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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74화 (175/201)

174화

“록센에서 별일 없었어, 안톤?”

“감시자가 따라붙긴 했지만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아마 그 부분에 대해선 세이지 님이 더 잘 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안톤이 세이지 쪽을 바라보았다. 순간 세이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진이 따로 지시한 일을 처리하느라 계속 밖으로 돌았더니, 그걸 제 주인에게 일러바치는 모양새였다.

속 좁기는.

“뭐, 괜찮았어. 아직은 감시만 하는 눈치였고. 아, 그리고 헤르파 사막에 도착하자마자 모두 사라졌어.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어딘지 확인할 요량이었던 것 같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북쪽 마을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 뭐 좀 찾았어?”

“황제의 측근이 북쪽 마을에 다녀갔다더군요. 그것도 반년도 전에요. 그리고 우리가 찾던 노파 역시 라딘의 서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어요.”

“뭐야? 그럼 다 한패였어?”

“그건 아니야. 황제의 측근이 다녀간 뒤에 노파가 행방을 감춘 걸 보면. 그리고 그 노파가 모리란 자에게 뭔가를 남겼더군. 이미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진의 말에 세이지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뭐야? 정말 그 노파가 예언자라도 된다는 거야?”

세이지가 꺼림칙한 듯 몸을 떨었다. 그런 쪽엔 거부감이 좀 있는 눈치였다.

“예언자까진 아니어도 점술사인 건 분명해. 우리가 라딘의 서를 찾고 있는 걸 알고 실마리를 남겼거든.”

진이 품에 있던 양피지를 꺼내 안톤과 세이지에게 내밀었다. 양피지를 받아 든 안톤이 재빨리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호리우스의 눈으로 된 크립텍스군요. 이게 폐하께서 찾는 그 물건입니까?”

“찾아봐야 알겠지만, 지금 내 생각으론 그런 것 같아. 그리고 설계도를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바닥에 희미하게 깔린 건 지도야.”

“지도라고?”

세이지가 고갤 숙이곤 양피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금은 안 보여요. 야광석을 갈아서 만든 잉크를 사용해, 어둠 속에서만 볼 수 있어요. 사실 어젯밤 월식이 아니었다면 숨겨져 있던 비밀 지도를 알아차리지도 못했겠지만.”

로엔은 월식의 빛을 통해 양피지에 걸어 놓았던 주술이 풀리는 걸 보며 숨을 삼켰었다.

뭔가 신기한 경험이었다. 모든 것들이 두 사람을 기다려 온 듯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서다.

로엔의 설명에 세이지가 납득이 된 듯 고갤 들었다.

“그럼 우린 이 지도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네.”

“네, 우선은요. 그런데 저 아이는 누구죠? 아까부터 우릴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로엔이 마차 쪽으로 고갤 돌렸다. 소년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로엔 일행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레 상단에서 일하는 아이입니다. 짐마차를 몰 사람이 필요해 데리고 왔습니다. 윌마, 이리 와.”

안톤이 부르는 소리에 윌마가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그리곤 흥분을 감추지 못하곤 로엔과 진을 번갈아 보았다

“윌마예요. 저는 안톤 님을 도와 나중에 말레 상단을 이끄는 게 꿈이에요. 그리고 랑케의 정보원으로도 활동하고 싶고요.”

소년의 자신만만한 포부에 로엔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안톤 역시 어이없다는 듯 윌마를 보았지만, 기분 나쁜 눈치는 아니었다.

“뭐야, 꼬맹이 주제에 이런 야망을 마음속에 숨기고 있었어? 그래서 한사코 로엔 님을 뵙게 해 달라고 매달린 거였네. 음흉하기는.”

세이지의 말에 윌마의 얼굴이 부끄러운 듯 붉어졌다.

“그러면 안 되나요?”

“안 될 건 없는데, 넌 뭘 잘하는데? 잘하는 게 있어야 상단을 이끌든 정보원이 되든 할 것 아냐.”

세이지가 윌마를 놀리듯 말했다.

“저는 숫자 계산도 할 줄 알고 마차도 잘 몰아요. 힘도 세서 짐도 잘 나르고요. 저기 낙타에 실어 놓은 짐도 제가 다 한 거예요.”

윌마가 낙타를 가리키며 의기양양한 얼굴을 했다.

윌마의 얘길 듣고 있던 로엔이 소년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윌마, 올해 나이가 몇 살이라고?”

“아홉 살이요. 하지만 안톤 님이 제가 다른 아이들보다 덩치도 크고 머리도 좋다고 했어요.”

아직 열 살이 되지 않은 제 나이가 마음에 걸렸는지 윌마가 재빨리 변명을 했다.

“그래, 내가 본 아홉 살 중 네가 제일 큰 것 같네. 아마 너라면 나중에 말레 상단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아.”

로엔의 말에 윌마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럼 저도 데려가 주세요. 헤르파 사막에서 쓸모가 있을 거예요. 제가 이래 봬도 음식도 제법 잘 만들거든요. 낙타도 잘 다루고요.”

“…….”

윌마의 부탁에 로엔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한참을 물끄러미 윌마를 바라보던 로엔이 신중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네가 도움이 될 것이란 건 의심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윌마, 나는 너를 데려갈 순 없을 것 같아.”

“제가 어려서인가요?”

