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로엔을 안은 채 바닥에 앉자 다행히 키가 큰 꽃들 사이로 두 사람의 모습이 숨겨졌다. 머리가 아찔할 만큼 짙은 꽃 향이 두 사람을 감쌌다.
진이 성급하게 입술을 삼키며 로엔의 바지를 벗겨 냈다. 그리곤 로엔의 어깨에 둘러 주었던 양털 모포를 바닥에 깔곤 그 위에 그녀를 눕혔다. 마치 모포를 이렇게 쓰기 위해 준비해 온 것 같아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서요.”
로엔이 허릴 야릇하게 비틀며 그를 재촉했다. 하나가 된다는 생각에 더는 욕망을 숨길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진 역시 서둘러 바지를 벗었다. 그리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단박에 로엔의 안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다.
“하음!”
성급한 열정에 로엔의 허리가 활처럼 휘어지며 그를 삼켰다. 다물린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신음이 얼마나 야릇한지 진은 거칠게 로엔의 안을 헤집었다.
닫혀 있던 내벽이 열리며 순식간에 두 사람은 하나가 되어 녹아내렸다.
두 사람이 얽혀 하나처럼 흔들릴 때마다 꽃들은 바람에 흩날리듯 나부꼈다. 꽃 향에 취한 듯 격렬하게 움직이던 진이 로엔의 셔츠를 풀어내더니, 이내 새하얀 가슴 위에 새겨진 혈독화에 입을 맞췄다.
“하아, 으음.”
날카로운 감각에 로엔의 턱이 들리며 바들바들 떨렸다. 그의 뜨거운 혀가 혈독화의 꽃잎을 하나하나 헤아리는 것처럼 달라붙었다.
지독히도 야했다. 고갤 내리고 제 가슴에 입을 내린 그의 모습에 로엔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껏 참으려 했더니.”
진이 로엔의 맨다리를 밀어 올리며 강하게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뜨겁게 용솟음치는 열기가 그를 쥐어짜듯 감쌌다.
통제에서 벗어난 감각에 로엔은 미친 듯이 허릴 비틀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곳이 지붕도 벽도 없는 곳이란 사실조차 잊은 채, 로엔은 욕망에 흐드러졌다.
새벽의 여명과 그 빛을 머금은 새하얀 꽃잎이 바람에 날렸다.
로엔은 그의 허리에 두 다릴 감으며 생각했다. 미쳤다. 이제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얼마 전 라이칸이 진을 마음에 품었냐는 물음에 답을 할 때가 되었던 것이다.
좋아한다. 아니, 어쩌면 이 감정은 사랑인지도 모르겠다고.
* * *
로엔은 흔들리는 말 위에서 눈을 떴다.
새벽녘에 진과 다급히 몸을 겹친 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얼마 뒤 눈을 떴을 때 모포에 감싸인 채 진의 품속에 있었다.
“조금이라도 먹어.”
로엔은 눈을 뜨지도 못하고 그가 주는 적당히 식은 스프를 받아먹었다. 뒤이어 따라오는 빵과 과일을 기계적으로 씹어 삼킨 뒤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왜 이렇게 눈을 뜰 수 없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의 품에 안겨 말을 타고 하루 종일 말을 달리는 동안에도 로엔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몽롱했다. 의식이 밀물과 썰물처럼 들어왔다 순식간에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괜찮아? 아프면 말해.”
걱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포에 감싸인 제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다정한 손길도.
로엔은 그의 손길에 안도하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로엔은 낯선 꿈속으로 자꾸만 끌려 들어갔다.
『때는 금환일식입니다.』
귓가를 울리는 낯선 목소리에 로엔은 눈을 뜨려고 애썼다. 불안감이 밀려들자 로엔은 진을 불렀다.
‘진?’
하지만 뭔가에 의해 무겁게 내리눌린 것 같은 눈을 도무지 뜰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낯선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절대 실패해선 안 됩니다. 한 치의 오차라도 생긴다면, 지금껏 쌓아 올렸던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건 한순간일 테니까요.』
로엔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말아 쥐었다.
그러고 보니 낯선 언어였다. 분명 타란 대륙에선 사용하지 않는 언어…….
‘맞아. 이건 사라진 고대 언어야.’
어린 시절, 아버지가 로엔에게 마법사의 언어라고 가르쳤던 것과 똑같았다.
그런데 왜, 이젠 사라져서 사용하지 않는 언어를 사용하는 거지? 대체 누가?
『기억하세요. 때는 금환일식입니다. 하늘에 붉은 반지가 떠오르는 그때.』
금환일식이란 말에 로엔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주술사일까? 분명 그 주술사 노파 역시 금환일식이 떠오르는 날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었는데.’
로엔은 축제에서 만났던 주술사 노파를 떠올렸다. 당장 눈을 떠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갤 돌려 확인하고 싶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대체 누구지? 누가……?’
