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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78화 (179/201)

178화

그때였다. 모닥불 위에 올려놓았던 스튜가 끓는지 연기가 나는 게 보였다.

“어어? 우리 저녁.”

세이지가 재빨리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끓고 있는 스튜 냄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팽팽하게 감돌던 긴장감이 사라졌다.

“이제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은데, 슬슬 깨워야 하지 않겠어?”

세이지가 평소처럼 여상한 태도로 로엔 쪽으로 고갤 돌렸다. 진은 세이지의 무던한 반응이 오늘처럼 반가울 때가 없었다.

“좀 더 재웠으면 하는데…….”

진은 곤히 잠든 로엔을 깨우는 게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이지의 태도는 강경했다.

“먹고 아예 재우는 게 좋지 않겠어? 속이 든든해야 체력 회복도 빠를 테고. 그리고 제발 밤에 괴롭히지 좀 마. 대장이 가만히만 두면…….”

“알았으니 그 입 좀 닥쳐.”

조금 예뻐 보인다 했더니 이내 속을 긁었다. 진의 차가운 반응에 세이지가 히죽 웃었다. 그제야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세이지의 묘안이었음을 깨달았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눈치껏 행동하는 세이지를 보며 진이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리고 로엔 님이 일어나야 다음 얘기도 할 것 아냐.”

느릿느릿 로엔에게 다가간 진은 손을 뻗어 깊이 잠들어 있는 로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그동안 피로가 누적돼 지쳐 있었는지 진의 손길에도 로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좀 더 재울까도 했지만 세이지의 말처럼 뭐라도 먹이고 재워야 할 것 같았다. 새벽에 일어난 이후 로엔이 하루 종일 거의 먹지 않았던 데에 생각이 미쳤다.

“로엔.”

진이 로엔의 이름을 속삭였다. 로엔을 깨우고 싶지 않아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를 냈다.

“으음―.”

그런데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로엔이 몸을 뒤척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진이 손끝으로 로엔의 뺨을 쓸었다. 그러자 나른하게 풀려 있던 로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진, 이제 일어날 시간인가요?”

잠에 취한 목소리가 나른한 신음처럼 귓가를 간질였다. 진은 아랫배에 느껴지는 묵직한 열기에 숨을 삼켰다.

진은 로엔이 눈치채지 않게 최대한 열기를 가라앉히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식사가 다 되었거든. 하지만 네가 더 자고 싶다면…….”

로엔이 눈을 뜨지 않은 채 고갤 가로저었다. 대신 진의 커다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는 고양이처럼 비벼 댔다.

그녀의 어리광에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입가에도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일어나야죠. 모두 기다리는데. 그런데 진?”

“말해.”

“꿈이 생각났어요.”

“무슨 꿈?”

“내가 열네 살 때 꿨던 꿈이기도 하고, 또 지난번에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꾼 꿈이요. 그게 뭔지 이제야 기억이 났어요.”

“생각해 보니 그때 꿈을 꿨었다고 했던 것도 같군. 그런데 같은 꿈을 열네 살 때도 꿨는지는 몰랐군. 대체 무슨 꿈이기에.”

평온하던 진의 목소리에 호기심이 어렸다.

그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로엔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뿜어내는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저도 지금 알았어요. 꿈이라서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생각이 났어요.”

로엔이 손을 뻗어 진의 뺨을 감쌌다. 그러자 진이 입이라 맞추려는 듯 로엔에게 고갤 숙여 왔다.

“그리고 이제 알 것 같아요. 왜 우리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는 곳을 찾지 못했는지.”

진의 입술이 로엔의 입술에 닿으려는 순간, 멈칫하고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곤 놀란 얼굴로 로엔을 응시했다.

“이율 찾았다고?”

“네, 그런 것 같아요. 그전에 한 가지 확인해 볼 게 있어요.”

로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야광석을 옆에 두고 두 개의 지도를 비교하고 있는 라이칸 쪽으로 고갤 돌렸다.

“라이칸, 지금 당장 내가 그 지도를 좀 봐야겠다.”

“앉아 계십시오. 제가 가겠습니다.”

로엔이 라이칸에게 고갤 끄덕인 다음, 안톤과 세이지를 향해 말했다.

“두 분도 이곳으로 와 주세요. 보여 줄게 있어요.”

일행이 모두 로엔 곁으로 모여들었다.

라이칸에게서 양피지를 받아 든 로엔은 품 안에서 진이 결혼 선물로 준 단검을 꺼냈다. 그러자 검날에 새겨진 고대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뭘 하려는…….”

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로엔이 단검으로 노파가 준 지도를 잘라 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검날이 사막의 경계선을 따라 조심조심 움직일 때마다, 서걱서걱 가죽이 잘려 나가는 소리가 났다.

이미 라이칸을 비롯해 세이지와 안톤의 얼굴은 경악으로 사색이 되어 있었다.

갑자기 잠에서 깬 로엔이 다짜고짜 가장 중요한 지도를 잘라 냈으니, ‘갑자기 미친 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래도 돼?”

세이지가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진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제발 말려 보라는 신호인 듯했다.

