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한 사내가 은둔자의 숲 입구에 섰다.
어둠에 휩싸인 숲을 바라보며 서 있는 사내의 표정이 서늘했다. 말없이 숲을 응시하던 사내가 주머니에서 검은 구슬 하나를 꺼내 들었다.
『숲을 지키는 자, 깨어나라.』
사내의 목소리가 숲을 향해 빠르게 날아들었다. 이내 고요하던 숲이 바람에 흔들리듯 무형의 힘에 짓눌렸다.
하지만 이내, 쨍! 소리와 함께 사내의 손바닥 위에 있던 검은 구슬이 깨어졌다. 사내의 주술을 숲에 걸려 있는 결계가 튕겨 낸 것이다.
“제길. 이번에도 통하지 않는 건가?”
사내는 숲의 입구로 한 발짝 말을 내밀었다. 그러나 거대한 힘에 의해 밀려나듯 사내의 몸이 뒤로 튕겨졌다.
순식간에 뒤쪽으로 던져진 사내가 몸의 균형을 잡으며 욕설을 삼켰다. 조금 전까지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지며 고갤 든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씨어. 황제의 숨은 책사이자 조력자이며 라딘의 혈족인 자였다.
씨어는 결계가 쳐진 은둔자의 숲을 응시했다.
여신의 파수꾼이 존재하는 은둔자의 숲은, 허락된 자에게만 길을 내어 주는 특별한 숲이었다.
결계가 쳐 있다는 것은 황제의 금원과 비슷했지만, 금원은 황가의 핏줄만을 허락하는 곳이기에 이곳 은둔자의 숲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이 숲은 신탁에 의해 정해진 숲의 주인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껏 신탁은 한 번도 은둔자의 숲에 주인을 선택하지 않았었다.
주인 없는 숲은 결계가 있어도 주술이 발동되지 않기 때문에 평범한 숲과 다름없었다. 그런 이유로 지금까지 씨어는 수차례 은둔자의 숲에 드나들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숲은 마치 주인이 있는 것처럼 결계를 치고 더는 그에게 길을 내어 주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록스버그 공작과 로이슈덴 공작의 결혼식이 있던 날 이후부터였다.
“그렇다는 건, 최근에 대신관에게 신탁이 내려졌다는 건데…….”
씨어는 무감한 눈빛으로 숲을 응시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었다. 대신전에 신탁이 내려졌다면 그가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문득 록스버그 공작과 로이슈덴 공작의 결혼식이 있었던 날 새벽이 떠올랐다.
대신전 지하에서 뿜어져 나왔던 신성한 푸른빛.
처음엔 그것이 신탁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신탁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였다.
그의 발을 묶고 접근하지 못하게 막던 힘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 대신전에 그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다.
씨어가 주먹을 쥐자 손바닥에 남아 있던 구슬 조각이 바스러지며 사라졌다.
“폐하 모르게 대신관을 은밀히 불러들어야겠군.”
그때, 하늘 위를 배회하던 검은 매가 씨어를 발견하곤 빠르게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가 팔을 내밀자, 그에게 훈련받은 매는 그의 어깨가 제 자리라도 되는 듯 사뿐히 내려앉았다.
사냥을 위한 매였지만 오랜 시간 씨어가 조련해 전서구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뭘 보고 왔는지 한번 볼까?”
씨어가 손끝으로 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매의 검은 눈을 응시했다. 그러자 푸른빛이 번뜩이며 매의 동공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지금까지 매가 본 기억들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아드리안 제국의 국경을 넘은 로엔 일행을 시작으로, 로엔이 진의 심장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을 물어 피를 삼키는 데서 끝나 있었다.
그러고 보니, 결혼식이 있었던 대신전에서 진이 로엔의 피를 삼켰다고 했었다.
“이런 와중에 타라의 붉은 연이 마침내 이어진 건가?”
씨어의 입가가 비릿하게 비틀렸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정작 타라의 붉은 연으로 이어진 두 사람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서둘러야겠군. 그들이 라딘의 서를 찾을 열쇠를 들고 나타나기 전에, 노파부터 찾아야겠어.”
모든 원죄의 시작인 위대한 예언자 라딘의 제자였던 타에라의 혈족을.
씨어는 제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는 매를 다시 게르피온을 향해 날려 보냈다.
어둠 속을 빠르게 날아가는 매를 보며 그는 황제를 설득해 게르피온의 국왕에게 전갈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로이슈덴 공작이 은밀하게 게르피온에 도착했다고 한다면, 게르피온의 국왕과 그의 최 측근인 사울이 이번 기회에 진 로이슈덴을 죽이려 들 게 뻔했다.
그렇게만 되어 준다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타라의 붉은 연을 끊어 놓을 수도 있었다.
그의 뜻대로만 되어 준다면 일이 재미있게 돌아갈 것 같았다.
* * *
게르피온의 국경에 도착한 건 늦은 밤이었다.
이틀 동안 쉬지 않고 말을 달려 국경으로 이용되는 산맥을 넘자, 그들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말에서 내리려는 로엔을 향해 진이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이젠 당연하다는 듯 그의 손을 붙잡자, 그의 팔이 그녀의 허리를 자연스럽게 안아 올렸다.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발이 땅에 닿았다.
