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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68화 (169/201)

168화

게르피온 북쪽 마을에 터를 잡은 모리의 대장간은 1년 365일 용광로의 불이 꺼진 적이 없었다.

비단 모리가 대장간의 주인이 된 후의 일만은 아니었다.

그가 대장간의 주인이 되기 전에도, 아니 그 전전대의 대장장이 때에도 대장간의 중앙에 있는 붉은 용광로의 불은 언제나 불의 신의 축복으로 꺼지지 않았다.

신성한 땅에서 시작된 불의 힘은 언제부터인지도 모르는 아주 먼 옛날부터 이곳, 북쪽 마을에 존재했다.

그 사실을 아는 자는 대장간의 주인인 모리밖에 없었지만, 간혹 주술사라 불리는 자들이 찾아와 불의 신물에 대한 얘길 주절거리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했다.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모리의 태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얕은 지식을 갖고 찾아온 주술사들은 붉은 용광로를 밝히고 있는 불의 신물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타닥, 타닥.

푸른 불꽃이 일렁이는 용광로의 불을 바라보던 모리가 상자를 열어 호리우스의 눈을 꺼내, 용광로 안으로 던져 넣었다.

그러자 사그라지던 불꽃이 화르륵 소릴 내며 무섭게 불이 일었다.

“말레 상단이라.”

모리는 자정이 거의 다 되어 가던 시간, 대장간을 방문했던 이든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든은 광장에 여인숙을 운영하는 갠디스의 사촌으로 오지랖이 넓고 성격이 서글서글한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모리를 찾아와 뜻밖의 것을 건네고 사라졌다.

「자, 받아요. 우리 여인숙에 든 손님이 이걸 가져다 드리래요.」

툭 건네고 간 봉투엔 그가 만든 단검이 들어 있었다.

지금껏 제가 만든 모든 검을 기억하고 있는 모리는 그 검이 아드리안 제국의 말레 상단에게 판 검이란 것을 바로 알아보았다.

“참 이상하군. 말레 상단에서 벌써 두 번이나 나를 찾아오다니.”

모리는 몇 달 전 그를 찾아왔던 라이칸이란 자를 떠올렸다.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와는 달리 그의 눈빛은 검처럼 날카로웠다.

그리고 그자는 제 주군을 죽이려는 암살자의 뒤를 쫓고 있었다.

“생각보다 순순히 돌아간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맹수처럼 따라붙던 눈빛과는 달리 순순히 물러난 그를 보며 안도했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다시 찾아온 걸 보면.

그것도 불의 신의 축제일에 딱 맞춰 오다니.

순간, 모리는 등골이 오싹할 만큼 지독한 냉기에 몸을 떨었다. 주위를 뜨겁게 달구던 붉은 용광로의 불꽃 역시 순식간에 잦아드는 게 보였다.

‘대체 이게 무슨…….’이라고 생각한 순간, 그림자가 일렁이는 게 보였다.

“모리, 오랜만이군.”

어둠을 뚫고 들려온 목소리에 모리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고갤 들자 언제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은청색의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로이슈덴…….”

“날 기억하고 있었군.”

진이 어둠 속에서 한 발짝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붉은 용광로의 불꽃이 또다시 흔들리며 급격히 그 빛을 줄였다.

마치 신성한 불 역시 갑자기 등장한 사내에게 두려움을 느낀 듯 한껏 몸을 사리는 느낌이었다.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정복 전쟁이 한창일 때, 적국의 기사가 저를 찾아온 건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었으니까요.”

거기다 제 나라 사람을 죽일지도 모르는 자에게 검까지 만들어 주었으니, 말 다 한 샘이었다.

“호리우스의 눈이군.”

진의 시선이 모리 옆에 놓여 있는 상자에 가 닿아 있었다. 당황한 모리가 재빨리 상자의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늦었다.

분명 붉은 용광로를 달구는 불길이 그 무엇도 아닌, 호리우스의 눈이란 사실을 진 로이슈덴 역시 알았을 터였다.

“검을 만들 때 저희 대장간만이 갖는 특별한 비법입니다.”

별것 아닌 듯 설명을 덧붙였지만 진이 표정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꺼지지 않는 신성한 불의 정체가 호리우스의 눈이었던 모양이군.”

“그건…….”

“속일 생각 마. 다 봤으니까. 그리고 경계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알릴 생각도 없으니까.”

진의 말에 그제야 모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전쟁이 끝났으니 더는 검이 필요 없는 것 아니셨습니까?”

“맞아. 우리의 계약은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파기됐지. 하지만 내가 오늘 이곳에 온 건 다른 이유에서다. 이든의 편지를 받았겠지?”

이든이라면…….

“말레 상단이 로이슈덴 공작가 소유였습니까? 제가 알기론…….”

“록스버그 공작가의 소유지. 얼마 전 록스버그 공작은 로이슈덴 공작 부인이 되었고.”

“아…….”

