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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67화 (168/201)

167화

록센을 벗어나 북쪽으로 갈수록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을 타고 달리는 동안에도 불어오는 바람이 연신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입술 새로 흘러나온 새하얀 숨이 연기처럼 뿜어져 나왔다가, 서늘한 공기에 순식간에 바스러졌다.

“워, 워.”

앞서 달려가던 라이칸이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그 뒤를 따르던 로엔과 진도 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무슨 일이지, 라이칸?”

“조금만 더 가면 북쪽 마을의 입구입니다. 바로 대장간으로 가시겠습니까?”

라이칸의 물음에 로엔은 고갤 가로저었다.

“대장간엔 내일 갈 거야. 그전에 정보원이 보낸 소문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생각이고. 상인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방을 빌렸으면 하는데.”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땅한 곳을 알고 있습니다.”

지난번 게르피온을 방문했을 때 봐 둔 곳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 그곳으로 가.”

다시 말을 달린 세 사람은 얼마 가지 않아 라이칸의 말대로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마을 축제라도 있는 모양이군.”

마을 입구부터 시작해 도로를 따라 매달린 등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갈수록 정말 축제라도 열린 건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말에서 내린 라이칸이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외지인이신 모양이네요. 운이 좋군요. 내일부터 축제가 시작되는데.”

“축제? 이 시기에 그런 것도 열리나?”

라이칸의 물음에 남자가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이런 반응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지 놀라는 기색도 없다.

“여긴 겨울이 굉장한 혹한기라, 첫눈이 내리 전에 불의 신께 축원을 드리는 게 전통이거든요. 아마 게르피온에서도 모리의 대장간이 있는 이 마을만의 특색일 겁니다. 그래서 불의 축제를 즐기기 위해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더러 있고요.”

남자의 얼굴엔 마을 축제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불의 신께 축원을 드리는 축제라, 재미있겠군. 혹시 우리도 그 축제에 참여해도 될까?”

말에서 내린 진이 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라이칸과 대화를 나누던 남자가 생각 없이 고갤 들었다가, 진의 서늘한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치곤 어깨를 흠칫 떠는 게 보였다.

“아, 예. 물론입니다. 불의 신은 너그러운 분이라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불의 기운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거든요. 혹시 묵을 곳은 있으십니까?”

“있…….”

“없는데, 마땅한 곳이 있을까요?”

로엔이 재빨리 라이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라이칸이 놀라 로엔 쪽으로 고갤 돌리자, 다 생각이 있으니 가만히 있으라는 듯 눈짓을 했다.

“당연히 있습지요. 사실 제 사촌이 이 마을에서 크게 여인숙을 하거든요. 제가 소개한 손님이라고 하면 아마 잘 해 줄 겁니다.”

“그래요? 마침 잘됐군요. 어딘지 알려 주면…….”

“아닙니다. 저만 따라오십시오. 제가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 제 이름은 이든입니다. 편히 부르십시오.”

이든이 로엔의 얼굴을 흘끗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쓰고 있던 외투의 후드를 벗은 로엔의 아름다운 얼굴이 햇빛에 가감 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럼 부탁할게요, 이든.”

로엔이 화사하게 웃자 이든의 얼굴이 흐무러졌다.

앞서 걷기 시작한 이든을 보며,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곤 소유욕을 드러내듯 손을 뻗어 로엔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왜요?”

깍지를 끼듯 단단히 그러쥔 진의 손을 내려다보며 로엔이 의아한 듯 물었다.

“허락 없이 웃지 마.”

“네?”

“딴 놈한테 웃어 주지 말라고. 화나니까.”

잇새로 흘러나온 목소리엔 불쾌감이 짙게 묻어 있었다. 질투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로엔은 얼굴을 붉히며 고갤 돌렸다. 그러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라이칸과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끼어들어 놀랐지?”

“아닙니다. 소문에 빠삭한 자를 물색하려 했는데,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라이칸의 말에 로엔은 앞서가는 이든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이든이 뒤를 돌아보며 얼른 오라고 손짓을 한다.

“얼른 오십시오. 내일이 축제라 방이 다 차면 저도 어쩔 방도가 없거든요.”

마치 전부터 잘 아는 사이라도 된 듯 그의 태도가 몹시도 살가웠다. 그런 이든을 보며 라이칸과 로엔은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고갤 끄덕였다.

“맞아. 우리가 딱 원하던 자야.”

* * *

이든이 데리고 간 여인숙은 축제가 열리는 마을 광장에 있었다.

생각보다 규모가 제법 큰 걸로 보아, 모리의 대장간을 찾아온 상인들이 묵는 숙소가 바로 이곳인 모양이다.

“다행입니다. 원래 오려던 곳이었는데.”

라이칸의 말에도 로엔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사실 이든이 자신만만하게 여인숙을 소개한다고 했을 때부터 같은 곳이지 않을까 짐작했었다.

모리의 대장간이 타란 대륙에서 손꼽히는 대장간이긴 했지만, 이런 시골 마을에 규모가 큰 여인숙이 여럿 존재하는 건 이해타산이 맞지 않아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여인숙 안으로 들어갔던 이든이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방이 다 나가고 없는 건가?”

창문을 통해 슬쩍 들려다본 여인숙 안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축제 때문인지 아니면 모리의 대장간을 찾은 상인들이 많은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이러다 방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여인숙 안으로 사러졌던 이든이 으스대며 밖으로 나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얘기가 잘 된 듯했다.

