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어서요. 무슨 냄새가 나는지 맡아 보라고요.”
로엔의 재촉에 의아한 표정으로 서 있던 진이 고갤 숙여 향을 맡았다.
“어때요?”
로엔이 초조한 표정으로 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향이 나지 않아. 특유의 꽃 향 대신 비릿한 피 냄새만 나.”
“보세요. 제 말이 맞죠? 당신 피가 제 몸속의 맹독을 모두 정화시킨 거예요. 아마 며칠 후엔 다시 맹독으로 가득 차겠지만 지금의 내 피는 깨끗해요. 위험하지 않다고요.”
로엔이 흥분한 표정으로 진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찌푸려져 있던 진의 표정이 서서히 변했다. 그의 얼굴엔 죄책감은 사라지고 놀람과 안도감이 떠올라 있었다.
“다행이야. 내 피가 네 독을 정화한다니.”
“저도 놀랐어요.”
서로의 체액이 도움이 되는 줄은 알았지만, 그의 피가 제 몸속의 독을 완전히 정화시킬 힘이 있을 것이라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알았으니 이제 누워 있어. 나가서 금방 저녁을 가져올 테니까.”
진이 풀어진 셔츠의 단추를 잠그곤 로엔을 침대에 다시 눕혔다. 그리곤 방을 나가려는 듯 다시 등을 돌렸다.
뭔가 이상했다.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태도가 석연치 않았다.
로엔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홀린 듯 그의 등을 힘껏 끌어안았다.
“어?”
로엔의 팔이 그의 허리에 감기고 등에 얼굴이 닿자 진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그가 방을 나가기 전에 뭔가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진, 만약 조금이라도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그날 새벽에 있었던 일은 제가 원했던 일이에요. 무엇보다 거절하는 당신에게 끝까지 매달린 건 저였고요. 그러니까, 막말로 유혹한 건 나니까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이라고요.”
그제야 긴장으로 굳어 있던 진의 등이 풀어지더니 그가 로엔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곤 그녀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너는 정말…….”
진은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말들을 짓씹었다. 그러자 로엔은 불안을 느낀 듯 그의 허리에 감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가 그녀의 팔을 떼어 내고 밀어낼까 봐 두려웠다.
진은 제 품에 바짝 안겨 붙는 로엔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자제하지 못한 나 때문이지. 그리고 걱정돼 죽는 줄 알았어. 이렇게 두려웠던 적이 처음이라, 수십 번을 지옥과 천국을 오가는 느낌이었고.”
진은 지금까지 그 누구에게도 한 번 내보인 적 없는 여린 감정을 오롯이 로엔 앞에 드러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적들을 제 손으로 죽였다. 사람의 목숨은 너무도 쉽게 끝이 났고, 그가 죽인 시체가 전쟁터 곳곳에 산처럼 쌓였다.
전쟁터였으니 죽이지 않으면 제가 죽었을 터다. 그러니 죄책감은 없었다. 정복 전쟁일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로엔이 제 품 안에서 정신을 잃은 모습을 본 순간, 처음으로 후회했다. 제가 죽인 사람들이 어쩌면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로엔을 보며 깨달았기 때문이다.
무심하게 사람의 목숨을 끊어 놓던 모습이 그의 품 안에서 시체처럼 늘어진 로엔과 겹쳐 보여 목구멍이 아릿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가슴속에서 자꾸만 치밀었다.
그런데 로엔이 제 피로 인해 몸속의 독이 정화되었다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본 순간, 또 다른 감정이 스멀스멀 일었다.
지금까지 드래건의 힘 따위 저주스럽기만 했는데, 제 몸속에서 제 의지와 상관없이 날뛰는 힘이 미치도록 싫었는데, 처음으로 달가워졌다.
제 피가 로엔에게 필요하다는 걸 안 순간, 몸속에 봉인된 드래건의 힘이 기껍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미친 게 분명했다.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몸속의 피를 몽땅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로엔, 나는 후회가 돼. 널 진즉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그랬다면 너도 나도 이렇게 오랜 시간을 돌아 만나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모든 것이 다 달라졌을 테니까.”
진이 그러지 못한 게 안타까운 듯 로엔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곤 아이처럼 그녀의 여린 목에 얼굴을 비볐다.
그 사랑스럽고 애처로운 몸짓에 로엔은 위로하듯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자 잘게 떨리던 그의 몸이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진, 내 생각은 조금 달라요.”
로엔의 말에 진이 고갤 번쩍 들었다. 당연히 로엔 역시도 제 생각과 같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로엔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진은 순간 서운함이 밀려들었다. 그게 뭐라고, 진짜로 벌어진 일도 아닌 가정일 뿐인데도 마치 그녀에게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마음이 상했다.
“만약 우리가 당신이 전쟁터로 나가기 전에 만났다면 서로에게 상처만 냈을 거예요. 열다섯의 나는 지금처럼 여유롭지도 못했고, 날카로운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었거든요. 그 가시에 당신은 만신창이가 되었을 거예요.”
진 또한 마찬가지였을 터였다. 이제 막 드래건의 힘을 각성한 때라, 그 힘을 통제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시간이었다. 그러니 그때보단 지금 이렇게 만나는 게 맞았다.