모리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 모습에 진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가 모리를 다시 찾은 이유가 록스버그 공작가의 암살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물어볼 게 있어서 왔다.”

“저는 관여한 바 없습니다. 의뢰를 받았지만 거절했고요.”

조금은 다급한 듯 말하는 모리의 태도에 진의 표정이 더욱 낮게 가라앉았다.

“그건 알고 있다. 검을 만드는 데 자부심을 가진 네가, 힘없는 어린 소녀를 죽일 살수의 검을 만들진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 암살자가 만드는 모든 검에 저만의 표식을 해 놓는 대장장이의 검을 암살 무기로 쓸 일은 없을 터였다. 바보가 아니고서야.

하지만 모리의 태도로 보건대, 의뢰는 들어왔었던 모양이다. 그게 무엇인지는 이제부터 알아보면 될 테고.

“그래서 거절했던 겁니다. 도와만 주면 그 대가로 아드리안에 지금 이곳보다 몇 배나 되는 대장간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지만 저는 신성한 불을 다루는 자일 뿐이라. 그리고 공작님도 언급하셨듯이 비록 제가 사람을 죽이는 검을 만들기는 하지만, 약자를 해하는 검은 절대 만들 수 없습니다.”

“그것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그래도 록스버그 공작을 암살하려는 자가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라는 건 알고 있었다는 뜻이군.”

순식간에 모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일렁이는 불꽃 너머로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는 것 역시 보였다.

모리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야말로 진 로이슈덴이 그를 찾아온 이유가 정말 그를 죽이기 위해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실, 알고는 있었지만 록스버그 공작님은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참신한 개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황제가 암살자를 어린 로엔에게 보내는데도 괜찮을 줄 알고 있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괜찮을 줄 알았다니.”

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무슨 의미인지 말하라는 듯 모리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모리가 고갤 들어 붉은 용광로를 바라보았다.

“신성한 불이 꺼지지 않아서입니다.”

또다시 알 수 없는 말을 뱉어 내는 모리를 보며, 진은 그의 말을 재촉하는 대신 기다렸다.

“혹시 공작님은 신성한 땅 노아스에 대해 들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노아스? 아니, 없다.”

“그곳은 타란 대륙에서 가장 신성한 땅이며, 검은 드래건의 혈족이 터를 잡아 살아오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검은 드래건은 한순간에 모습을 감추었고, 그 땅을 지키던 대장장이들이 주인을 잃고 꺼져 가던 신성한 불을 훔쳐 이곳으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불이 붉은 용광로 속의 바로 저것이고요.”

진의 시선이 붉은 용광로로 향했다. 숨을 죽이듯 불꽃을 잠재우고 있던 붉은 용광로가 진의 시선에 다시 화르륵 타올랐다.

일렁이는 푸른 불꽃을 보며 진은 다시 모리 쪽으로 고갤 돌렸다.

“노아스의 신성한 불과 록스버그 공작의 목숨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군.”

“저 역시 선대 대장장이로부터 전해들은 것이 다입니다. 선대 대장장이가 말하길, 록스버그 공작가에서 태어나 살아남은 여아는 신성한 불의 가호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용광로의 불이 꺼지지 않는 한 로엔 록스버그 공작님은 죽지 않을 겁니다.”

믿기지 않은 말이었다. 록스버그 공작가에 태어난 여아가, 신성한 불의 가호를 받는다니.

그렇다는 건 노아스의 검은 드래건의 혈족과 록스버그 공작가 사이에 뭔가 연관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렇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노아스의 땅에 살던 검은 드래건의 혈족이라니.”

진은 모리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제 심장을 손으로 꾹 눌렀다.

대장간에 도착한 후부터 심장에 돋아난 비늘이 바짝 날을 세우곤 드래건의 힘을 깨우려는 듯 몸속에서 자꾸만 꿈틀댔다.

‘제길, 갑자기 왜……?’

진이 드래건의 힘을 잠재우기 위해 심장 주변을 억누를수록 붉은 용광로의 불꽃이 파르르 떨며 더욱 몸집을 키웠다.

마치 제 몸속에 봉인되어 있는 드래건의 힘을 깨우기라도 하듯 푸른빛 역시 더욱 시퍼렇게 날을 세웠다.

“노아스라니. 제길.”

욕설과 함께 진이 심장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결혼식 날, 대신전에서 정신을 잃었을 때 보았던 꿈이 떠올랐다.

분명 위대한 예언가 라딘과 그의 제자 타에라였다. 그리고 그가 말했었다.

「1,000년 전, 모습을 감췄던 노아스의 땅에 파수꾼이 태어났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검은 드래건의 후예지. 그가 태어난 이상 더는 전쟁과 혼란은 없을 것이다. 곧 새로운 제국이 세워질 테니까.」

왜 지금 이 순간 그의 말이 떠오르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진은 지독한 충동에 이끌리듯 붉은 용광로를 쏘아보았다.

그리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용광로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 당장에라도 삼킬 듯 불꽃을 태우고 있는 용광로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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