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로엔은 천천히 술잔을 기울여 와인을 음미했다. 짙은 포도 향과 함께 은은한 꽃 향이 알코올 특유의 향과 어우러져 굉장히 독특했다. 와인에 꽃을 함께 넣은 듯했다.
“처음 맛보는 와인이네요. 좋은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게르피온에선 최고의 와인에 빙설에서만 자라는 꽃을 함께 넣어 숙성하는 게 전통입니다. 그리고 이 술은 만년설에서만 핀다는 화란을 넣어 만든 술이고요.”
설람이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술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뭐야? 귀한 술이라 그런지 굉장히 맛있잖아.”
세이지도 마음에 드는 듯 단숨에 잔을 비워 냈다. 그리곤 술병을 들어 다시 잔을 채웠다.
“조금만 마셔, 세이지. 내일 출발해야 하는데 고주망태가 되면 곤란하잖아.”
술잔을 옆에 놓은 채 들어 보지도 않던 진이 세이지를 말리고 나섰다.
“걱정 마, 대장. 내 주량이 얼만데. 이걸론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세이지가 윙크까지 해 가며 자신감을 표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라 진은 세이지를 말리지 않았다. 대신 로엔 쪽으로 시선을 줬다.
어느새 술잔을 든 로엔이 향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칠칠치 못하긴.”
진이 손을 뻗어 로엔의 턱으로 흘러내린 술을 닦아 주었다. 서슴없는 행동에 로엔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가 할게요.”
로엔이 그의 손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턱에서 떨어지기는커녕 진득하게 로엔의 입가를 어루만지며 입술에 묻어 있는 와인을 닦아 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지금이 식사 중이란 것과 식탁엔 두 사람 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서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흠흠.”
로엔이 재빨리 헛기침을 하며 음악이 들리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설람을 따라 들어왔던 무희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관능적인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무희들은 얼굴이 붉어질 만큼 선정적이었다.
“굉장히 아름답네요.”
“랑케의 이름에 걸맞게 음식은 물론 무희에 이르기까지 최고로 선보이려 노력 중입니다.”
설람이 로엔의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인 듯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엔은 고갤 끄덕이곤 다시 무희들 쪽으로 고갤 돌렸다.
몸의 굴곡이 여실히 드러나는 무복 차림이라,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일 때마다 노골적인 욕망이 읽혔다.
특히나 무희들의 시선이 진의 탄탄한 몸을 노골적으로 훑는 게 보였다.
순간 로엔은 불쾌감이 치솟았다. 가슴을 내리누르는 답답함에 로엔은 저도 모르게 앞에 놓여 있던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달콤한 와인이 한꺼번에 목을 타고 내려가자 순식간에 열이 올랐다.
“천천히 마셔.”
진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에서 술잔을 가져갔다. 로엔이 고갤 돌려 진을 보았다. 그러자 진이 마땅찮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술을 마시며 곁눈으로 살필 때까지 무희들에게 향해 있던 진의 시선이 로엔에게 닿아 있었다. 순간, 무희들의 춤을 봐서 좋았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그런 걸 묻는다면 꼭 질투를 하는 것 같아 꾹 입을 다물었다. 대신 불퉁한 표정으로 진 앞에 놓여 있는 술잔을 집어 들었다. 설람이 진에게 따라 준 잔이었다.
“로엔.”
“걱정 말아요. 내 주량도 세이지 님만큼은 되니까.”
진이 말릴 새도 없이 로엔이 술잔에 가득 든 술을 쭈욱 들이켰다. 연거푸 두 잔이나 술을 마셨더니 취기라도 올라오는 듯 몸이 노곤해졌다.
“그만 마셔.”
다시 잔을 빼앗아 간 진이 텅 빈 술잔을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로엔은 그런 진을 못 본 척 하곤 무희들 쪽으로 고갤 돌렸다.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진 실랑이로 탁자에 앉아 있던 남자들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자릴 피해 줘야 하나?’
무희들의 나른하고 관능적인 분위기와는 달리, 탁자 주위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 문득 로엔은 제가 눈치 없이 자릴 차지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진이 로엔 쪽으로 고갤 숙여 왔다. 그의 체향이 콧속으로 스미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괜찮아?”
그의 커다란 손이 로엔의 머리카락에 와 닿았다. 그의 숨결이 귓불을 스친 것도 모자라, 그의 손이 귓바퀴를 쓸어내렸다.
술에 취해 노곤해진 신경이 그의 손길이 닿자 저절로 나른한 숨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괜찮아요. 떨어져요. 사람들이 봐요.”
로엔이 귓불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을 밀어냈다. 하지만 자석이라도 된 듯 그의 손이 다시 그녀의 귀에 닿았다. 그리곤 손끝으로 뜨거워진 귓불을 건드리기까지 한다.
순간 등줄기에 날카로운 전율이 흘렀다.
“로엔, 식사가 다 끝났으면 우린 올라가는 게 어때?”
진이 그녀의 뺨에 바짝 얼굴을 붙여 왔다. 그리곤 입이라도 맞추려는 것처럼 그녀의 턱을 붙잡고는 그 쪽으로 천천히 돌려세웠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어, 잠깐만…….”
당황한 로엔이 재빨리 고갤 돌렸다. 밀려드는 갈증에 이번엔 마주 앉아 있던 라이칸의 잔으로 손을 뻗었다.
