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똑똑.
“목욕물을 가져왔습니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고용인 두 명이 커다란 목욕통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순식간에 뜨거운 물이 채워졌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을 보자, 로엔은 몸을 담글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때,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이 작은 바구니를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곤 바구니 안에서 말린꽃이 들어 있는 주머니를 꺼내 목욕통 안으로 넣는 게 보였다. 피로를 풀어 주는 허브였다.
작은 여인숙에서 손님을 위해 꽃잎까지 준비해 놓다니. 센스가 좋다고 생각한 순간, 종업원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종업원이 수줍게 웃더니 이내 말을 건네 왔다.
“남편분께서 특별히 부탁하셔서요.”
“그랬나요?”
“네. 얼굴만 잘생긴 줄 알았는데 다정하기까지 하고. 정말 좋으시겠어요. 그런 분을 남편으로 맞이하시다니.”
여종업원이 부러워 죽겠다는 듯 로엔을 보았다. 그러다 로엔의 얼굴을 보곤 납득한 듯 고갤 주억거렸다.
“부인께서 이렇게 아름다우시니 당연한 건가? 목욕 시중을 들어 드릴 테니, 이리 오세요.”
“아니에요. 목욕은 저 혼자도 충분하니 그만 나가 봐도 돼요.”
로엔의 말에 종업원이 고갤 끄덕였다.
“사실 저녁 준비를 하는 일손이 부족해 얼른 부엌으로 내려가 봐야 했거든요. 그럼 저는 나갈 테니, 필요하시면 여기 있는 줄을 잡아당기세요. 부엌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부르시면 올라올게요.”
여종업원의 서글서글한 태도에 로엔은 미소를 지었다. 랑케의 정보원이 운영하는 숙소라고 하더니 교육이 잘 되어 있는 듯했다.
“그래요. 수고 많았어요.”
종업원이 방을 나가자 로엔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그리곤 뜨거운 통 안에 몸을 담갔다.
수증기와 함께 퍼지는 은은한 허브 향에 팽팽하게 당겨 있던 신경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로엔은 입술 새로 비죽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기 위해 물속 깊이 얼굴을 묻어야 했다.
‘날 위해 허브까지 준비시키다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 * *
“록센에 말레 상단의 거점지가 있습니다. 헤르파 사막으로 이동하기 전, 록센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조달하면 될 겁니다.”
안톤의 설명에 진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여기.”
안톤이 재빨리 양피지로 된 지도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그러자 그때까지 의자에 삐딱하게 기대 있던 세이지가 몸을 앞으로 숙이더니 지도를 요리조리 살피기 시작했다.
“뭐야? 이것 헤르파 사막 지도 맞아?”
손으로 지도를 하나하나 짚으며 제 머릿속에 있는 사막의 지형과 세세하게 비교하던 세이지가 안톤을 올려다보았다.
“그 지도가 가장 최근에 시중에 나온 헤르파 사막의 지도입니다.”
“뭐야, 전혀 다른데? 그치, 대장? 대장도 딱 보면 알 것 아냐.”
세이지가 진의 앞으로 지도를 쓰윽 밀었다. 진은 제 앞으로 내밀어진 지도를 살핀 다음, 다시 안톤에게 지도를 건넸다.
“혹시 이 지도가 무용지물인 겁니까?”
진은 대답 대신 궁금한 것을 물었다.
“군사용 지도를 구하는 건 힘들겠지?”
“네. 정복 전쟁이 끝난 뒤론 게르피온에서 저희 말레 상단에 대한 규제를 시작했거든요. 이것도 어렵게 구한 겁니다.”
사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이 지도는 황실 기사단에서 근무하는 직원에게 거액을 주고 구한 지도였다.
“영 쓸모없진 않을 거야. 사막에 있던 오아시스와 전쟁 중 쌓아 놓았던 건물은 그대로일 테니까.”
진의 얘길 듣고서야 안톤의 얼굴에 안도의 감정이 떠올랐다.
“그럼 사막에 도착하면 공작님과 세이지 님만 믿어야겠군요.”
안톤의 말에 세이지가 걱정 말라는 듯 어깰 으쓱했다.
거만한 표정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거슬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만만하게 보여 신뢰가 느껴졌다.
“그런데 헤르파 사막에 가기 전에 들른다는 마을은 어떤 곳이지?”
지금까지 별 관심 없어서 물어보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무엇 하나 그냥 넘길 수 없는 상황이라 최대한 상세히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진의 물음에 안톤이 조금 망설이는 듯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옆에 앉아 있던 라이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북쪽 마을에 대해 순순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곳은 모리의 대장간이 있는 곳인데, 얼마 전 미친 노파 하나가 나타나 호리우스의 눈으로 뭔가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더군요. 로엔 님께선 그 노파가 만들려고 주문했던 것이 우리가 찾는 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찾는 것이란 건,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의미하는 듯했다.
안톤이 말을 마친 라이칸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여행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진 로이슈덴을 대하는 라이칸의 태도가 영 마땅치 않았었다.
