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본능적으로 타라의 연을 뒤로 감춘 뒤 천천히 고갤 돌렸다. 그러자 진 로이슈덴이 차가운 얼굴을 하곤 로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에 로엔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진? 언제…….”
로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이더니, 옆에 놓여 있던 짐을 들고는 동굴을 빠져나가 버렸다.
“진, 잠깐만…….”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뒤쫓기 시작했다.
동굴을 벗어나기 직전 로엔은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진이 그녀의 손을 쳐 냈다.
“엇!”
아픔보단 놀란 게 더 컸다. 진 역시 자신의 행동에 놀란 듯했지만 이내 무표정한 얼굴 아래 감정을 숨겨 버렸다.
로엔은 은둔자의 숲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후로 그녀에게 보인 적 없는 냉랭한 기운에 입술을 깨물었다.
‘어쩌지? 분명 오해를 했을 텐데…….’
“진?”
지금 당장 오해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말을 해야 했다. 제가 그에게 타라의 연을 주지 못한 이유를 설명을 해야…….
“내게 더 할 말이 남아 있나? 나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진의 목소리가 로엔의 심장을 옥죄었다.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날카로운 검이 되어 그녀에게 날아와 박혔다.
늦은 것 같았다. 너무 미적거리다가 기회를 놓쳐 버린 것 같았다.
진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얼굴로 로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에 로엔은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나는, 그러니까 이건…….”
로엔이 손에 쥐고 있던 제 타라의 연을 진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그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리더니 싸늘하게 말했다.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으니 더는 변명할 필요 없다. 그리고 더는 들을 이유도 없고.”
진이 무심한 눈빛으로 로엔의 손에 들려 있는 붉은색의 타라의 연을 보더니, 이내 고갤 돌렸다.
협곡을 따라 걸어가는 그의 등에선 지독히도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아, 어떡하지. 너무 늦어 버렸어.’
로엔은 허망한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진을 바라보았다. 손에 쥔 타라의 연이 아프게 손바닥에 박혀 들었다.
진즉 줬어야 했다. 세실의 말처럼 그에게 제 마음을 전했어야 했다.
후회로 심장이 욱신거렸다. 눈가가 뜨거웠다.
아니, 혈독화가 새겨진 심장이 타는 듯 아팠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를 놓칠 것만 같았다.
* * *
모래 늪으로 향하는 길에 무거운 침묵이 계속되었다.
대부분이 진의 무감한 눈빛과 서늘함 때문이었지만, 말을 달리는 내내 로엔의 시선이 진의 등에 고정되어 있음을 일행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뭐야, 두 사람? 설마 싸웠어?”
반나절이 지나지 않아 세이지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냉랭한 기운을 알아차리곤 어이없다는 듯 툭 하고 말했다.
하지만 평소와 달리 진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자릴 떴고, 로엔은 입술만 깨문 채 진의 등을 하염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제길, 제발 화해 좀 해. 숨 막혀 죽을 것 같으니까.”
그날 밤, 세이지가 답답하다는 듯 두 번째 말을 뱉어 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냉기는 사라질 줄 몰랐다. 오히려 진의 태도가 더욱 서늘해질 뿐이었다.
그리고 급기야, 세이지가 사정하듯 두 사람을 보며 막말을 쏟아 냈다.
“내가 잘못했어. 두 번 다시 두 사람한테 뭐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 화해 좀 해. 그냥 닭살을 떨어. 그게 더 나을 것 같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세이지도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진과 로엔의 사이가 좋아졌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진은 더 철저히 로엔을 피했고, 로엔은 더욱 안절부절못했다.
몇 번이나 기회를 틈타 말을 걸려 했지만, 진은 그런 로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일행이 함께 밥을 먹을 때에도 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혼자 먹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밤에는 같은 천막에서 잠을 잔다는 사실이었다.
대신 서로 등을 돌린 채 최대한 몸이 닿지 않게 천막과 천막 끝에 붙어 자긴 했지만, 그래도 같은 공간에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아마 진이 따로 자겠다고 천막을 나갔다면 더는 참지 못했을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가면 모래 늪으로 들어가는 입구야. 어떻게 할까?”
앞서 달리던 세이지가 말을 멈추곤 일행을 돌아보았다. 모래 늪이 어떤 곳인지 아직 정확히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들어가는 게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그러니 오늘 밤은 모래 늪의 입구에서 보내고 새벽이 되면 이동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차피 들어가야 할 곳이다. 지체해 봤자 시간만 늦어질 뿐이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모래 늪으로 들어가, 안전한 곳에 자릴 잡고 밤을 보내는 편이 나아.”
진의 의견에 로엔을 비롯해 일행이 고갤 끄덕였다. 하룻밤 늦게 들어간다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생기는 게 아니란 사실을 일행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행은 다시 말을 달려 모래 늪 안으로 들어섰다.
