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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69화 (170/201)

169화

“공작님! 로이슈덴…….”

모리가 놀라 그를 불렀다. 경악으로 물든 그의 얼굴은 일그러지다 못해 얼어붙은 듯 그대로 굳어졌다.

쇠를 녹이는 용광로였다. 인간이 그곳에 손을 넣었다간 형체도 없이 녹아 없어질 게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데 진 로이슈덴이 붉은 용광로에 손을 넣었다.

이건, 미치지 않고서야…….

“말도 안 돼.”

모리는 믿기지 않아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진짜였다.

진 로이슈덴의 손은 뜨거운 용광로에 녹아내리는 대신, 지금껏 한 번도 꺼진 적 없는 불꽃을 손에 쥔 채 서 있었다.

“불의 신물이란 게 이것이었나?”

진은 제 손바닥 위에서 타오르는 호리우스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호리우스의 눈에 옮겨 붙은 푸른 불꽃은 진에게 복종이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일렁였다. 아마 제 몸속에 있는 검은 드래건의 힘 때문인 듯했다.

신성한 땅 노아스의 주인이었다는 검은 드래건의 심장이 제 몸속에 봉인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진이 주먹을 쥐었다. 그러자 불꽃이 점점 그의 손안에서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어? 신성한 불이…….”

모리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한 번도 꺼진 적 없던 신성한 불이 마치 수명을 다한 듯 꺼져 가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진은 모리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 붉은 용광로를 가리켰다. 그러자 진의 손에서 사라졌던 푸른 불꽃이 용광로 안에서 다시 일렁이고 있었다.

“그럼 이건…….”

모리의 시선이 진의 손으로 향했다. 여전히 꽉 움켜쥔 그의 손은 펴질 줄 몰랐다.

“불의 신물이지. 그리고 이것의 주인은 네가 아니야. 너는 이 대장간을 지켜 왔던 대장장이들처럼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이것을 지키는 자였을 뿐.”

진의 말에 모리 역시 고갤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이 대장간의 주인이 된 자의 첫 의무가 바로 붉은 용광로를 지키는 것이었으니까요.”

붉은 용광로는 불의 신의 신물을 뜻했다. 그러니 이곳의 대장장이는 불의 신의 신물을 지키는 수호자일 뿐이었다.

그제야 진이 천천히 손을 폈다. 그의 손바닥 위에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단검이 신비로운 푸른빛을 띤 채 놓여 있었다.

모리는 단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빛에 놀랐다. 지금껏 수많은 검을 만들어 왔지만 절대 그의 능력으론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

노아스의 땅에 터를 잡고 검은 드래건을 모셨던 대장장이 난쟁이라면 모를까.

“어, 설마?”

모리의 눈이 커졌다. 그제야 진의 손에 놓인 단검이 1,000년 전 사라진 노아스의 땅에서 살던 난쟁이가 만든 검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단검 단면에 새겨진 노아스의 고대 문자가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잡이에 새겨진 그림은 공작새였다. 무엇보다 공작새는 로이슈덴 공작가의 상징이었다.

모리의 눈동자가 경외로 번뜩였다.

‘이젠 사라진 노아스의 땅의 주인이 로이슈덴 공작가였던가?’

충격으로 머리가 멍해졌다.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전 붉은 용광로에 손을 넣고도 멀쩡했던 진 로이슈덴이었다. 이건 그가 검은 드래건의 혈족이 아니고선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아스의 주인인 검은 드래건이…….”

모리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절대로 입에 담아선 안 되는 금언이었기 때문이다.

대신 모리는 진을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붉은 용광로의 불꽃을 후광 삼아 서 있는 그에게선 강한 힘이 느껴졌다. 마치 그가 불의 신처럼 느껴졌다.

왜 그를 처음 만난 순간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지금껏 제가 수호해 왔던 신성한 불의 주인이었던 것이다.

눈앞에 서 있는 진 로이슈덴은 검은 드래건의 혈족, 그 자체였다.

“늙은 노파가 찾아와 호리우스의 눈으로 뭔가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던데. 그게 뭐였지?”

진이 단검을 품 안으로 밀어 넣으며 물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때 노파가 들고 온 설계도가 아직 남아 있을 겁니다.”

모리가 자리에서 일어나 재빨리 어디론가 향했다.

잠시 후 가죽 주머니를 들고 나타난 그가 네모나게 접힌 양피지를 진에게 건넸다.

펼쳐 든 양피지 위엔 원통형의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가 그려져 있었다.

“크립텍스군.”

호리우스의 눈으로 만들어진 원통형의 물건은 크립텍스였다.

스물여섯 자의 알파벳이 새겨진 다이얼 다섯 개를 나란히 배열한 형태로, 그 안에 담긴 것을 꺼내려면 다섯 글자로 된 암호를 정확히 맞추어야만 했다.