하지만 딱 하나, 아쉬운 게 있었다.
“그래도 곁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긴 해요.”
“뭐가?”
“당신 혼자 견뎠을 시간이 안타까워서요. 제 편이라곤 하나 없는 삭막한 전쟁터에서 억누르고, 체념하고, 포기했을 시간이었을 테니까요.”
반역자라는 낙인을 찍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살아간다는 건 제 안에 있는 희망 같은 것들을 모두 죽이는 시간이었을 터다.
순간 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너만큼은 아니야. 난 견딜 만했거든.”
진의 손이 로엔의 뺨을 감쌌다. 그리곤 다정하게 눈가를 쓸었다.
그의 손이 닿자 예상치 않게 눈가가 뜨거워졌다.
당황한 로엔이 고갤 숙였다. 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10년 동안 검은 베일에 제 진짜 얼굴을 감춘 것처럼, 제 감정 역시도 능숙하게 잘 숨겨 왔다.
그러니 지금도 잘 숨길 수…….
“로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로엔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숙였던 고개가 저절로 들렸다. 그리곤 은청색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넌 내가 본 이들 중 가장 대단한 사람이다.”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감정이 고스란히 로엔에게 전달되었는지,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로엔이 그의 품에 얼굴을 폭 묻었다. 어느새 그의 셔츠에 뜨거운 뭔가가 느껴졌다. 진은 그게 로엔이 참고 억눌러 왔던 감정임을 깨닫곤 그저 그녀의 등만 토닥였다.
“수고했다. 이젠 내게 기대도 돼.”
로엔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진은 그런 로엔을 꼭 끌어안고는 감정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 * *
농가 주위를 경계하고 있던 라이칸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인기척이 나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둠 속에 서 있던 진이 모습을 드러내자 라이칸이 슬쩍 미간을 구겼다. 말없이 서 있는 진에게선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느껴져서다.
제길. 라이칸은 욕설을 삼키며 숨을 쉬려 애썼다. 하지만 그를 짓누르는 서늘한 냉기에 목이 졸리는 느낌이었다.
“너, 네 주인을 위해 뭘 내놓을 수 있지?”
진의 목소리가 어둠 속을 울렸다. 라이칸은 저도 모르게 허릴 곧게 세웠다.
은청색의 눈동자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본능이 그의 대답으로 많은 것이 바뀔 것이란 걸 말해 주는 듯했다.
라이칸은 등줄기에 소름이 끼쳐 드는 감각을 애써 무시한 채,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려 애썼다.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대답이나 해.”
“제 대답이 듣고 싶으신 것이라면, 제가 그 대답을 공작님께 해야 할 이유부터 말씀해 주시는 게 먼저이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그 이유 여하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을 테니까요.”
겁이 났다. 당장에라도 급소를 물어뜯으려는 듯 살벌하게 쳐다보는 진 로이슈덴의 눈동자가 맹수의 그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섭다고 해서 물러설 수 없었다. 무엇보다 제 주인인 로엔에 관한 일이니 확신을 갖고 신중하게 행동해야 했다.
“나는 내 모든 걸 내놓을 생각이다. 그러니 네 각오가 알고 싶다. 너는 뭘 할 수 있는지.”
“모든 것이라면, 목숨까지도 포함된 것입니까?”
예상한 질문이었다.
“맞아. 로엔이 필요로 한다면 내 몸속에 흐르는 피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줄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목숨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겠지. 그럼, 이제 네 차례군.”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서로를 쏘아보는 눈빛에선 물러설 수 없는 감정들이 읽혔다.
“저 역시 목숨입니다.”
“폐하를 적을 돌릴 수 있다는 뜻인가?”
진의 물음에 라이칸의 입매가 굳어졌다. 목숨은 라이칸 한 사람에 국한된 것이었지만, 황제를 적으로 돌린다는 의미는 가문 역시 포기할 의향이 있느냐는 뜻이었다.
“러셀 백작가는 대대로 록스버그 공작가를 모셔 왔습니다. 주군의 뒤를 따르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라이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진이 고갤 끄덕였다.
“그럼 이야기해 주겠나?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뭘 해야 하는지. 거짓말을 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아. 지금까지 모든 것들을 종합해 보건대, 그 저주를 푸는 데 내가 필요하다는 건 확실하니까.”
진의 말에 미세했지만 라이칸의 얼굴이 당혹으로 굳어지는 게 보였다. 제 짐작이 맞는 모양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 그러니까 로엔의 몸속에 흐르는 맹독을 없애려면 말이다.”
또다시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맞닿았다. 진의 얼굴에서 확신을 얻으려는 듯 그를 바라보는 라이칸의 시선이 무척이나 집요했다.
그의 시선에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쏘아보는 은청색의 눈동자를 보며, 결국 라이칸의 표정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진 로이슈덴이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그가 아니면 록스버그 공작가를 그리고 로엔을 구해 줄 이는 없었다.
로엔 록스버그를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충성심을 가졌지만, 그것만은 그가 해 줄 수 없는 영역이었다.
“록스버그 공작의 저주를 풀기 위해선…….”
라이칸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잦아들었다. 라이칸의 얘길 듣는 진의 은청색의 눈동자 역시 예리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