로엔은 단호한 표정으로 말을 달리는 진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동안 로엔은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지금껏 제 마음을 솔직히 인정하고 전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0년 동안 가시를 세우고, 귀족들의 눈을 속이면서 모든 이들을 적으로만 간주하며 살아왔다.
암살자의 검이 바로 목전에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진심을 전하는 방법은 솔직함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래서 로엔은 진을 놓쳤고, 이번엔 절대 실수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모래 늪에 한 번 발을 들인 것처럼, 이젠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마치 진 로이슈덴과 제 사이처럼.
그러니 더 늦기 전에 그와 얘길 해야 했다.
“시작부터 모래 수렁이 빠질 줄 알았는데, 오아시스라니. 운이 좋은 건가?”
다행히 모래 늪으로 조금 들어가자 오아시스가 나타났다.
세이지의 말처럼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릴 생각만 했는데, 눈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나자 반가움이 먼저 들었다.
“긴장했었는데 막상 들어오니 안심이 되네요. 오늘도 불을 피워 음식을 준비할 수도 있을 테고. 꼭꼭 숨겨 놓았던 소시지와 햄을 구워 먹을 때가 된 것 같네요.”
안톤이 마지막 만찬이라도 된 듯 준비해 온 비밀 재료를 꺼내 놓기 시작했다. 아마 진과 로엔 사이에 감도는 냉랭함을 조금이라도 풀어 보려는 노력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안톤의 노력은 진의 한마디로 여지없이 무너졌다.
“나는 주위를 살펴보고 올게. 저녁은 먼저 먹도록 해.”
말에서 내린 진은 요 며칠 그랬던 것처럼 일행에게서 떨어져 어느새 모습을 감추었다. 로엔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였다.
그런 그를 보며 로엔은 표정을 굳힌 채 세 남자를 향해 말했다.
“저도 오늘은 오아시스 좀 둘러봐야겠어요. 돌아보다 과일을 발견하면 따 올게요. 저녁은 먼저 드세요.”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로엔에게 향했다. 모두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다행히 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다녀오세요, 로엔 님.”
“저녁은 걱정 마시고, 천천히 다녀오셔도 됩니다.”
로엔은 라이칸과 안톤에게 고갤 끄덕여 보였다. 그리곤 우선은 진이 간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나며 서둘러 진이 갔던 방향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쪽이 아니라 저쪽이지. 그래, 이쪽.”
세이지가 로엔의 팔을 붙잡더니 방향을 틀어 진이 간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어, 나는…….”
“괜찮아, 괜찮아. 내가 보기에 저쪽보단 이쪽에 과일 나무가 아주 많을 것 같거든. 내 촉은 확실하니까 믿어도 좋을 거야.”
세이지가 당황한 채 입술만 달싹이는 로엔의 등을 슬쩍 떠밀었다. 그리곤 그녀의 뒤를 따라 걸으며 나직이 속삭였다.
“뭣 때문에 싸웠는지 모르지만, 제발 이 기회에 화해 좀 해. 분위기 좋으면 아예 내일 아침에 돌아와도 되고. 천막이랑 음식도 좀 챙겨 줄까?”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로엔이 얼굴을 붉혔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몸의 대화라도 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굳이 그럴 필욘 없을 것 같네요. 곧 돌아올 생각이라서. 과일만 따면.”
“그래, 알았으니까 뭘 하든 혼자만 돌아오지 마.”
로엔은 세이지의 배웅까지 받으며 진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대놓고 둘이 밤이라도 보내고 오라는 말이라 민망해 죽을 것 같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등을 떠밀어 주는 세이지가 고마울 지경이었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그 짧은 사이 진을 놓쳐 버린 로엔은 쓰고 있던 검은 천을 벗었다.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쓴 천을 벗자 풍성한 황금빛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천천히 숨을 내쉴 때마다 싱그럽고 청량한 공기가 폐 속을 가득 채웠다. 우울했던 기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얼마나 갔을까? 건조한 사막 한가운데에서 물 냄새가 났다.
조금 더 가자 풀숲에 숨기고 있던 작은 못이 보였다. 물을 보니 씻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서둘러 못으로 다가가자 짐작대로 그곳에 진이 있었다. 사막을 횡단하면서 입었던 검은색 로브를 벗어 던진 그는 바지 하나만 입고 상체를 드러낸 채였다.
그는 로엔이 뒤따라올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깨끗한 물속에 들어가 몸을 씻고 있었다.
“아…….”
로엔은 걸음을 멈추곤 멍하니 그를 응시했다. 은둔자의 숲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가 떠올라서다. 그때도 폭포수에 서 있던 그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었다.
지금도 젖은 머리카락에서 흘러내린 물방울이 굵은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려, 넓고 탄탄한 어깨 뒤로 사라졌다. 이제 막 해가 지려는 듯 붉은 석양빛이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로엔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그의 가슴 근육에서 배로 이어지는 군살 없는 몸으로 향했다. 치골에 걸친 바지 아래로 숨겨진 근육이 야릇한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내 거야. 아무에게도 주고 싶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