“로엔 님.”
당황한 라이칸이 재빨리 잔을 치우려 했지만, 로엔이 더 빨랐다. 솔개처럼 잔을 집어 든 로엔은 진이 말릴 새도 없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어, 이것도 술이잖아.’
사실 이번엔 물이 마시고 싶어서 잔을 들었는데, 운 나쁘게도 술이었다. 연거푸 세 잔을 비웠더니 로엔은 노곤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로엔? 이리 와.”
진이 로엔의 손에서 잔을 빼앗은 다음, 그녀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넓은 품에 안기자 질투로 들끓던 마음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정말 미쳤나 보다. 무희들의 춤을 조금 구경했다고 화가 나 술을 잔뜩 들이켜다니. 로엔은 생각지도 못한 진에 대한 소유욕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진, 그만해요. 간지러워요.”
다행히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진이 제 몸을 만지는데도 밀어내지 않는 것 말고는 술에 취한 티가 전혀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만 일어나. 너도 세이지처럼 주정뱅이가 되려는 게 아니라면.”
진의 타박에 로엔이 휙, 하고 고갤 돌려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그의 잘생긴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는 걸 보곤 살짝 얼굴을 붉혔다.
취하긴 취한 모양이었다. 이성이 마비라도 된 듯 그에게 닿아 있는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입술을 겹칠 듯 로엔이 진 쪽으로 턱을 든 순간, 탁! 소리와 함께 드륵! 하고 의자가 뒤로 밀려나는 거친 소리가 들렸다.
“진짜, 두 사람 이러기야? 여행하는 내내 발정이 난 것도 아니고. 제발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방으로 좀 가라고.”
세이지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두 사람을 향해 버럭 소릴 질렀다.
둔해진 머리로도 얼굴이 붉어질 만큼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재빨리 손을 뻗어 진을 밀어내고 싶었지만 마음처럼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마실 땐 달콤한 과일 향과 함께 꿀꺽꿀꺽 잘만 넘어가더니, 생각보다 도수가 높았던 모양이다.
무엇보다 여행을 하느라 지친 데다가, 뜨거운 물에 목욕까지 했다. 그리고 빌어먹을 질투로 빈속에 술을 연거푸 마셨더니 취기가 빠르게 올라온 것이다.
“그래. 우린 그만 들어가는 게 좋겠군. 그리고 로엔, 너 취했어.”
진이 손끝으로 로엔의 코를 잡고는 살짝 비틀었다. 술에 취한 로엔이 귀여워 한 행동이었지만, 진이 취했다고 하자 괜스레 오기가 생겼다.
“취하긴요. 나 멀쩡해요. 더 마실 수도 있다고요.”
로엔이 평소에 부리지도 않는 객기를 부리며 세이지 앞에 놓여 있는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
“이건 안 돼.”
놀란 세이지가 재빨리 술병을 들어 치웠다. 그와 동시에 진이 로엔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놔줘요. 나 안 취했다고요. 세이지 님, 욕심쟁이네요. 그 술, 설람이 우리 결혼 축하 선물로 준 거라고요.”
로엔이 평소와 달리 고집을 피웠다.
진은 그런 로엔을 내려다보다가, 로엔의 몸을 제 쪽으로 돌리곤 얼굴을 그의 품에 묻게 했다. 다른 사람이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숨기고 싶었다.
사실 술에 취해 붉어진 뺨이며 고집을 피우는 로엔의 모습이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이 모습을 다른 놈들이 본다고 생각하자, 질투심이 일었다. 로엔을 본 놈들의 눈을 다 뽑아 버리고 싶었다.
“취하지 않긴. 주정뱅이가 따로 없고만.”
진의 놀림에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로엔이 눈썹을 치켜떴다.
“내가 주정뱅이면, 당신은요? 이 바람둥이.”
갑작스러운 비난에 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전혀 짐작도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내가 왜 바람둥이지?”
진이 억울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껏 로엔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진에겐 그녀의 주장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왜긴요. 봤잖아요. 딴 여자들이 춤추는 걸 또 보고 있었잖아요. 그때, 축제에서도 집시 무희가 춤추는 것도 봤고요. 서로 요렇게 눈빛도 교환하고.”
“뭐? 내가 언제…….”
“언제긴요. 조금 전에 앞을 보고 있었으면서 시치미 떼는 건가요?”
“맞아. 네 말대로 앞을 보고 있었어. 내 앞에 있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니라, 너였으니까.”
“내말이 맞잖아요. 앞에 있는 날 보고…… 네?”
로엔이 말하다 말고 진을 올려다보았다. 술로 인해 둔해진 머리가 한발 늦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던 것이다.
“그래. 널 보고 있었다고. 무희들이 아니라, 내가 본 건 너야. 네가 너무 예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고.”
순식간에 얼굴은 물론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치켜 올라갔던 눈썹도 얌전히 내려와 있었다.
“아니, 나는…….”
꼬릴 내린 로엔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끝을 늘렸다. 그러자 이번엔 진이 의기양양한 얼굴로 쑤욱 고갤 숙여 왔다.
“그러니까 넌, 질투를 했다는 거지? 내가 다른 여자를 쳐다보는 줄 알고.”
“아니요.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당연히…….”
“로엔, 잊었나 본데 나는 당연하지 않는 사람이야. 진즉부터 너한테서 한시도 눈도 못 떼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