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75화 (176/201)

175화

“이리 와.”

진이 로엔을 불렀다.

로엔은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커다란 바위 뒤에 가죽 천막이 만들어져 있었다.

일행이 사용하는 1인용 천막보단 조금 커서, 두 사람이 사용하기엔 크게 무리가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천막 안엔 북쪽 마을에서 사 온 털로 된 양탄자가 깔려 있었다.

“먼저 들어가. 나는 네가 밤에 안고 잘 돌을 가져올 테니까.”

진이 모닥불로 가더니 잘 달궈진 돌을 꺼내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는 게 보였다. 그리곤 주머니를 들고 다시 천막으로 돌아왔다.

“새벽엔 추워. 이걸 안고 자면 괜찮을 거야.”

“당신은요? 저와 같이 자는 것 아니었어요?”

로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진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미소를 띠며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당연히 같이 자야지. 그래도 돌보단 사람의 온기가 더 따뜻한 법이니까.”

진이 천막 안으로 들어와 입구를 단단히 막았다. 이윽고 천막 안에 어둠이 찾아 들었다.

탁, 타닥. 돌이 부딪히며 불꽃이 일며 어둡던 천막 안이 밝아졌다. 진의 손엔 야광석이 들려 있었다.

“이건 또 언제 가져왔어요?”

“라이칸이 주더군. 네가 어둠을 무서워한다고 하면서.”

진이 로엔 옆에 야광석을 놓고는 양탄자 위로 올라갔다. 그는 로엔을 품에 안고 옆에 놓여 있던 두꺼운 담요를 끌어당겨 덮었다.

“편히 기대.”

진이 뒤에서 제 몸을 단단히 끌어안자 그의 짙은 체향이 훅 끼쳐 들었다. 목덜미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어느새 천막 안은 두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찼다.

“잠이 안 오면 잠이 올 때까지 네 얘기 좀 해 봐.”

진이 로엔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며 낮게 속삭였다.

“뭐가 궁금한데요?”

“뭐든.”

로엔은 진의 품에 안겨 생각에 잠겼다.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괴물 공작이란 별명은 어떻게 갖게 되었는지부터 말해 봐.”

고민하는 걸 눈치챘는지 진이 평소 궁금했던 걸 물어 왔다. 얼굴에 흉터도 없이 깨끗한데, 귀족들에게 괴물 공작이라 불리며 멸시의 대상이 되어 온 게 이상해서다.

“아, 그 소문은 일부러 제가 낸 것이었어요.”

“네가 그랬다고?”

생각지도 못했는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묻는 진을 보자 로엔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열심히 고갤 끄덕였다.

“맞아요. 제가 일부러 낸 소문이에요. 그럴 만한 이유도 있었고.”

“이유?”

“네. 처음 사고가 있었을 땐 귀족들 사이에선 동정론이 일었죠. 한순간에 부모를 잃은 어린 상속녀는 흔치 않았으니까요. 거기다 엄청난 돈을 가진 공작가였으니 말 다 했죠. 환심을 사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폐하조차도 병문안을 오실 정도였으니까.”

“쳇, 마음에 안 들어.”

진이 불쾌한 듯 혀까지 차며 로엔을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마치 과거에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던 귀족들에게 질투라도 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예요. 수많은 귀족들이 저와 혼인하겠다고 저택을 방문했다가, 제 얼굴에 난 흉터를 보곤 학을 떼고 도망간 거죠. 시간이 흐르면 제 몸속에 흐르는 혈독화가 흉터를 말끔하게 치유한다는 것도 모르고.”

“그건 잘된 일이군. 탐욕스런 자들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까.”

“맞아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소문을 내기 시작한 거예요. 강제로 결혼을 한 다음 소리 소문 없이 죽긴 싫었거든요. 차라리 비난을 받는 게 낫지. 그리고 암살 위협을 받게 된 것도 그때부터죠. 귀족들인 줄 알았는데, 황실이었다니. 생각지도 못했었는데.”

배신감이 짙게 배어 있는 목소리였다.

로엔은 씁쓸하게 웃다가 진이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는 걸 깨달았다. 슬쩍 고갤 돌려 그의 표정을 살폈다.

순간, 로엔은 그의 서늘한 눈빛에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살기를 띠고 번뜩이고 있었다.

“후회돼.”

“뭐가요?”

“반역이란 족쇄에 묶여 시간을 허비했던 게. 5년 동안 이 사막에서 괴로워했던 내가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야. 그런 자들을 위해 고민을 했었다니.”

무엇보다 그 오랜 시간 아버지를 원망했었다. 황좌에 대한 탐욕으로 아들에게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게 하는 지독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황실에서 로엔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어쩌면 아버지가 제게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게 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제 아비는 그런 일을 벌이기 전까지 그를 무척이나 아꼈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아들을 안타까워했고, 어머니의 애정까지 주려 노력했었다.

