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겨울 호수는 가장 자리가 벌써 꽁꽁 얼어 있었다.
사람들이 얼음 위에 서 있는데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걸 보니, 아직 시작되지도 않은 겨울의 혹한이 어떨지 작게나마 짐작이 됐다.
호수로 모여들었던 사람 들 중 몇몇이 앞으로 나왔다.
등을 띄워야 했기 때문에 마을에서 힘 꽤나 쓴다고 알려진 장정들의 손엔 도끼가 들려 있었다. 그 도끼로 꽁꽁 언 호수를 깨려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부지런히 얼음을 깨던 사람들이 움직임을 멈추더니, 이내 호수 밖으로 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챙, 챙, 쩍― 하는 굉음과 함께 새하얗게 얼었던 호수가 길게 갈라지며 깨어지는 게 보였다.
다른 때라면 차가운 공기를 찢는 날카로운 소리에 불쾌감을 느끼며 귀를 막았을 테지만, 달빛 아래 얼음이 갈라지는 모습은 묘하게 사람의 눈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손에 든 붉은 등을 호수에 띄울 생각에 자꾸만 흥분이 됐다.
그때 휘익, 휘리릭― 새소리와도 닮은 휘파람 소리가 호수의 서늘한 공기를 울렸다. 마을의 촌장이 들고 있던 특이한 형태의 피리 소리인 모양이었다.
“호수의 얼음이 깨졌으니 이제 등을 띄우셔도 됩니다.”
마을의 촌장이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자, 잔뜩 설렌 표정으로 등을 들고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 호수 쪽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곤 들고 있던 등을 띄우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잔잔한 호수가 붉은 등으로 가득 찼다. 로엔 역시 들고 있던 등을 호수 위에 띄웠다.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겨울의 한기를 품은 서늘한 바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설렘을 닮은 온화한 바람이었다.
“어, 눈이다.”
“정말? 세상에. 올해 내리는 첫눈이야.”
“올해도 모리가 날짜를 맞혔군.”
사람들의 목소리에 로엔이 고갤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하늘에서 새하얀 솜털이 내려오고 있었다.
눈을 향해 손을 뻗자, 손바닥에 내려앉은 눈은 로엔이 만지기도 전에 온기에 녹아 사라졌다.
“진, 이게 눈이래요.”
아쉬움과 신기함이 점철된 표정으로 로엔이 진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도 새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예쁘군.”
“네, 너무 예뻐요. 정말 마음에 들어요. 새하얀 솜털 같아요. 그런데 손에 닿자마자 녹아서 아쉬워요.”
로엔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눈을 잡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새하얀 눈은 잡는 순간 순식간에 녹아 없어졌다.
“나도 매 순간 아쉬워. 닿기만 해도 너무 달콤해 녹아 없어질 것 같아서.”
달콤하다고?
로엔이 움직임을 멈추고 진을 바라보았다. 진은 눈을 맛본 적이 있는지 굉장히 아쉬운 얼굴로 저를 보며 서 있었다.
로엔이 저도 눈을 맛보고 싶단 생각에 입을 벌리곤 혀를 내밀었다. 차가운 눈이 입안으로 들어가 사르르 녹아 내렸다.
분명 달콤하다고 했는데…….
“순 거짓말쟁이. 달콤하긴 커녕…… 흣!”
진의 손에 턱이 붙잡히자, 로엔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진의 시선이 살짝 벌어져 있는 제 입술에 닿아 있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태울 듯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진, 잠깐만…….”
당황한 로엔이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힘으론 그를 밀어내는 건 역부족이었다.
“비켜 봐요. 다른 사람들이 보면…….”
“걱정 마. 다른 사람들은 우리한테 신경도 쓰지 않을 테니까.”
진이 키스라도 하려는 듯 뻔뻔하게 고갤 숙여 왔다. 당황한 로엔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곧 첫눈을 맞으며 서로를 끌어안고 키스하는 연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로엔의 뺨이 뜨거워졌다. 진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봐.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
진의 입술이 로엔의 뺨에 닿았다. 조금 전 새하얀 눈이 닿았던 곳이었다.
뺨에 닿았던 입술이 콧잔등에 닿았다. 그리고 다시 눈꺼풀 위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로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부끄러웠다. 키스보다 더한 것도 한 사이였지만, 이상하게도 혀를 얽는 농밀한 키스를 할 때보다 이렇게 뺨에 입을 맞출 때가 더 어쩔 줄 몰랐다.
“흐읏.”
그가 턱을 기울여 깊숙이 입을 맞춰 왔다. 차갑게 식은 입술이 그의 더운 숨결에 빠르게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꺼운 외투 너머로 심장이 뛰는 게 느껴졌다. 허리에 감긴 팔에 힘이 더해지며 진득하게 몸을 맞물려 왔다.
“녹아내릴 것 같아.”
입술을 붙인 채 속삭여 오는 목소리에 로엔은 지금까지 달콤하다느니, 아쉽다느니 했던 말들이 새하얀 눈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제 입술에 대한 말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살짝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맞물렸다. 주위에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와 입술이 닿는 순간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새하얀 눈이 커튼처럼 내려 두 사람을 감쌌다.
뜨거운 숨결이 몸을 뜨겁게 달궜다. 당장에라도 그와 몸을 겹치고 싶은 열기에 등줄기에 나른한 쾌락이 지나갔다.
