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진?”
바로 앞까지 다가온 로엔이 걸음을 멈췄다. 손에 들고 있는 야광석을 들어 올려 바위 쪽을 비추자, 바위 아래 앉아 있는 진의 모습이 보였다.
“여기 있었네요. 혹시 제가 방해한 거면 돌아가고요.”
뻔히 로엔이 다가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진은 그녀가 가까이 올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그 말은 그녀와 얘길 나누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야광석의 빛 너머로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깊고 짙은 눈동자를 보자 로엔 역시도 덜컥 겁이 났다.
그때, 사막 쪽에서 서늘한 냉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왔다. 그 차가움에 로엔이 몸을 떨자, 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이상했다. 그가 손을 내민 것뿐인데 조금 전까지 느꼈던 한기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았다.
로엔이 그의 손을 잡고는 그가 앉아 있는 바위 옆에 앉았다. 이내 익숙하게 진의 팔이 그녀의 허릴 감싸고는 바짝 당겨졌다.
그의 온기가 몸에 닿자, 그제야 추위는 물론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야광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로운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진, 아까 했던 말 중에서…….”
“그건 신경 쓸 것 없어, 로엔.”
진은 로엔이 하려는 말이 뭔지 깨닫곤,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는 듯 말을 끊었다.
사실은 잔뜩 겁을 집어먹은 겁쟁이가 되어 버린 상태라, 지금은 그녀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는 쪽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분명 그와 같은 감정이 아니라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네?”
“괜찮다고. 그리고 우리 결혼에 대해선 모든 일이 끝난 다음에 다시 상의하는 게 좋겠어.”
“아, 우리 결혼이요. 그렇죠.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있으니까.”
로엔은 조금 실망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동굴을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를 찾으면 꼭 할 말이 있었는데, 막상 진이 다음을 기약하자 내내 마음속에 담아 왔던 말들이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그렇지. 더 중요한 게 있었지.”
이미 알고 있었다. 로엔 록스버그에겐 가문의 저주가 먼저라는 것쯤은. 그래서 그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했던 것도 다 알고 있었는데…….
‘다 아는데도, 그런데도 왜 이렇게 속이 쓰린 건지.’
진은 어둠 속을 응시한 채 미간을 구겼다. 정말 속 좁게 구는 스스로가 못마땅했다. 하지만 감정은 이미 흘러넘쳐 뾰족한 가시를 만들어 냈다.
“먼저 들어가는 게 좋겠군. 난 좀더 살펴볼 게 남아서.”
진이 로엔의 허리에 감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에 의해 밀려나게 된 로엔은 알 수 없는 상실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은 벽이라도 생긴 것 같았다. 겉으론 태연한 척 보였지만 미묘하게 어긋난 감정들이 자꾸만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그래서인지 평소처럼 왜 그러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로엔은 웅크려 있던 몸을 일으키며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뭔가 이렇게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발길을 돌리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날씨가 춥군. 들어가 쉬는 게 좋겠어.”
또다시 진이 로엔을 밀어냈다. 결국 로엔은 입술을 깨문 채 돌아서야 했다.
“그래요. 먼저 들어갈 테니 천천히 오세요.”
로엔은 손에 들고 있던 야광석을 그에게 내밀었다.
“아니야. 가져가. 나보단 네게 더 필요할 테니까. 난 지난 5년 동안 사막이 익숙해져서 야광석 없이도 충분히 괜찮거든.”
진에게 내밀어졌던 야광석이 다시 로엔의 손에 들어왔다.
분명 어두운 협곡을 지나 동굴까지 가는 동안 야광석이 필요했다. 그 역시 그걸 걱정해 거절한 것일 테고.
하지만 한 번 마음이 꼬이자 그의 모든 행동들이 그녀를 거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을 대로 해요.”
돌아서는 로엔의 목소리가 감정 없이 서늘했다.
그 서늘함에 놀라 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엔에게 손을 뻗기 위해 팔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이 로엔의 외투에 닿기 직전, 차마 붙잡지 못하고 허공중에 머물렀다.
진은 애써 주먹을 말아 쥐고는 팔을 내렸다. 그리곤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야광석의 불빛을 눈이 시리도록 가슴에 담았다.
“제길!”
더는 야광석의 불빛이 보이지 않자, 진이 낮게 욕설을 뱉어 냈다. 그리곤 바위 아래 털썩 주저앉았다.
자꾸만 어긋나는 감정이 가시가 돋아난 바늘처럼 제 심장을 콕콕 찔러 댔다.
서늘하던 바람에 어느새 모래가 섞이더니 순식간에 폭풍을 만들어 내며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동굴로, 로엔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진은 묵묵히 자리에 앉아 모래 폭풍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어느새 어둠 사이로 뿌연 모래바람이 보였다. 진은 새벽이 될 때까지 로엔에게 돌아가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도 폭풍이 일고 있었다.