“아니. 네가 어려서가 아니라, 이 일을 의뢰받은 사람 때문이야. 우린 상인이고, 의뢰받은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해야 해. 그런데 이번 의뢰자는 우리에게 비밀을 지켜 달라고 했거든. 무슨 뜻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이번 의뢰자가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어서 저를 데려갈 수 없다는 건가요?”

“맞아. 상인에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신뢰니까. 너도 알고 있지?”

로엔의 설명에 윌마의 표정이 변했다. 로엔의 말을 이해한 것이다.

“당연히 알고 있어요. 상인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안톤 님이 말씀해 주셨거든요. 그럼, 좋아요. 저는 여기서 로엔 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매일매일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건 되죠?”

아무도 없는 사막 입구에서 어린 소년이 열흘이 넘는 시간 동안 기다린다고 하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윌마, 우리가 언제 돌아올 줄도 모르는데 굳이 그럴 필요는…….”

“안톤, 잠시만요.”

안톤이 난처한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끼어들자 로엔이 그를 불러 저지했다.

“좋아, 윌마. 하지만 매일매일은 그렇고, 일주일 후에 이곳으로 와 줄 수 있겠어?”

“일주일 후요?”

“응. 그리고 사흘 동안 매일 이곳으로 와서 우릴 기다려 줘. 그리고 사흘이 지났는데도 우리가 오지 않으면 랑케의 벤투스에게 연락해 줄래?”

“랑케의 벤투스 님이요? 그렇게만 하면 되나요?”

“그래. 그것만 해 주면 아주 큰 도움이 될 거야.”

로엔의 말에 윌마가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주먹을 꽉 쥐곤 다짐하듯 말했다.

“그럴게요. 일주일 후에 여기서 로엔 님을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리고 사흘 동안은 매일매일 올 거고요. 그러니 그때가 되면 꼭 돌아오세요.”

“그래. 그때 돌아와서 보자, 윌마.”

로엔이 윌마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일행을 향해 돌아섰다.

“그럼 이제 출발할까? 사막은 밤이 빨리 찾아오니 오늘 밤 묵을 곳까지 가려면 서둘러야 해.”

세이지의 말에 일행은 다시 말에 올랐다. 그리곤 죽음의 땅이라고 불리는 게르피온의 헤르파 사막의 입구로 발을 들여놓았다.

* * *

사막의 밤은 칠흑과도 같았다. 뜨겁게 작열하던 한낮의 태양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나마 밤이 되기 전 협곡 아래 자릴 잡고 나무를 끌어다 모닥불을 피우자, 고요하던 사위가 밝은 빛을 뿜어냈다.

“이곳이 라딘의 서의 열쇠가 잠들어 있는 곳입니까?”

어둠 속에서 빛을 뿜어내는 양피지에 그려진 지도를 내려다보며 안톤이 물었다.

“그런 것 같아.”

“헤르파 사막의 끝이군요. 소금 사막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고요. 그런 곳에 라딘의 서의 열쇠가 잠들어 있었다니. 의외네요.”

안톤이 눈살을 찌푸렸다.

말레 상단은 게르피온과의 소금 교역권을 갖고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리고 말레 상단의 책임자인 안톤 역시 소금 사막에서 소금을 채취하는 것을 감독하기 위해 몇 번이나 그곳을 찾았었고.

그런데 그런 가까운 곳에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었다는 게 의외였던 모양이다.

“나도 놀랐어. 그렇게 가까운 곳에 숨겨져 있었다니. 그리고 그 장소가 아드리안 제국이 아니라 게르피온이란 사실에도 놀랐고.”

로엔의 말에 네 남자 역시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이곳까지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나흘이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낮에 움직이는 건 더위 때문에 힘들기 때문에 새벽 시간과 오전 시간에 최대한 많이 움직여야 하거든요. 그리고 한낮에는 휴식을 취하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진, 당신 생각은 어때요?”

안톤의 말에 동의하기 전, 로엔은 옆에 앉아 있는 진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는 아까부터 양피지를 보며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로엔의 물음에 진이 양피지에서 눈을 떼긴 했지만 여전히 뭔가 거슬리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것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아채지 못한 탓에 딱히 입에 담지는 않았다.

“좋은 생각인 것 같군. 헤르파 사막의 태양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서.”

“그럼 내일 새벽에 출발하려면 일찍 자야겠네요. 밤새 불침번을 서야 할 것 같은데.”

로엔의 말에 세이지가 고갤 가로저었다.

“불침번은 서지 않아도 될 거야. 여기가 괜히 죽음의 땅이 아니거든.”

“그게 무슨 말이죠, 세이지 님?”

“여긴 우릴 공격할 맹수조차도 없다는 뜻이야. 내 장담하건대, 5년 동안 이곳에 있으면서 개미 새끼 한 마리 본 적 없었어. 그치, 대장?”

세이지가 동의를 구하듯 진을 보았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 역시도 모두 진에게 가 닿았다. 모닥불이 그의 조각 같은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 냈다.

“맞아. 사막 끝에 소금 사막이 없었다면 이곳은 버려진 땅이 되었겠지. 아드리안에서 헤르파 사막을 차지하기 위해 200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도 않았을 테고.”

“거봐. 그러니까 이곳에 있을 때만이라도 긴장감은 내려놓고 편히 자자고.”

세이지의 말에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그렇게 해요. 출발은 동이 트자마자 하는 걸로 하고, 다들 좀 쉬어요.”

로엔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일행은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마음 드는 곳에 1인용으로 보이는 가죽 천막을 쳤다. 다들 노숙에 익숙한 듯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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