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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77화 (178/201)

177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오는 걸 눈으로 확인한 진은 일행이 있는 모닥불 쪽에서 걸어갔다.

진을 발견한 세이지가 잠든 로엔을 눈으로 가리키며 평소와 달리 낮게 속삭였다.

“괜찮아? 피곤해 보이던데.”

“한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거야. 그것보다 로엔은 우리가 찾는 곳이 주술이나 결계가 걸려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 한나절 내내 말을 타고 찾아다녔지만 찾지 못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라고 여기는 듯했어.”

세 사람 생각은 어떤지 묻는 얼굴이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소금 사막을 몇 번이나 오가는 동안 한 번도 지도에 표시된 장소를 보지 못했습니다. 로엔 님 말씀처럼 주술이나 결계가 쳐져 있지 않고선 당연히 한 번은 지나쳐 갔을 위치인데 말입니다.”

신중하게 하루 동안의 행보를 곱씹던 안톤이 로엔의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라이칸, 네 생각은 어떻지?”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라이칸의 대답에 진의 시선이 세이지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세이지가 어깰 으쓱해 보이더니 지나가듯 말했다.

“아까, 로엔 님이 그랬었잖아. 지도가 잘못된 것 같다고. 난 주술이나 결계 따위는 모르니까 지도 쪽이 잘못된 것이라 생각해. 대장 생각은 어때?”

세이지도 헤르파 사막 지형에 대해 빠삭했지만 진 로이슈덴만큼은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에서 진의 의견이 가장 중요했다.

“내 생각은 지도에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다만, 우리가 양피지에 표시된 지도에서 뭔가를 놓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지도를 잘못 봤다고? 하지만 그게 가능해? 다섯 명이서 같이 지도를 봤는데. 놓친 부분이 있을 리가…….”

세이지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진은 잠든 로엔에게서 가져온 지도를 꺼내 바닥에 펼쳤다. 그리곤 헤르파 사막이 시작하는 입구를 시작으로 소금 사막에 이르는 길을 꼼꼼히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제길, 이러다 눈이 빠질 것 같아.”

진과 함께 지도를 살피던 세이지가 더는 힘들어서 못 하겠다는 듯 뒤로 나자빠졌다. 안톤 역시 눈이 침침한지 고갤 들어 몇 번 눈을 깜빡이는 게 보였다.

“안톤, 지난번에 네가 구해 왔던 헤르파 사막 지도를 주겠나? 비교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아,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안톤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제 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곤 꾸러미 안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를 들고 다시 돌아왔다.

“여기 있습니다, 공작님.”

진이 안톤에게 받은 지도를 노파의 지도 옆에 펼쳤다. 그리곤 두 개의 지도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대장, 이건 내 생각인데. 그 노파가 남겼다는 이 지도가 가짜가 아닐까? 그러니까 그게 꼭 맞는다는 보장은…….”

“세이지, 그 노파가 가짜를 남겼을 리는 없어.”

진의 태도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의 확신에 찬 대답에 세이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제 주인인 진 로이슈덴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거짓일 리 없기 때문이었다.

“알았어. 이제 의심 같은 건 안 할게. 난 저녁 준비를 할 테니까 내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

세이지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저는 뭘 하면 되겠습니까?”

고갤 들자 라이칸이 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든 도움이 되고 싶은 눈치였다.

“내가 찾고 싶은 건 두 지도 사이에 다른 점이다. 아주 사소한 부분이라도 놓치지 않고 봐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라이칸이 주머니에서 야광석을 꺼내 지도가 잘 보일 수 있도록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지도를 살피기 시작했다.

“공작님, 혹시 북쪽 마을에 갔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로엔 님께서 말씀해 주시긴 했지만,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안톤이 진의 안색을 살피며 재빨리 사과의 말을 전했다.

“죄송합니다. 이건 공작님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노파가 건넨 지도가 맞다고 확신하는지 궁금해서요. 하지만 불편하시다면 굳이 말씀해 주지 않으셔도…….”

결국 진의 서늘한 눈빛에 안톤이 말끝을 흐렸다. 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기가 눌린 듯 보였다.

진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안톤을 바라보다, 두려운 듯 시선을 피하는 안톤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겁을 주려는 건 아니었는데 안톤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사색이 되어 있었다.

특별히 그의 질문에도 뭔가를 의심할 만한 점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안톤은 말레 상단의 주인이자 로엔이 신뢰하는 자였다.

“혹시 노아스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나?”

나직한 진의 목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안톤을 비롯해 양피지를 살피던 라이칸도, 그리고 저녁 준비를 하던 세이지의 시선마저 진에게 향했다.

“노아스? 그게 어디야? 내가 좀 무식해서 그런 쪽으론 잘 모르거든. 꼭 알아야만 한다면 지금부터 배우고. 대장이 알려 줘야 할 테지만.”

세이지가 처음 들어 봤는지 멋쩍은 듯 머릴 긁적였다.