‘아버지가 그런 결정을 한 게, 혹시 대신전에 봉인되었다는 200년 전의 신탁과 관련 있는 걸까? 그 신탁 때문에 내게 드래건의 심장을 삼키게 하고, 그 뒤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걸까?’

한 번 시작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하지만 정작 그 사실에 대해 답을 해 줄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었다.

진은 모리에게 들었던 검은 드래건을 떠올렸다.

모두가 하나의 해답을 향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진?”

어둠 속 어딘가를 헤매던 진의 눈동자가 로엔을 찾아 움직였다.

바다를 닮은 신비한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본 순간, 진은 그가 지금껏 애타게 찾던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진이 로엔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달콤하고 향긋한 체향에 불안전하게 뛰던 심장이 잠잠해졌다. 로엔에게서 나는 꽃 향이 혈독화의 향이라는 걸 알았지만 진은 상관없었다.

로엔은 그것이 독초라며 경계하는 듯 보였지만 진에겐 그 어떤 향보다 사랑스러웠다.

“아직도 아버지를 원망하나요?”

“모르겠어. 내가 지금껏 믿어 왔던 것들이 진실인지 헷갈리기 시작했거든.”

그의 대답에 로엔이 몸을 돌려 진을 마주 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 뼘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쳤다.

“선대 로이슈덴 공작님에 대한 정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황좌에 대한 탐욕으로 반역죄를 지을 사람은 아닐 것 같아서요.”

“원래 황좌라는 건 사람을 탐욕으로 미치게 하는 자리야. 인성이랑은 상관없어.”

그 단적인 예시가 바로 에드윈이었다.

그는 존더부르크 황실의 유일한 장자였지만 끊임없이 진을 의심하고 죽이려 들었다.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그걸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른 이를 죽이고, 이용하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

“알아요. 하지만 당신은 아니잖아요.”

로엔이 손을 뻗어 진의 뺨을 감쌌다. 그녀의 손이 얼굴에 닿자, 진이 로엔의 손 위로 손을 겹쳐 왔다.

커다란 손의 온기를 느끼며 로엔은 진을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당신은 아니에요. 그러니 당신 아버지 역시 그런 분이 아닐 것이라 생각해요.”

확신하듯 말하는 로엔을 보며 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몇 번을 깜빡였지만 저를 바라보는 로엔의 눈빛엔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뭘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 얼마 전까지도 널 속였던 나인데.”

“그건 아직도 그리 썩 유쾌하진 않아요. 내가 당신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걸 보며 즐거워했을 걸 생각하면 복수라도 해 줘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니까.”

“로엔,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네가 곤란해하는 것 같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뿐이야. 전에도 말했었잖아. 네 장단에 놀아나 줄 테니 할 말이 생기면 꼭 내게 털어놓으라고 했던 말.”

기억났다. 캠벨 후작가의 여름 별장에서 진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었으니까.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건가요?”

“의심을 한 건 로열 에스콧에서 네가 나에게 키스했던 게 생각났을 때부터야. 꿈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 확신을 한 건 그 뒤지만.”

“그때 당신을 살리겠다고 키스를 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그때 얼마나 고민을…… 흣!”

그가 갑자기 입술을 부딪쳐 왔다. 놀란 로엔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진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그때 네가 아니었다면 내 몸속에 있는 드래건이 각성을 했을 거야.”

진의 말에 로엔이 수줍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뭐, 계약이었으니까요. 저는 약속을…… 으흡!”

또다시 입술을 부딪쳐 오는 진 때문에 로엔은 숨을 삼키며 눈을 깜빡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잘 준비를 마친 일행이 있었다. 아무리 진이 스킨십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 성격이라고 해도, 이건…….

로엔이 재빨리 고갤 가로저었다. 하지만 진의 눈동자엔 이미 진득한 열기가 떠올라 있었다.

“소리만 내지 않으면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로엔은 제 턱을 붙잡곤 입술을 겹쳐 오는 진을 밀어내며 연신 고갤 가로저었다. 일행에게 들릴세라, 큰 소리로 그를 밀어낼 수도 없는 상황이라 난처하기 짝이 없었다.

“진…….”

급한 대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입술을 떼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진의 입술은 집요하게 그녀에게 따라붙으며 아랫입술을 깨물고 애가 닳은 듯 입술을 부딪쳐 왔다.

입술을 붙잡히면 끝이란 생각에 로엔은 자꾸만 요리조리 고갤 피했다.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결국 진은 몸을 일으켰고, 로엔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그녀의 몸 위로 올라탔다.

“흣.”

순식간에 몸을 내리누르는 나른한 무게감에 로엔은 신음을 삼켰다.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새어 나간 신음 소리를 되돌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진, 안 돼요. 소리가…….”

로엔은 소릴 참을 자신이 없어 고갤 가로저었다. 그의 손만 닿아도 온몸을 관통하는 열기로 미칠 것 같았다.

이 좁은 천막에서 진과 몸을 섞는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참아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를 막는 게 최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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