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그야 당연히 알고 있었다. 로엔은 귓가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음속으로만 대답했다.
진득하게 들러붙는 그의 낮은 목소리에 온몸이 뜨겁다 못해 배배 꼬이는 것 같았다. 부끄럽고 민망한데, 기분이 자꾸만 들뜨는 것 같았다.
사람들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이고 있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술에 취했기 때문인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와, 미친.”
그때 세이지가 어이없다는 듯 불쑥 끼어들었다.
로엔이 슬쩍 고갤 돌리자 이젠 험악하게 얼굴을 구긴 세이지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뭐? 왜?”
진이 세이지를 쏘아보며 불쾌함을 드러냈다. 방해받은 게 싫은 눈치였다.
“지금 여기서 화낼 사람이 대장이라고 생각해?”
“그럼 누군데?”
“당연히 우리지. 지금 두 사람이 우리한테 못 볼 꼴 보이고 있잖아.”
세이지의 지적에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세이지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이젠 대놓고 사정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까지는 대장이 사랑에 눈이 뒤집힌 것 같아서 참고 참았는데,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사람들 앞에서 흘레붙는 꼴 보여 주기 싫으면, 제발 지붕 있고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곳으로 가서 하라고. 제발, 부탁이니까.”
세이지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발까지 동동 굴렸다.
“어? 여기가 지붕도 있고 벽도 있는데?”
로엔이 순진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지붕과 벽을 차례로 가리켰다.
그녀의 해맑은 태도에 세이지는 물론 이번에 라이칸마저도 얼굴을 붉히며 고갤 숙였다.
분명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였지만, 그제야 제 주인이 술에 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무엇보다 제 주인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라 그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치였다.
“제길! 그래, 내가 실언했어. 지붕도 있고, 벽도 있고. 사람은 없는 곳. 이제 됐지?”
세이지가 다시 정정해서 말하자, 로엔이 진을 향해 돌아섰다.
“잘 들었죠? 우리 이제 가야 한대요. 지붕도 있고, 벽도 있고, 사람은 없는 곳으로요.”
로엔이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진의 팔을 붙잡고는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다들 로엔의 모습에 뻥 찐 얼굴이었지만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다.
로엔의 어깨너머로 진이 한 마디만 더 하면 죽을 줄 알라며, 살벌하게 쏘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네 사람이 서둘러 고갤 돌리자, 진이 더는 머뭇거릴 생각 없다는 듯 두 팔로 로엔을 번쩍 안아 들었다.
“목에 팔 감아. 떨어지면 안 되잖아.”
“목에 팔 다 감았어요. 떨어지면 안 되니까.”
진이 하는 말을 따라 하며 아이처럼 웃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진은 로엔의 이마에 입을 가져다 댔다. 술기운이 올라온 듯 로엔의 이마가 몹시도 뜨거웠다.
“차가워.”
열이 올라서인지 진의 입술이 차갑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그건 네가 뜨거워서 그래. 이 주정뱅이.”
진이 술에 취한 로엔을 놀리듯 다시 한 번 그녀의 붉어진 뺨에 입을 맞췄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니면서, 진은 부끄러움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애정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 세이지는 더는 할 말도 없다는 듯 혀를 내두를 뿐이었다.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인사도 필요 없으니까 얼른 가시라고요. 진짜 눈꼴 시리니까.”
세이지가 어서 가라는 듯 손을 휙휙 저었다. 음란 마귀들을 내쫓는 모양새였다.
진은 기분 나쁘지도 않는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들을 남겨 두곤 로엔을 품에 안고 유유히 2층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이 바뀌어도, 저렇게 바뀔 수가 있나? 진짜 믿을 수가 없네.”
등 뒤로 세이지가 술병을 병째로 들고 마시는 게 슬쩍 보였다.
“라우렐도 같이 왔어야 했는데. 누가 믿겠어. 수도사 같던 우리 대장이, 발정 난 맹수처럼 굴 줄을. 쳇, 따라오는 게 아니었어. 저렇게 염장을 있는 대로 지를 줄 알았으면.”
진은 제 품에 안긴 로엔을 고쳐 안고는 계단을 마저 올랐다.
“진, 나 몰래 언제 발정 났어요?”
로엔이 진을 올려다보며 고갤 갸웃했다. 그 모습에 진은 다리 사이가 묵직해지며 뜨겁게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정말 세이지 말처럼 발정이라도 난 듯했다.
“응. 그러니 조심해. 한입에 삼켜지고 싶지 않으면.”
진이 고갤 숙여 로엔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예민한 살에 닿자, 등줄기에 소름이 확 끼쳐 들었다.
“괜찮아요.”
“응? 뭐가?”
진이 로엔의 턱에 입을 맞추며 물었다. 그러자 로엔이 그의 목에 감았던 팔에 힘을 주었고, 자연스럽게 그의 고개가 아래쪽으로 끌려 내려갔다.
어느새 그녀의 입술이 그의 귓가에 닿았다. 그리곤 비밀 얘기라도 하듯 은밀하게 속삭였다.
“나도 그렇거든요. 내 눈에도 당신밖에 안 보여요.”
