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아드리안 제국의 황궁 서쪽엔 작은 탑이 있었다.
키가 큰 자작나무로 둘러싸인 탑은 작정하고 찾지 않는다면 그 존재조차도 알 수 없는 곳이기도 했다.
200년 전 존더부르크 1세에 의해 지어진 서쪽 탑은 황제 이외엔 그 누구도 발을 들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서쪽 탑의 주인은 대대로 이어져 온 라딘의 혈족이었다.
황제의 숨은 조력자이자, 지금은 사라진 금기된 주술을 쓰는 유일한 자.
위대한 예언가 라딘이 죽은 이후,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들은 라딘의 혈족을 씨어(Seer)라 지칭했고, 서쪽 탑의 주인이 된 씨어는 ‘라딘의 서’를 찾는 데 골몰했다.
처음엔 일종의 벌이었다. 제 혈족이 숨긴 ‘라딘의 서’를 찾는 개일 뿐이었고.
사실 예언서이자 강력한 주술을 품고 있는 ‘라딘의 서’는 존더부르크 1세에 의해 사장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진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라딘의 서’는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처럼 그저 그런 평범한 책이 아니었다.
예언서의 주인이자 타란 대륙 역사상 가장 강력한 주술을 지녔던 대마법사 라딘의 힘이 고스란히 담긴 마법서였다. ‘라딘의 서’를 갖는 자가 타란 대륙을 평정한다는 소문이 돌 만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고.
그리고 예언서에 쓰인 내용은 현실이 된다는 점에서 황제가 될 욕심을 품은 자들에겐 꼭 손에 쥐고 싶은 물건이기도 했다.
존더부르크 1세도 그 예언서를 손에 넣길 원했었다. 아니, 당연히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가 될 자신의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라딘은 제 예언이 잘못되었음을 제자인 타에라에게 말했다. 한마디로 아드리안 제국을 넘어 타란 대륙의 주인이 될 자는 그가 아닌 다른 이라고 했다.
‘노아스의 주인인 검은 드래건의 혈족.’
그자가 타란의 새로운 주인이며, 제 신부가 될 여인 역시 그자의 신부라고 했다.
한순간에 모든 걸 빼앗길 처지에 놓인 것이다.
타란 대륙을 손이 쥘 열망으로 들떠 있던 존더부르크 1세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빼앗길 수도 없었다. 그는 라딘의 예언을 사장시키고, 그의 목줄을 쥘 계획을 세웠다.
그 처음 계획이 바로 검은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자를 반역죄로 몰아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은밀하게 기사단과 주술사들을 움직여 검은 드래건의 피를 받은 이를 몰살시켰다.
무엇보다 라딘의 제자였던 타에라의 도움이 컸다.
제 스승이 잘못된 예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걸 꺼렸던 것인지, 타에라가 알아서 제 손으로 노아스의 땅에서 검은 드래건의 혈족을 찾아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귀족들은 벌벌 떨며 그의 발아래 납작 무릎을 꿇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존더부르크 1세의 의도대로 순조롭게 되어 갔다.
하지만 그가 검은 드래건의 혈족을 잡아 모두 죽이는 사이, 라딘은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숨어들었다.
강력한 마법이 담긴 ‘라딘의 서’ 역시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빌어먹게도 그것이, 서쪽 탑이 세워진 후 그곳에 갇힌 씨어의 불운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서쪽 탑의 창문이 열렸다.
빛 하나 없던 어둠 속에 등대처럼 등불이 일렁거렸다.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된 듯 어두운 하늘을 비행 중이던 검은 매가 빠른 속도로 서쪽 탑을 향해 날아들었다.
씨어가 등불을 들어 길을 밝히자, 매가 앞으로 뻗은 씨어의 팔위에 안착했다. 매의 다리엔 주술로 채운 붉은 족쇄가 반짝였다.
씨어가 매의 검고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언제나 그렇듯 똑같은 말을 낮게 읊조렸다.
“그래, 게르피온에서 뭘 보고 돌아왔는지 한번 볼까?”
이내 서쪽 탑의 창문이 닫히고 어둠을 밝히던 등불이 사라졌다. 또다시 짙고 음산한 어둠이 서쪽 탑을 감싸기 시작했다.
* * *
북쪽 마을은 축제로 인해 아침부터 분주했다.
필요한 정보를 다 얻긴 했지만 세이지와 안톤과 만날 날까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축제에 참석한 다음 떠나자고 의견을 모은 참이었다.
느지막이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자, 라이칸은 볼일이 있다며 여인숙을 나갔다.
1층 테라스에 남은 두 사람은 광장을 내려다보며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두 분은 축제 구경 안 가십니까?”
빨래가 가득 담긴 바구니를 들고 계단을 내려오던 이든이 밖으로 나가다 테라스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로엔과 진을 발견하곤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천천히 가 보려고요. 그런데 구경할 만한 게 있을까요?”
로엔의 물음에 이든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올해 축제는 다른 때와는 달리 아주 특별하답니다.”
“뭐가 다른데요?”