차마 닫히지 못한 로엔의 눈에 호수 아래로 무수히 떨어지는 눈이 보였다.
아름다웠다. 눈으로 덮인 그림처럼 신비로운 겨울 호수와 그 위를 따라 흔들리는 등불. 그리고 바람을 닮은 청량한 체향이 온통 로엔의 마음을 채웠다.
“널 지금 당장 안고 싶어. 더 가까이 닿고 싶어.”
그의 속삭임에 로엔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로엔도 그에게 더 가까이 닿고 싶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지만 부족했다.
“좋은 곳을 알고 있어.”
진이 로엔에게서 몸을 떼곤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겨울 호수에서 벗어나 그들이 간 곳은 다름 아닌, 모리의 대장간이었다.
대장간 안으로 들어간 진이 재빨리 아무도 들어올 수 없게 문을 닫았다. 그리곤 붉은 용광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뜨거운 불꽃이 차갑게 언 두 사람의 몸을 녹였다.
“주인도 없는 곳에 들어와도 될까요?”
“걱정 마. 아무도 없어.”
그리고 중간에 모리가 돌아온다고 해도 두 사람을 방해할 리 없었다. 진 로이슈덴은 모리가 신성시 여기는 붉은 용광로의 주인이었다.
무엇보다 진이 대장간을 나오기 전에 이곳에서 월식을 봐도 된다고 먼저 허락한 건 모리였다.
“천창을 통해 월식도 볼 수 있어.”
진의 말에 로엔이 고갤 들었다. 그의 말처럼 층고가 높은 건물의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 밤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새하얗게 내리는 눈 역시 눈에 들어왔다.
눈이 내려 추운 밖과는 달리 대장간 안은 아늑했다.
“이리 와.”
진이 로엔의 손을 잡고는 용광로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옆에 놓여 있던 두꺼운 양탄자를 바닥에 깔고는 로엔을 앉혔다.
그는 로엔이 입고 있는 두꺼운 코트를 벗기고 축제에서 산 털로 된 가죽 부츠도 벗겼다. 그의 손이 조급하게 그녀의 옷을 헤집었다.
순식간에 알몸이 된 로엔이 두 팔로 벗은 몸을 감쌌다. 본능적으로 제 심장에 새겨진 혈독화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이상했다. 사랑을 나눈 게 처음도 아닌데, 그의 시선에 자꾸만 얼굴이 붉어졌다. 아마 그의 눈빛 때문인 듯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보듯 그의 눈빛이 열망으로 빛나고 있었다. 언제나 차갑게 느껴지던 은청색의 눈동자가 타오르는 용광로의 푸른 불꽃처럼 진득하게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진.”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들은 듯 그가 눈을 맞춰 왔다. 그리곤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던 손을 붙잡더니 그녀의 손목에 입을 맞췄다.
로엔은 그가 입을 맞춘 게 그녀의 손목에 걸려 있는 타라의 연이란 걸 깨닫곤 입술을 깨물었다.
“네 손목에 내 타라의 연이 채워져 있는 걸 볼 때마다 내가 어떤 마음인지 알면, 넌 도망치고 싶을지도 몰라.”
진의 목소리에 담긴 진득한 소유욕에 로엔은 몸을 떨었다.
그 무엇도 그의 마음속의 공허를 채울 수 없었다. 그래서 모든 것에 철저히 무관심했고, 의미를 두지 않았다.
로엔 록스버그는 그러던 중 그가 온전히 갖게 된 유일한 제 소유였다. 그러니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절대 놓을 수 없었다.
황제인 에드윈을 죽여야 하는 반역자가 된다고 할지라도, 절대 제 것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진이 로엔의 뺨을 감싸 쥐곤 입술을 겹쳐 왔다. 쪽, 쪽. 입술이 맞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질척한 소리가 대장간 안을 울렸다.
순식간에 로엔의 몸이 두꺼운 양탄자 위에 눕혀졌다. 그리곤 그녀의 몸 위로 진의 단단한 몸이 겹쳐졌다.
로엔은 맨살에 닿는 옷감의 감촉에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도 벗어요. 온전히 당신한테 닿고 싶어요.”
진이 서둘러 입고 있는 옷을 모두 벗었다. 빠르게 알몸이 된 진의 심장에 검은 드래건의 비늘이 불빛에 반짝였다.
이채를 띤 그 신비로운 광채에 로엔은 고갤 숙여 입을 맞췄다. 그녀의 입술이 닿자 탄탄한 어깨 근육이 흠칫 떨리는 게 보였다.
로엔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군살 없는 아랫배로 향했다. 손끝으로 울퉁불퉁한 근육을 쓸어내리자, 그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제길.”
드래건의 비늘에 닿는 로엔의 입술 감촉에 진이 열기를 참지 못하고 몸을 떨었다. 그리곤 로엔을 품에 안고는 농밀하게 몸을 겹쳤다.
로엔은 이제 막 봄을 맞은 초록의 나무처럼 한껏 달콤한 이슬을 머금고 순식간에 젖어 들었다.
그 달콤하고 녹아내릴 것 같은 습윤함에 진은 허릴 움직여 단숨에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날카로운 쾌감에 온몸이 속절없이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