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월식?”
“네. 고대에서 달은 호루스의 왼쪽 눈으로, 죽음을 상징합니다. 오늘 밤은 악마의 별이 호루스의 왼쪽 눈을 삼키는 월식입니다. 악하고 부정한 것들은 삼켜지고 모든 선만이 존재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 원하는 소원을 비십시오. 새하얗고 순결한 첫눈이 그 소원을 불의 신께 가져갈 것입니다.”
“월식에 비는 소원이라. 재미있겠군.”
“만약 월식을 보실 장소가 필요하시다면 이곳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마을과 떨어진 곳이라 밤이 되면 이곳을 찾는 이는 저뿐입니다. 만약 공작님께서 오신다면 월식을 편히 보실 수 있게 준비해 두겠습니다.”
모리의 제안이 솔깃했다.
“그럼 부탁하지.”
진이 모리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뒤 대장간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모리는 상자를 열어 호리우스의 눈을 붉은 용광로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화르륵 소릴 내며 불꽃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모리는 한참을 그렇게 서서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지켜본 뒤에야 그곳을 떠났다.
얼마 뒤,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검은 매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검고 푸른 눈이 주술에 걸려 있어 날카롭게 번뜩였다. 그리곤 회귀 본능에 의해 제 주인이 있는 아드리안 제국의 황궁을 향해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 * *
어두운 창밖을 내다보던 로엔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몸을 돌렸다.
불이 꺼진 방은 어두웠다. 하지만 창문을 통해 들어온 달빛은 방으로 들어오는 진을 비추기에 충분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갔던 일이 잘 안 된 건가요?”
로엔의 물음에 진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로엔에게 다가왔다. 그리곤 그녀를 품에 안고는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선 화염 냄새와 함께 청량한 숲의 향이 났다.
“괜찮나요?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말없이 그녀를 품에 꼭 안고 있는 그의 모습에 걱정부터 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로엔은 억지로 그를 밀어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음영이 진 얼굴에선 그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진?”
로엔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감쌌다. 진은 온기를 찾는 아이처럼 그녀의 손에 얼굴을 묻고는 손바닥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죠?”
“응, 아무 일 없었어. 뜻하지 않은 사실들을 많이 알게 됐지. 반년 전 에드윈이 사람을 보내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에 대해 알아보고 간 모양이더군. 그리고 우리가 찾던 그 점성술사 역시 라딘의 서와 연관이 있었고.”
진은 모리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말했다. 이야기가 다 끝난 뒤엔 외투에 넣어 두었던 양피지와 나침반까지 꺼내 로엔에게 건넸다.
하지만 로엔은 그가 건네는 양피지와 나침반을 받는 대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우리가 필요한 정보를 다 알아 왔는데, 왜 그런 얼굴인지 모르겠네요.”
로엔이 의아한 듯 말하자 진이 손을 뻗어 로엔의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겼다.
“화가 나서 그래.”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데요.”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10년 전에 황제가 널 죽이려고 모리의 대장간에 검을 의뢰했다더군. 거절을 하긴 했지만,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 너와 그렇게 오랫동안 거래를 하면서도 네가 한 마디 언질도 하지 않았다는 게 화가 나. 빌어먹게도.”
사실 모리의 잘못은 아니었다. 타국의 황제와 명망 있는 귀족 간의 분쟁이었으니까.
한낱 타국의 대장장이인 모리가 나서서 해결할 위치도 아니었고, 만약 그가 로엔을 돕기 위해 움직이려고 했다면 암살자의 손에 죽게 될 이는 로엔이 아니라 모리가 되었을 터였다.
원망할 필요도 없었지만, 화가 났다. 제 무력함에 더 분노가 치솟았고.
10년 전이면 로엔은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런 어린아이를 죽이기 위해 타국에까지 손을 뻗었다고 생각하자, 황실에 대한 분노가 들불처럼 치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용납이 되지 않았다.
황제가, 절대 권력을 쥔 자가 어린아이를 죽이기 위해 이렇게까지 하다니.
진은 그의 지난날이 후회가 됐다. 그런 거지 같은 황제를 위해 정복 전쟁에서 5년 동안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사실이 미치게 싫었다.
또한 그런 황제 때문에 반역죄를 지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모든 걸 포기했던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다.
“진, 고갤 들어 봐요.”
로엔의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진이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의 얼굴에 씁쓸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화가 난 이유가 나 때문이었나 보군요.”
“맞아. 그리고 나에게도 화가 나. 왜 이제야 널 만나게 된 걸까? 내가 바보같이 내 연민에 빠져 있지만 않았어도…….”
지난번에도 했던 말이라 로엔은 차분하게 응수할 수 있었다.
“억지 그만 부려요, 진. 당신도 알잖아요. 우린 지금 만났어야 했어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을 읽으려는 듯 진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때도 말했지만 재미있었을 것 같긴 해요.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귀족 청년이 괴물 공작에게 반해 쫓아다니는 모습은 흥미로울 것 같거든요.”