“오늘 밤에 월식이 있거든요. 연인들에겐 평생에 단 하나뿐인 반려를 맞게 되는 날이죠. 그래서 갠디스가 축제에 참석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것이고요.”
“그런 의미가 있었군요.”
흥미로워하는 로엔과는 달리, 이미 모리에게 들어 월식에 대해 알고 있던 진은 말없이 차를 마실 뿐이었다.
“네, 그러니 월식이 있는 시간엔 꼭 연인과 함께 계세요. 이미 만나신 것 같긴 하지만.”
이든이 옆에 앉아 있는 진에게 시선을 준 다음 다시 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혹시 알고 있었어요? 오늘 월식이 있는 거요.”
로엔이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차를 마시고 있는 진을 건너다보았다. 필요한 정보도 다 모았는데, 한사코 축제가 끝난 다음에 가자고 했던 게 바로 진이었기 때문이다.
“모리가 그런 비슷한 말을 한 것 같기도 하군.”
별 관심 없다는 듯 말하는 진을 보며 로엔은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분명 흥미가 있는데도 아니 척 내숭을 떠는 모습이 귀여워서다.
“어쩔 수 없겠네요. 사실 저도 눈이란 게 뭔지 보고도 싶고. 그럼 슬슬 나가 볼까요? 아참, 그러고 보니 월식이 몇 시인지 물어보질 못했네요.”
“자정이라고 들었어.”
자리에서 일어서던 로엔이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로엔을 따라 일어서던 진이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갤 든다.
“그냥요. 시간까지 자세히 알고 있는 걸 보니 ‘정말 축제를 즐기고 싶었구나.’ 싶어서요.”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이곳 축제는 처음이니까.”
진은 별것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귓불이 붉어진 건 숨길 수가 없었다.
“그렇죠. 그런 건 당연히 꼭 알고 있어야죠. 그럼, 그것 말고 알아 둔 게 또 있나요?”
“밤에 북쪽 호수에 등을 띄운다더군.”
“그래요? 거기에도 꼭 참석해야겠네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또 뭐가 있는지 말해 봐요. 진.”
로엔이 바짝 얼굴을 들이밀며 흥미진진한 얼굴의 진을 관찰했다.
로엔의 거듭되는 질문에도 귀찮아하는 법도 없이 설명하려 애쓰는 진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 말고는 딱히 없다고 듣긴 했는데, 분명 직접 구경하다 보면…….”
“풋―.”
입술 새로 흘러나온 웃음소리에 진이 하던 말을 멈추곤 로엔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입술을 꾹 다물곤 미간까지 찡그린 로엔을 본 순간, 진의 눈썹이 가파르게 위로 치켜 올라갔다.
“너…….”
그제야 저를 놀리고 있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다.
“축제를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네요, 진. 관심도 없는 줄 알았더니.”
로엔이 웃음을 삼키며 진을 놀렸다. 그러자 진이 작게 내쉬더니 로엔의 손을 붙잡았다.
“관심 없어. 좋아한 적도 없고.”
“그런 것치곤…….”
“너랑 같이 참석할 테니까 알아본 거야. 그래서 관심이 생긴 것이고.”
진이 로엔의 손에 깍지를 끼곤 은근하게 손바닥을 문질렀다. 예민한 살갗이 맞닿아 천천히 비벼지자, 순식간에 야릇한 열기가 느껴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자 키스하고 싶어졌다. 로엔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서둘러 감정을 삼켰다. 이러다간 축제는커녕…….
“흠흠, 얼른 가요. 겨울 호수에 등을 띄워야 한다면서요.”
로엔은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제 얼굴에 들러붙는 진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삼킬 듯 일렁이는 지독한 열기에 맞잡은 손이 저릿했다. 로엔은 이젠 숨기지도 않는 그의 노골적인 감정에 얼굴이 붉어졌다.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보던 진이 천천히 고갤 돌렸다.
“그래, 어서 나가는 게 좋겠군. 지금 나가지 않으면 축제는커녕 밤까지 널 놓아주지 못할 것 같으니까.”
로엔이 고갤 들어 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다분히 성적인 의도를 품고 있는 말이었지만, 그의 냉정한 얼굴에선 그 어떤 음흉함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러니까 맨날 나만 안달이 난 것 같지.’
로엔이 마땅찮은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는지도 모르고 진이 외투를 가져와 로엔에게 건넸다.
“나가서 방한용 장갑을 사야겠군. 사막도 밤엔 여기 못지않게 춥거든.”
“갠디스가 신은 털 부츠가 마음에 들던데. 그것도 사야겠어요.”
외투를 마저 입은 로엔은 진과 함께 문을 나섰다. 이내 주위에 있던 낯익은 자들이 두 사람을 발견하곤 따라붙는 게 보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길 기다린 것 같았다.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지금은 공격하진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그들 역시 로엔 옆에 있는 사람이 진 로이슈덴이란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공격할 마음이 있다고 해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는 게 맞았다.
로엔은 천천히 긴장을 풀었다. 그리곤 축제를 즐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