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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83화 (184/201)

183화

순간 지독한 소유욕이 심장을 삼켰다.

로엔은 망설임도 없이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입고 있던 겉옷과 바지, 그리고 신발을 벗어 던진 후 린넨으로 된 속옷만 입고는 무작정 물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첨벙, 첨벙.

로엔이 물살을 가르며 그에게 다가가자 진이 고갤 들었다. 그녀를 발견한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놀란 듯 일렁이더니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모습에 로엔은 초조해졌다. 그가 저를 두고 가 버릴 것 같았다.

“기다려요. 할 말 있어요.”

“난 없어.”

진이 로엔에게 등을 돌리고 물 밖으로 나가려는 것을 보며 로엔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겁쟁이.”

순간 진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추더니 그가 미간을 구기며 다시 로엔 쪽으로 돌아섰다.

“도망치지 마요. 여기서 날 놓고 가 버리면 다신 당신 안 봐요.”

뻔뻔하기까지 한 제 협박이 통할까 생각했지만, 다행히 통했다. 요 며칠 그녀를 외면하던 것과는 달리, 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안도한 것도 잠시, 그에게 다가간 로엔은 다짜고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가 도망갈 것 같은 불안함이 만들어 낸 행동이었다.

그녀의 손길에 진이 흠칫 몸을 떨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듯 몸을 움직였다.

“도망치면 다신 안 본다고 했죠?”

로엔이 다시 경고를 하자, 진이 어쩔 수 없이 얌전해졌다. 마치 목줄을 맨 맹수처럼 보였다.

“놓고 말해. 도망 따윈 안 갈 테니까.”

“그걸 어떻게 믿어요. 요 며칠 나를 없는 사람처럼 굴어 놓고. 안 돼요.”

로엔은 뾰족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는 단호하게 고갤 가로저었다. 그리곤 그것도 마음에 놓이지 않아 그의 팔을 양손으로 붙잡아 단단히 옭아맸다.

로엔을 내려다보며 난처한 듯 미간을 찌푸리던 진이 체념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알았으니 얼른 말해.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자꾸 제 시선을 피하는 진을 보며 로엔은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막상 그를 마주하자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더욱이 그가 눈앞에 상체를 드러낸 채 서 있는 것을 보니 대화보다는 다른 것이 더 하고 싶었다.

정말 욕망에 눈이 먼 짐승도 아니고. 그와 마주하자마자 그를 만지고 키스하고 싶어졌다.

‘하아, 제발 진정해.’

로엔은 뜨거운 숨을 고르며 냉정해지려 애썼다.

가까스로 그의 몸에서 눈을 떼곤 고갤 들자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진과 눈이 마주쳤다. 제 욕망을 읽기라도 한 듯 그의 입매가 잔뜩 굳어 있었다.

“이건 본능 같은 거예요. 아름다운 조각품을 보면 자연히 눈이 가는 것과 같아요. 그러니 이건 불가항력과도 같은…….”

하아, 미쳤다. 대체 왜 이런 쓸데없는 변명을 늘어놓는 건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가 제 속마음을 눈치챈 것 같아 민망함에 나온 말들이었다.

“누가 뭐래? 그나마 다행이군. 내 얼굴과 몸은 마음에 든다니.”

진이 불통하게 말하곤 고갤 돌렸다. 날카로운 턱 선과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매가 그가 화가 나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진, 타라의 연은…….”

로엔이 타라의 연을 입에 담는 순간, 진의 입매가 눈에 띄게 굳어지는 게 보였다. 짐작대로 그가 화가 난 이유가 타라의 연 때문인 듯했다.

“그것이라면 이제 됐어. 결혼을 하면 부부끼리 타라의 연을 주고받는다길래 나도 받아 볼까 생각했던 것뿐이야.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도 아니니, 네가 주기 싫으면 억지로 주지 않아도…….”

로엔이 손으로 그의 입을 가로 막았다.

“그만! 나부터 말할게요. 자꾸 중간에 말을 자르니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을 당신에게 할 수가 없잖아요.”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고, 잠시 진은 이 상황이 마땅찮은 듯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이내 평정심을 되찾은 모양인지 담담한 얼굴로 로엔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제 입을 막은 로엔의 손을 떼어 내며 두 사람 사이에 간격을 벌렸다.

“좋아. 이제부터 입 닥치고 있을 테니까 말해 봐.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거친 언사에서 그의 기분이 바닥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지만, 로엔 역시도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더욱이 그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가 저 때문이란 걸 알기에 사소한 것까지 걸고넘어지고 싶지 않았고.

“잘 들어요. 우선은 타라의 연을 칼라일에 놓고 왔다고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로엔의 사과에 진이 입매를 굳혔다. 그녀의 사과가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하지만 이유가 있었어요.”

“……”

진은 거짓말까지 할 정도로 대단한 이유가 뭐냐고 입 밖으로 묻는 대신, 듣고 있으니 더 해 보라는 듯 고갤 끄덕였다.

“타라 여신의 축원의식이 있었던 마지막 날, 대신관이 했던 말을 기억할 거예요. 신탁에 대해서 말했던 것이요.”

