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록스버그 공작가에 태어난 여아는 백 일 전에 죽는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록스버그 공작가에 내려진 저주였다. 하지만 로엔은 살아남았다.
그렇다고 해서 로엔이 제 운명만큼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조금 전 진에게 말했듯이 혈독화가 그녀의 상처를 치유하는 역할을 하는 건 맞지만, 14세에 시작된 첫 월경을 기점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몸속에 흐르는 맹독이 로엔을 보호하며 치유하는 건 여전했지만, 독이 몸속에 쌓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 두통이 시작되었고 정기적으로 공작새의 눈물을 복용하지 않으면 불면증에 시달리곤 했었다.
‘열네 살을 기점으로 몸에 독이 쌓이기 시작했으니, 스물여덟엔 죽게 될 줄 알았는데.’
그럴 줄 알았는데…… 드래건의 심장을 삼킨 진 로이슈덴을 만나게 되다니.
사실 엄밀히 말해서 로엔에겐 진은 선물과도 같은 존재였다. 록스버그 공작가의 저주를 풀기 이전에, 진의 체액은 로엔의 몸속에 흐르는 맹독을 정화해 그녀의 생명을 연장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만약 공작가의 저주를 풀지 못하더라도 진 로이슈덴과 함께 있는 한 로엔은 맹독에 중독돼 목숨을 잃을 일은 없었다.
“그렇다니 다행이군.”
진이 고갤 끄덕이고 나서야 로엔은 고갤 돌려 주위를 살폈다.
그녀는 진의 품에 안긴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침대 주변에 서 있는 세 남자의 얼굴빛이 어두웠다.
‘왜 다들 여기에 모여 있는 거지? 이틀은 더 가야 한다던 게르피온의 국경에 벌써 도착한 건가?’
로엔이 고갤 갸웃하며 무슨 상황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했다.
“여긴?”
“아, 세이지가 찾아낸 농가야. 네가 갑자기 정신을 잃는 바람에 국경까진 가지 못했거든. 그리고 참고 삼아 말하자면 네가 정신을 잃은 순간부터 하루 반이 지났지. 지금은 저녁이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다들 네가 눈을 뜨길 기다리고 있었어.”
벌써 하루 반이 지났다고?
“그러니까 내가 하루 반 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거죠?”
로엔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 얼굴로 되물었다.
“응.”
그렇게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니. 아니, 이건 잔 게 아니라 진의 말처럼 정신을 잃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했다.
“이상하네요. 나는 잠이 든 상태에서 꿈을 꾼 것밖엔 없는데.”
그것도 긴 꿈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보기 위해 애썼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 반이 지나 있었다니…….
‘어, 잠깐.’
그러고 보니 딱 한 번 이런 적이 있었다.
‘어떻게 잊고 있었던 거지? 록스버그 공작가가 뒤집힐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는데 말이야.’
로엔의 나이 열네 살이 되었을 때, 첫 월경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레이디들이 열셋에 월경을 시작하는 데 비해선 조금 늦은 편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서재에 앉아 있었다. 점심을 먹은 직후라 노곤함에 잠시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었었다.
시간이 지나 잠에서 깨어나 보니, 로엔은 서재가 아니라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야말로 침실은 울음바다였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놀라 로엔이 몸을 일으키자, 세실을 비롯해 엠마와 스미스는 유령이라도 본 듯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나자빠졌었다.
다행히 그 상황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라이칸이었다.
그리고 조금 전 진이 했던 것처럼 똑같은 말을 했었다.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다고. 그리고 벌써 이틀이 지났다고.
‘그때도 꿈을 꾸었던 것 같은데. 무슨 꿈이었지?’
로엔이 그때 꾸었던 꿈이 뭔지 생각하는 데 골몰하는 사이, 진이 묘한 눈빛으로 로엔을 보았다.
“꿈을 꾸었다고? 무슨 꿈인지 기억은 나고?”
“모르겠어요. 꿈에서 눈을 뜰 수가 없어서 보진 못했어요. 하지만 소리가 들렸어요. 두 사람이 있었던 것 같은데. 한 사람은 여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남자였다. 분명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하지만 처음 듣는 목소리라 누구였는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누구였더라? 분명 남자긴 했는데…….”
로엔이 미간까지 찌푸리며 고민을 하던 중,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라이칸과 눈이 마주쳤다. 조금은 초조한 듯 로엔을 바라보는 표정이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건, 사람들 앞에서 말할 수 없는 얘기인 게 분명했다.
로엔이 라이칸만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미세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제야 라이칸이 평소의 침착한 얼굴로 돌아오더니 여상하게 입을 열었다.
“꿈일 뿐이니 기억하려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만약 중요한 일이었다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기억나지 않겠습니까?”