“하아, 정말 미치겠군.”
맹수가 으르렁거리듯 그가 거친 숨을 내쉬자, 그의 가슴이 크게 흔들렸다. 그의 은청색의 눈동자가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술에 취한 것 맞아?”
겉으로 봤을 땐 멀쩡해 보이는 로엔을 보며 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사실 술에 취했든, 취하지 않았든 중요한 건 아니었다. 술에 취해 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로엔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엔 칼같이 선을 지키면서 지금은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아내릴 듯 굴고 있었다.
그 간극이 주는 아찔함에 진은 자꾸만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안 취했어요. 누굴 주정뱅이로 알아. 하지만 빨리요. 나 키스하고 싶어요.”
로엔의 칭얼거림에 진이 서둘러 복도를 걸어갔다. 하필 방은 왜 맨 끝 방인 건지. 오늘따라 인내심이 바닥나는 기분이었다.
마침내 방문 앞에 도착한 진은 서둘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로엔을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고는 그녀의 몸을 제 몸으로 내리눌렀다.
“안 취하긴? 겉만 멀쩡하고, 머릿속은 완전 술에 절었는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나긋한 목소리로 키스해 달라고 조를 리 없었다.
진의 지적에 로엔이 배시시 웃었다.
“알았으면 얼른 혀나 내밀어요. 아까부터 키스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으니까.”
뻔뻔한 요구에 진이 낮게 신음을 삼켰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침대가 삐꺽 소릴 내며 흔들렸다.
뜨겁게 달아오른 욕망을 품은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 * *
설람이 운영하는 여인숙을 떠나, 하루를 꼬박 달린 후에야 게르피온의 상업도시인 록센에 당도 했다.
게르피온에서 수도 다음으로 가장 번창한 도시인 록센은 아드리안의 수도 칼라일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시가지를 형성하는 도시의 형태와 광장을 중심으로 구획을 나눈 상권까지. 딱 칼라일의 축소판이었다.
마치 로엔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안톤이 입을 열었다.
“록센은 칼라일을 모델로 만들어진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게르피온의 수도가 북쪽에 치우쳐 있어서 교역을 하기엔 위치상 불편한 점이 많거든요. 10년 전 국왕의 명령으로 만들어졌는데, 도시 건축학자들이 칼라일의 배치도를 그대로 가져와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안톤의 설명에 납득이 된 듯 로엔이 고갤 끄덕였다.
“말레 상단의 중심 거점지도 여기라고 했지?”
“네. 저기 도로 옆에 있는 건물이 말레 상단의 길드입니다. 북쪽으로 떠나기 전까지 저곳에서 머물게 될 겁니다. 필요한 물품도 저곳에서 구할 생각이고요.”
안톤의 설명에 로엔이 생각에 잠긴 듯 잠시 말이 없었다.
“안톤.”
“네, 말씀하십시오.”
“여기서 둘로 갈라지는 게 좋겠어.”
“그게 무슨…….”
안톤이 조금 당황한 듯 로엔을 보았다.
“우릴 쫓는 자들이 생겼잖아. 시간도 단축하고, 시선도 교란하고. 그러니까 너와 세이지 님은 여기에 남아서 예정대로 사막으로 갈 준비를 끝내도록 해.”
“그럼 세 분만 북쪽 마을로 이동하실 생각이십니까?”
안톤은 로엔의 계획을 바로 이해한 모양이다.
“그럴 생각이야. 함께 움직이는 게 시간 낭비 같아서. 어때요, 진?”
로엔이 의견을 묻듯 진에게 시선을 주었다.
“괜찮은 생각이군. 사흘 후에 헤르파 사막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지.”
진의 말에 네 사람이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우린 시간도 아낄 겸 식사 후 바로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그게 좋겠군. 세이지, 잠깐 나 좀 볼까?”
어떻게 할지 결정이 되자, 진이 세이지를 따로 불렀다. 그리곤 두 사람은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릴 옮기더니 뭔가 심각한 얼굴로 얘길 나누기 시작했다.
“알았어. 걱정 마, 대장. 내가 알아서 할게.”
두 사람이 다시 일행 곁으로 돌아오자 다섯 사람은 서둘러 말레 상단의 길드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로엔 일행이 사라지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도착한 모양입니다.”
그제야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에 서 있던 사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말레 상단의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일행 중 두 명은 그가 너무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전쟁터가 아닌 곳에서 저들을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울의 입가가 서늘하게 비틀렸다.
며칠 전 국왕의 명령을 받고 침전에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진 로이슈덴과 그의 심복인 세이지를 만나게 될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뜻밖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사울에겐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것이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가 건넨 덫일지라도 절대 물러설 수 없기도 했다.
다시는 없을, 진 로이슈덴과 세이지를 죽일 기회였으니까.
“어떻게 할까요?”
“사람을 붙여 감시하도록 해. 아, 아니다. 말레 상단에 우리 쪽 사람이 있나?”
“있습니다.”
“그럼 그자에게 무슨 수를 쓰더라도 짐꾼으로 따라붙으라고 해. 직접 감시하는 편이 우리에게도 유리하니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