로엔의 농담에 음울하던 진의 입가에 그제야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마 지금처럼 너만 쫓아다녔을 거야. 너에게 정신없이 빠져서는 밤마다 담을 넘었을 테고.”
진의 말에 로엔이 어이없다는 듯 진을 보았다.
“발랑 까져서는. 누가 창문을 열어 준대요?”
로엔은 얼마 전 진이 창문을 넘어 제 방에 찾아왔을 때를 떠올렸다. 깜짝 놀리긴 했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었다.
“밤새 창문을 두드리면 마음 약한 넌 열어 주지 않고는 못 배겼겠지. 그리고 너. 내 얼굴 좋아하잖아.”
진의 뻔뻔함에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로엔은 지금보다 어린 모습의 진을 상상했다. 서늘함과 날카로움이 덜한, 진의 말랑말랑한 미소년의 모습을.
“로엔, 너에게 줄 게 있어.”
진이 고갤 숙여 로엔의 입가에 입을 맞췄다. 쪽, 쪽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뭔데요?”
진이 품 안에서 단검을 꺼냈다. 붉은 용광로에서 꺼낸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바로 그 단검이었다. 1,000년 전 대장장이였던 난쟁이가 만든 불의 신의 신물이기도 했다.
“단검이네요.”
“너에게 주는 결혼 선물이야.”
로엔은 진에게서 단검을 받아 들었다. 그리곤 예리한 빛을 뿜어내는 단검을 살폈다.
달빛에 비춰 보니 단검의 한쪽 면에 고대어가 음각되어 있었다. 그리고 단검의 손잡이에 새겨진, 로이슈덴 공자가의 상징인 공작새가 눈을 붙잡았다.
로엔은 단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손에 감기는 느낌이 굉장히 익숙했다. 마치 처음부터 제 것인 양 착각이 들 정도였다.
“고마워요. 내일 축제에서 단검을 넣을 검집을 사야겠어요.”
로엔이 마음에 드는 듯 진을 올려다보았다.
“로엔, 나도 갖고 싶은 게 있는데. 주겠나?”
“갖고 싶은 거요? 그게 뭔데요?”
“너에게 타라의 연을 받고 싶군.”
순간 로엔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검을 쥔 손 역시 허공에서 멈춘 채 움직일 줄 몰랐다.
로엔의 반응에 진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었다.
“당황했나 보군. 어려우면 주지 않아도 돼. 그냥, 결혼을 하면 타라의 연을 교환하는 게 관례라고 하고, 또 네 물건 중의 하나를 갖고 싶기도 해서…….”
“줄게요. 당연히 줘야 하는데, 제가 생각이 너무 짧았어요. 경황이 없기도 하고. 하지만 지금은 없어요. 아드리안으로 돌아가면 줄게요. 놓고 왔거든요.”
로엔의 말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진의 입매가 사르륵 풀렸다.
“그래, 돌아가면 꼭 줘.”
진이 로엔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곤 허리에 팔을 감고는 그녀의 입술에 진득하게 혀를 얽어 왔다.
“항상 가지고 다닐 생각이야. 손목에 채워서 내가 누구 것인지 모두가 알 수 있게.”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조금 들뜬 듯도 보였다. 제 몸을 꽉 끌어안는 그의 팔에도 온기가 느껴졌다.
로엔은 차마 그를 마주 안지 못했다. 기쁜 듯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타라의 연이라…….’
사실 타라의 연은 그녀가 항상 몸에 품고 다니는 작은 가죽 주머니 안에 고이 보관되어 있었다.
반려가 된 그에게 제 타라의 연을 줘야 했지만, 진에게 주지 못한 이유는 대신관의 말 때문이었다.
「네. 누구의 것인지는 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타라의 연에 매달린 공작새에 피가 흥건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도 보였습니다.」
「이건 그 형태가 불분명하긴 한데, 동그란 원통형의 물건이었습니다. 호리우스의 눈으로 된 물건인 건 확실한데, 복잡한 주술이 걸려 있는 것처럼 보이더군요. 혹시 그런 물건을 가지고 계십니까?」
피가 묻어 있었다는 타라의 연을 차마 진에게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진이 건넨 양피지엔 원형으로 된 크립텍스의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대신관이 말했던 신탁의 내용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 피를 흘리는 이는 제 타라의 연을 가진 사람일 확률이 컸다.
그러니 제 타라의 연은 모든 것들이 해결된 후에 진에게 줄 생각이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것이고.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렸더니 피곤해요. 자고 싶어요.”
“그래, 어서 자는 게 좋겠어.”
진이 로엔을 안고 침대로 향했다. 그녀를 침대에 눕히곤 그 역시 당연하다는 듯 로엔 옆에 누었다.
이불까지 꼼꼼하게 덮은 후 잠을 청했다. 그제야 안온함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이완되기 시작했다.
곧 로엔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