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공작의 공개 구혼-164화 (165/201)

164화

“하지만 신경이 쓰이긴 해. 왜 하필 사울일까? 그것도 헤르파 사막에 대해 잘 아는 그를 갑자기 국왕이 불렀다는 게 감이 안 좋아. 위험할지도 모르겠어.”

정복 전쟁은 이미 끝났지만, 아드리안 제국의 황제인 에드윈이 묵인한다면 게르피온의 국왕이 로엔 일행을 죽인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터였다.

로엔은 국왕전에 들었다는 사람이 아드리안 제국에서 보낸 자라고 확신했다.

“황제가 보낸 자일 거예요. 우릴 믿지 못하고 있을 테니까 감시하고 견제할 자가 필요했겠죠. 그리고 라딘의 서에 관심이 있는 게르피온의 국왕이 적격이었을 테고요.”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부지리를 노리려 하는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세이지의 말을 들어 보니, 기사단의 단장인 사울이란 자가 세이지와 진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듯 보였다.

십중팔구 사울이 진과 세이지를 죽이기 위해 공격해 올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아무리 타란 대륙 최고의 기사라고 해도, 진이 한꺼번에 상대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함정에라도 빠진다면 자칫 진이 위험해질 수 있었다.

“지금까지 황제가 우리 뒤를 쫓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군.”

진의 목소리가 나직이 방 안을 울렸다. 네 사람 모두 그의 말에 동의하듯 고갤 끄덕였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진의 물음에 로엔은 어깰 으쓱해 보였다. 지금으로썬 특별히 손쓸 방법이 없어서다.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어차피 우리가 헤르파 사막에서 황제가 원하는 물건을 찾을 때까지 다들 지켜만 볼 테니까. 그러니 그때까진 우린 안전하다는 뜻이죠.”

로엔의 말에 일리가 있긴 하지만, 만에 하나 사울이란 놈이 복수심에 눈이 멀어 공격이라도 한다면 큰일이긴 했다.

“그럼, 기사단의 공격에 대비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라이칸의 물음에 로엔이 고갤 가로저었다.

“당연히 해야지. 아마 그들의 공격은 우리가 헤르파 사막에서 물건을 찾고 돌아오는 시점이 될 거야. 앞으로 최소한 열흘 이상의 시간이 있다는 뜻이지. 그사이 방법을 찾아야지. 지도를 좀 정확히 봐야겠어.”

로엔이 지도를 펼쳤다. 아직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가 사막 어디에 묻혀 있는지 정확한 위치는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버지가 남기신 밀서를 근거로 추측해 보건대, 헤르파 사막의 끝과 소금 사막이 맞닿는 경계 부근이 아닐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지도를 살피던 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헤르파 사막으로 들어갔다가 나가는 길은 오직 하나였다.

“입구와 출구가 하나뿐인 사막이라.”

도망칠 곳이 없으니, 이건 빼도 박도 못하고 게르피온의 기사단과 싸워야 할 상황이었다.

“만약 그들이 공격을 해 온다면 사막의 입구, 그리고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일 거야. 매복을 해야 하니까 몸을 숨기기 좋은 지형이어야 하고. 세이지 님, 혹시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매복은 물론 먼저 공격했을 때 유리한 곳이 있나요?”

로엔의 물음에 세이지가 고갤 숙여 지도를 꼼꼼히 살폈다.

“내 기억으론 여기야. 입구에서 가장 가깝기도 하고, 사막이 시작되는 부근이라 거대한 협곡이 있었거든. 우리가 인원이 적으니 협곡 안에 몰아넣고 한꺼번에 처리하는 쪽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

“협곡을 지나가지 않고 사막의 입구로 가는 방법은 없나요?”

“딱 하나 있다고 듣긴 했어. 포로로 잡힌 게르피온의 병사였는데, 시체를 너무 많이 봐서 미쳤는지 하루 종일 정신 나간 말만 떠들어 댔었거든. 하지만 그 병사가 했던 말 중에 쓸모 있는 말이 제법 있었지.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사막을 빠져나가는 숨겨진 길이었어.”

세이지의 말은 몹시도 흥미로웠다.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 않는 길이 있다니.

“그게 어디죠?”

“여기야. 하지만 이곳은 모래 늪이라, 이곳으로 들어간 자들 중에 살아남은 자가 없다고 했어. 그러니 우린 죽으나 사나 협곡을 지나야만 한다는 뜻인 거지.”

희망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결국 결론은 하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로엔은 모래 늪이 끌렸다.

“모래 늪이라. 만약에 우리가 모래 늪을 무사히 건넜을 땐 어떻게 되는 거죠?”

로엔의 질문에 세이지가 설마 모래 늪으로 갈 생각이냐는 듯 로엔을 보았다.

“협곡을 지나가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가능성을 열어 놔야죠.”

“사실 정확한 건 몰라. 그 병사 놈 말론 그곳으로 들어갔다가 살아 돌아온 자가 없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늪 너머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거지.”

“그럼 정말 모래 늪이 죽음의 땅인지, 아니면 살아서 나갈 수 있는 숨겨진 길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이네요. 그렇죠?”

로엔의 시선이 모래 늪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지도에 머물렀다.

지도상에서도 딱히 별다른 표시는 없었다. 위험 지역이란 의미로 붉은색의 선들이 가득 차 있을 뿐.