만약 암호가 잘못되었거나 억지로 열려고 한다면 크립텍스 속의 유리가 깨져 산성 용액이 흘러나오게 된다.

그리고 용액이 유리 안쪽의 파피루스를 녹여 영원히 그 안의 비밀을 사라지게 만드는 장치이기도 했다.

“의뢰자가 황제였나?”

“아닙니다. 다른 자였습니다. 하지만 황제도 알고 있는 듯합니다. 반년 전 황제의 측근으로 보이는 자가 저를 찾아와 이것에 대해 묻고 간 적이 있습니다.”

모리의 대답에 진이 고갤 끄덕였다. 아마 에드윈이 찾는 라딘의 서의 열쇠가 바로 이것인 모양이었다.

호리우스의 눈으로 된 크립텍스.

그리고 대신관이 신탁에서 본 물건 역시 이것인 듯했고.

“그럼 이걸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 노파는 어디에 있지?”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인 크립텍스에 대해 알고, 그것을 만들려고 했던 노파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정체가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그게, 반년 전 황제의 측근이 다녀간 뒤론 보이지 않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죠.”

그래서 모리 역시 노파가 황제 쪽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안 모양이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혹시 그 노파, 눈이 안 보이나? 아주 특이한 형태의 검은 구슬을 갖고 있고.”

“맞습니다. 주술사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더군요. 대신 자신은 시간에 갇혀 흐르는 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미쳤다고 생각했고요. 혹시 그 노파를 만나신 겁니까?”

“그런 것 같군. 왜 게르피온에서 아드리안 제국까지 흘러 들어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보니 그 노파, 별을 따라왔다고 했다. 또 로엔에게 하늘에 붉은 반지가 뜰 때 곧 만나게 될 것이라고도 했고.

‘젠장, 이런 인연으로 엮여 있어서 그랬던 건가?’

진은 손에 들려 있는 양피지를 다시 모리에게 건넸다.

“가지고 가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에겐 필요하지 않는 물건이라. 만약 신경이 쓰이신다면 그 노파를 만나거든 건네주십시오.”

모리의 말에 진은 양피지를 품 안에 밀어 넣었다. 로엔에게 보여야 할 것 같았다.

“모래 늪은 어떤 곳이지? 신의 신물이 모래 늪에 잠들어 있는 불의 신의 보물을 찾는 열쇠라도 하던데.”

진은 이든에게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모래 늪이라면, 헤르파 사막에 있는 그곳을 말하시는 겁니까?”

“맞아. 사막의 세이렌이 있는 곳이라고 하던데. 소문이 맞는 건가?”

“그런 소문이 있긴 하지만, 아무도 모릅니다. 그곳에 들어간 자들은 한 명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까요. 조금 전에 공작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곳에 불의 신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는 헛소문이 있어서 들어간 자들이 종종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모리 역시도 뜬소문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럼 헤르파 사막을 나오는 또 다른 출구는 없나? 반드시 살아서 나올 수 있는 출구 말이다.”

진의 말에 모리는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고갤 가로저었다.

“제가 아는 한 없습니다. 사막의 출입구는 딱 하나뿐이고요. 더 물으실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뭐든 알려 드리겠습니다.”

모리의 말에 진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내가 돌아간 뒤 널 찾는 자가 있을 것이다. 그자에겐 이 양피지를 내게 건넸다는 말만 하면 된다.”

진이 신성한 땅 노아스의 주인이며, 검은 드래건의 힘을 지닌 자란 사실은 함구하라는 의미였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리고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드릴 물건이 있습니다.”

모리는 대장간의 창고로 들어가더니 한참을 부스럭거렸다. 그리곤 손에 작은 상자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헤르파 사막에 가신다고 하니, 이걸 가지고 가십시오. 유용하게 쓰실 겁니다.”

상자의 뚜껑을 열자 나침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침반이라면 필요 없다. 이미 헤르파 사막의 지형은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평범한 나침반과는 다르다고 들었습니다.”

“뭐가 다르지?”

“주술이 걸려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눈으론 보이지 않는 길을 알려 준다고 하더군요.”

진이 낡은 나침반을 받아 들곤 모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걸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군.”

“저에겐 필요 없는 물건입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간다면 그 쓸모를 다할 수 있을 테죠. 그리고 신성한 불의 주인에게 드리는 선물입니다.”

“그럼 받도록 하지.”

진의 말에 안심한 듯 모리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언제 떠나십니까?”

“바로 떠나도 상관없지만, 축제가 끝난 다음 날 떠날 생각이다.”

“첫눈을 맞으실 수 있겠군요.”

“북쪽 땅이라 눈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이군.”

“그렇기도 하지만, 북쪽 마을에 내리는 첫눈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모리의 말에 진은 이든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고갤 끄덕였다.

“불의 신을 축원하며 축제까지 여는 걸 보면 특별할지도 모르겠군.”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번 축제가 더 특별한 건, 월식과 함께 첫눈이 내리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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