“기억나.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든 원통형의 물건에 대한 내용이었지.”

“그랬었죠. 그리고 그것과 함께 또 다른 말을 했었어요. 그것도 기억나나요?”

“아니. 특별히 생각이 나는 건 없는 것 같군.”

진이 기억을 더듬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지 천천히 고갤 가로저었다.

“대신관이 그러더군요.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든 크립텍스와 함께 제 타라의 연을 보았다고. 그리고 타라의 연에 붉은 피가 묻어 있었다고 했어요. 불길하다고 하면서요.”

“피라고?”

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네. 그래서 망설였어요. 당연히 첫날밤 의식에 따라 타라의 연을 당신에게 줘야 했지만, 대신관이 했던 불길하다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어요. 그래서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지금 날 걱정했다는 건가? 내가 네 타라의 연을 갖고 있다고 다칠까 봐 두려워, 내게 거짓말까지 해 가며 타라의 연을 주지 않았다고?”

진의 말에 로엔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그래요. 하지만 제 의도와는 달리 거짓말을 한 건 사실이니, 당신한테 미안해요. 그래도 위험할 수 있는 물건을 당신에게 줄 순 없었어요.”

“그럼, 넌?”

“네?”

로엔은 의아한 듯 진을 응시했다.

“저야 제 물건이니 당연히…….”

“그렇게 따지자면 네 타라의 연은 우리가 결혼한 것과 동시에 네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된 셈이지. 너도 말했잖아. 어차피 결혼과 함께 네가 가진 타라의 연은 나에게 주려 했다고.”

“그거야 그렇지만…….”

“아닌가?”

“……”

로엔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맞는다고 인정하면, 제 타라의 연을 그에게 줘야 할 판이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물건을.

로엔이 입을 꾹 다물자 그녀의 의도를 알아챈 듯 진이 입을 열었다.

“그걸 내게 줘.”

“진?”

“분명 전에 네 입으로 준다고 약속했던 것 같은데. 벌써 마음이 변한 건가?”

로엔은 대답 대신 고갤 가로저었다. 당연히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줄게요. 당연히 줄 생각이었어요.”

“언제? 네 말대로 모든 게 끝나고 나면?”

“네.”

“그럼 난?”

“네?”

“그럼 난, 네가 위험할지도 모르는 물건을 갖고 있는 걸 마음 편히 지켜봐야 하는 건가? 너는 내가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진이 짓씹듯 말하며 로엔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그래 줬으면 해요. 힘들겠지만 날 위해서…….”

“로엔.”

진이 로엔의 이름을 부르며 이번엔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리곤 시선을 피하지 못하게 그녀의 턱을 붙잡고는 그를 보게 했다.

필사적으로 엇갈리며 시선을 피하던 로엔의 눈동자가 기어이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에 붙잡혔다.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보단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다.

“내가 너에게 그렇게 못 믿을 사낸가? 네가 날 걱정하고, 날 보호해 주고 싶을 만큼 내가 그렇게 약한 존재인가?”

“아니에요. 한 번도 당신을 약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하지만 그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가 타란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인 것과는 별개로, 그가 다치는 게 싫었다. 그녀가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해서라도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러니 이건 약하고 강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였다.

“나 때문에 당신이 위험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왜 안 되지? 나에겐 널 위해 다치는 게 커다란 영광이다. 나에겐 정복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것보다 널 위해 목숨을 거는 게 더 중요해져 버렸거든. 그것이 내가 네 사내라는 증거고, 나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런데 너는 왜 내 권리를 네 마음대로 빼앗으려 하지?”

진의 말에 로엔이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안 된다고 해야 했지만, 뜨거운 감정이 밀물처럼 밀려와 목을 아프게 조였다.

“어떻게…… 그게 영광인지 모르겠군요. 특권이라니. 당신은…….”

가까스로 침착함을 흉내 내며 말했지만, 결국 로엔은 말을 끝맺지 못한 채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와 지금 눈을 마주한다면 제 감정을 고스란히 들켜 버릴 터였다.

“로엔, 그러지 말고 제발 날 봐. 네가 말했었지? 내게 도망치지 말라고. 그러니 너도 도망치지 마. 나도 더는 너를 두고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니까.”

로엔이 고갤 들어 다시 진을 응시했다. 올곧게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정말 특권이라고 생각하나요? 진심으로 정복 전쟁보다…….”

“로엔, 나는 절대 거짓은 말하지 않아. 그러니 날 믿어.”

“……”

“그리고 네가 잊은 것 같아, 다시 한 번 말하지. 나는 노아스의 주인이었던 검은 드래건의 혈족이다. 내 몸속에 봉인되어 있는 드래건의 힘이 있는 한, 타란 대륙에서 날 죽일 수 있는 자는 없다. 그것이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일지라도.”

진의 단호한 목소리에 불안으로 떨리던 로엔의 마음이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알고 있어요. 타란 대륙에서 당신을 해할 자가 없다는 걸요.”

“그래. 그러니 이제 타라의 연을 내게 줘. 이젠 정말 내 것을 가져야겠어.”

진이 단호한 눈빛으로 로엔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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