“그렇긴 하지. 아, 지금 생각나는 게 있는데. 게르피온 사람들은 모래 늪에 저주가 걸려 있다고들 한대. 뭐라더라. 바다에서 목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는 것 있잖아.”

세이지가 생각이 나지 않는 듯 머릴 쥐어짰다.

“혹시 세이렌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 세이렌. 그거였어.”

세이지가 막혀 있던 속이 뚫린 듯 개운한 얼굴을 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안톤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건 세이지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이 지도를 구할 당시, 지도상 역시 같은 말을 했거든요. 다른 곳은 다 가도 되지만 모래 늪 쪽으론 눈길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사막의 세이렌이 있다나, 뭐라나. 그런 황당한 소문도 있는 모양입니다.”

사막의 세이렌이라.

로엔은 모래 늪에 호기심이 생겼다. 모래 늪이 위험 곳이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묘하게 그곳에 들어가는 걸 꺼리는 누군가가 만들어 낸 소문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치 사교계를 떠도는 가십들처럼.

“왜 난 그곳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네요.”

로엔의 말에 네 남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모한 결정이란 생각이 드는 모양이다.

“우선 모래 늪에 대한 정보를 더 수집해 보는 게 좋겠어요.”

“최대한 은밀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소문이 나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우리가 그들을 피해 죽음의 늪으로 스스로 발을 들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괜찮을 것 같거든.”

“속임수를 쓰시려는 겁니까?”

라이칸의 물음에 로엔은 턱에 손을 대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아직은 생각 중이야. 뭐가 더 유리할지 가늠 중이거든. 뭐, 정 필요하면 모래 늪을 직접 건너는 것도 방법일 테고.”

그쪽 길을 선택한다면 게르피온의 기사단이 그들 뒤를 쫓을 일은 없을 터였다. 또 다른 위험이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흠, 흠.”

그때, 부엌문 뒤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갤 돌리자, 방해하지 않기 위해 부엌 쪽에서 대기 중이던 설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가져와도 될까요?”

설람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안톤이 고갤 끄덕였다.

이내 안쪽에서 대기 중이던 종업원들이 음식이 가득 든 접시를 들고 밖으로 나와, 식탁에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손님이 우리밖에 없는 모양이네요.”

로엔은 텅 비어 있는 탁자를 둘러보며 설람을 향해 물었다.

“제가 로엔 님이 묵을 테니 손님을 받지 말라고 미리 전갈을 해 놓았습니다.”

안톤의 설명에 로엔이 납득이 된 듯 고갤 끄덕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설람입니다. 게르피온에선 벤투스 님을 대신해 정보원들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설람이 로엔을 향해 허릴 숙였다. 로엔을 비롯해 진이 누군지 다 아는 눈치였다.

“로엔이에요. 설람 덕분에 게르피온에서 오는 정보들을 빠짐없이 살펴보고 있어요. 앞으로도 랑케를 위해 힘써 줄 것이라 믿어요.”

로엔의 말에 설람의 얼굴이 밝아졌다.

“제가 로엔 님과 공작님을 위해 특별히 좋은 술을 준비해 뒀습니다. 결혼 축하 선물인데, 가져와도 될까요?”

결혼 선물이란 말에 로엔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갤 끄덕였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 주다니, 오히려 고마워해야겠군요. 무엇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고생했으니 그간의 여독도 풀 겸 간단히 한잔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고.”

“그럼 얼른 내오겠습니다.”

로엔의 대답이 떨어지자, 설람은 재빨리 자릴 떴다. 로엔이 마음을 바꿔 거절할까 봐 서두르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식탁에 차려진 음식들 대부분 아드리안 제국에서 즐겨 먹는 음식이었다. 이것 역시 세심한 배려인 모양이었다.

“배가 고플 텐데, 다들 먹도록 해요.”

이내 식사가 시작되었다. 설람이 로엔 쪽 사람이란 사실을 알고 나자, 세이지를 비롯해 진 역시 긴장을 풀고 느긋하게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그때 지하 저장고로 내려갔던 설람이 와인 병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의 뒤로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무희들이 따라 들어왔다. 식사의 여흥을 돋우기 위해 특별히 데려온 듯했다.

“로엔 님을 비롯해 라이칸 님까지 이곳을 찾아와 주셔서 얼마나 영광인지 모릅니다. 거기다 타란 대륙에서 가장 유명하신 기사님들 두 분까지 뵙게 되다니. 그런 의미로 제가 먼저 한 잔씩 잔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설람이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로엔과 진을 번갈아 보았다.

로엔이 흔쾌히 고갤 끄덕이며 설람에게 잔을 내밀었다. 순식간에 로엔의 잔 안에 붉은색의 와인이 가득 찼다.

“고마워요, 설람.”

순간 설람이 얼굴을 붉히더니, 수줍은 듯 고갤 숙였다. 그 뒤로, 옆에 앉아 있는 진을 필두로 식탁에 있는 사람들의 잔이 채워졌다.

“설람, 내 잔도 받아요.”

“네?”

기대도 하지 못했는지 설람이 놀란 듯 고갤 들었다. 감히 말레 상단과 랑케의 주인인 로엔이 그에게 술을 따라 줄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눈치였다.

“어서요.”

로엔의 재촉에 넋이 나가 있던 설람이 재빨리 두 손으로 잔을 들어 로엔 쪽으로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로엔 님.”

설람은 술이 가득 든 잔을 내려다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제 평생 이런 호사는 처음인 눈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