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순식간에 그에 의해 뒤로 눕혀진 로엔은 몸을 내리누르는 나른한 무게감에 허릴 비틀었다.
“저녁은 조금 뒤에 먹어야 할 것 같군.”
진이 서둘러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왔다. 로엔의 새하얀 목과 뽀얀 가슴에 입술을 묻었다.
붉게 핀 혈독화의 꽃이 짙은 향을 뿜어냈다. 진의 붉은 혀가 가슴 위를 진득하게 빨았다.
“아음, 아아…….”
또다시 찾아온 농밀한 열기에 로엔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가느다란 허리가 야릇하게 비틀렸다.
이미 쾌락으로 젖은 몸은 다시 시작되려는 열기에 잔뜩 흥분한 채였다. 다리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모리의 대장간에서 화염처럼 일렁이던 불꽃이 제 몸속에 들어앉은 느낌이었다. 몇 번이나 그와 몸을 겹치고 욕망에 몸을 떨어도 뱃속에 들어앉은 불은 꺼질 줄을 몰랐다.
가슴 주변을 배회하던 그의 입술이 나비처럼 로엔의 온몸에 흔적을 남겼다.
진이 느릿하게 로엔의 젖은 내벽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느른하게 시작된 탐욕이 그녀의 몸을 꿰뚫는 순간, 광포한 맹수처럼 온몸을 집어삼켰다.
진이 로엔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느릿하게 목덜미를 쥐었다. 그리곤 신음을 삼키는 로엔의 입술에 혀를 얽어 왔다.
두 사람의 몸이 관능으로 흔들렸다. 농밀하게 얽힌 하체가 연신 서로를 찾아 들며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하아, 진……. 천천히, 으음…….”
집요하게 여린 살을 헤집어 대는 감각에 로엔은 아랫배에 힘을 주며 허릴 비틀었다. 발끝까지 이어지는 쾌락에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두 사람은 끊임없이 몸을 겹치며 서로를 탐했다. 어느새 밤이 깊어지고 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변해 자욱한 안개로 뒤덮일 때까지 서로를 품에 안았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열기가 잦아들고 기분 좋은 나른함에 잠이 빠져든 후에야 모래 늪에 도사리고 있던 힘이 서서히 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오아시스는 물론 모래 늪에 안개가 짙게 깔려 있었다.
분명 어젯밤까진 쾌청하게 맑았던 하늘이었다. 하지만 새벽빛이 어스름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자, 어둠이 밀려 나간 자리엔 자욱한 안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잠에서 깨어난 세이지는 안개를 보곤 경계심을 잔뜩 내비치며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상황에선 기를 쓰고 신경을 곤두세워 봐도 딱히 방법은 없었다.
“대체 이게 다 뭐야? 하필 지도도 없는 곳에 안개까지 끼다니.”
세이지는 욕설을 삼키며 천막에서 나와 모닥불을 피웠다.
그나마 불을 피우자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었던 시야가 조금은 밝아지는 듯했다.
그때, 인기척이 들리더니 새벽부터 어딜 다녀온 것인지 안톤이 느릿느릿 걸어오는 게 보였다.
“나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대장 다음으로 처음이네. 어딜 다녀오는 거야? 새벽에 안개까지 껴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데.”
“아, 세이지 님이셨네요.”
세이지가 일어나 있을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안톤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 표정 변화에 세이지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안톤이 평소보다 예민해 보여서였다.
“뭐야, 그 반응은?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표정이잖아.”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는데 안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무슨 그런 말씀을. 사막에서 훔칠 게 뭐가 있다고. 그나저나 세이지 님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나야 뭐, 사막에 오니 전쟁터에 있던 버릇이 나오는 모양이야. 사람을 의심하고 적을 감지해 내는 감 말이야.”
“기뻐해야겠네요. 모래 늪에서 꼭 필요한 능력일 테니까요. 그런데 로엔 님과 공작님은 아직이신 모양이네요. 평소보다 더 늦으시는 것도 같고.”
“당연히 밤새 화해를 했을 테니 늦게 돌아오지 않겠어?”
세이지의 말에 안톤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야 그렇지만. 뭐, 두 분이 화해만 하신다면 좋겠네요. 요 며칠 살벌한 분위기에 심장이 오그라드는 줄 알았거든요.”
“뭐, 그렇지.”
그러다 세이지의 시선이 안톤의 어깨에 붙어 있던 검은 털에게 닿았다.
“뭘 붙여 오고 그래. 밖에 나갔다가 전서구라도 날린 거야?”
세이지가 손을 뻗어 검은 털을 떼어 주려 하자, 안톤이 유난히 놀란 얼굴을 하며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세이지의 미간이 가늘어졌다.
“뭐야, 불쾌하게. 내가 신분이 천하긴 해도 그렇게 정색할 정도로 더럽진 않거든?”
세이지가 입가를 비틀며 안톤을 응시했다. 그러자 안톤이 사색이 된 얼굴로 손을 가로저으며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했다.
“불쾌하게 해 드렸다면 죄송합니다, 세이지 님. 갑자기 손을 뻗으셔서 놀라서.”
“걱정 마. 전쟁터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긴 했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죽이진 않거든.”
세이지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그러고는 뭔가 부탁할 일이라도 있는 듯 안톤을 바라보았다.