“로엔, 로엔. 정신 차려 봐. 로엔!”
진이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엔 다급함이 느껴졌다.
로엔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조급함에 눈을 뜨려 애썼다.
“공작님! 공작님!”
이내 라이칸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라이칸은 왜 또 저렇게 날 부르는 거지?’
로엔은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힘껏 밀어 올렸다. 분명 조금 전까진 안간힘을 써도 떠지지 않던 눈이 거짓말처럼 떠졌다.
“어?”
로엔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네 명의 얼굴을 보곤 놀라 입을 다물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로엔, 정신이 드나?”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이제 정말 멀쩡해?”
진에서부터 세이지에 이르기까지, 한마디씩 그녀에 대한 안부를 물어 왔다.
당연히 괜찮았다. 그냥 잠을 자다 일어난 것뿐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 그들의 유난스러운 행동이 이상하게만 느껴졌다.
“무슨 일이죠? 내가 잠든 사이에 큰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로엔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네 남자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세이지가 뒤로 털썩 주저앉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라이칸과 안톤의 표정 역시도 눈에 띄게 밝아졌다.
다만, 그녀를 품에 안고 있는 진만은 여전히 표정을 굳힌 채였다.
“잠을 자고 일어났다고?”
“네. 꿈을 많이 꾸긴 했지만, 분명히 자고 있었는데…….”
그제야 진의 표정 역시도 조금 누그러졌다.
“어떻게 된 일인데요?”
로엔의 물음에 진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벽에, 그러니까 그렇게 잠이 들고 나서 지금까지 정신을 잃고 있었어.”
정신을 잃었다고? 잠을 잤던 게 아니라?
“어, 하지만…….”
“나도 처음엔 자는 줄 알았어. 그런데 갑자기 죽은 사람처럼 몸이 늘어지더니,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더군.”
“…….”
로엔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진을 바라보았다.
“진짜야. 대장이 달리는 말을 멈추고, 바로 인공호흡을 하지 않았다면 심장이 멈췄을 거라고.”
인공호흡은 뭐고, 또 심장이 멈추는 건 또 뭔지?
로엔이 생각에 잠긴 사이, 진의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빌어먹게도 라이칸에게 네 몸에 대해 물어도 아는 게 없더군.”
이내 로엔의 시선이 라이칸에게 향했다. 진에게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그의 얼굴이 그 짧은 시간 해쓱해져 있었다.
“그만 좀 괴롭히고 사이좋게 지내면 안 되나요? 라이칸이 대체 뭘 잘못했다고.”
로엔이 라이칸의 편을 들자, 진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제 주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200년 동안 록스버그 공작가를 모신 가신이었다며? 당연히 너에게 대해 알아야 되는 것 아닌가?”
진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그리고 이 모든 잘못이 마치 라이칸 때문이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정말 어이가 없어 로엔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치며 진을 흘겨보았다.
“이건 라이칸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문이 특수한 거라고요. 지금껏 내 나이 때까지 살아남은 여아가 있었어야죠. 다 백 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는데, 정보가 남아 있었겠어요? 라이칸이라고 알았겠냐고요.”
“그건 또 무슨 말이지? 록스버그 공작가에서 살아남은 여아가 너뿐이라니. 그 말은 모두 백 일 이전에 죽었다는 건가?”
로엔은 선뜻 진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진의 표정엔 공포와 함께 여러 가지 감정들이 혼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맞아요.”
“그럼 너는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아니, 아니다. 그러니까 설마 너도 죽는 건 아닐 테지?”
예리하게 빛나는 은청색의 눈동자와 마주하자, 로엔은 섣불리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예외적으로 살아남긴 했지만, 아버지의 밀서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예측해 보면 아마 서른 살 이전에 죽게 될 가능성이 컸다.
이미 로엔의 몸속에 흐르는 맹독은 그녀가 성인이 될수록 더 짙어지고 있었다. 특히 성인식 이후 제 핏속의 맹독이 강해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왜 대답을 못하는 거지?”
진의 목소리가 짐짓 심각했다.
“당연히 살죠. 너무 빤한 질문이라, 어이가 없어서 말을 못 한 것뿐이고요.”
로엔의 대답을 듣고서도 진의 표정은 여전히 서늘했다. 그녀가 뭔가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사실이에요. 진도 알잖아요. 제 몸속에 흐르는 맹독이 다른 사람에겐 치명적이지만, 나에겐 반대라는 걸요. 상처도 그 덕에 치료된 것이고요. 그러니 내 말을 믿어요.”
다시 한 번 침착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고 나서야 굳어 있던 진의 어깨가 스르륵 풀리는 게 보였다. 이제야 그녀를 믿는 눈치였다.
로엔은 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입가에 경련이 일 것 같았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웃으려 애썼다.
그러다 라이칸과 눈이 마주쳤고,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며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다행히 눈치 빠른 라이칸은 침묵할 줄 알았다.