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팽글팽글 돌던 나침반의 바늘이 한쪽 방향을 향해 멈췄다.
안개를 뚫고 이어지는 푸른빛은 안개 너머의 어떤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눈으론 보이지 않는 길을 알려 준다고 하더니. 이런 뜻이었군.”
모리가 말했었던 것 같다. 이 나침반을 주며, 이건 신성한 불의 주인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정말 내가 노아스의 주인인 건가? 아버지, 로이슈덴 공작가가 검은 드래건의 혈족이었던 겁니까?’
진의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새롭게 알게 된 진실로 인해, 이젠 그가 믿어 왔던 것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버지가 제게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게 한 의미가 정말 황좌에 대한 탐욕이었는지, 아니면 그를 황제로부터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인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