라이칸의 말에 방 안에 감돌던 묘한 분위기가 깨어졌다. 특히 집요하게 로엔의 꿈에 대해 묻던 진 역시도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래, 중요한 내용이었으면 기억이 나겠지.”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하신 의원을 모셔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농가에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하더니, 집주인에게 의원까지 부탁한 모양이었다.
“내가 나가 볼게. 의원은 이제 필요 없다고 하면 되는 거잖아.”
문에 가장 가깝게 서 있던 세이지가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또다시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로엔은 방에 남은 세 사람에게 차례차례 시선을 주었다.
“저 때문에 일정이 늦어져 버렸네요. 걱정시킨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런 말씀 마십시오. 로엔 님. 저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일정이 아니라, 로엔 님의 안위입니다. 그리고 하루 정도는 충분히 조율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해 주니 안심이 되네. 고마워, 안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국경에서 기다리고 있을 정보원에게 일정이 변경되었다고 연락을 해 놓아야 해서요.”
안톤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라이칸 역시 따라 일어섰다.
“저도 나가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방을 나가자 진은 로엔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곤 이불을 목까지 끌어 올려 덮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 가시려고요?”
“누워 있어. 내려가서 먹을 걸 가져올 테니까.”
문으로 걸어가는 진을 보자 로엔은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차올랐다.
“진.”
의식하기도 전에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불러 세웠다. 진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순간 로엔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왜일까? 말없이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 울컥 뜨거운 감정이 올라오며 목구멍이 아릿했다.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로엔 스스로도 제가 느끼는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마치 분리불안 증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로엔, 나는 네가 정신을 잃은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무리하게 널 안은 게 아닐까, 후회가…….”
진이 재빨리 뒷말을 삼키듯 입을 다물었다. 로엔은 잔뜩 쉰 목소리에 놀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말도 안 돼. 그 때문이라니.’
당황스러웠다. 그가 제 걱정을 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가 정신을 잃은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죄책감을 느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사실 그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충분히 짐작은 됐다.
두 사람은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 급하게 몸을 겹쳤다. 성급한 욕망에 통제력을 상실한 채 과도하게 서로의 몸을 탐했던 것 역시 사실이었다.
격렬했던 첫 번째 정사가 끝난 뒤에도 진은 로엔을 놓지 못했다. 계속에서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추고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그가 다시 그녀의 안에서 힘을 얻어 움직이기 시작했었다.
한계까지 치달은 쾌락이 두 사람을 끝까지 몰아붙였고, 그곳이 지붕도 벽도 없는 숲이란 사실조차 망각한 채 서로를 탐했다.
격하게 흔들리던 육체에 지독한 열기가 덮쳐들었다. 로엔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길고도 집요한 쾌락으로 떨리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몸속의 피가 요동치듯 뜨겁게 달궈졌다.
그리고 그 순간 로엔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진의 심장에 돋아난 드래건의 비늘을 이로 물어뜯었었다.
‘아, 맞다.’
그제야 로엔은 정신을 잃기 전 몸에 일어났던 반응을 기억해 냈다.
얼마나 드래건의 비늘을 세게 물었는지 입안 가득 피 맛이 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혈 향은 비릿하고 역한 향이 아니라, 청량하고 달콤한 향이었다.
‘미친. 내가 그의 피를 먹다니.’
새로운 깨달음에 로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엔은 제가 왜 정신을 잃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진.”
로엔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진이 잠시 망설이더니, 다시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이지? 분명…….”
로엔이 다시 고갤 가로저었다.
“당신 탓이 아니에요.”
로엔이 손을 뻗어 그의 셔츠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진이 재빨리 그의 손을 붙잡았다.
“뭘 하려는 거지?”
당황한 진의 손을 로엔이 말없이 밀어냈다. 그리곤 셔츠의 단추를 다 풀고는 옆으로 밀어내자, 검은 비늘이 찢겨 생채기가 나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어?”
진 역시도 그제야 제 비늘에 난 상처를 깨달은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것 때문인 것 같아요. 제가 비늘을 물어뜯었거든요. 아마 입안으로 삼켜진 피에 드래건의 힘이 있었던 것 같아요. 제 몸속의 맹독과 섞이며 독이 해독되었을 거예요. 그 여파로 정신을 잃은 것이고요.”
로엔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옆에 놓여 있는 진의 단검을 집어 제 손끝을 그었다. 새빨간 피가 손가락 끝에 한 방울 맺혔다.
“로엔, 지금 뭐 하는…….”
“진, 냄새를 맡아 봐요.”
로엔이 그의 얼굴 앞에 손을 들이밀었다. 제 핏속에 맹독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로엔은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