특히 로엔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두 남자의 신경전이 대단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살기가 가시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로엔 외엔 절대 순종하는 법이 없는 라이칸이 진에게 순순히 행동하고 있었다.
안톤은 놀라움을 감춘 채 앞에 놓여 있는 지도를 응시했다. 뭔가, 두 사람 사이에 모종의 타협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대신관이 신탁이라며 그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호리우스로 된 원통형의 물건. 아마 그것인 모양이군.”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저도 그것이 아닐까 생각 중입니다. 그리고 로엔 님께선 모리의 대장간에서 열쇠를 찾을 단서를 발견하길 바라고 계시고요.”
“다들 모였군요. 제가 좀 늦었네요.”
갑자기 들려온 로엔의 목소리에 탁자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계단 쪽으로 향했다.
어느새 목욕을 끝내고 내려온 로엔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로엔.”
로엔을 발견한 진이 제일 먼저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이 얇게 느껴졌는지, 제가 입고 있던 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여긴 아드리안과 달리 실내에서도 겉옷을 입어야 해.”
“그렇게 춥지 않아서 괜찮아요.”
로엔이 한쪽 벽에 설치되어 있는 벽난로 쪽으로 시선을 줬다. 일렁이는 불빛이 방 안을 훈훈하게 데우고 있었다.
“입고 있어. 목욕을 한 뒤라 금방 몸이 차가워질 거야.”
진이 로엔의 손을 끌어다 제 옆자리에 앉혔다.
자리에 앉아 있던 세 사람이 로엔에게 인사를 건넸다. 여행하는 동안 진의 유난스러움에 이젠 익숙해졌는지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다만 세이지만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진을 볼 뿐이었다.
“지도에 대해 얘기 중이었던 모양이네요.”
로엔이 안톤의 손에 들려 있는 지도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안톤이 양피지를 로엔 앞으로 내밀었다.
“두 분 말씀을 들어 보니, 제가 구한 지도가 무용지물인 듯합니다.”
로엔은 고갤 끄덕일 뿐 다른 말은 없었다.
헤르파 사막으로 가기로 결정했을 때, 이것에 대해 말을 나눈 적이 있던 터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무엇보다 로엔에겐 시중에 나와 있는 지도보다 더 정확히 사막 지형을 꿰고 있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걱정할 것 없어. 조금 전에도 말하긴 했는데, 내 머릿속에 헤르파 사막 지형이 다 들어 있거든.”
세이지가 손으로 제 머리를 가리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그건 믿어도 좋아. 세이지가 지형을 읽는데 머리가 비상하지. 전쟁터에서 전략을 짤 때 세이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고.”
평소와 달리 진이 세이지를 칭찬했다. 그러자 세이지이 표정이 봤냐는 듯 더 기고만장해졌다.
“안톤, 헤르파 사막을 횡단하는 건에 대해선 세이지 님과 상의하도록 해. 세이지 님,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았어. 나만 믿어.”
로엔은 두 사람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뒤, 라이칸에게 시선을 줬다.
“랑케의 정보원은 어디에 있지?”
로엔이 주위를 살피자 라이칸이 재빨리 덧붙였다.
“이곳의 주인인 설람입니다. 로엔 님께서도 보셨을 겁니다. 지금은 저녁 준비를 하느라 잠시 자릴 비웠고요.”
“그래? 그럼 설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군.”
“아닙니다. 설람이 부엌으로 가기 전에 중요한 사실을 전해 주었습니다. 오늘 새벽, 게르피온의 국왕전에 은밀하게 사람이 들었다고 합니다.”
라이칸의 말에 로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누군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지 못한 듯합니다. 하지만 그자가 돌아간 뒤, 국왕이 바로 기사단의 단장을 불러들인 모양입니다.”
“기사단장이라면…….”
“사울이네.”
세이지가 불쑥 이름을 뱉어 냈다. 눈살을 찌푸리며 똥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자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눈치였다.
“맞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라이칸도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그의 시선이 세이지에게 향했다.
“전쟁터에서 계속 싸웠으니까. 진짜 독종이야.”
세이지가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본능적으로 목덜미를 쓱쓱 문질렀다.
그의 행동에 사람들의 시선이 세이지의 목덜미에 있는 흉터에 가 닿았다. 세이지 역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 멋쩍게 웃었다.
“맞아. 그자가 낸 거야. 대장이 아니었다면 난 죽었을 거고.”
세이지가 껄끄러운 얼굴을 하며 목덜미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여전히 불쾌함은 가시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이지 님이 그렇게 말할 정도면 우리 쪽에서도 미리 경계를 해야겠군요. 공격에 대한 준비도 해야 하고.”
“뭐, 그렇지. 하지만 우리에겐 대장이 있잖아. 아마 우리 대장한텐 상대도 안 될걸? 사울 같은 놈 열 명이 한꺼번에 덤벼도 끄떡없거든.”
세이지가 걱정할 것 하나 없다는 듯 진을 보았다.
그의 얼굴엔 진 로이슈덴에 대한 자부심과 확고한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