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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80화 (181/201)

180화

로엔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진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 역시 이제 결단을 내려야 했다.

“대장은 어디 가는 거야?”

세이지가 빈 그릇을 들고 로엔에게 다가왔다.

“밖을 살피러 간다고 했어요. 바람이 심상치 않다고 하면서요.”

세이지가 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주더니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 며칠 사막의 하늘을 수놓았던 별들이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모래 폭풍이 오려는 모양이야. 하지만 여긴 괜찮아.”

세이지의 말에 로엔 역시도 고갤 끄덕였다.

모닥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들릴 뿐,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각자 생각에 빠져 있는 눈치였다.

“내가 괜한 오지랖인지 모르겠는데, 대장이 준 검을 돌려주려던 것 같은데.”

세이지가 로엔이 계속해서 만지작거리고 있는 단검에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로엔이 그에게서 단검을 숨기듯 슬쩍 소매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일부러 들은 건 아니야. 여기가 동굴이라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렸거든.”

“오히려 제가 폐를 끼친 모양이네요. 괜히 신경 쓰이게 해서 미안해요.”

로엔의 사과에 세이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상황이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에 일일이 마음 쓸 필요 없어. 그리고 사과는 내가 아니라 대장이 받아야 하는 것 아닐까? 보답 받지 못했잖아.”

세이지의 지적에 로엔은 혀가 굳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보답 받지 못한 마음이라니.

로엔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자, 세이지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로엔 님은 우리 대장을 좋아하지 않는 거야?”

여행하는 내내 봐 왔다시피 진 로이슈덴이 로엔 록스버그에게 흠뻑 빠져 있다는 사실엔 그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노골적으로 제 감정을 드러내는 것에 진 로이슈덴은 망설임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로엔 역시도 딱히 싫어하는 눈치도 아니었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니, 로엔이 먼저 진에게 마음을 표현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세이지가 아는 자들 중에서 사랑하는 마음과 상관없이 여인들에게 친절한 자들도 여럿 보아 왔다.

만약에 로엔 역시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라면, 대장이 불쌍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대장을 놓고 저울질하는 건 아니지?”

저울질이란 말에 로엔이 놀라 고갤 들었다. 세이지의 표정엔 어느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저더러 바람둥이가 아니냐고 묻는 건가요?”

“맞아. 우리 대장은 연애가 처음이라 밀당 같은 건 못해. 마음에 둔 여자가 있는데 다른 여자에게 눈길을 주는 건 더더욱 못하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우리 대장을 좋아해 주면 안될까? 객관적으로 봤을 때, 괜찮은 사람이거든. 그러니까…….”

“세이지, 당장 그 입 닥쳐! 무례하게 감히 어디서…….”

언제 왔는지 라이칸이 세이지의 멱살을 잡고는 일으켜 세웠다. 금방이라도 세이지에게 주먹을 휘두를 것처럼 라이칸의 눈동자엔 서늘한 분노가 차올라 있었다.

“뭐야? 나는 그냥 우리 대장이 걱정이 돼서…….”

“사과해. 아무리 네가 로이슈덴 공작의 사람이라도 해도 될 말이 있고, 하면 안 될 말이 있는 거다, 세이지.”

라이칸의 지적에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세이지가 입을 다물었다.

라이칸의 살벌한 표정을 보자 제가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 역시 진이 걱정돼 한 말이었지만, 라이칸의 입장에선 제 주인을 모욕한 일이니 화를 내는 건 당연했다.

세이지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고갤 끄덕였다.

“알았으니 이제 놔. 배운 게 없는 무식한 놈이지만, 잘못한 일에 대해서 사과할 줄은 알거든.”

세이지가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자, 라이칸이 멱살을 놓고는 한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그러자 세이지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로엔을 바라보았다.

“미안해. 내가 헛소리를 지껄였어. 제발 잊어 줘. 다신 주제넘은 짓은 하지 않을게.”

“세이지 님.”

그녀에게 허릴 숙이고 있는 세이지를 보며, 로엔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고갤 들자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평소 다정하던 눈빛엔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세이지 님이 뭘 걱정하는지 알겠어요. 하지만 이번엔 지나치셨어요. 저는 바람둥이도, 밀당 같은 것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세이지가 머릴 긁적이며 진짜 미안한 얼굴을 했다.

“사실 나도 알고는 있었어. 그냥, 우리 대장이 너무 매달리는 것 같아서. 지금까지 대장 곁에 있었지만 저렇게 남한테 저자세로 나오는 건 처음 보거든. 이건 완전 간도 쓸개도 다 빼 놓은 목줄 건 맹수 같잖아. 정말 미안해.”