하지만 안톤과 라이칸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아마 그들은 노아스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다.

“두 사람은 들어 아는 모양이군. 지금은 사라진 신성한 땅, 노아스에 대해.”

확신에 찬 말투에 안톤과 라이칸이 동시에 고갤 끄덕였다. 이내 두 사람의 시선이 어김없이 동굴 한쪽에 잠들어 있는 로엔에게 향했다.

“경계할 필요 없다. 나 역시 모리를 통해 노아스가 록스버그 공작가와 연관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니까.”

“모리라면, 그 대장장이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뜻하지 않게 들려온 이름에 안톤이 고갤 갸웃했다. 대장장이 이름이 왜 지금 진의 입을 통해 나오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눈치였다.

“맞아. 모리의 대장간에 갔다가 아주 흥미진진한 얘길 듣게 됐지.”

진의 시선이 라이칸이 들고 있는 노파가 건넨 지도에 닿았다가 다시 안톤에게 향했다. 언제 왔는지 세이지가 진 앞에 자릴 잡고 앉고 있었다.

“뭔데? 대장, 궁금해 죽겠으니까 말 좀 해 보라고.”

진이 고갤 끄덕이더니 라이칸을 보았다.

“라이칸, 너도 대장간에 갔으니 봤겠군. 대장간 중앙에 있던 붉은 용광로를 말이야.”

“네, 본 기억이 납니다. 대장장이 모리가 다른 용광로와는 달리 그곳만 굉장히 조심스럽게 다루더군요. 옆에 있던 대장장이 말론 지금까지 대장간이 문을 연 이래로 붉은 용광로의 불이 꺼진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습니다.”

라이칸이 기억을 더듬어 그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말했다.

“모리가 말하길, 붉은 용광로의 불꽃은 아주 특별한 곳에서 왔다고 하더군요.”

마지막 말에 진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제야 라이칸은 제가 맥을 제대로 짚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고, 긍정의 의미로 진이 고갤 끄덕였다.

“특별한 곳이라면…… 혹시 노아스입니까?”

안톤이 성급한 목소리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눈동자엔 감출 수 없는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맞다. 그리고 신성한 땅이라 불리는 노아스의 주인이 검은 드래건이라고 하더군. 지금은 사라져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혈족 말이다.”

“검은 드래건이었습니까? 노아스의 주인이?”

얼이라도 빠진 듯 라이칸과 안톤이 서로를 마주 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래. 하지만 모리는 더 재미있는 말을 했다. 붉은 용광로의 불꽃이 꺼지지 않는 한 록스버그 공작가에서 태어나 살아남은 여아는 절대 죽지 않는다고 말이다.”

진이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두 사람이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그게? 그러니까 노아스의 주인이 검은 드래건인 거고, 노아스에서 왔다는 붉은 용광로의 불꽃은 록스버그 공작가의 여아, 로엔 님과 관련이 있다는 거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는지 세이지가 제가 들은 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그리곤 그의 시선이 잠들어 있는 로엔에게로 향했다.

“맞다, 세이지.”

“와, 되게 신기하네. 이건 그러니까, 운명이란 거지? 노아스와 록스버그 공작가가 뭐냐, 처음부터 끈끈한 인연으로 묶여 있었다는 뜻이잖아. 거기다 라딘의 서에 대해 알고 있다는 노파까지 대장이 그곳에 올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지도를 남겨 놓은 거고.”

세이지가 말을 멈추곤 소름이 돋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진이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가 진짜라고 확신한 이유를 이제야 안 모양이었다.

“미친. 내 평생 이런 신박한 일은 처음이라. 사실 나는 노아스의 주인이라는 검은 드래건이 더 궁금하긴 한데, 지금은 없는 거잖아. 어, 아니다. 검은 드래건이라면……. 와, 진짜. 미친.”

세이지가 정말 놀랐는지 욕설을 뱉어 내며 진을 응시했다.

세이지 역시 어린 시절 진이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고 그 힘을 통제하기 위해 전쟁터에서 죽을힘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진 로이슈덴이 노아스의 주인이라는 검은 드래건과 연관이…….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 ‘미친!’이었다.

그때, 안톤이 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 역시 세이지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등을 보인 그의 어깨가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었다.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합니다, 공작님.”

진은 그런 안톤을 내려다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려움에 떨게 할 목적으로 얘길 꺼낸 게 아니었다. 사실대로 말해야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더는 설명을 할 필요가 없어서 말했던 것뿐이었으니까.

“그럴 것 없다. 말레 상단의 총책임자쯤 되는 자라면 당연히 의심을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나라도 예외일 수는 없을 테고. 그러니 일어나도 좋다, 안톤.”

“그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안톤이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네 사람 사이에 감도는 팽팽한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노아스의 주인이 검은 드래건이라니. 전설이나 신화 속에만 등장하는 존재를 눈으로 보고 있다는 생각에 세 사람은 등골이 오싹하는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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