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로엔…….”
그가 고갤 숙이더니 이마며 뺨에 입을 맞췄다. 가벼운 버드 키스였지만 얼굴에 닿는 그의 입술엔 숨길 수 없는 욕망이 담겨 있었다.
“진, 정말 안 돼요. 소릴 참는다 해도 사람들이 알…… 흐음.”
진이 단단하게 일어선 하체를 로엔의 아랫배에 문질러 왔다. 등줄기에 전율이 흘렀다. 발끝까지 쩌릿한 열기가 어리자 그의 유혹에 넘어갈 것 같았다.
진 역시 그걸 알아차린 듯 사냥 직전의 맹수처럼 느른하게 허릴 움직였다.
금방이라도 몸을 겹칠 듯 파고드는 열감에 로엔은 발끝을 움찔 댔다.
“아무도 모를…….”
“모르긴 뭘 몰라. 지금도 다 들리는데.”
순간 세이지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몸이 얼어붙었다.
“제발 좀 그만하고, 잠 좀 자자. 내일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잖아. 정말 양심도 없다니까. 그리고 내가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이런 데서 하고 싶어? 발정 난 것도 아니고. 진짜, 창피해서는. 귀족들의 체면이며 평판을 중요하게 여긴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또다시 들려온 세이지의 목소리에 로엔이 얼른 진을 밀어냈다. 그리곤 그에게 등을 돌려 돌이 가득 든 주머니를 끌어안고는 얼굴을 묻었다.
수치심에 귓불은 물론 목덜미까지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말, 다음부턴 떼어 놓고 다니든지 해야지.”
진이 불만을 가득 담고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로엔이 얼굴을 숙인 채 제발 그만하라고 그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소용없었다.
“나도 바라던 바니까, 제발 나 말고 라우렐을 데리고 가.”
세이지의 말에 진이 민망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로엔을 뒤에서 끌어안은 뒤, 담요를 끌어다 덮었다.
“내일은 좀 더 떨어진 곳에 천막을 쳐야겠어. 방해꾼들 없는 곳으로.”
로엔은 어이가 없었다. 반성은커녕 다른 방법이나 찾을 생각이나 하고.
하지만 수치스러운 한편으론 묘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알았으니 얼른 자기나 해요.”
진은 로엔을 힘껏 끌어안고는 아쉬움을 달래듯 그녀의 뺨에 입을 맞췄다.
로엔 역시 눈을 감았다. 좁은 천막 안은 두 사람의 온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더 따뜻했다.
로엔은 그의 품이 주는 안온함에 빠져 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 *
모래바람이 부스스 날렸다. 한낮의 열기가 작열하고 있었지만 로엔 일행은 멈추지 않고 말을 달렸다. 건조한 모래 위에 그들이 남긴 말발굽이 깊게 박혀 흔적을 남겼다.
광활하게 펼쳐진 헤르파 사막은 생명체라곤 없는 메마른 모래땅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손가락 사이로 힘없이 빠져나가는 모래 위에, 유독 그들이 밝고 지나간 자리만이 말발굽에 밟히면 밟히는 대로, 짓쳐지면 짓쳐진 대로 흔적을 남겼다.
바람이 불면 사라지고 말 모래땅이건만, 그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낱낱이 기록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끈질겼다.
로엔은 뒤를 돌아 그들이 남긴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광활한 모래사막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며칠 동안 말을 달렸지만 물기 하나 없는 건조한 공기가 익숙해지지 않았다.
로엔이 고삐를 당기자, 함께 말을 달리던 일행이 기민하게 알아차리곤 말을 멈춰 세웠다.
“무슨 일이지?”
“이상해서요. 계속 같은 곳을 겉돌고 있는 느낌이에요. 이곳을 벗어나면 곧 소금 사막인데, 지도에 표시된 곳은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고 있고요.”
말을 삼키긴 했지만 로엔은 마치 결계에 갇혀 의미 없이 헤매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지금 네 말은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건가?”
진의 말에 로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신 로엔은 양피지를 꺼내 지도를 살폈다.
이틀 전 야광석으로 그려진 지도를 펜으로 하나하나 따라 그려, 지금은 낮인데도 지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로엔은 소금 사막의 입구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곤 고갤 들어 황량한 모래사막을 응시했다. 지평선 끝에 만년설처럼 새하얗게 펼쳐진 평원이 보였다.
작열하는 햇빛에 다이아몬드를 뿌려 놓은 듯 반짝이는 빛은 의심할 여지없이 소금 사막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서 있는 이곳에, 지도에 표시된 곳이 있어야 했다.
“길을 잃은 것보단 지도가 잘못된 것 같아요. 우선 쉴 곳을 찾도록 하죠. 곧 밤이 될 테니까요.”
어느새 한낮의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
순식간에 찾아드는 사막의 밤은 야차처럼 잔혹했다. 낮의 숨 막히는 열기를 몰아내고 서늘한 냉기를 뿜어내기 전에 밤을 보낼 적당한 곳을 찾아야 했다.
“적당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소금 사막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는 안톤이 일행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버석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한참을 달린 일행은 붉은색의 거대한 협곡 앞에 다다랐다.