* * *
밤새 협곡을 관통하던 서늘한 바람이 새벽녘이 되어서야 멈췄다.
로엔은 붉은 협곡의 동굴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모래 폭풍이 일으킨 먼지가 걷히길 기다리며 오전 시간을 보내야 했다.
전날 밤, 로엔은 진을 만나고 동굴로 돌아와 라이칸이 미리 만들어 놓은 가죽 천막에서 밤을 꼬박 새웠다.
진과 함께 사용하던 천막 안에 혼자 덩그러니 누워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느라 잠을 자지 못했다.
하지만 진은 밤새 계속된 모래 폭풍이 지나고 어스름한 새벽이 밝은 뒤에야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게선 서늘한 냉기를 머금은 바람 냄새가 났다.
그래서 왔냐고, 왜 이렇게 늦었냐고 묻지도 못하고, 잠든 척 눈을 꼭 감고 있었다.
그 역시 평소처럼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잠을 자는 대신, 처음으로 등을 돌린 채 몸을 뉘었다.
두 사람이 누우면 빠듯한 공간이라 떨어져 누울 수는 없었기 때문에 서로의 등이 맞닿았다.
로엔은 그와 거리를 실감하며 어깰 움츠렸다.
그 순간, 진이 흠칫 어깨를 굳히며 천막 끝으로 바짝 붙어 그녀와 거리를 최대한 넓히는 게 느껴졌다.
눈을 꼭 감고 있던 로엔이 흘끗 뒤를 돌아보았다. 제게 등을 돌린 채 닿지 않게 최대한 몸을 웅크리는 그에게 화가 났다.
지금 뭐 하는 거냐며 당장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가 뿜어내는 냉기에 입을 꼭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녀와의 거릴 두려 하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로엔은 설핏 잠이 들었다. 그리고 라이칸이 아침을 먹자며 깨우러 올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몸을 일으키다 이상하게 몸이 개운한 걸 느끼며 고갤 갸웃했다.
분명 잠이 들 때까지 골반과 허벅다리의 근육이 욱신거렸는데, 잠을 자고 일어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뭉쳐 있던 근육이 풀려 아무렇지도 않았다.
분명 어제저녁에 안톤이 준 약을 진이 가지고 있어 바르지 못하고 잤었는데…….
‘설마?’ 하며 바지를 걷어 올렸다. 그러자 건조하던 다리가 크림이라도 바른 듯 촉촉했다.
아마 제가 잠든 사이 진이 안톤이 준 약을 바르곤 새벽 내내 그녀의 다리를 주물러 뭉친 근육을 정성껏 풀어 놓은 모양이었다.
순간, 밤새 불쾌했던 마음이 썰물처럼 빠져갔다.
서둘러 바지를 내리곤 천막을 나가자 라이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작님은?”
로엔이 동굴 안을 살피며 진의 행방을 물었다.
“세이지와 함께 밖을 살피러 가셨습니다. 모래 폭풍으로 인해 지형이 바뀐 데다, 최대한 빨리 모래 늪으로 가는 길을 찾을 생각이라고 하셨습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 아니었어?”
“세이지 말로는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길을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협곡에서 게르피온의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협곡을 거치지 않고 바로 모래 늪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도 했고요.”
그제야 납득이 된 듯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안톤이 건네는 음식을 받아 들곤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선 진이 있는 곳으로 가서 어제 하려고 했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모래 늪에 가는 게 먼저인 듯했다.
식사를 마친 로엔은 라이칸과 안톤과 함께 진과 세이지가 돌아오기 전에 부지런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들이 돌아오면 바로 출발하기 위해서였다.
로엔은 가죽 가방 안에 짐을 챙겨 넣었다. 그러다 진이 준 단검을 가방에 넣어 뒀던 걸 떠올리곤 다시 꺼내 들었다.
진은 이 단검이 검은 드래건이 그 반려에게 주었던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제게 건넸고.
“과연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 건가?”
그에게 제 타라의 연도 건네지 못했는데.
그 생각이 무겁게 로엔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가방 깊숙이 넣어 두었던 타라의 연을 꺼냈다.
「네 것이다.」
「계약 결혼이든 뭐든 상관없이, 내게 결혼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다. 그러니 내 반려 역시 세상에 너 한 사람뿐이란 뜻이겠지. 그러니 네가 원치 않는다면 버려. 어차피 너 아니면 의미 없는 물건일 뿐이니까.」
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가시처럼 목구멍에 걸려 그녀를 괴롭혔다.
로엔은 제 손바닥에 놓인 붉은색의 타라의 연을 내려다보았다. 지금껏 미뤄 두고 있었는데, 그에게 건네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대신관의 신탁은…….’
그래,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그의 곁에 꼭 붙어 있으면 될 일이었다. 그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옆에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대장, 거기 서서 뭐 해?”
뒤에서 들려온 세이지의 목소리에 로엔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세이지가 대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진 로이슈덴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