“정말 전서구라도 보내고 온 거면, 나도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데. 급하게 전갈을 보낼 사람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세이지 님. 그렇지 않아도 전서구를 띄울까 해서 밖으로 나갔는데 안개가 껴서…….”
보내지 못했다는 뜻인 것 같았다.
“쳇, 안개가 문제군.”
세이지는 아쉬운 듯 말하곤 아침 준비라도 하려는 듯 모닥불에 나뭇가지를 던져 넣었다. 그는 라이칸의 천막 쪽으로 시선을 주며 눈살을 찌푸렸다.
“라이칸이 좀 늦네. 어디가 아픈 건가? 이런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세이지가 고갤 갸웃하며 라이칸의 천막을 주시했다. 귀 기울여 보아도 도무지 천막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안톤이 앞을 막아서자 세이지가 신경질적으로 안톤을 옆으로 밀쳤다. 평소와 달리 유난스럽게 구는 안톤에게 기분이 상했다.
“내가 뭐, 라이칸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 말고 저리 비켜 봐. 감이 좋지 않으니 직접 살펴봐야 안심이 될 것 같으니까.”
“이상하다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는데?”
세이지의 날카로운 물음에 안톤은 혀가 굳은 듯 선뜻 답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세이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안톤을 지나쳐, 라이칸의 천막으로 다가갔다.
‘오늘따라 참 이상하단 말이야.’
세이지는 안톤의 행동을 곱씹으며 천막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안에서 천막을 열고 라이칸이 밖으로 나왔다.
“뭐야? 괜찮아?”
유독 창백해 보이는 라이칸의 얼굴을 보며 세이지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모래 늪에 들어오자마자 탈이 난 것 같아 불안했다.
“몸이 무겁긴 한데, 괜찮아.”
“그렇다면 다행이고. 와서 아침이나 먹어. 얼른 만들어 줄 테니까.”
세이지가 다시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걸 보며 라이칸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안톤 님 괜찮으십니까?”
모닥불 쪽으로 걸어가다 날이 선 얼굴로 세이지를 쏘아보고 있는 안톤을 발견하곤 라이칸이 말을 건넸다.
“별일 아닙니다. 저는 로엔 님과 공작님이 오시기 전까지 천막에서 조금 쉬고 있겠습니다. 피곤하네요.”
안톤이 서둘러 천막으로 걸어가 버리자, 라이칸이 세이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일은 무슨. 오히려 내가 불쾌해하는 상황이라고.”
세이지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안톤이 사라진 쪽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의 안톤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굉장히 예민해 보였다.
“모래 늪에 들어와 불안한 모양이야. 안개도 끼기도 했고.”
세이지의 말에 라이칸 역시도 고갤 끄덕였다.
세이지는 어제 먹다 남은 음식을 그릇에 덜어 라이칸에게 건넸다. 그리곤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짙게 낀 안개를 응시했다.
‘쯧, 큰일인데. 이러다간 적이 공격해 와도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죽게 생겼군.’
“대장이랑 로엔 님은 걱정 마. 둘이 함께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차라리 우리가 더 문제지.”
“뭔가 느껴지는 게 있는 모양이군.”
라이칸의 물음에 세이지가 어깰 으쓱해 보였다.
“아직은 모르겠어. 다만 대장과 로엔 님 옆엔 켈피가 있으니까.”
“켈피라면 신탁에 등장하는 그 전설의 동물을 말하는 건가?”
“맞아. 그놈은 전쟁터에서도 대장하고 함께였거든. 정말 귀신같은 놈이야. 적이 오는 걸 얼마나 빨리 알아채는지, 몇 번이나 대장의 목숨을 살렸지. 나도 포함해서.”
마치 제 말이라도 되는 듯 자랑을 늘어놓자, 라이칸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나는 게 보였다.
“로이슈덴 공작가에 마구간이 있다고 하던데. 나도 꼭 한 번 보고 싶군.”
“나도 딱 한 번 가 본 게 다야. 하지만 로엔 님에게 부탁하면 가능하지 않겠어? 우리 대장이 로엔 님에겐 껌뻑 죽잖아. 완전 목줄 달린 맹수라니까.”
“누가 목줄 달린 맹수라고, 세이지?”
안개를 뚫고 들려온 진의 목소리에 세이지의 얼굴에 반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누구긴 누구겠어. 여기서 주인 있는 맹수가 대장 말고 누가 있다고.”
겁도 나지 않는지 뻔뻔하게 말하곤 진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웃는 세이지를 보며, 라이칸은 긴장했다. 안개 속에서 말을 타고 나타난 진 로이슈덴의 표정이 서늘했던 것이다.
“네 목줄은 내가 쥐고 있다는 걸 잊지 마라, 세이지. 여기서 선을 더 넘어서면 확 목을 졸라 버리는 수가 있으니까.”
다행히 로엔이 그만하라는 듯 진의 옆구리를 찔러 대는 통에 경고 정도로 끝날 모양이었다.
속 편하게 웃는 세이지와는 반대로 라이칸이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톤은?”
진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린 로엔이 안톤이 자리에 없는 걸 확인하곤 주위를 살폈다.
“새벽부터 일어나 전서구를 띄운다고 돌아다니더니, 피곤한 모양이야. 좀 쉬겠다고 들어갔어.”
세이지의 말에 로엔이 고갤 갸웃했다. 지금 상황에서 딱히 전서구를 띄울 이유가 없어서다.
오히려 여행이 시작된 이후 최대한 은밀하게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안톤의 행동은 의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