말의 속도를 줄이며, 안톤이 익숙한 듯 협곡 안으로 들어갔다.
붉은색의 암벽으로 이뤄진 협곡을 따라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자, 절벽 아래 넓은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깁니다.”
안톤이 말에서 내렸다. 그리곤 세이지와 함께 낙타에 실려 있는 짐을 들고 동굴 안쪽으로 이동하는 게 보였다.
로엔은 말에서 내리는 대신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깎아지른 듯 가파른 절벽이 사막의 모래바람을 막아 준 탓인지,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아늑하기까지 했다.
‘뭐지? 이 익숙한 느낌은?’
로엔은 고갤 들어 협곡 사이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해가 지려는지 붉은 노을과 함께 검은 어둠이 서서히 사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로엔?”
진이 부르는 소리에 허공에서 부유하던 로엔의 시선이 갈 곳을 찾은 듯 진에게 향했다.
로엔은 제게 내밀어진 진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로엔이 제 손을 잡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자, 초조함이 밀려든 진이 기다리는 대신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말에서 내리는 걸 도왔다.
“아, 고마워요. 그냥, 어딘지 익숙한 느낌이라.”
“협곡이라 비슷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야. 헤르파 사막의 입구에도 이런 협곡이 있었으니까.”
진이 별일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사막에 있는 협곡이야, 거기서 거기니까.”
로엔은 진과 함께 동굴로 향하며 여전히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아까 했던 말 있잖아.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지도가 잘못된 것 같다고 했던 말. 왜 그렇게 생각하지?”
“모르겠어요. 분명 소금 사막의 입구가 가까워졌는데도 지도에 표시된 곳이 보이지 않으니, 지도가 잘못된 건 아닌가 생각했어요. 주술이 걸려 우리가 같은 곳을 헤매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기도 했고요.”
“주술?”
“네. 아버지께서 남기신 록스버그 공작가의 비서엔 위대한 예언가 라딘은 마법사라고 했어요. 만약 그가 라딘의 서를 찾을 수 있는 열쇠를 이곳에 숨겼다면, 쉽게 찾을 수 없게 만들었을 것 같거든요.”
“그래서 주술에 의해 숨겨진 건 아닌가 생각했다는 말이군.”
“네. 열쇠를 숨긴 자가 라딘이 아니라 만약 그 제자였던 타에라라고 해도, 그녀 역시도 주술사였으니 같은 맥락이었을 테고요.”
로엔은 200년 전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숨긴 이가 당사자인 라딘이든 아니면 소문처럼 타에라든 상관없이 결계나 주술이 쳐져 있을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지난번에 왔을 때 남겨 두고 간 것들이 있어서 불을 피울 수가 있었습니다.”
진과 함께 동굴 안으로 들어가자, 안톤이 두 사람을 맞았다.
동굴은 그렇게 깊지 않았다. 무엇보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품은 바위 덕에 동굴 특유의 습윤한 기운 없이, 따듯하고 건조했다. 사막의 서늘한 냉기를 피해 밤을 보내기에 최상의 장소였다.
“안톤 덕분에 오늘은 따뜻한 곳에서 지낼 수 있겠네.”
“아닙니다. 로엔 님께선 음식이 조리되는 동안 안쪽에 들어가 쉬시는 어떻겠습니까? 다 되면 부르겠습니다.”
“그래, 눈을 좀 붙이는 게 어때? 새벽부터 쉬지 않고 말을 달리느라 힘들잖아.”
“아니요, 나도…….”
“거절할 생각은 마. 네가 쉬는 게 우리에게도 좋으니까.”
진이 동의를 구하듯 세이지와 라이칸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래, 좀 쉬어. 내일도 강행군이 될 텐데.”
세이지가 어서 진을 따라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라이칸 역시 로엔에게 그게 좋겠다는 듯 고갤 끄덕여 보였다.
“어쩔 수 없죠. 그럼 한숨 자고 일어날게요. 사실 모래 위에서 말을 탔더니 피곤하던 참이었거든요.”
로엔은 순순히 제 상태를 인정했다. 일정이 뒤처지는 걸 염려해 애써 그들과의 체력 차이를 무시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배려를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 좋을 듯했다.
세이지 말처럼 내일도 강행군을 해야 했다. 그러니 내일이 되기 전까지 체력을 회복하는 게 맞았다.
로엔은 진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동굴의 한쪽 벽에 누가 펴 놓았는지 두꺼운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로엔은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 얼굴에 쓰고 있던 검은색 천을 벗었다. 그러자 진이 천을 받아 먼지를 털어 내고는 옆에 내려놓았다.
“누워 있어.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저녁을 먹고 나서 상의하면 되니까, 지금은 아무 생각 말고 푹 자.”
로엔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진이 선수를 쳤다.
“그럴게요, 진.”
로엔이 푹신한 양탄자 눕자 진이 모포를 가져와 덮어 주었다.
말을 달리는 동안 긴장했던 근육이 천천히 이완되며,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눈꺼풀이 내래앉는 것과 동시에 진의 입술이 이마에 닿는 게 느껴졌다. 로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더니, 이내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