“공기가 차군. 이걸 두르도록 해.”
진이 손에 들고 있던 양털 모포를 로엔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고마워요.”
로엔은 모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으로 단단히 잡아 고정한 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말을 달리는 동안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빠르게 정리해 주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서서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낯간지러울 만큼 다정한 그의 손길에 뺨이 붉어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세이지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이젠 질렸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염병천병 또 시작이네. 결혼 안 한 사람은 어디 서러워서 살겠어? 시도 때도 없이 애정 행각이라니. 보는 사람만 눈이 썩지, 썩어.”
이젠 세이지의 투덜거림에도 익숙해졌는지, 진은 화를 내기는커녕 무시했다. 그래서인지 민망함은 항상 로엔의 것이었다.
로엔이 이제 그만하라는 듯 슬쩍 그의 손을 밀어내며 눈치를 줬다.
하지만 이놈의 남자는 눈치라곤 깡그리 갖다 버렸는지 밀려나기는커녕, 오히려 로엔의 뺨을 쓸며 고개까지 숙여 왔다.
“몸은 괜찮아? 못 걷겠으면 내게 안겨도 상관없고.”
이젠 그의 품에 안겨 옮겨지는 게 당연하다는 듯 행동하는 그를 보자 한숨이 새어 나오려 했다. 버릇을 들여도 단단히 잘못 들인 듯했다.
로엔이 그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물러서려 하자, 진이 재빨리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왔다. 잠시라도 떨어지면 어떻게 되기라도 하듯 그의 시선이 진득하게 얽혀 왔다.
냉혹한 기사라고 알려진 로이슈덴 공작이 이렇게 사람에게 달라붙지 못해 안달을 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로엔은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고 있는 세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그의 팔을 꼬집었다. 제발 좀 놓으라는 신호였다.
“이제 괜찮아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제야 진이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그녀의 허리에 감았던 팔을 풀었다. 대신 그녀의 손을 잡고는 숙소로 향했다.
“저녁은?”
“같이 먹어야죠.”
로엔의 대답에 진이 눈살을 찌푸렸다. 방에 들어가 둘만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그의 생각이 뻔히 읽혔지만 번복할 수는 없었다. 게르피온의 국경을 넘기 직전에 안톤이 오늘 묵게 될 숙소가 랑케의 정보원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귀띔을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럼 저녁을 먹기 전에 방에서 좀 쉬는 건 어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할 테니까.”
목욕이란 말에 로엔은 잠시 갈등했다.
이틀 동안 먹는 것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거의 쉬지도 않고 말을 달린 터라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거기다 그간 씻을 곳을 찾지 못해 몸에 묻은 먼지를 최대한 빨리 씻어 내고 싶었다.
“그게 좋겠어요. 저녁 식사까진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요.”
로엔이 고갤 끄덕이고서야 끈질기게 달라붙던 진이 로엔에게서 떨어졌다.
사실 떨어졌다고 해도 눈에 띄게 먼 거리도 아니었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달라붙어 있던 거리에서, 많아야 한 뼘 거리였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숙소 건물 앞에 도착한 두 사람 앞에 여관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더니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객실에 목욕물을 준비해 줬으면 좋겠군. 식사는 1시간 후에 할 테니, 맞춰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묵으실 방은 2층입니다. 먼저 올라가시면 제가 뒤따라가겠습니다.”
주인이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곧이어 종업원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은 주인이 일러 준 대로 로엔과 함께 계단을 올라 2층 객실로 향했다.
“쭉 가셔서 끝 방입니다.”
어느새 뒤따라온 주인이 두 사람에게 방을 알려 줬다. 진이 주인에게 고갤 끄덕인 다음 문을 열고 객실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깨끗하군.”
진이 먼저 방 안을 살피고는 로엔을 의자에 앉혔다. 그리곤 익숙하게 그녀의 어깨에 둘러 준 모포며 입고 있는 외투를 벗겨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틀 전, 정신을 잃은 후론 계속 이 상태였다.
진은 로엔이 갓 태어난 아기 새인 양 모든 것을 챙기려 들었다. 오늘 아침엔 일행이 다 보는 앞에서 신발까지 신겨 주려 해, 그를 말리느라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다.
그 모습에 세이지가 ‘그만 좀 질척거리라고. 대장이 연애가 처음이라 모르나 본데, 그렇게 질척거리는 남잔 인기 없다고. 질려서 도망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그래.’라고 한 소리 하지 않았다면 기어코 제 발에 신발까지 신긴 다음 품에 안아 말에 태웠을 터였다.
“이제 괜찮으니 그만 내려가 보세요. 안톤이 지도를 구한 모양이니, 가서 같이 보셔야죠.”
“세이지가 있으니 나는 천천히…….”
“그럼 제가 갈까요?”
로엔의 한마디에 진이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여전히 로엔 혼자 두고 나가기 싫은 눈치였다.
“정말 제가 내려가요?”
“아니, 여기 있어. 내가 갈 테니까.”
결국 진이 방을 나가자, 로엔은 그제야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