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이젠 별걸 다 해 주는 모양이네. 아예 밥도 먹여 주지 그래?”
세이지가 삐딱한 눈빛으로 한마디 했다. 갈수록 제 암컷에게 안달이 난 수컷처럼 구는 진이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싶은 걸 애써 참는 중이니까 시비 걸지 마.”
진의 대답에 세이지가 정말 놀란 듯 헉, 하고 숨을 삼키는 소리가 둘렸다. 눈꼴 시려 그냥 해 본 말이었는데, 진심일 줄은 상상도 못한 눈치였다.
“와, 정말 라우렐이 같이 와서 이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아마 돌아가서 내가 본 걸 얘기해도 안 믿을 것 아냐. 헛소리 그만하라고 하지 않으면 다행인 거지.”
세이지가 미친놈처럼 혼잣말을 하더니 이내 스튜가 든 그릇을 진에게 건넸다.
“자, 여기. 그릇에 넘치도록 담았으니까 먹여 주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고. 난 저쪽 가서 먹을 테니까.”
세이지가 제 그릇을 들고는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버렸다. 자세히 보니 그곳엔 이미 가죽 천막이 세워져 식사 후 바로 쉴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럼 저도…….”
“저도 가서 먹겠습니다. 편히 드십시오.”
라이칸에 이어 안톤도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의 자리로 향했다.
두 사람만 남겨지자 로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진을 곱게 흘겼다.
“이게 뭐예요. 같이 식사 좀 하나 했더니 다 내쫓고.”
“나는 가라고 한 적 없어. 알아서 피해 준 거지. 그러지 말고 어서 먹어. 배고플 것 아냐. 점심때도 물만 마시고 대충 때웠었잖아.”
코앞이 소금 사막인데도 지도에 표시된 장소를 찾지 못해 신경이 바짝 곤두섰었다. 그래서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는데, 그걸 본 모양이었다.
“제건 제가 먹을 테니, 당신도 어서 먹기나 해요.”
로엔이 옆에 놓여 있는 그릇을 들어 스푼으로 스튜를 떠먹었다.
협곡을 떠난 이후론 불을 피울 수가 없어서 과일과 고기를 말린 것으로 식사를 대신했었다. 오늘은 운이 좋아 뜨거운 스튜를 먹을 수 있게 되자, 식욕이 일었다.
“여기, 이것도 같이 먹도록 해.”
진이 나이프로 딱딱한 빵을 썰어 로엔에게 건넸다.
로엔은 빵을 뜨거운 스튜에 찍어 먹으며 고갤 들었다.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든 사막의 하늘에 별이 떠 있었다.
“모래 늪은 어떤 곳일까요?”
“모리가 그러더군. 모래 늪에 불의 신의 보물이 있다고. 그땐 별생각 없이 넘겼었는데, 아마 불의 신의 보물이란 게 라딘의 서의 열쇠가 아니었나 싶군.”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그 소문들 역시도 어쩌면 사실과는 다를지도 모르겠어요. 사막의 세이렌이 있다는 그 소문이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다 거짓은 아닐 거야. 전엔 불의 신의 보물을 찾기 위해 모래 늪으로 들어갔던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 죽었다고 했거든. 그러니 사람들의 출입을 막는 주술이나 결계가 쳐져 있을 거야.”
로엔 역시도 진의 생각에 동의했다. 라딘이 서의 열쇠가 있는 장소라면, 누구나 쉽게 들어갈 순 없을 테니까.
“결계라……. 라딘은 무슨 주술을 걸어 놓은 걸까요? 환각, 아니면 무기겠죠?”
로엔이 스튜를 먹으며 생각에 잠긴 듯 낮게 속삭였다.
진은 빵을 잘라 입에 넣다가 움직임을 멈추고 로엔을 보았다.
“그렇겠지. 그런데 네가 꾸었다던 그 꿈 말이야. 어떤 꿈이었지?”
로엔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고심하듯 잠시 모닥불의 불꽃을 응시했다. 진은 로엔이 말을 꺼낼 때까지 묵묵히 기다렸다.
“아마 믿지 않을 거예요.”
“믿고, 안 믿고는 내가 결정해.”
진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제 꿈은 항상 하늘에 떠 있는 붉은 반지에서부터 시작돼요.”
“붉은 반지?”
“금환일식이요. 아마 그건 제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 금환일식이 있었기 때문인 듯해요.”
로엔은 눈을 감았다. 그리곤 열네 살 첫 월경이 시작되었을 때, 그리고 얼마 전 꿈에서 보았던 장면을 되짚기 시작했다.
“꿈엔 두 사람이 있어요.”
로엔의 귓가에 꿈속에서처럼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때는 금환일식입니다.』
“꿈속에 등장하는 여자가 고대어로 말해요. ‘때는 금환일식입니다.’라고요.”
그 목소리가 들려올 때면, 뭔가에 의해 무겁게 내리눌린 것처럼 도무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또한 사슬에 묶인 듯 몸은 꼼짝도 할 수도 없었고.