“갠디스, 손님들을 2층으로 안내하면 되는 거지?”

“정말 못 살아. 그렇지 않아도 넘쳐나는 손님 때문에 축제에도 못 나갈 판인데, 사람을 더 데려오면 어쩌라는 건지. 마음대로 해. 대신 이불 빨래는 오빠가 해.”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든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저희 때문에 괜히…….”

“아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갠디스 성격이 워낙 괄괄하거든요. 그리고 사실 이번 축제에서 불의 신께 남편감을 갖고 싶다고 소원을 빌 생각이었는데, 갑자기 손님들이 밀어닥쳐서 화가 난 것뿐이고요.”

“아.”

이든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며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며 1층을 가득 채운 손님들을 살폈다.

“그나저나 불의 신의 축제가 유명한 모양이군요. 축제 기간에 맞춰 이렇게 손님들이 많은 걸 보면요.”

“유명하긴요? 아까도 말했지만 가끔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긴 한데, 그건 가뭄에 콩 나듯이 하는 거고. 사실 저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놀라긴 했어요. 아무리 모리가 지키는 불이 영험하다고 해도, 이런 적은 없었거든요.”

“그럼 매년 이렇지는 않다는 건가요?”

“당연하죠. 시골 축제에 뭐 볼 것 있다고. 차라리 록센이나 수도에서 하는 축제라면 모를까.”

이든의 말에 로엔을 비롯해 진과 라이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1층에 있는 손님들을 훑는 시선 역시 순식간에 달라졌다.

“그런데 불의 신이 영험하다는 소문은 무슨 말이죠?”

“아아, 불의 신에 얽힌 전설이 있거든요. 아마 그것 때문인 듯해요.”

“전설이요?”

“네. 지금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밖엔 모르는 이야기인데, 그게 뭐였더라. 아, 맞다. 모래 늪과 관련된 내용이라. 거기에 불의 신의 보물이 숨겨져 있다나 뭐라나. 그걸 찾기 위해선 불의 신물을 찾아야 한다는데, 그런 게 있었으면 진즉에 찾았겠죠.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 게 벌써 200년 전인데.”

별것 아닌 이야기로 치부하는 이든과는 달리 세 사람의 표정은 뭔가 실마리라도 찾은 듯 예리하게 빛났다.

“흥미롭긴 하네요. 그런데 불의 신물이란 건 어디서 찾아야 한다는 말은 없었나요? 저도 한번 찾아보고 싶네요.”

로엔이 흥미를 보이자, 이든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불의 신의 보물에 흥미가 생기신 모양인데, 포기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뭐 사실 그런 동화 같은 이야길 들으면 호기심이 발동하긴 하는데, 다 거짓말이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도 이곳을 찾아온 노파가 한 명 있었는데, 불의 신물을 찾겠다고 모리의 대장간에 몇 달을 죽치고 있었다니까요. 그러고 보니, 그 노파가 요즘 안 보이네요. 축제 기간 때면 어김없이 모리를 찾아왔었는데.”

복도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던 이든이 걸음을 멈췄다.

“여기, 방 두 개를 사용하시면 될 거예요. 식사는 언제든 내려오셔서 하면 되고, 대신 내일 저녁은 알아서 해결하셔야 한데요. 갠디스가…….”

이든이 조금 난처한 얼굴로 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머릴 긁적였다. 축제에 참석해야 한다고 하더니, 저녁 식사는 예정에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든. 우리도 내일은 축제에 참석할 생각이라.”

“잘됐네요.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아, 그리고 내일은 눈이 올지도 모르니 옷을 단단히 입고 나가시는 게 좋을 거예요.”

“눈이요?”

“네, 올해의 첫눈이 내일 내리거든요. 모리가 한 말이니, 틀림없을 거예요.”

모리? 대장장이가 날씨를 예측할 수 있다고?

의아한 마음에 로엔이 이든을 보며 여상하게 물었다.

“대장장이에게 예언 능력이 있는 모양이네요.”

“그게 아니라, 모리의 대장간에 있는 불이 진짜 영험하거든요. 그래서 가끔 날씨도 정확히 집어내는 모양이더라고요, 좋은 검을 만들려면 그런 게 필요하다나 뭐라나. 그럼 쉬세요. 저는 갠디스를 도우러 가야 해서.”

이든이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가자, 세 사람의 시선이 은밀하게 교차했다.

이든이 했던 말들 속에 그들이 원했던 이야기의 대부분이 들어 있었다.

“역시 우리가 원했던 자였네요.”

로엔의 말에 진과 라이칸 역시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곧 라이칸이 이든이 했던 말들 중 하나를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1층에 있는 자들 말입니다. 게르피온의 국왕이 보낸 자들일까요?”

“그럴 거야. 그리고 에드윈이 보낸 자들도 섞여 있을 테고.”

진의 서늘한 목소리에 로엔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한 상황이니 놀랄 것도 없긴 한데, 좀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겠네요. 예를 들자면 우리가 직접 움직이는 게 아니라,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사람을 대신 보내는 것도 좋고.”

로엔의 말에 진과 라이칸이 동시에 1층으로 고갤 돌렸다. 그곳은 조금 전 일을 돕겠다고 내려간 이든이 있었다.

“그렇군. 네 말처럼 우리가 원했던 자가 분명해. 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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