세이지가 다시 한 번 사과한 뒤 제 자리로 돌아가 가죽 천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아.”

태연한 척 대답하긴 했지만 로엔의 얼굴에 떠오른 혼란스러움을 읽지 못할 라이칸이 아니었다.

결국 라이칸은 제 주인의 어두운 얼굴을 보며 오래전에 제가 했던 말을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예전에 제가 드렸던 말 때문에 로이슈덴 공작님에 대한 마음을 망설이고 계시는 것이라면…….”

“라이칸.”

로엔이 손을 뻗어 라이칸의 팔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곤 죄인처럼 서 있는 라이칸을 향해 천천히 고갤 가로저었다.

“상황이 변했다는 걸 너도 알고, 나도 알아. 그러니 그때 나눴던 일에 대해선 괘념치 않아도 돼.”

그제야 굳어 있던 라이칸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로엔 님, 로엔 님께서 변하셨다고 먼저 말씀하셨으니 저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로이슈덴 공작님이 믿을 만한 사람이란 것에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무엇이든 로엔 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하시면 됩니다. 저는 무조건 그 길을 따를 생각입니다.”

로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고마워, 라이칸. 나 좀 나갔다 와야겠어. 집에 돌아오지 않는 길 잃은 맹수가 있어서 내가 데리러 가야 하거든.”

라이칸이 주머니 안에서 야광석을 꺼내 로엔에게 건넸다.

“가지고 가십시오. 길이 어둡습니다.”

야광석을 받아 든 로엔은 라이칸에게 고맙다고 말하곤, 서둘러 진이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 * *

동굴에서 나온 진은 협곡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목적지를 정하고 나온 걸음이 아니라, 걷다 보니 협곡의 입구까지 와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얼굴을 비롯해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다행히 모래가 섞이지 않은 바람에선 바다 향이 났다.

근처에 소금 사막이 있어서인지 그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바다 향이 묻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막에 바다 냄새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진은 커다란 바위 아래 걸터앉았다. 그가 자릴 잡은 곳은 바위 안으로 움푹 들어가 있어 서늘한 냉기를 막아 주었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새삼스럽게 실망을 하다니.”

진은 로엔이 제가 준 단검을 내밀었을 때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무엇보다 로엔이 자신은 자격이 없다는 듯 단검을 내밀었을 때 기분이 상했다. 그 말의 의미는 명백히 그를 진정한 반려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와는 달리, 로엔은 두 사람의 결혼을 여전히 계약 결혼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그 많은 시간 서로를 품고 몸을 겹쳤지만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이다.

“내가 착각을 한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모리의 대장간에서 서로를 품에 안고 월식을 보며 소원을 빌었을 때, 로엔 역시도 제 마음과 같다고 여겼다. 처음은 어떨지 몰라도, 그땐 그랬다.

그녀를 닮은 아이를 원한다고 함축적으로 제 소원을 내비쳤을 때에도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그와 똑같은 감정이 흘러넘친 걸 보았었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한 번도 로엔의 입을 통해 좋아한다거나, 그 비슷한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끊임없이 로엔에게 제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로엔이 먼저 그에게 손을 내민 적은 없었다.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진이 욕설을 짓씹었다.

“제길, 비참하군.”

진은 난생처음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뭘 해야 로엔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차라리 전쟁터에서 적군과 싸우는 게 났겠군.”

씁쓸하게 웃으며 고갤 들자, 검은 하늘에 별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어느새 바람이 구름을 밀어낸 모양이었다.

몇 달 전에도 이곳 헤르파 사막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었다.

그때는 전쟁의 한가운데였고, 5년 동안 계속된 정복 전쟁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피 냄새가 진동하고 그의 손엔 사신의 검이라 불리는 ‘부러지지 않는 검’이 들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진?”

어둠을 뚫고 들려온 로엔의 목소리에 진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협곡을 따라 동굴로 이어진 길에 야광석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진, 거기 있나요?”

또다시 들려온 로엔의 목소리엔 초조함이 읽혔다.

진은 아직 제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로엔을 다시 마주할 생각을 하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레고 좋은 반면 심장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왜 사랑에 빠진 사내들이 용기 없는 겁쟁이처럼 구는지 처음으로 이해가 됐다.

지금 진 로이슈덴은 그 누구도 아닌, 로엔 록스버그가 두려웠다. 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고, 그를 죽일 수도 있는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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