『절대 실패해선 안 됩니다.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긴다면, 지금껏 쌓아 올렸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건 한 순간일 테니까요.』
“그리고 또 말해요. 절대 실패해선 안 된다고.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긴다면, 쌓아 놓았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고 경고해요.”
그럴 때마다 로엔은 불안했다. 시야는 가려져 있고, 음산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목을 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꿈이란 걸 알고 있었고, 그래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걸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날카로운 뭔가가 자구만 심장을 옥죄는 감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슬펐다. 안타깝고 절망적인 감정에 심장이 찢기는 느낌이었다.
대체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알 수 없었지만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리고 또다시, 귓가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억하세요. 때는 금환일식입니다. 하늘에 붉은 반지가 떠오르는 그때.』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해요. 기억하라고. 때는 금환일식이며, 하늘에 붉은 반지가 떠오르는 그때 모든 것들이 일어날 것이라고요.”
로엔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순간, 불안으로 들썩이던 심장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하지만 심장이 자꾸만 먹먹했다.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그의 목에 팔을 감고 그가 곁에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졌다.
마치 꿈속의 감정에 동화라도 된 듯 그 안타까운 감정이 너무도 절절하게 느껴졌다.
“금환일식이라고?”
“네. 그리고 오늘 꿈의 마지막을 본 것 같아요.”
로엔은 마른침을 삼켰다. 또다시 초조함이 밀려들자 입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뭔지 말해 줄 수 있나?”
“노아스의 주인인 검은 드래건이 죽어요. 내 꿈에 나왔던 두 사람에 의해.”
로엔이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진에게 내밀었다.
“이 단검이 거기에 있었어요. 이 검, 내게 결혼 선물로 주기 위해 만든 게 아닌 거죠? 예전부터 존재했던 검인 거죠?”
로엔이 확신에 찬 듯 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은 대답 대신 단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곤 검날에 새겨진 고대어를 손끝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게 무슨 뜻인지 아나?”
진이 손끝으로 훑어 내리는 글귀는, 다름 아닌…….
『타라의 연.』
로엔이 단검에 새겨진 고대어를 읽었다. 그러자 진이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맞아. 노아스와 함께 사라진 고대어로 타라의 연이다. 검은 드래건의 언어이기도 하고. 나는 이 단검을 모리의 붉은 용광로에서 가져왔다.”
진이 단검을 다시 로엔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젠 그 주인은 로엔이라는 듯이.
“붉은 용광로라면…….”
“모리가 그러더군. 이게 바로 불의 신의 신물이라고.”
“그럼 이건 제 것이 아니군요. 이건 노아스의 주인인 당신 거예요.”
검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 진 로이슈덴의 것이었다. 로엔이 다시 단검을 진에게 내밀었다.
“아니, 이건 네 것이다. 이 단검은 노아스의 주인이었던 검은 드래건이 그의 반려에게 주기 위해 난쟁이들에게 주문했던 검이었거든.”
타란 대륙의 역사서에서 노아스 땅에 살던 난쟁이들은 타고난 대장장이라 알려져 있었다.
신성한 땅 노아스와 함께 그들의 존재 역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특별한 검은 타란 대륙에서 선택받은 가문에게만 극비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로이슈덴 공작가에 전해지는 ‘부러지지 않는 검’이었다.
“그걸 어떻게?”
“단검의 손잡이에 로이슈덴 공작가의 상징이 새겨져 있는 걸 너도 봤을 거야. 아마 짐작대로 우리 가문은 검은 드래건의 마지막 혈족일 거야.”
“아…….”
로엔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것을 진이 확신에 찬 얼굴로 말하자, 그제야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느낌이었다. 진이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기도 살아남은 이유도.
그리고 그의 몸속에서 봉인된 채 잠들어 있는 드래건의 힘이 그를 집어삼키지 못한 것도 설명이 됐다.
‘진 로이슈덴이 마지막 남은 검은 드래건의 혈족이라니.’
로엔은 제 손에 놓여 있는 단검을 내려다보았다. 진의 말로는 이 단검은 검은 드래건의 반려에게 주는 물건이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받아도 되는 걸까?’
“진, 나는…….”
“네 것이다.”
로엔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린…….”
“만약 계약 결혼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것이라면 그만둬. 너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이미 우리 사이는 계약과는 관계가 없어진 지 오래라는 걸.”
로엔은 그 말이 사실이라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로엔의 손을 잡았다.
“우리 사이를 뭐라고 정의하든 나는 상관없다. 하지만 내게 결혼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야. 그러니 내 반려 역시 세상에 너 한 사람뿐이란 뜻이겠지. 그러니 네가 원치 않는다면 버려. 어차피 너 아니면 의미 없는 물건일 뿐이니까.”
진이 로엔의 손을 놓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곤 로엔에게 제 감정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
“잠시 주위를 살피고 오겠다. 바람이 부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아.”
그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한 핑계가 분명했다. 또한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못한 로엔에 대한 배려였다. 그의 마음을 알기에 로엔은 진을 붙잡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