하지만 진은 로엔을 저지하는 대신 세이지에게 입 다물라는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어느새 사막의 지형대로 잘려 나간 지도를 로엔이 나머지 지도 위에 겹쳐 놓았다. 그리고 지도를 이리저리 움직여 모든 경계가 딱 들어맞도록 했다.

“다 됐어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는 두 개의 지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노파가 건넨 지도에서 라딘의 서의 열쇠가 묻혀 있다고 표시되어 있는 지점을 단검으로 찔러 표식을 새겨 넣었다.

검날이 겹쳐져 있는 두 개의 양피지를 관통한 것을 확인한 후에야 로엔은 단검을 빼냈다.

로엔은 양피지로 된 지도를 먼저 진에게 내밀었다.

“진, 당신이 먼저 확인해 보세요. 우리가 뭘 놓쳤는지.”

로엔에게서 양피지를 받아 든 진이 겹쳐져 있던 양피지를 분리했다. 그리곤 무감한 눈빛으로 지도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이건…….”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평소와 달리 놀란 듯 커졌다. 그러자 로엔은 그가 뭘 묻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천천히 고갤 끄덕여 보였다.

“네, 우리가 완전히 잘못 생각했던 거예요.”

“뭐야, 뭔데 그래?”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두 사람이 답답했는지, 세이지가 진의 손에 들려 있던 지도를 가져갔다. 그리곤 조금 전 로엔이 검으로 구멍을 낸 위치를 확인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소금 사막 옆에 있었던 것 아니었어?”

세이지의 말에 안톤과 라이칸이 차례차례 지도를 받아 위치를 확인했다.

분명 로엔이 검을 꽂아 넣은 곳은 소금 사막이 있던 곳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지도 위에 표시된 곳은 소금 사막이 아니라 모래 늪이었다.

헤르파 사막이 시작되는 입구에 있던, 사막의 세이렌이 있다던 소문의 그곳이었다.

“지도가 거꾸로 그려져 있었어요. 우린 그걸 이제야 눈치챈 것이고요.”

“그럼 우리가 헛걸음한 거였어? 사막 입구를 두고 끝까지 온 거잖아.”

사흘간 사막을 가로지른 것이 모두 헛고생이었다고 생각하자, 세이지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곤 지도를 다시 한 번 살폈다.

다시 봐도 지도에 표시된 곳은 모래 늪인 걸 확인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여기, 들어가면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곳이라고 한 데잖아.”

맞장구를 쳐 주길 바라며 한 말이 아니었지만, 동굴 안에 감도는 긴장된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의 앞날이 지금보다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뜻이었다.

“게르피온의 기사단을 피해 모래 늪으로 가려고 했는데. 우리의 목적지가 될 줄은 몰랐네요.”

로엔이 최대한 가볍게 말하려 했지만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때 진이 지도들을 집어 돌돌 만 다음 품속으로 집어넣었다.

“우선 저녁부터 먹는 게 좋겠어. 이렇게 앉아만 있다고 해서 가야 할 최종 목적지가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래, 그러자고. 어차피 가야 하는 곳이면 배나 든든히 채우고 가야 뭘 해도 할 것 아냐.”

세이지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안톤과 라이칸이 따라 일어섰다. 그리곤 모닥불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진이 손을 내밀어 로엔이 일어서는 걸 도왔다.

“아.”

허벅지와 종아리가 뻐근했다. 평지를 달릴 땐 괜찮았는데, 푹푹 빠지는 모래사막을 달리느라 몸에 평소보다 힘을 준 게 문제였던 모양이었다.

로엔이 신음을 삼키며 일어서자 진이 망설임 없이 그녀를 두 팔로 덥석 안아 들었다.

“고마워요.”

일행이 기다리고 있는 모닥불 쪽에 도착하자 라이칸이 평평한 돌 위에 푹신한 모포를 깔며 말했다.

“여기 앉으시면 됩니다.”

“고마워, 라이칸.”

“근육통이시면 제가 근육통에 좋은 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픈 곳에 바른 다음 뭉친 곳을 풀어 주면 됩니다.”

안톤이 짐 안에서 작은 통을 꺼내 로엔에게 내밀었다.

“안톤, 고마…….”

“고맙군. 잘 쓰지.”

로엔의 손이 약통에 닿기 전에 진이 먼저 손을 뻗어 약통을 가져갔다. 그리곤 제가 사용하려는 듯 주머니 속을 밀어 넣었다.

“진, 당신도 아픈가요?”

“아니, 난 멀쩡해. 어차피 약을 바른 다음에 뭉친 곳을 풀어 줘야 한다며.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 내가 받은 것뿐이야.”

“어, 음…….”

진의 뻔뻔한 대답에 로엔은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이젠 익숙해질 만도 했지만 서늘한 표정으로 거침없이 감정을 표현하는 진에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특히나 금욕적인 얼굴로 입술을 겹치며 노골적으로 성적인 유혹을 해 올 때면 심장이 간질거리며 온몸이 뜨거워 미칠 것 같았다.

무엇보다 진이 제 맨다리에 약을 바르고 주물럭거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자동으로 연상이 되는 걸 보면, 저 역시 변태가 맞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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